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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산사(甘山寺)는 경주시 내동면(內東面) 신계리(薪溪里)에는 사찰로 신라 성덕왕(聖德王) 18(719)에 중아찬(重阿湌) 김지성(金志誠 또는 金志全, 652720)이 자신의 장전(莊田)을 희사(喜捨)하여 성덕왕과 이찬 김개원(金愷元, 645720년 경)의 복을 빌고 그의 가족 안녕과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仁章, 630년 경 678년 경) 일길찬(一吉, 7위 관등)과 어머니 관초리 (官肖里, 632698년 경)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이다.

김지성(金志誠)6두품 출신으로 집사부 시랑을 역임한 인물이며 67세에 성덕왕 17(718년) 무오년에 벼슬을 버리고 장전(莊田)인 감산장(甘山莊)에 있다가 그 다음 해인 성덕왕 18(719) 기미년에 왕의 특명으로 다시 기용되어 나갈 때, 감산장(甘山莊) 자리에 절을 세우고 석조미륵보살입상과 석조아미타불입상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이 불사를 끝낸 다음 해인 성덕왕 19(720) 경신 422일에 69세로 사망하였다.

김지성(金志誠)의 부모는 아버지 인장(印章) 일길찬은 나이 47세에 돌아가서 화장 후 동해 흔지(欣支, 지금 영일의 옛 이름) 해변에 산골하였고 어머니인 관초리 부인은 나이 66세에 돌아가서 화장 후 또한 동해 흔지 해변에 산골하였다.”
그의 일가는 아우인 김양성(金良誠) 소사(小舍, 13위 관등)와 누님인 고파리(古巴里)와 전처(前妻)인 고로리(古老里), 후처인 아호리(阿好里), 서형(庶兄)인 김급한(金及漢), 일길찬 김총경(金聰敬) 대사(大舍, 12위 관등), 누이동생인 수혜매리(首兮買里)이다.

이찬 김개원(金愷元)을 거명하고 있는 것은 김개원과 특별한 친족 관계거나 어떤 혈맹(血盟)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김개원은 당시 정치실력자로 태종 무열왕 김춘추(604661)와 문명부인과사이에 태어 난 61녀의 막내아들로  효소왕(, 687702) 4(695년)에 수상인 상대등에 올랐고 효조왕이 16세에 후사 없이 돌아가자 13세의 효소왕의 동생 성덕왕을 보위에 올려놓은 태종 무열왕계의 수장이다.
김개원의 누나들은 김흠운(金運, 631655)의 처 요석공주(瑤石, 631년 경?)와 김유신(金庾信, 595673)의 처 지소부인(智炤, 640712년 이후)과 함께 각각 가문의 혈손을 결속시켜 통일 신라왕국을 안정으로 이끌어간 인물이다. 그는 각 가문을 결속하기 김흠운의 막내딸을 신문왕의 계비로 맞아들여 효소왕과 성덕왕 형제를 낳게 하였고 김유신 혈손 중에서 왕비를 맞아들이기 위해 성덕왕 3(704년) 5월에 김원태(金元泰)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현재 감산사의 모습은 1300년 전의 감산사가 아니다. 석조 아미타여래입상과 석조 미륵보살입상이 발견 된 당시인 1915년에 감산사는 옛 절터의 대부분이 전답지이고 삼층석탑과 작은 불당2채만 있었다. 이후 지속적인 불사가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조계종 사찰로 비구니 스님이 운영하고 있으며 조경이 아담하고 깨끗하다. 템플 스테이도 운영하고 있다.
국보인 석조 아미타여래입상과 석조 미륵보살입상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어 볼 수가 없고 삼층석탑과 석조 비로자나불좌상(石造 毘盧舍那佛坐像)만 볼수 있다.

대적광전.  석조 비로자나불좌상(石造 毘盧舍那佛坐像)은 석조불상으로 대적광전(大寂光殿)에 봉안되어 있다.

석조 비로자나불좌상(石造 毘盧舍那佛坐像)
석조 비로자나불좌상(石造 毘盧舍那佛坐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은 석조불상으로 대적광전(大寂光殿)에 봉안되어 있는데 머리 부분과 앞면의 훼손이 심하고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도 없어진 것을 보수하였다. 머리에는 나발과 육계를 낮게 표현하였다.
양손은 파손되었던 것을 지권인(智拳印)으로 보수하였다. 그 외 신체부위는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데, 어깨가 각이 지고 양쪽 다리는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양 무릎이 두텁고 넓어서 전체적으로 당당하고 안정된 모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원래의 모습은 알 수 없으나 감산사 창건과 연관지어 8세기 초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우리나라 비로자나불상 중에서는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짐작된다.
이 석불(石佛)의 뒷면 왼쪽과 앞면 중앙하부의 띠 매듭과 뚜렷한 옷 주름(衣紋)은 경주 남산 용장사터 삼륜대좌불,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과 더불어 통일신라시대 석조 불상의 옷 주름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감산사지 삼층석탑 (甘山寺址 三層石塔, 문화재자료 95)

대적광전에서 삼층석탑으로 가는 다리

감산사지 삼층석탑 (甘山寺址三層石塔)은 대적광전 뒤편에 있으며 무너져 있던 것을 1965년에 세웠으며 현재 높이는 약 3.3m이다. 현재 2층과 3층 몸돌은 없고 1층 지붕돌위에 2층과 3층 지붕돌이 올려 진 삼층석탑이다.
기단은 2층으로 하였는데, 1층 기단은 4개의 돌로 구성되었고 각 면에는 모서리 기둥과 안 기둥을 각각 새겼다. 2층 기단의 각 면에도 모서리기둥과 안기둥을 각각 새겼으며 갑석부연과 괴임 2단으로 구성하였다. 1층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1개의 돌로 하였고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에는 4단의 받침을 조각하였고 윗면은 낙수면으로 되어 있다. 현재 2층과 3층 몸돌은 없어지고 지붕돌만 남아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을 잘 보여 주며, 지붕돌의 추녀가 직선이고 전각(轉角)이 들려 있어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다.

감산사(甘山寺) 석조 아미타여래입상(石造 阿彌陀如來立像, 국보 82)와 석조 미륵보살입상(石造 彌勒菩薩立像, 국보 81)
두 불상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1916년 일본인 학자 도변창(渡邊彰)과 말송웅언(末松熊彦)이 경주지방 고적을 조사할 때 내동면(內東面) 신계리(薪溪里) 감산사 터 논바닥에 엎어져 있던 것을 발견하여 경복궁으로 옮겼다. 그 해 3월 조선총독부에서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를 열었을 때 총독부 안의 특설 미술관에 전시되었다.

감산사터에서 나온 석재들

이 특설 미술관은 경복궁 전각 일부를 헐어내고 지은 것인데 이때 경복궁을 일반에 공개했다. 조선물산공진회가 끝난 12월에는 특설 미술관을 조선총독부 박물관이란 이름으로 고쳐 일반에 공개함으로써 이 두 불상은 조선총독부 박물관 수장품이 되고 말았다.

일제는 이를 통해 경복궁 탈취를 기정사실화하고 다음 해인 19167월에는 근정문과 광화문을 헐어내고 근정전 앞에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 시작하였다. 조선 민중의 시선을 교묘하게 따돌려 반발 기회를 주지 않고 경복궁을 빼앗은 것이다.
처음부터 일본 제국주의의 의도는 조선 민심에 깊이 뿌리내린 풍수설을 이용하여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을 왕실로부터 탈취함으로써 일본의 통치를 기정사실화하자는 것이 그 첫째 목적이었다. 그리고 물산장려로 민생을 돌보는 것처럼 대내외에 선전하는 것이 그 둘째 목적이었다.

두 불상의 광배 뒷면을 보면 불상을 만든 경위를 자세하게 적은 조상기(造像記; 불보살상을 만든 연유를 밝힌 글)에 따르면, 미륵보살상의 조성 연대는 719(성덕왕 18), 아미타상은 720(성덕왕 19)으로 밝혀져 있다. 그리고 8세기 통일신라의 불교사상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두 불상이 만든 연대를 알 수 있어 통일신라 불상 양식의 변천과정을 연구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조상기에는 당시의 장법(葬法), 개인의 사원 건립과 불상 조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 금석학과 신라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감산사(甘山寺)관련 삼국유사 제2권 탑상(塔像) 4 남월산(南月山, 또는 감산사甘山寺라고도 한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절은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0리 가량 되는 곳에 있다. 금당주미륵존상화광(金堂主彌勒尊像火光) 후기(後記)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개원(開元) 7년 을미(乙未; 719) 215일에 중아찬(重阿飡) 전망성(全忘誠)이 그의 죽은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과 죽은 어머니 관초리(觀肖里) 부인을 위해서 공손하게 감산사(甘山寺)와 석미륵(石彌勒) 하나를 만들고, 겸하여 개원(愷元) 이찬(伊飡)과 아우 간성(懇誠) 소사(小舍)현도사(玄度師), 누이 고파리(古巴里), 전처(前妻) 고로리(古老里), 후처(後妻) 아호리(阿好里), 또 서형(庶兄) 급막(及漠) 일길찬(一吉湌), 일당(一幢) 살찬(薩湌), 총민(聰敏) 대사(大舍)와 누이동생 수힐매(首肹買) 등을 위하여 이러한 착한 일을 했다. 어머니 관초리 부인이 고인(故人)이 되자 동해유우 변산야(東海攸友 邊散也)라 했다.”

극락전
산신각

미타불화광(彌陀佛火光) 후기(後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중아찬(重阿飡) 김지전(金侍全)은 일찍이 상의(尙衣)로서 임금을 모시고 또 집사시랑(執事侍郞)으로 있다가 67세에 벼슬을 도로 바치고 집에서 한가로이 지냈다. 이때 국주(國主) 대왕(大王)과 이찬(伊飡) 개원(愷元), 죽은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 죽은 어머니, 죽은 동생, 소사(小舍) 양성(梁誠), 사문(沙門) 현도(玄度), 죽은 아내 고로리(古老里), 죽은 누이동생 고파리(古巴里),
또 아내 아호리(阿好里) 등을 위해서 감산(甘山)의 장전(莊田)을 내놓아 절을 세웠다. 또 석미타(石彌陀) 하나를 만들어 죽은 아버지 인장 일길간을 위하여 모셨는데, 그가 고인이 되자 동해유우 변산야(東海攸友 邊散也)라 했다.”(제계帝系를 상고해 보면, 김개원金愷元은 태종太宗 김춘추金春秋의 여섯째 아들 개원각간愷元角干이며, 문희文熙가 낳은 이다. 성지전誠志全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의 아들이다. 동해유우東海攸友는 필시 법민왕法敏王을 동해東海에 장사지낸 것을 말한 것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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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구름이 떠도는 곳에 있다 하여 부르는 백운암은 통도사 內 20개 암자 중에서 유일하게 암자까지 차가 들어가지 않는 아담하고 소박한 암자이다. 영축산 팔부능선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수도처로 유명하고 특히 만공스님이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은 곳이다.

백원암 산신각 앞에서 본 풍광

또한 백원암 금샘에서 나는 금수(金水)는 암벽아래 돌 사이에 솟아나는 석간수인데 물맛이 뛰어나고 일품이다. 금수는 일주문 지나서 1곳, 용왕각 좌측에 1곳 그리고 산신각 입구 1곳 등 3곳에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통도팔경 중 제6경 백운명고(白雲鳴鼓)라 하여 저녁 무렵 흰 구름이 영축산을 휘감는 백운암의 북소리가 매우 아름답고 청명하다고 한다. 사찰의 북은 법고(法鼓)라고 부르는데 인간의 윤회에 의하여 현생한 축생을 위하여 치는 북이다.

극락암에서 출발하여 맞이하는 비로암과 백운암의 갈림길

통도팔경은 영축산의 동쪽 산록을 따라 발달한 통도천 계곡의 자연 경관과 불교 문화 요소의 특성을 잘 표현한 것으로 제1경은 무풍한송(舞風寒松), 제2경은 안양동대(安養東臺), 제3경은 비로폭포(毘盧瀑布), 제4경은 자장동천(慈藏洞天), 제5경은 극락영지(極樂影池), 제6경은 백운명고(白雲鳴鼓), 제7경은 단성낙조(丹城落照), 제8경은 취운모종(翠雲暮鐘) 등으로 되어 있다.

백운암 아래 800m 지점의 주차장으로 매우 협소하니 가능하면 극락암 주차장을 이용하면 좋다.
백운암에 필요한 생활용품을 나르는데 사용하는 모노레일
백운암의 가파른 길에 사용하는 지팡이
오르막길을 따라 나무계단과 계곡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백운암 일주문을 맞이할 수 있다.

백운암은 892년(진성여왕 6)에 조일대사(祖日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남아 있는 기록은 없다. 1810년(순조 10)에 침허대사(沈虛大師)가 중건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조성되어 백운암에 봉안된 「백운암 지장탱화」가 당시의 중건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백운암 지장탱화」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87호로 1804년(순조 4)에 조성된 불화이다. 화면의 맨 위쪽에는 상서로운 구름이 가득 펼쳐져 있고 중앙에 지장보살이 석장(錫杖)과 투명 구슬을 쥐고 가부좌한 채 앉아 있다. 비단에 채색을 하였고 크기는 세로 158㎝, 가로 175㎝로, 조선 후기 불교 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살며시 보이는 백운암

1970년대에 극락암에 주석한 경봉스님이 후원하여 사세를 크게 확장하였다. 주요 건물로는 대웅전 기능을 하는 백운암, 용왕각, 산식각, 요사채 등이 있다.
백운암은 통도사에서 약 6㎞ 정도로 떨어져 있는데, 승용차를 가지고 오면 극락암 주차장에 주차하거나, 백운암 아래 800m 지점의 주차장에 주차하면 된다. 백운암 아래 주차장은 협소하여 가능하면 극락암 주차장을 이용하면 좋다. 극락암 주차장에서 걸어서 출발하면 50분정도 이면 백운암에 도착한다. 비로암 방향의 갈림길을 지나서 오르막길을 따라 나무계단과 계곡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백운암 일주문을 맞이할 수 있다.

백운암 일주문

만공(滿空, 1871~1946)스님은 19세기 조선의 사라져가는 선풍을 일으킨 선승 경허스님(1849~1912)의 세 제자 중 막내이다. 이른바 삼월(三月)이라 하여 수월(水月), 혜월(慧月), 만공(滿月) 세 명의 스님으로 맏이인 수월스님을 상현달(上弦), 혜월스님을 하현달(下弦), 만공스님을 보름달인 만월(滿月)이라고 부른다.

백원암 금샘에서 나는 금수(金水)는 암벽아래 돌 사이에 솟아나는 석간수가 인데 물맛이 뛰어나고 일품이다. 금수는 일주문 지나서 1곳, 용왕각 좌측에 1곳 그리고 산신각 입구 1곳 등 3곳에 조성되어 있다. 이중 일주문 지나면 맞이하는 금수
일주문 우측에 자리잡고 있는 포대화상
백운암
용왕각과 백운암
용왕각
용왕각 좌측에 있는 금수


만공스님이 백운암에서 보름동안 선 수행을 하였는데 어느 날 새벽, 통도사에서 들려오는 새벽 종소리를 듣는 순간 홀연히 깨우치게 되었다. 이후 스승 경허 스님이 머무르고 있는 범어사를 향해 보은의 큰 절 세 번을 하고 천장사로 돌아갔다. 당시 백운암 생활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고, 홀로 거닐며 자재하였다. 」

나한전

만공스님은 법명은 월면(月面)이고 법호는 만공(滿空)이다. 속성은 宋氏로 본관은 여산(礪山)으로 어렸을 때 속명은 도암(道岩)이었다. 1871년(고종 8년, 신미년) 3월 7일 전북 태인군 태인읍 상일리(현재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휘(諱)는 신통(神通)이라 하였고 어머니는 金氏였다.
만공 스님이 13세 되던 1883년(신미년) 겨울, 도인 하나가 집으로 찾아와 말하기를 이 아이는 단명할 상으로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 하였다. 이에 놀란 어머니 金氏가 단명을 면할 방도를 묻자, 도인은 김제 금산사에 가서 올해를 넘기면 운명이 바뀌어 장수를 한다고 하였다.

산신각 입구에 있는 금수

만공스님의 부모님은 아들이 집안의 장자이기에 바로 금산사로 아이를 데려가서 그 해를 보냈다. 그리고 금산사에서 1년을 보내자 부모님 생각과는 달리 만공스님은 출가를 결심 하였다. 만공스님의 단명할 상이 출가를 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1886년에 충청남도 공주 동학사에서 출가하여 행자 생활을 하다가, 같은 해 충남 서산 천장암(天藏庵)에서 태허(泰虛)를 은사로 모시고, 경허(鏡虛, 1849~1912)를 계사(戒師)로 하여 사미십계(沙彌十戒)를 받았다. 이때 월면이라는 법명을 받았으며, 이후 10년간 천장암(天藏庵)에서 공양주를 보았다. 1893년 11월 천장암을 떠나 충청남도 아산 봉곡사에서 수행 중 1895년 7월 (24세)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화두(話頭)를 가지고 홀로 참선에 열중하다가 큰 깨달음을 얻었다.

산신각

1898년 스승 경허를 따라 동래 범어사에 갔다가 돌아오던 중 홀로 통도사 백운암에 들렀다. 이때 장마를 만나 보름을 지냈는데 두 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1901년 7월 경허가 있는 서산 천장암으로 돌아왔다.
덕숭산 수덕사(修德寺)와 정혜사(定慧寺)·견성암(見性庵)을 거쳐 금강산 유점사(揄占寺)에서 3년을 지냈다. 1904년(광무 7년, 33세)에 경허로부터 만공이라는 법호(法號)와 함께 전법게(傳法偈, 득도한 큰스님이 수행 과정을 점검하여 깨달음을 인정하는 것)를 받은 후 덕숭산 수덕사 부근의 금선대에서 설법을 열었고 선풍을 진작시키며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1914년 충남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의 간월암(看月庵)을 중창하였고 예산 덕숭산 수덕사, 정혜사, 견성암 등의 중창에 관여하고 승려들을 길러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이후에는 민족적 자긍심을 가지고,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의식을 가졌다.
1920년초 선학원(禪學院) 설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선승들의 결사(結社)이자 경제적 자립을 위한 계(契) 모임인 선우공제회운동(禪友共濟會運動)에 참여하였다
1927년 현양매구(懸羊買拘)라는 글을 지었는데, 임제 32대 사문 만공이라 하여 임제종풍(臨濟宗風)의 계승자임을 선언하였다.
1934년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朝鮮佛敎禪理參究院)이 설립될 때 이사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바로 이사장 선출에서 이사장은 송만공(宋滿空), 부이사장은 방한암(方漢岩)이 선임되었다.
1935년부터 3년간 마곡사 주지를 지내면서 대처(帶妻), 음주, 식육을 하는 일본 불교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할 것을 주장하였다.
1937년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조선 31본산(本山) 주지회의가 열렸는데 총독부가 조선불교의 일본 불교화를 주장하자 이에 호통을 치며 공박하였다.
1940년 5월의 조선총독부의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수행과 참선에만 정진하였다. 1941년 3월 10일 선학원에서 개최한 전국고승법회에서 계율을 올바로 지키고 선(禪)을 진작시켜 한국불교의 바른 맥을 이어갈 것을 강조하였다.
당시 조선 말살 정책을 펼친 미나미 지로[南次郞] 조선총독의 회유도 거절하는 등 식민지배의 만행을 비판하는 데 앞장섰다.

800m 아래 주차장에서 올라온 생활용품을 내리는 곳

주로 예산 덕숭산에 ‘전월사(轉月舍)’란 띠집을 짓고 머물며 선불교의 진흥을 위해 힘쓰다가 1946년 10월 20일 거울을 보며 "이 사람 만공, 70년 동안 나와 동고동락하느라 고생했지. 그동안 수고 많았네."라는 유언을 남긴 뒤 세수 75세, 법랍 62세로 입적했다. 사후에 <만공어록 滿空語錄>이라는 책이 편찬되었다.

덕숭산에서 다비하여 유골은 덕숭산 금선대 근처에 부도 만공탑을 세웠다. 진영(眞影)은 경허의 진영과 함께 금선대에 봉안되었다.
"부처님 사리로 모든 것은 넉넉하고 거기에 다 뜻이 포함 되어 있으니, 사리를 수습하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사리를 수습하지 않았으며, 이후 덕숭산의 다비식에서는 어떤 스님이든지 사리를 수습하지 않는 것이 문도들이 지켜야 할 전통이자 불문율로 자리 잡았다.

제자로는 춘성, 일엽(여류시인인 김일엽의 법명), 고봉, 혜암, 혜천, 원담 등이 있다.
만해 한용운과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만해는 내 애인이야."라고 말했는가 하면, "지금 온 조선 땅에 사람이 하나 하고도 반 있는데 그 하나가 바로 만해"라고 말하기도 했다.

만공스님은 이론과 사변을 철저히 배제하고 무념과 무심(無心)의 태도로 화두를 스스로 참구(參究)하는 간화선법(看話禪法)을 채택하여 제자들에게는 항상 조주(趙州)의 무자 화두를 참구할 것을 강조하였다.
간화선(看話禪)을 바탕으로 나를 찾을 것을 강조하였다. ‘나’라는 개체의 나가 아니라 일체만법을 포함하는 만유의 나로, 이는 곧 일심과 통한다고 설법하였다.

참선을 위해서는 행자의 자세도 중요하지만 보조적 요건도 필수적으로 구비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또한 환경과 배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견해를 처음으로 설파하였다. 참선의 보조 여건으로는 선지식(善知識)과 수도(修道)에 적절한 도량, 함께 수도하는 좋은 도반(道伴)의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좋은 스승을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보았다. 속세에서도 역시 배경과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하였다. 개인의 노력이 중요하지만 그에 걸맞은 배경과 환경적 요인도 사람을 만든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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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함월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기림사는 유서 깊은 사찰이자 지금까지 법통이 이어지고 있는 천년 고찰이다. 달을 머금고 있는 산인 함월산에 자리 잡고 있는 기림사는 선덕여왕 12(643)에 천축국(天竺國;인도)에서 온 승려 광유가 임정사(林井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고 이후 원효대사가 중창(重創)을 하면서 인도 2대 정사인 기원정사(祇園精舍)의 기(), 죽림정사(竹林精舍)의 림()자를 합쳐 기림사(祇林寺)라고 개명(改名)하였다.

2000년대 기림사

삼국유사 기이 편 만파식적(萬波息笛)조에 따르면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동해바다 이견대(利見臺)에서 동해용으로부터 대나무와 옥대를 얻고 감은사에서 하루 밤을 지낸 후 돌아오는 길에 기림사 서쪽냇가(용연폭포)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라는 내용이 있어 최소 신문왕(682때 기림사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림사는 광복 전만 하더라도 이 일대에서 가장 큰 절로 불국사 등 60여개 말사를 거느린 큰 사찰이었으나 불국사가 복원되어 대대적으로 개발됨에 따라 사세가 역전하여 지금은 불국사의 말사로 되었다

함월산 기림사 일주문

옛날부터 기림사 경내·외에는 다섯 가지 맛을 가진 샘물이 있어 오정수(五井水) 또는 오종수(五種水)라 하여 다섯 곳에 샘이 있었고 물맛이 좋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는 맛볼 수 있는 샘이 없다. 오종수(五種水) 종류와 내용을 살펴보면 명안수(明眼水)라 하여 눈이 밝아진다는 물, 오탁수(烏啄水)라 하여 기림사 동편 큰 바위 아래의 물로 맛이 좋아 까마귀도 쪼아 먹었다는 물, 장군수(將軍水)라 하여 마시면 기개가 커지고 신체가 웅장해져 장군을 낸다는 물, 감로수(甘露水)라 하여 하늘에서 내리는 단 이슬과 같은 물, 마지막으로 화정수(和靜水)라 하여 마실수록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물이 있었다.

일주문 초입

이렇게 물맛이 좋은 이유는 기림사가 위치한 양북면 일대가 규조토가 많이 생산되는데 이 규조토가 물의 정수 역할하기 때문이라고 지질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오탁수(烏啄水)라 하여 기림사 동편 큰 바위 아래의 물로 맛이 좋아 까마귀도 쪼아 먹었다는 물로 위치는 알수가 없다.

기림사 오른쪽에 흐르는 천은 호암천(虎岩川)으로 양북면 호암리의 성황현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안동리에서 대종천에 합류하는 하천이다. 신문왕이 문무대왕릉에 가기 위해서는 서라벌에서 이곳 기림사까지는 수레를 타고 왔고 호암천(虎岩川)에서 배를 띄어 감은사까지는 대종천 뱃길을 이용하여 갔었다. 호암(虎岩)은 순우리말 이름인 범 바위에 대해 한자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다.

기림사 오른쪽에 흐르는 호암천(虎岩川)
신문왕이 문무대왕릉에 가기 위해서는 서라벌에서 이곳 기림사까지는 수레를 타고 왔고 호암천(虎岩川)에서 배를 띄어 감은사까지는 대종천 뱃길을 이용하여 갔었다.

풍수가에 의하면 기림사 터는 영구음수형(靈龜飮水形), 즉 거북이가 물을 마시는 형국의 명당자리이기 때문에 몽고침입, 임진왜란 등 전란으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환경덕분에 기림사에는 보물이 4점이나 있다. 건칠보살좌상(보물 제415), 대적광전(大寂光殿, 보물 제833), 소조비로자나 삼존불(보물 제958), 비로자나불 복장전적(腹藏典籍, 보물 제959) 등 있다. 특히 흙, 종이, , 나무 등 재료에 따라 다양한 불상이 있어 볼거리가 풍성하다.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깨죽나무

천왕문 왼쪽 석축아래 오종수(五種水) 중 물을 먹거나 눈을 씻으면 눈이 맑아진다는 명안수(明眼水)가 있다. 1990년대까지 물이 고여 있었으나 지금은 물이 말라버렸다. 소나무 뿌리 때문에 눈이 맑아진다는 견해도 있다.

천왕문
천왕문 왼쪽 석축아래의 명안수(明眼水)

천왕문 좌우에는 불법승을 해치는 나쁜 무리인 마구()를 제압하고 있는 사천왕이 조성되어 있는데 마구() 복장을 살펴보면 일본 전통 속옷인 훈도시를 입고 있어 왜구임을 알 수 있다. 그 만큼 당시 왜구는 해악한 무리이고 주민들을 많이 괴롭혔다. 마구()는 사찰마다 형태와 착용복장이 다른데 일반적으로 추풍령이북은 몽고와 만주족으로 묘사되어 있다.

사천왕(四天王)고대 인도신화시대부터 사방을 지키는 호세신(護世神)으로 귀족 혹은 귀인의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나 중국으로 건너오면서 는 동안에 차츰 험상궂은 무사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불교에 흡수되면서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須彌山) 아래 동서남북의 4를 지배 하면서, 佛法을 수호하며 중생들을 바른 길로 이끄는 호법신 역할을 하고 있다. 위로는 제석천(帝釋天)을 받들고 밑으로는 팔부중(八部衆)을 거느리고 있다.

경전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10권에는 국가가 위태로울 때 사천왕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되어 있어 가장 대표적인 호국경전이다사찰에서는 천왕문 좌우에 배치되어 있고 탑의 사방 동. . . 북을 수호하는 신장으로도 조성 되었다. 또한 외호신장이라고도 하여 불국정토의 외막 을 맡아보는 역할을 하며 동방은 지국천, 서방 광목천, 남방 증장천, 북방 다문천이다.

천왕문 좌우에는 불법승을 해치는 나쁜 무리인 마구(니)를 제압하고 있는 사천왕이 조성되어 있는데 마구(니) 복장을 살펴보면 일본 전통 속옷인 훈도시를 입고 있어 왜구임을 알 수 있다.

북방 다문천(多聞天)은 부처의 도량을 잘 지키며 부처의 설법을 가장 많이 듣고 암흑계의 사물을 관리하는 신장으로 왼손에는 탑 또는 비파를 들고 있고 피부색은 의 흑색이다. 서방 광목천(廣目天)죄인에게 심한 벌을 내려 고통을 느끼게 하며 죄인으로 하여금 반성하게 하고 道心을 일으키게 하는 신장으로 오른손에는 푸른 용, 왼손에는 붉은 여의주를 들고 피부색은 의 백색이다.

남방 증장천(增長天)은 자신의 위엄과 덕으로서 만물을 소생하게 하고 덕을 베푸는 신장으로 비파를 타고 있고 피부색은 의 적색이다. 동방은 지국천(持國天)은 착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벌을 내리며 인간을 보살피고 인간들의 국토를 지키는 신장이다. 왼손에는 칼, 오른손에는 보주를 들고 왼손은 허리를 잡고 있거나 손바닥에 보석을 올려놓고 있으며 피부색은 의 청색이다.

기림사의 특징 중 하나가 진남루(鎭南樓)다. 맞배지붕에 앞면 7칸, 옆면 2칸의 긴 건물로 임진왜란 때 승병의 지휘본부로 사용된 누각인데 지금은 누각의 형태가 아니고 18세기 중반에 중창(重創), 변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남(鎭南)은 남쪽을 진압한다는 뜻인데 남쪽은 왜구를 의미한다. 기림사 유물에 전적, 나팔, 목패 등이 있어 호국 사찰임을 이해할 수 있다.

천왕문을 지나 보이는 진남루
맞배지붕 익공양식의 앞면 7칸, 옆면 2칸 진남루(鎭南樓)
현재 진남루 일부를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다.
겹처마 익공양식의 진남루
진남루와 응진전

대적광전과 진남루 사이에 안산암(安山岩)으로 만들어진 높이 3m의 아담한 삼층 석탑이 있다. 통일신라말기 석탑으로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앙화까지 남아 있다. 기단부는 2층 기단으로 각 층은 한 개의 통돌로 2층 기단은 2개의 우주와 1개의 탱주를 새겨서 조성하였다. 탑신부는 한 개의 통돌로 3층을 조성하였고 각 탑신석은 2개의 우주를 새겼고 옥개받침은 4단을 만들었다.

응진전과 삼층석탑

기림사 3층 석탑은 일반 석탑과 다르게 기단부와 탑신부에 이끼가 많이 있는데 이유는 옛날 오종수(五種水) 중 장군수(將軍水)가 있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장군수를 메워버리게 된 이야기는 2가지가 전해진다. 하나는 자리에 석탑이 조선시대에 이 곳 물을 먹고 난 사람이 이곳에서 역적모의를 하다가 발각된 뒤에 나라에서 샘을 메워버렸다는 이야기가 하나고 또 다른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때 이 물을 먹고 장수가 되어 독립투사가 나올 것이란 생각에 일제가 우물을 메웠다는 이야기다. 고요한 밤에 탑에 귀를 대고 있으면 탑 아래 우물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응진전은 맞배지붕의 정면5칸의 다포양식의 조선후기 건축물이다. 500명의 나한을 모신 전각으로 나한상을 자세히 보면 돌로 만든 석불인 것으로 알 수 있다. 소위 불석(佛石)으로 하여 함월산에 있는 돌로 사암 계통의 부드러운 재질로서 조각이 쉽고 석재를 두부 자르듯이 결에 따라 자를 수 있어 옛 부터 불상 조각에 많이 사용해 왔던 돌이라고 한다.

함월산 불석(佛石)으로 만든 나한상
응진전의 다포

약사전 앞에는 1기의 목탑터가 있다. 가운데 심초석(11×11×11cm)이 있고 정면, 측면 각 3칸의 터가 온전히 남아 있다. 목탑이 언제 소실되었는지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목탑이 단탑인 경우와 쌍탑인 경우에 따라 가람의 주 출입방향을 판단 할 수 있다. 목탑이 단탑이면 응진전 중심으로 동쪽에서 올라오는 경우이고 쌍탑이면 현재 사용하고 있는 방향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쌍탑이 있는 사찰이 많아서 기림사가 쌍탑일 가능성도 한번 정도 생각해볼 일이다.

목탑터
가운데 심초석이 있고 정면, 측면 각 3칸의 터가 온전히 남아 있다.
기림사의 목탑터가 단탑이면 응진전 중심으로 동쪽에서 올라오는 경우이다

약사전은 맞배지붕의 정면 3칸, 옆면 1칸의 다포양식의 건축물로 1600년대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효종 5(1654)에 중창되었고 숙종 4년 중수했다. 주불은 약사여래불(약사유리광여래)로 질병의 고통에서 구해주는 부처로써 7세기 중엽부터 시작하여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때 유행했던 부처이다. 보통 손에 약그릇 또는 보주를 들고 있으나 기림사 약사여래불에게는 없다. 좌우 협시보살은 일광, 월광보살로 이마나 보관에 해, 달 또는 손에 해, 달을 들고 있다

맞배지붕 다포양식의 정면 3칸, 옆면 1칸 약사전
주불은 약사여래불(약사유리광여래)이고 좌우 협시보살은 일광보살과 월광보살

대적광전(大寂光殿)보물 제833호로 맞배지붕의 겹처마에 정면 5칸, 옆면 3칸의 다포양식의 건축물이다. 창건이후 6차례 다시 지어졌다. 이중 5번째는 1629년(인조7)에 지어졌고 마지막으로 1786년 경주 부윤 김광묵에 의해 지어져서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단청은 색깔이 바래어 지나긴 긴 세월을 알려주고 다포공포의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조각예술은 정갈함과 함께 고풍스러운 멋을 풍긴다. 또한 법당 출입문의 살문이 솟을 꽃살문인데 간결하고 아름답다.

보물 제 833 호로 맞배지붕 겹처마에 정면 5 칸 , 옆면 3 칸 다포양식의 대적광전(大寂光殿)
법당 출입문의 살문이 솟을 꽃살문인데 간결하고 아름답다.

내부는 4개의 고주(高柱) 외에 따로 2개의 측면 고주를 세워 넓은 공간을 구축하였으며, 화려하고 장엄하다. 그리고 빗천장과 우물 천장이 설치되어 있다.

대적광전의 다포

대적광전에는 중앙의 비로자나불, 왼쪽은 아미타불, 오른쪽은 석가모니불인 삼존불 즉 비로자나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규조토)으로 만든 소조불로 보물 제958호다. 규조토는 그 성질이 물을 머금으면 흙 반죽이 되나 마르면 돌처럼 딱딱 해지는데 이 성질을 이용하여 불상을 만들었다. 만든 시기는 임진왜란 직후이다.

중앙의 비로자나불, 왼쪽은 아미타불, 오른쪽은 석가모니불

상체는 장대하나 하체는 빈약하게 느껴지며, 네모난 얼굴에는 강인한 표정이 엿보인다. 대적광전에 삼존불이 조성되면 일반적으로 중앙의 비로자나불, 왼쪽 노사노불, 오른쪽 석가모니불이 일반적인 구도다. 특이하게 기림사 대적광전에는 노사노불 대신에 아미타불이 조성되어 있다.
비로자나불의 복장에서 불경(, 목판본과 사경)이 발견되었는데 비로자나불 복장전적(腹藏典籍)이라고 부른다. 보물 제959호로 제작 시기는 고려 11세기부터 조선 17세기로 고려시대 목판본(木版本), 사경(寫經)과 조선시대 목판본(木板本)이다. 전적(典籍)이 발견된 것은 1986. 9. 6 새벽 문화재 절도범들이 대적광전에 침입하여 비로자나불의 뒷부분을 파괴하여 복장유물을 꺼내어 도주하는 것을 잡아서 유물을 되찾았다.

왼쪽의 탱화는 기림사 삼불회도로 김림사의 창건설화를 표현하고 있다.
내부는 4 개의 고주(高柱) 외에 따로 2 개의 측면 고주를 세워 넓은 공간을 구축하였으며 화려하고 장엄하다 ; 그리고 빗천장과 우물 천장이 설치되어 있다 .

관음전에는 은행나무로 만든 11면 관세음보살이 있는데 1986년 우리나라가 아시안게임을 유치한 기념으로 열린 불교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은 것이다.
11면 관세음보살은 밀교의 관점에서 본 관세음보살상으로 제도하는 중생들의 형태에 따라 11가지의 얼굴모습을 나타낸다. 좌면(3)은 분노 상으로 악한 중생을 꾸지람하여 악으로부터 구하려는 상이고 우면(3)은 백아 상으로 착한중생에게 더욱 정진을 권하는 상이며 정면(3)은 자비 상으로 선한 중생에게 자비로운 마음으로 칭찬하는 상이다. 그리고 뒷면(1)은 대폭소상으로 착한중생, 악한중생 모두를 포섭하는 아량을 베푸는 상이고 맨 위(1)는 아미타여래이다.

관음전
관음전에는 은행나무로 만든 11면 관세음보살이 있는데 밀교의 관점에서 본 관세음보살상이다.

삼천불전에는 과거, 현재, 미래의 각 천불씩 조성되어 있는데 주불 석가모니는 한지로 1990년대에 제작되었다. 삼성각에는 독성신인 나반존자가 모셔져 있는데 석가모니처럼 스승 없이 홀로 도를 이룬 분으로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분으로 육당 최남선은 단군으로 보고 있다. 불교계에서는 나반존자를 십육나한을 대표하는 빈두로존자로 파악하고 있으며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이 입멸한 후 이 세상에 머물며 다음 세상의 미륵불이 나실 때까지 중생을 구제하라는 부촉을 받았다고 한다.

삼천불전
과거, 현재, 미래의 각 천불씩 조성되어 있는데 한지로 1990년대에 제작되었다.
독성신인 나반존자가 모셔져 있는 삼성각

기림사 명부전은 우리나라에서 영험이 높기로 유명한 곳이어서 이곳에서 조상제사를 모시는 이가 많다.

명부전
화정당
절에서 조성하여 만든 화정당 앞의 화정수(和靜水)
범종루
사물인 운판, 목어, 범종, 법고(북)
목어

기림사 성보박물관 입구에는 불두와 광배가 심하게 훼손된 불령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석조여래좌상은 원래 불령고개 길가에 방치되어 있는 것을 이곳으로 옮겨 왔다. 방형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오른 손은 무릎위에 놓고 왼손은 배 앞에 놓은 것으로 법의는 통견식이고 양 어깨를 걸쳐 내려와 두 무릎을 덮었으며 가슴에는 군의의 매듭이 보인다. 방형대좌의 하대는 복련, 중대는 안상 그리고 상대는 앙화를 조각하였다. 제작 시기는 통일신라말기로 추정하고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불령 석조여래좌상

기림사 성보박물관에는 보물 제415호인 건칠보살좌상으로 높이 91cm인 관세음보살반가상이 있다. 대좌의 글귀에 연산군 7(1501)으로 되어 있어 제작연대로 추정하고 있다. 건칠불이란 진흙으로 속을 만들어 삼베나 종이를 감고 그 위에 진흙가루를 발라 묻힌 다음 속을 빼어 버리고 옻칠을 입힌 속이 빈 소상이다.

보물 제415호인 건칠보살좌상

머리에는 당초문을 새긴 보관을 썼고 얼굴은 남성적이며 냉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목에는 화려한 장식의 목걸이를 하고 있어 눈에 띈다. 왼발은 대좌 위에 얹고 오른발은 대좌 밑으로 내렸으며, 오른손은 무릎 위에 얹고 왼손을 약간 뒤로하여 대좌를 짚고 앉아 있는 모습이 편안하고 자연스럽다자세는 경주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과 비슷하다.
이 밖에 석조치미, 불석으로 만든 석조여래좌상, 명부전에 봉안되는 사자로써 죽은 사람의 죄를 적은 기록을 지옥세계에 전달하는 직부사자와 죽은 사람의 집에 가서 죽은 사람을 살피거나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 감재사자 등 있다.

용마루 양쪽 끝에 설치하는 석조치미로 사찰의 규모 추측할 수 있다.
불석으로 만든 석조여래좌상
직부사자도
감재사자도

성보박물관 맞은편에 매월당(梅月堂) 영당(影堂)이 있는데 김시습(金時習) 영정이 모셔져 있다. 본래의 영당은 현종11년(1670) 경주부사 민주면이 남산 용장사 경내에 오산사를 지었으나 고종5년(1868)에 훼철되었다. 고종 15년(1878) 경주유림이 경주부윤 민창식에게 청원하여 함월산 기림사 경내에 다시 지었고 1998년 경주시에서 중건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이르렀다.

김시습(金時習, 1435 ~ 1493)은 본관은 강릉,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 법호는 설잠(雪岑)이며 조선 초기 문인으로 생육신 중 한사람이다.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난 그는 유, 불 정신을 아우르는 사상과 뛰어난 문장력으로 수많은 시와 저서를 남겼다. 생후 8개월에 글 뜻을 알았고 3세에 능히 글을 지을 정도로 천재적인 재질을 타고 났다. 5세에는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후일 중용하리란 약속과 함께 비단을 하사받기도 했다. 그의 이름인 시습은 논어의 학이편(學而篇) 중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매월당 ( 梅月堂 )&amp;nbsp; 영당 ( 影堂 )

과거준비로 삼각산 중흥사에서 수학하던 21세 때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대권을 잡은 소식을 듣자 보던 책을 모두 불사르고 그 길로 삭발하고 중이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났다. 그는 관서, 관동, 삼남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는데 <매월당시사유록(梅月堂時四遊錄)에 그때의 시편이 수록되어 있다. 31세 되던 세조 11년 봄에 경주 남산 금오산 용장사에서 37세 까지 성리학과 불교에 대하여 연구하는 한편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지었다.

김시습 ( 金時習 )&amp;nbsp; 영정

37세에 서울 성동에서 농사를 직접 짓고 환속하는 한편 결혼도 했다. 벼슬길로 나아갈 의도를 갖기도 했으나 현실의 모순에 불만을 품고 다시 관동지방으로 은둔, 방랑을 하다가 충청도 홍산 무량사에서 59세의 일기로 병사하여 일생을 마쳤다.
삼국유사 2권 기이(紀異) 2편 만파식적(萬波息笛)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1대 신문대왕(神文大王)의 이름은 정명(政明), 성은 김씨(金氏)이다. 개요(開耀) 원년(元年) 신사(辛巳; 681) 77일에 즉위했다. 아버지 문무대왕(文武大王)을 위하여 동해(東海) 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절 안에 있는 기록에는 이렇게 말했다. 문무왕(文武王)이 왜병(倭兵)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처음 창건(創建)했는데 끝내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왕위(王位)에 올라 개요(開耀) 2(682)에 공사를 끝냈다. 금당(金堂) 뜰아래에 동쪽을 향해서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으니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개 유언(遺言)으로 유골(遺骨)을 간직해 둔 곳은 대왕암(大王岩)이고, 절 이름은 감은사(感恩寺)이다. 뒤에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했다.

이듬해 임오(壬午) 5월 초하루에 해관(海官) 파진찬(波珍飡) 박숙청(朴夙淸)이 아뢰었다. “동해 속에 있는 작은 산 하나가 물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는데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합니다.” 왕이 이상히 여겨 일관(日官) 김춘질(金春質; 혹은 춘일春日)을 명하여 점을 치게 했다. “대왕의 아버님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三韓)을 진호(鎭護)하고 계십니다. 또 김유신공(金庾信公)도 삼삼천(三三天)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 세계에 내려와 대신(大臣)이 되었습니다. 이 두 성인(聖人)이 덕()을 함께 하여 이 성을 지킬 보물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만일 폐하께서 바닷가로 나가시면 반드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얻으실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여 그달 7일에 이견대(利見臺)로 나가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살펴보도록 했다.

산 모양은 마치 거북의 머리처럼 생겼는데 산 위에 한 개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합해서 하나가 되었다. 사자(使者)가 와서 사실대로 아뢰었다. 왕은 감은사에서 묵는데 이튿날 점심 때 보니 대나무가 합쳐져서 하나가 되는데, 천지(天地)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치며 7일 동안이나 어두웠다. 그 달 16일에 가니 용 한 마리가 검은 옥대(玉帶)를 받들어 바친다. 왕은 용을 맞아 함께 앉아서 묻는다. “이 산이 대나무와 함께 혹은 갈라지고 혹은 합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용이 대답한다. “비유해 말씀드리자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오니, 성왕(聖王)께서는 소리로 천하를 다스리실 징조입니다. 왕께서는 이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부시면 온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이제 대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닷속의 큰 용이 되셨고 유신은 다시 천신(天神)이 되어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 하여 이런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보내시어 나로 하여금 바치게 한 것입니다.”왕은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 (五色)비단과 금()과 옥()을 주고는 사자(使者)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 가지고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때 산과 용은 갑자기 모양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왕이 감은사에서 묵고 17일에 기림사(祗林寺)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太子) 이공(理恭; 즉 효소대왕孝昭大王)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와서 하례하고는 천천히 살펴보고 아뢰었다. “이 옥대(玉帶)의 여러 쪽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왕이 말한다. “네가 어찌 그것을 아느냐.”“이 쪽 하나를 떼어 물에 넣어 보십시오.” 이에 옥대의 왼편 둘째 쪽을 떼어서 시냇물에 넣으니 금시에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이내 못이 되었으니 그 못을 용연(龍淵)이라고 불렀다. 왕이 대궐로 돌아오자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천존고(月城天尊庫)에 간직해 두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병(敵兵)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 지면 날이 개며, 바람이 멎고 물결이 가라앉는다. 이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國寶)로 삼았다.

효소왕(孝昭王)때에 이르러 천수(天授) 4년 계사(癸巳; 693)에 부례랑(夫禮郞)이 살아서 돌아온 이상한 일로 해서 다시 이름을 고쳐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했다. 자세한 것은 그의 전기(傳記)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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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생면 해운산에 위치하고 있는 인성암(引聖庵)은 신라 무열왕(654~660)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고 북쪽 성인산(聖人山)이 있어 성자를 이끌어 들인다고 하여 유래가 된 이름이다. 서생팔경(西生八景) 중 성암모종(聖庵暮鍾)이라 하여 인성암의 저녁 무렵 종소리는 매우 아름다웠다고 알려졌다.

인성암 입구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가 서생포 왜성에서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여러 번에 걸쳐 담판을 하면서 이 사찰에 머물렀다고도 전해진다. 그럼 성자는 원효대사와 사명대사일까?

인성암 전각으로는 대웅전, 칠성각, 독성각, 산령각, 종각 등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 일본인들로 구성된 울산군교육회가 일본어로 펴낸 울산군향토지(蔚山郡鄕土誌)’에 조선인 불교 사찰은 9곳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백양사와 옥천암, 신흥사, 동축사, 월봉사, 인성암, 내원암, 문수암, 석남사 등이 당시에 존재했다. 건물 자체를 보면 근대에 지어진 것이다.

대웅전
칠성각
독성각과 산령각
종각

수령 400~500년 된 팽나무 한 그루가 있어 사찰의 긴 역사를 증명하듯 노거수의 장엄함이 보인다. 팽나무는 성암모종(聖庵暮鍾)의 저녁 종소리를 들었으리라. 지금은 사찰 방문객에게 귀속 말로 그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는 듯하다.

수령 400~500년 된 팽나무 한 그루가 있어 사찰의 긴 역사를 증명하듯 노거수의 장엄함이 보인다.

대웅전에 있는 청동금고의 새겨진 명문을 살펴보면 일제 강점기 때인 1927년에 대대적인 불사가 있었고 당시 주지스님은 법명은 재선이고 호는 벽허였다. 그때 서생면 진하에 살고 있는 근대 울산 최고의 갑부 이규현이 청동금고를 비롯하여 칠성도, 독성도, 산신도 조성에도 시주를 하였다.

1970년대 이규현의 아들 이근수(李根守)가 그의 고택 만석정의 행랑채를 헐어 대웅전을 짓는데 대들보 등 에 도움을 주었다. 2대를 거쳐 인성암 불사에 큰 보탬을 주었던 父子이다.

문화재로는 유형문화재 17신중도(神衆圖)’와 문화재자료 18석조보살좌상(石造菩薩坐像)’이 있었으나 도난을 우려해 범어사 성보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특히 석조보살좌상은 경주 불석으로 알려진 흰색의 석재로 제작되었다.

 암자에서 나와 길을 따라 가면 무일당(無一堂) 선용대선사(善用大禪師)의 부도와 비를 만날 수 있다. 무일당 선용대선사는 192539일 평안남도 용강군 대산면 해산리167번지에서 부친 김곽도와 모친 곽희운 사이에서 9대독자로 출생하여 신의주와 만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에서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무일당(無一堂) 선용대선사(善用大禪師)의 부도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

6.25전쟁 때 켈로부대원으로 안강전투와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여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고 국가유공자가 되었으나 참혹한 전투를 통한 인생무상을 절감하여 1960년경 금정산 범어사에서 하동산대종사 문하로 출가 득도하였다. 이후 보제루 보수, 종각 보수, 진입로 공사 등 범어사의 발전과 가람 수호를 위해 헌신한 공을 인정받아 1968년 종정 표창을 받기도 했다. 1988년에 인성암 주지로 부임한 이후 청풍가풍과 무소유적인 삶으로 정진하였고 형편이 딱한 학생들의 소식을 접하고는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세납 83세 법랍 47세에 원적하였다. 현대의학 발전을 위해 법구를 생전유언에 따라 동국대학교 의과대학병원에 기증하였고 유골은 대전국립현충사에 안장되었다.

무일당(無一堂) 선용대선사(善用大禪師)의 부도와 비
인성암 가는 길에 만나는 서생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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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군 장안읍 임랑리에 자리 잡고 있는 묘관음사(妙觀音寺)는 임제종 소속의 사찰로 운봉 대종사가 1941년에 창건하였다. 운봉 대종사가 입적(入寂)한 후에는 제자인 향곡 혜림(1912~1978)이 중창하였고, 1967년 진제 스님이 법을 이어받았다. 묘관음사(妙觀音寺)는 임제종 선풍을 선양하면서 청담(靑潭), 성철(性徹), 서옹(西翁), 월산(月山) 등 당대의 선지식 승려들이 묘관음사에 수행 정진(爲法忘軀)하였다.

사찰은 오래 되지 않았지만, 한국 불교의 선풍 맥을 잇는 사찰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서산 대사 이후 끊어진 선 맥이 경허 스님에 의해 되살아나 경허(鏡虛), 혜월, 운봉(雲峰), 향곡(香谷), 진제(眞際) 스님으로 이어졌다. 성철 스님도 이곳에서 생식하며 동안거를 보냈다. 이곳에서 성철 스님이 출가 전 두었던 딸 수경이 찾아오자 "만날 필요 없다"고 일갈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이 일화는 1949년 성철 스님이 향곡 스님과 함께 이곳에서 수도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수경은 교사생활을 하다 이후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는데, 법명을 불필(不必)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불도를 얻는데 필요 없는 딸이라는 뜻이다.

다리 위에는 동해선 경전철이 있어 전철이 수시로 달리고 있다.

향곡과 성철 스님은 불교 정화 운동을 하던 봉암사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은 향곡, 성철 스님과 절친한 사이였던 청담의 딸인 묘엄이 쓴 책 회색 고무신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런 인연으로 성철은 묘관음사 길상선원에 머물면서 생식을 하고 장좌불와(長坐不臥)로 동안거(冬安居)를 하였다고 한다.

인도에서 온 달마대사가 중국에서 선종을 일으킨 이래  6조 혜능조사 이후 위앙, 임제, 조동, 운문, 법안종으로 갈라져 이른바 오가칠종(五家七宗)이라는 선종의 황금시대가 열렸다. 특히 임제종은 양기방회와 황룡혜남이라는 걸출한 종장이 나타나서 양기종과 황룡종으로 외연이 확대되었다.

2층 건물로 1층은 금강문, 2층은 보화원
강당 역할을 하는 보화원

 고려 말 태고(太古) 보우 선사(普愚禪師)가 중국 임제종 양기파의 석옥 청공 선사(石屋淸控禪師)로부터 정통 법맥을 이어받은 후 열반(涅槃)의 미묘한 이치와 이심전심으로 전해지는 석가모니의 깨달음[正法眼藏]’을 스승과 제자가 계속 이어 갔다. 이러한 깨달음은 청허당(靑虛堂) 휴정(休靜)과 환성(喚醒) 지안(志安)을 거쳐 경허(鏡虛), 혜월, 운봉(雲峰), 향곡(香谷), 진제(眞際)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묘관음사 경내를 둘러보면 조경이 매우 정갈하고 깔끔함이 느껴진다. 마치 군두더기가 없어 보이는 정원 같다. 동백나무, 대나무, 단풍나무, 소나무와 능소화 등이 조화롭게 경내를 감싸고 있어 깊은 산골 사찰과 비교하더라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특히 선 수행을 하는 납자들에게는 사시사철 주야 함축되고 절제된 조경과 사찰공간이 어우러진 환경을 제공하여 득도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대웅전 중심으로 좌우 마노당과 산호당이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
마노당
산호당
종각

경내 전각은 대웅전, 조사전, 관음전, 삼성각, 종각 등이 있으며, 당우(堂宇)로는 금강문과 보화원,마노당, 산호당, 길상선원(吉祥禪院), 금모당 등 있다. 또 묘관음사를 창건하고 중창한 승려 운봉과 향곡의 부도와 탑비가 백화도장에 있다.

대웅전과 산호당

그리고 경내에 탁마정(琢磨井)이라는 샘이 있는데 향곡 스님과 성철 스님의 관련된 일화가 있다. 탁마는 옥 따위를 갈고 닦는 일 또는 학문, 기예, 정신 등을 향상시키는 과정이고 탁마정의 깊이는 약 6m로 물이 지표면까지 올라 차있다. 향곡, 성철 스님 두 스님이 수행을 하다가 더욱더 깊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한 스님이 다른 스님의 목덜미를 잡고 우물 속에 머리를 넣고 죽음의 직전까지 가는 극한의 상황에서 한마디 하도록 하는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였다.

탁마정이라는 우물

혜림(蕙林) 향곡(香谷)

혜림(蕙林) 향곡(香谷, 1912~1978)1912년 음력 118일 경상북도 영일군 신광면 토성리(현 포항시 북구 신광면 토성리) 아버지 김원묵(金元默), 어머니 김적정행(金寂靜行) 사이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김진탁(金震鐸), 법명은 혜림(蕙林), 법호는 향곡(香谷)이다.

능소화와 한 몸이 된 소나무

192716세에 천성산 내원사로 출가하여 범어사 성월(性月)을 은사로 득도하고, 혜림(蕙林)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31년 금정산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운봉(雲峯)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내원사 조실 운봉 문하에서 정진하다 크게 깨달은 후 인가를 받았다. 1960년대~1970년대에 북쪽에는 전강, 남쪽에는 향곡이란 뜻의 북 전강 남 향곡(北 田岡 南 香谷)’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혜림은 한국 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참선 수행자였다.

조사전에는 경허(鏡虛 ),&nbsp; 혜월 ,&nbsp; 운봉(雲峰),&nbsp; 향곡(香谷)스님의 진영이 있다.
관음전에서 본 경내 전경
저 너머 임랑해수욕장을 품고 있는 동해바다가 보인다.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성철(性徹), 청담(靑潭), 보문, 자운(慈雲) 등과 함께 결사에 참여하였다. 봉암사 결사는 한국 불교의 정통성을 지키고, 수행자의 본분대로 살아갈 것을 발원하여 이후 대한불교 조계종의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 이후 혜림은 제방선원에서 수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였다. 6·25 전쟁 직후인 1951년에는 부산 선암사 조실로 추대되었다. 1955년에는 정화불사에 동참하여 경주 불국사 주지 소임을 맡았고,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를 중창하였다. 정화불사 당시 중앙종회의장으로 한국 불교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헌신하였다.

관음전

1959년에 부산 묘관음사에 길상선원(吉祥禪院)을 개원하고 무차 대회(無遮大會)를 열어 법문을 펼쳤다. 이후 조계산 선암사, 경주 불국사, 팔공산 동화사의 조실 및 선학원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67년 진제(眞際)에게 법맥을 물려주고,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이다가 1978년 음력 1218일 묘관음사에서 입적하였다. 세수는 67, 법랍은 57세로 부도와 비는 묘관음사 백화도장에 있다.

삼성각 가는 길
삼성각

혜림은 경허(鏡虛), 혜월(慧月), 운봉의 법맥을 계승하였고 후학을 가르칠 때는 부처를 절대자로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부처에 대한 관념을 버리지 못하면 부처 또한 스스로를 얽어매는 쇠사슬에 불과하다.”고 강조하였다. 즉 스스로가 하나의 무위 진인(無位眞人, 도를 닦는 마음이 뛰어나서 지위를 달 수 없을 만큼의 위치에 오른 참된 인간)임을 자각하도록 하였다.

길상선원

또 혜림은 정법을 만나 공부하는 사람이면 먹고 입는 데 팔려서는 안 된다.”면서 머리에 붙은 불을 끄는 것과 같이 간절히 공부해야 된다.”고 강조하였다. 편하고 잘 먹는 것만 생각하면 도심(道心)이 일어나지 못하고 망상과 분별과 번뇌만 일어난다. 신심과 분심과 의심을 갖고 정진해야 성과가 있다.”고 하였다. 저서로 1982년에 제자들이 편찬한 향곡 선사 법어집(香谷禪師法語集)이 있다.

금모당 가는 길
사찰 가장 상단에 위치한 금모당

묘관음사 입구 금강문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비스듬히 올라가면 운봉선사 발원문 표지석을 지나 백일홍 한 그루와 백화도장이 보이는데 그곳 백화도장에 향곡 대종사 행화비(香谷大宗師行化碑)와 부도 그리고 운봉 대종사 행화비(雲峰大宗師行化碑)와 부도가 있다. 눈에 띄는 것은 백화도장의 바닥이 만다라를 연상케 하는 대리석에 경전내용을 새겨져 깔려있다.

백일홍과 백화도장

향곡 대종사 행화비(香谷 大宗師 行化碑)와 부도

19791218일 법제자 진제(眞際)가 세웠고  비신은 너비 63, 두께 32, 높이 174이다. 귀부는 가로 152, 세로184, 높이 93이다. 귀부는 연화문이었던 것을 최근에 거북 모양으로 바꾸었다.

향곡 대종사 행화비 ( 香谷 大宗師 行化碑 )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향곡은 1912118일 경상북도 영일군 신광면 토성리에서 아버지 김원묵(金元黙)과 어머니 김적정행(金寂精行)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진탁(震鐸)이며, 16세에 둘째 형을 따라 천성산 내원사에서 입산하였다. 18세에 조성월(趙性月)을 은사로 모시고 혜림(蕙林)이라는 법명을 받았고, 1930년 금정산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운봉 선사(雲峰禪師)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1944년 임제 정맥의 적전(嫡傳)이 되었고, 향곡(香谷)이라는 당호를 받았다.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여러 도반들과 함께 정진하던 중에 크게 깨우치고 아래의 오도송을 읊었다.

왼쪽부터 향곡 대종사(香谷 大宗師) 부도와 행화비(行化碑), 진신사리탑, 운봉 대종사 행화비(雲峰 大宗師 行化碑)

홀연히 두 손을 보니 전체가 살아났네/ 삼세의 불조들은 눈 속의 꽃이요/ 천경만론이 모두가 무슨 물건이었더냐/ 이를 좇아 불조들이 모두 몸을 잃었도다. 봉암사의 한 번 웃음 천고의 기쁨이요/ 희양산 구비 구비 만겁토록 한가롭네. 내년에도 또 있겠지 둥글고도 밝은 달/ 금풍이 부는 곳에 학의 울음 새롭구나.

이후 묘관음사를 중건하고 선방을 열자 많은 제자들이 모였다. 묘관음사에서 후학을 지도하다가 19781215일 해운정사에서 열반게를 짓고, 1218일 입적하였다. 세수는 67세이고, 법랍은 50세였다.

운봉 대종사 행화비(雲峰 大宗師 行化碑)와 부도

원래 경상북도 선산 도리사에 있었는데, 문도들의 뜻에 따라 2000년 묘관음사로 옮겼다.  비신은 높이 81, 너비 66, 두께 33이다. 귀부는 가로 103, 세로 146, 높이 79이다.

운봉 대종사 행화비 (雲峰 大宗師 行化碑)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운봉은 1889127일 경상북도 안동 후남동 정씨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13세 때 일하 화상(一荷和尙)을 은사로 출가하였고, 15세 되던 해 삭발하고 사미계를 받았다. 이때 법명이 성수(性粹)이다. 사미계를 받고 본격적으로 불문에 든 운봉은 강백(講伯) 회응(晦應)의 문하에서 교법을 배우고, 23세 되던 해 범어사 만하 화상(萬下和尙)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25세에 상주 원적사의 석교 율사(石橋律師)로부터 계율을 배웠다. 금강산·오대산·묘향산 등의 거찰에서 정진하였다. 35세에 백양사 운문암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이때 한 편의 게송을 읊었다.

운봉 대종사 (雲峰 大宗師) 부도

문 밖에 나왔다가 갑작스레 차가운 기운이 뼈 속에 사무치자/ 가슴속에 오랫동안 걸렸던 물건 활연히 사라져 자취가 없네. 서릿발 날리는 달 밝은 밤에 나그네들 헤어져 떠나간 다음/ 오색단청 누각에 홀로 있으니 산과 물이 다 공하도다.

운봉은 부산 선암사의 승려 혜월을 찾아가 인가(認可)를 받았다. 이로써 임제종의 법등(法燈)이 운봉에게 계승된 것이다. 이후 운봉은 통도사·범어사 등에서 조실을 맡아 후학을 가르쳤다. 계미년(1943) 월내포 묘관음사로 옮겼다. 병색이 깊어지자 제자 향곡에게 자신이 입적할 날을 미리 알리고 후사를 부촉(咐囑)하였다. 2월 그믐날 입적게(入寂偈)를 남기고 돌아가셨다. 운봉의 나이 58, 법랍 45세였다.

석가 달마삼천(釋迦達磨退三千) 후학 성철(性徹) 삼가 쓰다.

법자질(法資秩) 회암 조심(晦岩祖心), 향곡 혜림(香谷蕙林), 구옹 지우(瞿翁智宇), 구암 고현(龜岩古玄), 우하 도원(雨下道源), 진해 각현(震海覺玄), 낙산 병율(落山炳律)

묘관음사에는 조선후기에 제작 된 부산시 문화재 42호 오여래탱(五如來幀)46호 불자(拂子)가 있다.

전법(傳法)의 증표인 불자(拂子)

불자(拂子)는 승려가 수행할 때 마음의 티끌이나 번뇌를 털어 내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불교 용구 중 하나이다. () 혹은 불진(拂塵)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먼지와 벌레 등을 쫓아내는 데 사용하였던 생활 용구로 그 모습은 총채와 유사하다. 불자는 선종에서 전법(傳法)의 증표이기도 하며, 선승의 문답 또는 주지가 설법할 때 상징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경전의 기록에 의하면 흰 말의 꼬리털로 만든 백불(白拂)을 불자 중 귀중하게 여겼는데, 묘관음사의 불자가 바로 백불이다. 선사[慧明禪師]], 운봉으로 이어지는 전법게를 전수받은 뒤 창건하였는데, 묘관음사불자는 혜월의 유품으로 향곡이 사용하였다.

모양은 흰색의 말총과 나무 자루로 이루어졌는데, 길이는 83이다. 말총은 유제(鍮製, 놋쇠)로 된 세 벌의 줄로 촘촘히 엮어 나무 자루에 단단히 묶어 연결하였다. 나무 자루에는 어떠한 장식도 하지 않았으나, 손잡이 부분에 붉은색의 띠를 묶고 그 끝에 2개의 수술을 매어 소박하게 장식하였다.

영가 천도를 위한 재()에 사용되는 오여래탱(五如來幀)

묘관음사 오여래탱(妙觀音寺五如來幀)은 다보여래(多寶如來), 묘색신여래(妙色身如來), 광박신여래(廣博身如來), 이포외여래(離怖畏如來), 감로왕여래(甘露王如來) 등 다섯 여래를 각 폭에 따로 그린 탱화로, 영가 천도를 위한 재() 의식 때 사용하는 도량 장엄용 불화이다.

오여래탱은 부산 지역에서는 유일한 작품으로 5폭이 한 세트를 이루는데 각 폭의 크기는 세로 66.4, 가로 116.3의 액자 형태로 되어 있다. 원래 족자 형태였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1폭씩 액자 형태로 개조해 재 표구된 상태이다. 다섯 여래의 전체적인 모습은 매우 흡사하다. 중앙에 정면을 향한 여래를 중심으로 좌우 각 2폭의 여래로 구성되어 있는데, 적색과 녹색의 구름문을 뒤로 한 채 두광과 신광을 갖춘 여래가 연꽃 위에 서서 합장하고 있는 모습이다.

여래의 머리 위에는 육계가 뾰족하게 솟아 있고, 얼굴은 타원형에 이목구비가 다소 중앙으로 몰려있는 편이다. 전반적으로 채색은 적색과 녹색을 주조로 군청색을 가미하였는데, 일부 덧칠된 색채와 필선으로 원래의 가치를 다소 떨어뜨린다. 하단의 화기란(畵記欄)은 원위치를 상실한 채 액자 속에 따로 보관되어 있으며 화승으로 보이는 유성(有性)과 낙정(樂淨)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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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련산((金蓮山, 415m) 마하사골에 위치한 마하사(摩訶寺)는 부산 최초의 사찰이다. 1965~1970년 대대적인 중창불사 중 대웅전 건물에서 "상량문" 이 발견되었는데, 그 상량문에서 마하사를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어 창건시기를 신라 내물왕대로 추정하고 있다. 마하사의 마하(Maha)는 산스크리트로서 그 뜻은 "훌륭한" "존귀한" "위대한"이란 뜻으로 글자 그대로 "훌륭한 사찰"이란 뜻이다.

마하사 초입의 나무터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누구인가?

아도화상 또는 묵호자는 삼국유사, 삼국사기, 해동고승전에 따르면 고구려 사람으로 아버지 아굴마, 어머니 고도녕 사이에서 태어났고 5세 때 출가하여 16세에 위나라로 갔다가 19세에 돌아왔다. 신라 미추왕 2(263)때 부터 불교 전파에 노력하였고 눌지왕 2(418) 일선현(현재 선산)에 모례의 집에 머물면서 신라 최초의 사찰 도리사를 창건하였다. 그리고 신라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기 된 계기를 만든 인물이 아도화상이다.

그리고 마하사의 터가 금학이 알을 품는 금학포란(金鶴包卵)의 형세에 자리 잡고 있어 따뜻한 기운이 넘치는 명당자리이다오래전 금련산에는 마하사, 반야암, 바라밀다사(波羅密多寺) 등 세 개의 사찰이 있었는데 지금은 마하사만 남아 있고, 반야암과 바라밀다사는 마하사 입구의 맞은편 언덕에 사찰 터의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마하사 약수터
중생들의 간절한 소원성취를 위한 곳인가?

옛날부터 마하사의 십육나한이 영험하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지역의 신도들이 많이 찾아와서 소원성취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나한전의 16나한의 불상이나 탱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인간적이고 해학적이며 소탈한 모습을 띄고 있다. 불씨를 구해 준 나한과 동지 팥죽, 참새를 쫓아낸 나한등 관련 설화를 보면 팥죽이 먹고 싶어서 황령산의 봉화대를 찾아 갔다는 것이나, 나한전의 불사를 하지 않자 종소리를 바꾸어 버린 것 등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 주어 웃음과 함께 친근함을 느끼게 한다.

인간적이고 소탈한 모습의 부처님
2층 누(樓) 건물양식에 천왕문과 범종각
좁은 산세 지형을 최대한 활용한 건물이다.

또한 수영팔경(水營八景) 중 하나인 연산모종(蓮山暮鐘)’이라 하여 마하사에서 해질녘에 울려 퍼지는 은은한 범종소리로 금련산 마하사골을 해탈 향기로 그윽하게 한다고 한다. 그래서 일까? 초입에서 맞이하는 범종각의 청정한 종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다.

마하사 창건 내력을 보면 임진왜란 때 봉수대를 지키는 호국불교 사찰이기에 건물이 모두 불탔고, 18~19세기 단계적으로 사찰의 모습을 갖추었다. 1717(숙종 43) 초암(草庵) 형태의 대웅전과 나한전을 짓고 신도 박성우(朴聖祐)가 시주하여 16나한상을 조성하였다. 1729(영조 5) 승려 각찬이 주도하여 나한전을 중건하였다. 1773(영조 49) 승려 진우(震祐)와 쾌일(快一)이 나한전을 다시 중건하였다. 1791(정조 15) 승려 채정(采定)이 대웅전을 중건하였다. 1841(순조 14) 대방, 즉 마하대복연을 중건하였다. 1860(철종 11) 대웅전과 요사를 중건하였다. 1876(고종 13) 요사와 식당을 중건하였다.

마하사의 터가 금학이 알을 품는 금학포란(金鶴包卵)의 형세에 자리 잡고 있어 따뜻한 기운이 넘치는 명당자리이다.

1965년부터 1970년 사이 승려 문성이 대웅전·응진전·대방·요사·식당을 중건하였다. 1983년 승려 지환이 응진전을 중건하였고, 1984~1985년 승려 지연이 종각을 세우고 반야암을 중창하였다. 1987년 승려 지정이 설법전을 보수하였고, 대방을 지장전으로 개축하였다. 1995~1998년 승려 경민이 대웅전과 삼성각을 중건하여 현재의 마하사 모습을 갖추었다.

대웅전은 정면 5,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안에는 2000년에 조성한 금동 아미타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고, 후불탱과 목각 지장탱, 목각 신중탱이 있다. 오른쪽에는 조선 후기 제작한 목조 여래 삼존 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창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솟을살 살대에 십장생 살대를 꾸며 놓은 살문구조다. 대웅전에 보기 힘든 특이한 구조로 보는 재미가 솔솔한 창호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대웅전
대웅전 공포의 고풍스러운 맛은 크지 않다.
창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솟을살 살대에 십장생 살대를 꾸며 놓은 살문구조로 대웅전에 보기 힘든 특이한 구조로 보는 재미가 솔솔한 창호다 .
십장생 중 학과 소나무
십장생 중 학과 사슴, 소나무

나한전은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18세기 건물을 최근 중창하였다. 안에는 18세기 조성한 목조 석가여래 좌상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좌우 협시하고 있다. 또 불단 좌우에 16나한상과 나한도는 석조로 목조 석가여래 좌상과 같은 시기 작품이다.

정면&nbsp; 3 칸 ,&nbsp; 측면&nbsp; 2 칸의 팔작지붕의 나한전
옛날부터 마하사의 십육나한이 영험하기로 유명하여 지역의 신도들이 많이 찾아와서 소원성취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대웅전 맞은편 대방(大房)은 일명 마하대복연(摩訶大福緣), 지장전으로 근래에 다시 고쳤다. 대방(大房)은 스님들의 수행, 식사, 회의 등이 열리는 곳으로 현재 마하대복연, 지장전 현판이 각각 걸려있다. 맨 좌측에는 지대방 현판이 걸려있는데 사찰의 큰 방에 딸린 작은 방을 칭하는 것으로 본 건물에 시멘트로 추가적으로 만든 것 같다.

지대방은 본래 스님들의 휴게실로 스님들의 신변잡기, 종단 소식 등을 주고받는 장소로 주로 별도의 방이 없는 스님, 갓 출가한 행자나 사미들이 주된 이용자다. 어원은 벽에 지댈 수 있는 방에서 유래했으며 현재는 창고로 쓰이는 것 같다.

지대방,&nbsp;마하대복연 ( 摩訶大福緣 ),&nbsp; 지장전

십육나한의 설화, 불씨를 구해 준 나한과 동지 팥죽」과 참새를 쫓아낸 나한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어느 해 동짓날 밤에 마하사의 불씨가 모두 꺼져 버려 팥죽을 쑤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주지가 절 부엌에 가 보니 화덕에 불이 켜져 있어 놀라는데, 그때 황령산의 봉화꾼이 와서 하는 말이 어젯밤 이 절의 상좌 아이가 불을 얻으러 왔기에 불을 주고 팥죽을 먹여 보냈다고 했다. 주지는 그리한 일이 없기에 이상하게 여기고 팥죽을 쑤어 나한전에 올라갔는데 십육나한 중 오른쪽 세 번째 나한의 입술에 팥죽이 묻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뒤 소문이 나 민가에서 찾아오는 신도들이 많아졌다.

어느 해에는 절 마당에 참새가 많이 찾아와 절에 피해가 크자 나한전에 빌었더니 참새 한 마리가 죽어 떨어지고, 그 후로 다시는 참새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어느 해에는 불사를 거행하는데 돈이 부족하여 나한전의 불사를 행하지 않고 불사 종료 회향식을 올리려고 했다. 이때 범종을 치는데 종소리가 나무 소리로 바뀌어 신도들이 깜짝 놀라 나한전에 나가 내일 나한전 불사를 거행하겠다고 하니 종소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16나한 설화의 영향인지 전반적으로 부처님 상이 정겹고 친밀감이 느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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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 앵림산(鶯林山, 491m) 기슭에 위치한 안적사(安寂寺)는 신라 시대인 661(문무왕 원년) 원효(元曉)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초창에 관한 문헌 자료는 전하지 않으나 해운대구 반송동 운봉 부락 뒤편에 있었던 운봉사(雲峰寺)가 연원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운봉사는 석탑 옥개석을 비롯해서 기와·토기·청자 파편 등이 발견되어 신라 말 고려 초의 사찰로 추정된다. 운봉사가 임진왜란으로 폐사되자 현재 지역으로 옮겨와 안적사가 되었다고 한다.

주차장에서 계단따라 올라가면 맞이하는 원통문

1592(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이후 범어사(梵魚寺) 묘전 화상(妙全和尙)이 중건하였다. 1873년에는 대웅전, 수선실 등을 경허(慶虛), 해령(海嶺)이 중수하였으나 광복 후 거의 폐사되고 소실되었다. 1973년부터 남곡덕명(南谷德明)이 대웅전, 삼성각, 수선실, 요사채, 종무소 등을 다시 지어 지금의 가람 배치를 갖추었다.

일주문

현재 안적사 경내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삼성각, 설현당, 보림원 등 10동의 건물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로 1990년 무렵 지어졌으며, 아미타여래 좌상과 관음보살·대세지보살이 모셔져 있다그리고 대웅전 에는 아미타여래가 서방 극락세계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그린 아미타극락회상도(阿彌陀極樂會上圖)가 있는데 1874년에 제작 된 탱화로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0호이다. 보통 극락전의 본존불인 아미타여래의 후불탱화나 감로 탱화 등의 상단탱화로 주로 사용되고 있다.

천왕문
천왕문에서 바라 본 일주문
천왕문 겸 반야문 사방벽면에는 12지상이 벽화로 꾸며져있다.
공포가 아름다운 종각

특징은 화면 상단에 등장하는 나한의 묘사에서 두드러지는데, 아미타 삼존을 비롯한 문수·보현 동자의 표현이 조선 후기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면, 나한상 6위의 얼굴 표현은 주색(朱色) 바림의 음영을 통해 얼굴의 굴곡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어, 음영을 부각시켜 인물의 개성을 표현하는 근대 불화의 성격으로 조선 후기 불화에서 근대 불화로 전환되는 과도기적인 변화 단계를 보여주고 있는 자료이다.

또한 중생의 사후 세계를 관장하는 지장보살과 명부(冥府)에서 중생들의 죄질을 심판하는 십대 명왕들, 그리고 그 권속들을 도설하고 있는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가 있었으나 현재 범어사 성보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1919년에 제작된 작품이기는 하나 전통 기법을 가진 고식적인 구도, 독특한 표현 기법,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양, 유려한 선 처리 등 이 시대 작품으로는 보기 드문 아름다운 작품으로 주목받는 문화재이다.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9호이다.

삼층탑에 진신사리3과를 봉안하여 여래진신사리보탑이라고 칭함

대웅전 바로 옆에 삼성각에는 칠성탱·산신탱·신중탱과 원효·의상(義湘동산(東山)의 진영이 있다. 대웅전 왼편에 요사인 설현당(說玄堂), 오른편에 보림원(寶林院)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 뒤편으로 삼소굴(三笑窟)이라는  선원이 자리하고 있다. 최근에 조성한 3층 석탑도 경내에 있다.

안적사 전경

안적사는 비록 건축물은 최근에 지어졌지만 신라 시대 승려 원효와 의상이 젊었을 때 화엄경을 깊이 연구하였다고 전해지는 사찰로 신심이 깊은 신도와 수선납자가 꾸준히 이 절을 찾고 있다. 현재 범어사의 수사찰(首寺刹)이고 신라시대의 맥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앵림산(鶯林山)은 산속에 꾀꼬리 떼들이 모였다 하여 붙은 이름으로 장산의 북쪽 연봉으로, 북서쪽 골짜기에서는 내동천이 발원해 내동 마을의 내리교를 가로질러 흘러내린다. 앵림산 주변에는 억새 군락지가 형성되어 있고 해송이 주를 이루며, 사방으로 너덜겅이 있다. 그리고 2시간에서 7~8시간에 이르는 다양한 산행 코스와 시원하고 조용한 계곡도 있어 등산객과 여름철 가족 피서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앵림산(鶯林山)과 원효(元曉)와 의상(義湘)대사의 이야기

원효(元曉)대사와 의상(義湘)대사는 젊었을 때 불교의 경전인 화엄경을 깊이 연구하며 안적사에서 정진하였다. 안적사(安寂寺)가 있는 곳은 동해의 푸른 바다가 아른거리고, 숲이 울창하며, 기후가 따뜻하여 온갖 새가 지저귀고 있는 극락같이 아름다운 곳이다. 더욱이 따뜻한 남쪽 나라에만 있는 꾀꼬리와 극락조가 짝을 지어 지저귀고, 사람들의 팔과 어깨에 앉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곳을 앵림산(鶯林山)이라 했다. 이 극락 같은 곳에서 원효대사는 안적사 자리에 토굴을 만들고, 의상대사는 꾀꼬리 떼가 많이 서식하는 그 아래에 토굴을 만들어 주석하였다. 의상대사는 탁발하지도 않고 선녀가 올리는 공양을 받고 있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이를 자랑하고 싶어 사형으로 모시고 있는 원효대가를 공양에 초대하였다. 그런데 이날 어김없이 공양을 올리던 선녀는 끝내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기다리다 못해 되돌아 간 후에 나타난 선녀에게 의상대사는 무안을 당한 화풀이를 하였다. 선녀는 원효대사가 앉은 곳에 화광이 충전하여 접근할 수 없었다고 변명하였다. 그때 의상스님은 원효스님이 금강 삼매에 들어 신통을 부린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 의상스님은 교만심을 버리게 되어 크게 득도하였다고 한다.

1973년 불사에 크게 기여한 신도의 무덤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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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물결처럼, 단풍 빛깔에 비치는 물결처럼, 이 모두 비단 빛의 물결이라서 비단 금(), 물 수()하여 금수(錦水)라고 하고 천년, 만년 동안 거울처럼 맑고 얼음처럼 차가운 금수가 사시사철 흐르는 골짜기가 금수동(錦水洞)이다. 금수(錦水)는 삼각산 박치골의 박천(朴川) 물과 불광산 백련암 계곡의 물이 합류한 청정한 물로써 이 아름다운 계곡인 금수동(錦水洞)이 장안사 계곡을 대표하고 있다.

금수동 각석

장안사(長安寺)로 가기 위해 통과하는 초입 골짜기가 금수동(錦水洞)이고 멋있게 맞이하는 것이 금수동(錦水洞) 각석이다. 상장안 마을 첫 주차장과 둘째 주차장사이의 도로변 암벽에 錦水洞 세 글자를 초서체로 새겨져 있는데 그 유려함이 매우 뛰어나나 누구 썼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그 옛날 금수동(錦水洞) 절경에 감탄한 유랑객이 필력을 다해 새겼으리라.

풍문에 의하면 이진순 현감, 본관이 능성 구씨인 선비 등이 썼다고 하며, 전설에 의하면 원효대사가 손가락으로 썼다고도 한다. 원효대사는 그만큼 이 지역에서 인연이 많다. 금수동 글자 오른쪽에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 새겨져 있고 왼쪽에는 산수계원(山水契員)과 사람이름 12명이 새겨져 있어 양반들의 계모임인 산수계에서 12명이 이곳에 놀러 와서 기념으로 새긴 것 같다.

금수동 글자 오른쪽에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 새겨져 있다.
왼쪽에는 산수계원(山水契員)과 사람이름 12명이 새겨져 있어 양반들의 계모임인 산수계에서 12명이 이곳에 놀러 와서 기념으로 새긴 것 같다.

불광산(660m) 산록에 위치한 장안사(長安寺)673(문무왕 13) 원효(元曉)가 척판암(擲板庵)과 함께 창건했다는 송고승전(宋高僧傳)의 기록이 있다. 처음 절 앞에 계곡이 양 갈래로 흐르고 있어서 쌍계사(雙溪寺)로 불리다가 809(애장왕 10)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기장현 읍지(機張縣邑誌)에는 선여사, 취정사, 안적사, 장안사 등을 원효가 창건한 4대 사찰로 기록하고 있다.

천왕문 통과하면 맞이하는 부처님

장안사(長安寺)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의 병화로 모두 소실되었다가 1631(인조 8)에 중창하였고 1638(인조 16)에는 태의대사(太義大師)가 중건하였다. 1660(현종 1) 김방한(金邦翰)이 지은 장안사 대웅전기(長安寺大雄殿記)2009년 대웅전 지붕 밑에서 중수 연도가 적힌 상량문인 순치 13년 종도리 묵서명(順治十三年記宗道里墨書銘)이 발견되어 확인결과, 1654(효종 5)에는 박수(朴秀), 김억문(金億文), 최춘매(崔春梅) 72명이 시주하고, 1657(효종 8) 학능(학능), 충묵(沖墨), 원정(元正)스님 등이 24일에 불사를 시작하여 512일에 기둥을 세우고, 67일에 들보를 올리는 상량을 하였으며, 1658년에 중수를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장안사 대웅전은 201286일 보물 제1771호로 지정되었다.

왼쪽의 나무는 수령이 200년 된 단풍나무로 보호수로 지정

1744(영조 20)에는 대웅전 지붕 부분의 서까래 등을 교체·보수하였으며, 1951년에도 부분적으로 보수하였다. 1975년에는 처마를 다시 채색하였으며, 1987년에는 장안사 대웅전 지붕의 번와(翻瓦, 기와를 잇는 작업) 불사가 있었다.

현재 장안사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응진전, 명부전, 산신각, 설법전, 해동전, 불광전, 천왕문, 종각 등이 있으며 석조건축물에는 5층 석탑과 석등이 있다. 또한 경외 천왕문 오른쪽으로 걸어가면 대숲이 나타나는데 이곳에는 절터 주변에 있었던 부도(浮屠) 5(), 탑비(塔碑) 2()를 옮겨 한 자리에 봉안하였다.

장안사 경내의 백미는 보물 제1771호인 대웅전(大雄殿)이다. 부산 지역 가장 오래된 다포식 목조 건축물로 1658년에 중수를 완성한 그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기둥과 대들보 등 주요 구조 부재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어, 건립 시기의 목조 건축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 원형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건물 폭에 비해 건물 자체 높이가 높고 처마가 깊게 돌출한 팔작지붕을 갖기 있기 때문에 평면의 규모에 비해 웅장한 느낌을 준다. 대웅전 공포의 화려함에 이어 창호(窓戶)의 아름다운 미를 볼 수 있는데 살문 맨 아래에는 태극무늬, 중간 좌우에는 빗살(교살)과 솟을살(격자빗살), 그리고 맨 위에는 빗살과 원형의 꽃 살로 살문을 꾸며서 소목장의 뛰어난 미적안목과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대웅전(大雄殿)은 부산 지역 가장 오래된 정면 3칸, 측면 3칸 팔작지붕 겹처마의 다포식 목조 건축물로 1658년에 중수를 완성한 그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정면 3, 측면 3칸의 겹처마 건물로 측면에서 볼 때 팔() 자 모양을 가진 팔작지붕의 다포(多包) 양식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기둥 윗부분을 장식해 주는 공포는 기둥 윗부분 외에 기둥 사이에도 설치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전면 공포는 후면 공포나 좌우면 공포와도 양식의 차이를 나타내는 등 몇 차례에 걸친 공포의 보수·교체 흔적이 보인다.

대웅전 후면으로 겹처마와 돌담의 평행미가 돋보인다.
대웅전 측면으로 단청과 공포의 화려함을 느낄수 있다.

대웅전 삼존불 중앙에는 석가여래, 왼쪽에는 약사여래, 오른쪽에는 아미타여래로 구성되어 있고, 본존불인 석가여래는 1659년 대화원(大畵員) 녹원(鹿元)을 비롯하여 편수(片手)인 명자(明紫), 학륜(學崙), 각인(覺仁)이 참여하여 불신(佛身)은 불석(佛石, 제오라이트), 양손은 나무로 조성한 석조 석가여래삼불좌상(石造 釋迦如來三佛坐像)으로 보물 제1834호이다.

대웅전 창호(窓戶)에서 아름다운 미를 볼 수 있는데 살문 맨 아래에는 태극무늬, 중간 좌우에는 빗살(교살)과 솟을살(격자빗살), 그리고 맨 위에는 빗살과 원형의 꽃 살로 살문을 꾸며서 소목장의 뛰어난 미적안목과 감각을 느낄 수 있다.

 

턱이 짧은 방형의 얼굴에 콧날이 우뚝하며, 부드럽고 자비로운 미소를 띠고 있다. 이 불상은 조성연대와 작가가 밝혀져 있어 17세기 중·후반 불교조각사 연구에 기준 작이 될 수 있고, 불석 제 불상의 본격적인 유행 시점에 제작되어 불상 재료 연구에 중요한 불상으로 평가된다. 후불탱화는 석가영산회상도(釋迦靈山會上圖)로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87호이다.

대웅전 옆 산신각

응진전(應眞殿)은 맞배지붕 겹처마의 정면 3, 측면 2칸 익공양식으로 1899년에 건립되었고 나한전(羅漢殿)이라고도 하는데 공포는 전반적으로 장식적인 성향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으며 겹처마를 통하여 공포 살미 초제공, 이제공의 연화 앙서형, 삼제공의 용두와 봉두의 화려함을 부각하였는데 19세기말 부산지역 사찰의 건축특성을 확인 할 수가 있다. 

응진전(應眞殿)은 맞배지붕의 정면 3칸, 측면 2칸 익공양식으로 1899년에 건립되었다.

 

응진전 공포 살미의 초제공, 이제공은 연화 앙서형, 삼제공은 봉두로 조각되어 있다.

 

살미의 삼제공이 용두로 조각되어 있다.

중앙의 주불은 석가모니, 왼쪽에는 미륵보살, 오른쪽은 제화갈라보살 그리고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85호인 석조 석가 삼존 십육 나한상이 모셔졌다. 후불탱화인 석가 영산회상도(釋迦靈山會上圖)는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88호이다. 나한은 석가여래가 열반한 후 미륵이 나타나기까지 열반에 들지 않고 이 세상에 있으면서 불법을 수호하도록 위임한 분들이다.

중앙의 주불은 석가모니, 왼쪽에는 미륵보살, 오른쪽은 제화갈라보살

명부전(冥府殿)은 맞배지붕의 정면 3, 측면 3칸 익공양식으로 1744년 중건되었고 주불은 지장보살, 왼쪽에는 도명존자, 오른쪽은 무독귀왕을 모신 곳이며 지장전이라고 하고 지옥의 심판관인 모신 곳이라서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지장보살 뒷면에 봉안 된 지장보살도는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89호이고 석조 지장 시왕상은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86호이다.

육도에서 헤매는 중생들이 죽으면 염마대왕 앞에 나가 자기가 지은 죄악에 대해 엄격하고도 공정한 재판을 밭게 되는데 그 재판은 10대왕이 하게 된다.

명부전(冥府殿)은 맞배지붕의 정면 3칸, 측면 3칸 익공양식으로 1744년 중건되었다. 왼쪽은 석등

설법전(說法殿)은 팔작지붕에 정면 5, 측면 3칸의 커다란 규모로 최근에 지었다. 안에는 금동 와불상(臥佛像)이 봉안되어 있다. 와불 복장(腹藏)에는 2001년 미얀마 마웅매이사()의 승려 우뚜리야 사야도우가 기증한 진신 사리 3과가 봉안되어 있다.

설법전(說法殿)은 팔작지붕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커다란 규모로 최근에 지었다.

삼층석탑에도 혜경선사가 태국에서 부처님 진신사리 7과를 구해서 봉안하였다.

부처님 진신사리 7과가&nbsp; 봉안 된 삼층석탑

부도(浮屠)와 탑비(塔碑)

천왕문 오른쪽으로 걸어가면 대숲이 나타나는데 입구에 원효 이야기 숲 안내도표지판이 있다. 이곳 원효 이야기 숲 초입에 고려말 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석종형(石鐘形) 부도(浮屠) 5(), 탑비(塔碑) 2()가 있다. 절터 주변에 있던 이들을 장안사 종루 왼쪽에 옮겨졌다가 현재는 위치로 다시 옮겨져 있다. 원효 이야기 숲은 조성 중인 것 같다.

원효 이야기 숲 입구

부도 가운데 문자가 새겨진 것은 선암당 명열대사(仙岩堂 明悅大師) 부도뿐이다. 명열대사 부도는 옥개가 생략되고 석종형으로 전면에 仙岩堂 明悅大師塔이란 명문이 있고 후면에는 가경(嘉慶) 3(정조 22, 1798) 9월에 조성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딴 기록은 글자가 마멸되어 판독할 수가 없다이 이외의 부도는 8각의 옥개석을 얹은 것이 있고 중대석과 하대석이 한 돌로 구성된 부도도 있으며 높이 147의 부도도 있으며 모두 5기의 부도가 있다.

선암당 명열대사(仙岩堂 明悅大師) 부도는 옥개가 생략되고 종형으로 전면에 仙岩堂 明悅大師塔이란 명문이 있고 후면에는 가경(嘉慶) 3년(정조 22년, 1798년) 9월에 조성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글자가 마멸되어 판독할 수가 없다.
석종형(石鐘形) 부도 ( 浮屠 )로 중대석과 하대석이 한돌로 되어있다.

부도와 연관된 탑비(塔碑)2기가 있는데 그 하나는 1754(영조 30, 건륭 19)에 처음 세웠는데 1844(현종 10, 도광 24)에 다시 세운 선교양종 월조당 대선사지탑비(禪敎兩宗 月照堂 大禪師之塔碑)이고 다른 하나는 1775(영조 51, 건륭 40) 세운 연파당대사 쾌주지비(蓮坡堂大師 快淍之碑).

연파당 대사(蓮坡堂大師) 쾌주비(快淍碑)

蓮坡堂大師快淍之碑

乾隆四十年乙未九月日 上左錦察允澤

건륭 40(1775) 을미년 9월 일 상좌 금찰 윤택

蓮坡堂大師快淍之碑
乾隆四十年乙未九月日 上左錦察允澤

선교양종(禪敎兩宗) 월조당 대선사(月照堂大禪師) 탑비(塔碑)

禪敎兩宗月照堂大禪師之塔碑

師諱克存 俗姓張氏 車成人也 幼從粹寬定師落髮 長隨香坡

선사의 휘는 극존(克存)이오, 속성은 장()씨로 거성(車成) 사람이다. 어려서 수관정사(粹寬定師)를 따라 머리를 깎았고, 커서는 향파(香坡)를 따르며

粗味敎亻又 後隨靑霄 更參禪旨 老而彌傳來祖焰淸虛七代 年臨稀二卒恙

대략 교종의 가르침을 맛보았다. 그 뒤 청소선사(靑霄禪師)를 따르며 참선의 뜻을 알았으며, 늙어서는 조사 청허(淸虛)7대 뒤를 뒤이었다. 나이 72세에 병으로 죽었다

皈寂三日 周維禪光亙天 灵骨二枚 形具五色 一安長安 一安雲興寺

선사가 입적한 지 3일 뒤에 선광(禪光)이 주위를 두르며 하늘에까지 닿았고, 사리 2매가 다섯 가지 색을 갖추고 있었다. 하나는 장안사(長安寺)에 안치하고, 또 하나는 운흥사(雲興寺)에안치하였다.

世稀有 故樹塔焉 □□ 哲海平順 平學性玉 最屹有侃

이는 세상에 드문 일이므로 탑을 세워둔다. 철해 평순, 평학 성옥, 최흘 유간.

(乾隆十九年)甲戌四月日立 都監通政眞札

건륭19년 갑술년(1754) 4월에 세우다. 도감 통정 진찰

道光二十四年甲辰二月日 改立 定林

도광24년 갑진년(1844) 2월 다시 세우다. 정림

禪敎兩宗月照堂大禪師之塔碑
師諱克存 俗姓張氏 車成人也 幼從粹寬定師落髮 長隨香坡 粗味敎亻又 後隨靑霄 更參禪旨 老而彌傳來祖焰淸虛七代 年臨稀二卒恙 皈寂三日 周維禪光亙天 灵骨二枚 形具五色 一安長安 一安雲興寺 世稀有 故樹塔焉 □□ 哲海平順 平學性玉 最屹有侃 (乾隆十九年)甲戌四月日立 都監通政眞札 道光二十四年甲辰二月日 改立 定林

청룡등(靑龍嶝) 절단에 얽힌 전설

청룡등(靑龍嶝) 대한 전설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혜통국사와 독룡 관련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스님들 이야기다혜통국사(惠通國師)와 독룡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신라 효소왕 때 기장산(機張山=달음산)에 숨어 있던 독룡이 곰으로 화신하여 주민들에게 큰 해를 입히고 있었다. 당시 혜통국사(惠通國師)서는 친히 기장산의 독룡을 퇴치하려고 기장현에 왔었다. 독룡은 동해용왕에게 빌고서 이곳 청룡등에 숨어 있었다혜통국사께서는 독룡이 청룡등에 숨어있는 것을 알고 밀단법(密壇法)으로서 독룡을 설유하였다. 그러면서 독룡이 다치지 않고 도망칠 수 있도록 청룡등의 기슭을 헐어주었다. 그러나 독룡은 황금 송아지로 변신하여 또 도망하였다. 그리고 다시 기장산 바위굴에 곰으로 화신하여 숨어 있는것을 찾아 곰에게 불살계의 자비설법으로 단속하였다.

그때 혜통국사께서 청룡등의 기슭을 헐어놓게 되자 두 갈래 쌍계는 한 갈래 계곡수로 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쌍계사를 장안사라고 고쳤고장안사는 독룡의 피해를 벗어나고 동해용왕의 가호를 받아 번성하고 있다고 한다.

원효 이야기 숲 내 산책길

다른 하나인 스님들 이야기다

장안사는 신라시대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는데, 초기에는 쌍계사라 하다가 신라 애장왕께서 다녀간(809) 후부터 장안사라 개칭되었다그때 이후부터 장안사는 찾아드는 방문객은 물론 치성 드리고 재 올리는 청탁이 날로 늘어나 매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따라서 식당을 담당하는 부중 취사 전담 말석 스님들은 너무나 바빠 허리 한 번 펼 사이도 없이 종일 식사 뒷바라지에 시달려야 했다. 피곤이 쌓여 몸은 매일 지쳐 있었고 밥 지을 땔나무도 산에서 채취해 와야 했다.

밥 짓고 반찬 만들고, 그릇 씻고, 그야말로 한시 반시도 쉴 틈이 없으니 몸은 파김치가 되어 손가락 하나도 꼼짝하기가 싫을 지경이었다. 짜증이 절로 나왔다.

이놈의 절이 언제쯤이나 망할꼬?”

탄식조로 나오는 넋두리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한 과객이 늦게야 찾아들어 그들과 함께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부중들의 넋두리를 듣던 과객이 말했다.

절을 망하게 할 방책이 한 가지 있기는 한데, 그대들이 과연 그 일을 해 낼 수 있을지?”

은근히 부중들을 충동질하였다. 그러나 부중들은 귀가 번쩍 띄었다. 그들은 정색을 하고 다그쳐 물었다.

정말로 방책이 있기나 합니까?” 힘없던 눈망울들이 번쩍 빛이 났다.

어서 좀 일러 주십시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소.”

부중들의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제야 과객이 방책을 일러주었다.

그것은 바로 절 앞을 감싸고 흐르는 청룡골 개천 물 때문이다. 청룡등(靑龍嶝) 끝자락 잘록한 부분을 절단하여 똑바로 직선으로 흐르게 하라. 그러면 절은 자연적으로 쇠퇴할 것이라는 말이었다청룡등 잘록한 부분이 비록 가늘기는 하나 장비라고는 괭이와 삽밖에 없는 그들로서는 여간 거창한 공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부중들로서는 워낙 시달려왔기에 그런 저런 것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당장 그 다음날 밤부터 일에 착수하여 교대로 밤을 새워가며 작업을 진행시켰다. 기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 달 밝은 날 밤 공사가 거의 완공단계에 이르렀을 때였다. 절단 부위에서 시뻘건 피가 터져 나오더니 이어서 황금송아지가 뛰어나와 슬픈 울음을 세 번 울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그런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서였다. 절로 찾아드는 손님이 하나 둘씩 줄어들더니 마침내 손님의 발걸음이 완전히 끊어지고, 절은 망해버렸다는 것이다.

두 이야기의 결과는 서로 상반된 내용이다. 이 대목에서 청룡등(靑龍嶝)의 존재와 위치가 궁금하다.

신라 불교 사상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승려인 원효(元曉)

원효(元曉, 617~686)는 성은 설씨(薛氏)이며, 아명은 서당(誓幢신당(新幢). 경상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신라의 불교 사상을 대표하는 사상가이다. 서로 다른 견해에 내재된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차원 높은 통섭(通攝)의 원리를 추구한 화쟁사상(和諍思想)은 불교뿐만 아니라 한국 철학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당나라 유학을 포기한 뒤 당시의 선진적인 불교 사상을 섭렵하여 화쟁의 논리로 체계화하였다.

원효(元曉)]에게 경주가 자신의 역량을 펼친 곳이라면, 젊은 원효의 주요 활동지 가운데 하나가 울산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보이는 낭지화상(郞智和尙)에게 불법을 배우는 장면이나 지통(智通)과 교유하며 수행한 곳이 울산의 반고사(槃皐寺)와 영축산 일대이다. 원효는 울주군 두동면 대곡리에 있던 반고사에서 지내면서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초장관문(初章觀文)을 저술한 뒤 울주 영취산에서 수행하던 낭지 화상에게 보내 비평을 부탁하였다.

남긴 저서는 약 80200권으로 알려져 있다. 그 가운데 완본으로 현존하는 저서는 대혜도경종요(大慧度經宗要), 법화종요(法華宗要), 열반경종요(涅槃經宗要), 미륵상생경종요(彌勒上生經宗要), 무량수경종요(無量壽經宗要),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대승기신론별기(大乘起信論別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이장의(二障義),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13부이다. 잔본(殘本)으로 현존하는 저서는 화엄경소(華巖經疏), 본업경소(本業經疏), 범망경보살계본사기(梵網經菩薩戒本私記), 판비량론(判比量論), 중변분별론소(中邊分別論疏),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6부와 해심밀경소서(解深密經疏序), 미타증성게(彌陀證性偈)등 총 20여 종이다.

불광산(660m)은 대동여지도(1861)에 기장현 장안의 주산으로 표기돼 있고, 조선 후기에 지어진 '차성가'에도 불광산 솟았으니 사문법계 없을 손가(이하 생략)라고 이곳의 경관을 노래하고 있다. 불광산의 다른 이름은 팔기산으로 '봉우리 8개로 이루어진 산'이란 뜻이다.

차성가(車城歌)는 기장의 명소·마을 등 140여 곳의 아름다움을 풍수지리에 맞춰 호방하게 노래한 기행가사다. 창작 연대는 1800년대 중반, 작자는 미상이다. 차성은 고려시대부터 불린 기장의 옛 이름. 차성, 즉 수레(車)와 성(城)은 나라의 해안 변경 군사상의 요충지를 암시하고 있다.

삼각산(425m)는 장안사 서쪽에 있는 산으로 전형적인 노년산지로 산봉우리는 왕릉처럼 둥그스레하나 산기슭은 가파른 편이다. 삼각산이란 삿갓모양의 3개의 봉우리가 동서로 나란히 솟아 있는데서 비롯되며, 기우제를 지내던 산이라고 한다. , 이 삼각산을 삼신산으로 삼아 인근마을 사람들은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렸고 그러면 꼭 단비가 내려 해갈이 되었다고 한다.

박천(朴川)은 삼각산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천으로 박천(朴川)은 밝내 로서 예부터 신선한 곳으로 인식해왔다. 옛날 이 삼각산 아래 박천물에서 삼각산의 산정으로 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숭배하는 제사를 올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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