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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은 경주분지의 남쪽에 위치하고 신라시대 불교유적의 보고(寶庫)이자 영산(靈山)이다. 7세기 초를 시작으로 신라가 국운을 다하는 10세기 초엽까지 끊임없이 사원이 건립되었고 고려시대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점차 하나둘씩 쇠락의 길을 걸어 왔다. 현재 불상 118구, 탑 96기, 절터 147곳이 남아 있고 최대 절터는 용장사지이다. 신라시대 220개 사찰 중 약 70%가 남산에 있었다.

봉화골 칠불암 가는 길에 진달래꽃들이 산행인들을 맞이하고 있다.

남산은 해발 494m로 금오봉(468m)과 고위봉(494m)의 두 봉우리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남북길이가 8km, 동서 폭은 4km이고 동남산은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지형이고 서남산은 경사가 급한 형태이다. 또한 남산은 전체가 바위로 이루어진 악산으로 35개 내외의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칠불암(七佛庵)은 남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고위봉 동쪽 봉화골 기슭에 자리 잡고 있고 동남산 남쪽 끝자락에 위치하여 동쪽으로 터진 골짜기라서 계곡이 깊은 곳이다. 통일전(統一殿)에서 출발하면 약 3.5㎞로 1시간가량 소요된다.

절 이름을 칠불암이라 부르는 것은 1930년대 이후에 이곳에 암자를 새로 짓고 나서부터다. 이곳에   8세기 초, 통일 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7구의 마애불로 남아 있어 칠불암이라 했다 한다. 통일신라시대 당시 절 이름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실전(失傳)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이곳에서 출토된 기와에 사□사(四□寺)라는 명문이 있었다 하니 혹시 사불사(四佛寺)는 아니었는지 추정할 뿐이다.

칠불암 초입에서 만나는 시누대와 오솔길

칠불암(七佛庵)의 마애불상군은 남산에 있는 통일신라의 마애불상 가운데 가장 연대가 빠르고 장대한 규모 그리고 석경(石經)의 파편(破片) 존재와 화려한 꽃무늬로 장식된 막새기와 조각들이 출토되고 있음으로 미루어 국가적 차원에서 세운 큰 가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석경(石經)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등 불교의 경전을 화강암에다 새긴 것으로, 창림사지(昌林寺址)에서도 발견되었고 주로 불전 내부의 벽체를 장엄하게 위해 사용한다.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각황전(覺皇殿)에서 장식 된 석경을 볼 수 있으며 이곳 칠불암이 석경 사용의 기원이 된 곳이다.

칠불암의 석경 파편

 

칠불암 초입 계단 왼쪽에 있는 약수터는 경주지역 향토사학자들에 의하면 『三國遺事』, 「紀異」第一, 〈書出池〉條의 기록으로 미루어, 488년 정월 15일에 炤知王이 행차하고자 하였던 天泉亭의 ‘天泉’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三國遺事』, 「紀異」第一, 〈書出池〉條 기록의 488년 정월 15일 炤知王이 행차하고자 하였던 天泉亭의 天泉으로추정하고 있는 칠불암 약수터

칠불암 터는 동향하고 있는데 서쪽으로는 하늘에 닿을 듯이 거대한 암봉(巖峰)을 배경으로 하고, 경사가 가파르고 험한 동쪽과 북쪽의 능선상은 절 터를 마련하기 위해 석축을 쌓았다. 석축은 북쪽에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 있으며, 15∼16단으로 높이는 8m이다. 동쪽은 잡목과 무너진 흙더미로 덮여 있어 정확한 절 규모를 확인하기 어렵다. 남북 16.40m, 동서 13m의 대지(臺地) 위에 서쪽에는 3단으로 층계를 이룬 2m 높이의 석축을 쌓아 불전(佛殿)을 마련하였다. 불전의 서쪽 끝에는 비교적 규모가 큰 반원형(半圓形) 바위가 놓여 있는데 동향(東向)한 부분에 삼존불이 부조(浮彫)되어 있고 삼존불 바위면에서 동쪽으로 석주(石柱)가 서 있는데 각 면마다 여래상을 새긴 사방불(四方佛)이 있다.

특히 삼존불이 조각되어 있는 바위의 배면(背面)과 측면(側面)에는 목조건축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방형공(方形孔)이 있는데 배면의 경우 윗부분에는 7개, 아래 부분에는 4개 아래위로 각 2개소씩 있고 측면은 남쪽에 4개, 북쪽에는 1개가 있다. 그리고 사방불에도 위에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북쪽과 남쪽 두 곳이 있어 삼존불과 사방불이 놓여 있는 불전은 목조로 된 건물 안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불전 남쪽이 출입구로 생각된다. 따라서 삼존불과 사방불이 있는 불전은 벽면을 석경으로 구축하고 지붕은 가구(架構)한 반 석굴(半石窟) 형식(形式)으로 추정된다.
인도 굽타 양식의 마애삼존불
마애삼존불 중 본존불은 석가불상으로 추정되고 높이 5m, 너비 8m로 된 반원형 바위 면에 동향(東向)하여 높은 부조(浮彫)로 새겨져 있으며, 두 겹으로 핀 넓은 연꽃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있다. 우견편단(右肩編袒)에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맺고 있는데, 항마촉지인의 경우 통일신라기인 8세기 초 새로이 유행하기 시작하는 수인이다. 불두(佛頭)는 소발(素髮)의 머리위에 육계(肉髻)가 끈으로 동여맨 듯이 나타나 있으며, 코는 파손된 것을 시멘트로 보수하였다.

삼존불과 사방불 중 남면의 보생불상(寶生佛像)

본존불의 왼쪽 협시보살은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으로, 본존불 대좌의 복련대(覆蓮帶) 꽃잎과 같은 모양의 연화대좌 위에 서서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집어 가슴 앞에 올려들고 오른손은 아래로 떨어뜨린 채 정병(淨甁)을 들고 있다. 보살은 몸을 약간 틀고 허리를 굽힌 삼곡(三曲)자세이며 얼굴과 시선이 본존상을 향하고 있다. 머리는 삼면두식(三面頭飾)으로 장식을 하고, 왼쪽 어개에서 비스듬히 내려온 승기지(僧祗支)는 가슴을 감싸고 있으며 남은 자락이 아래로 물결을 그리며 흘러 내렸다. 두 어깨에는 보발(寶髮)이 덮여 있고 목에는 영락(瓔珞)이 걸려 있다. 허리를 감싸고 있는 치마 주름 위를 과판(銙板)이 달린 띠로써 동여매고, 흘러내린 치마 자락은 발등을 덮고 양 옆으로 퍼지면서 가느다랗게 주름잡아 처리하였다. 넓은 천의(天衣)는 어깨에 걸쳐 두 팔을 감싸며 양 옆으로 흘러 내렸고 팔목에는 팔찌가 장식되었다. 머리 뒤에는 보주형(寶珠形) 두광이 새겨져 있다.

삼존불 중 본존불 석가불상과 오른쪽 협시보살 다라보살상(多羅菩薩像), 사방불 중 북면의 세간왕불상(世間王佛像)과 남면의 보생불상(寶生佛像)

오른쪽 협시보살은 다라보살상(多羅菩薩像)으로 추정되며 복련꽃 대좌 위에 서서 오른손에는 보상화(寶相華)를 들어 가슴 앞에 올리고 왼손은 아래로 떨어뜨린 채 천의자락을 잡고 있다. 얼굴은 본존상 방향으로 반쯤 돌리고 있으며, 머리에는 삼면두식(三面頭飾)으로 된 관을 썼고 두 어깨는 보발로 덮여 있다. 목에는 영락을 하고 있으며, 승기지(僧祗支)가 비스듬히 가슴을 감싸고 왼쪽 어깨에 걸쳐 있다. 허리를 감싸고 있는 치마 주름 위를 끈으로 매었다. 어개에 걸친 천의가 두 팔을 감싸고 아래로 흘러내린 것과 발등을 덮고 있는 옷자락이 양 옆으로 퍼지면서 주름잡고 있는 모습 그리고 팔목에 간단한 팔찌가 끼어져 있는 것과 머리 뒤에 무늬 없는 보주형의 두광이 배치된 것 등은 오른쪽 보살상과 같다.
본존불과 보살상들은 두광(頭光)만 보주형(寶珠形)으로 각기 처리하였으며, 신광(身光)의 경우는 달리 표현하지 않고 바위 면을 그대로 이용한 것처럼 보인다. 칠불암 마애불은 우리나라 촉지인(觸地印) 여래좌상(如來坐像)의 시원형식(始原形式)으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고 촉지인의 수인과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걸친 대의의 착의법(着衣法), 그리고 가부좌한 양다리 사이로 부챗살 모양으로 삐쳐 나온 옷자락의 형식 등은 이후의 석굴암 본존불에서 완전한 정형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양식적 특징은 탄력성 넘치는 육체미를 통한 생명력의 구현으로 한 조형미는 인도 굽타양식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점이다. 약간 모나면서 딱 벌어진 어깨와 잘록한 허리로 인해 신체의 건장함이 두드러져 보이는데, 위엄 어린 표정의 네모진 얼굴은 약간 이국적이며 생동감 넘치는 신체 구조이다. 가부좌한 양다리 사이로 부챗살 모양으로 구불구불하게 삐쳐 나온 옷자락의 모습이나 연꽃 대좌의 연꽃잎이 두 겹으로 맞붙은 형태도 인도의 조각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이다.
협시보살 역시 양발을 옆으로 벌린 어정쩡한 자세에, 조각이 다소 투박하지만 가슴에 대각선 방향으로 걸친 천의(天衣)의 한 쪽 끝이 뒤로 돌려졌다가 다시 앞으로 늘어진 형태는 인도적인 요소이다.
사방을 평정하여 삼한통일로 천하의 주인임을 표방한 사방불(四方佛)
사방불(四方佛) 가운데 동면(東面) 약사불상(藥師佛像)은 밑으로 쳐진 복련과 앙련의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다. 왼손은 약 그릇을 들어 무릎 위에 놓고 오른 손은 엄지와 둘째 손가락을 집어 가슴에 올려 설법인(說法印)을 표시하고 있다. 소발(素髮)의 머리 위에 육계가 솟아 있다. 불의(佛衣) 깃 사이로 길게 드러나 보이는 앞가슴에 비스듬히 승각기가 가려져 있고 옷끈 매듭이 부챗살 모양으로 드러나 보인다. 무릎을 덮고 흘러내린 옷자락이 대좌의 윗부분을 덮고 있다. 두광은 무늬 없는 보주형으로 삼존불과 같이 처리하였다.

삼존불 중 본존불 석가불상과 왼쪽 협시보살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 사방불 중 동면의 약사불상 ( 藥師佛像 )과 남면의 보생불상(寶生佛像)

서면(西面)의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은 불신(佛身)만 부조(浮彫)로 조각하였으나 연화대좌는 선각(線刻)으로 표현되었다.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오른손은 엄지와 둘째 손가락을 집어 가슴 앞에 올리고, 왼손은 엄지와 셋째․넷째․다섯째 손가락을 굽히고 둘째손가락만 펴서 무릎 밑으로 내린 설법인상(說法印像)을 하고 있다. 불의(佛衣) 깃 사이로 드러난 앞가슴에 승각기가 보이며 동여맨 옷끈은 저고리 옷고름처럼 매듭을 지었다. 왼쪽 팔에 걸쳐서 흘러내린 옷자락은 왼쪽 무릎 위에 얹혀 있는 오른발 끝을 덮고 있어 발은 일부만 드러나 있다. 머리 뒤의 두광은 윗부분이 떨어져 나가 원형처럼 보인다.
남면(南面)의 보생불상(寶生佛像)은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두 손은 서면의 불상과 같이 설법인을 표시하고 있다. 결가부좌를 하고 앉은 발은 흘러내린 옷자락 속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다. 소발(素髮)의 머리 위에는 육계가 단정히 솟아 있다. 두광은 무늬가 없는 보주형으로 되어 있다.

삼존불과 사방불 중 남면의 보생불상(寶生佛像)

북면의 세간왕불상(世間王佛像)은 서쪽의 아래 부분이 결실된 까닭에 가장 좁은 면이다. 따라서 불상도 동쪽 윗면에 조그맣게 나타나 있다. 복련의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설법인하는 모습과 무늬가 없는 보주형 두광으로 장엄된 것 등은 다른 상들과 같은 형태이다. 그러나 다른 불상들과는 달리 앞가슴의 승각기 아래로 보이는 옷근은 매듭을 지었고 두 무릎 위에는 두 발이 나타나 있다. 무릎 아래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역시 주름이 잡혀서 연화대좌 위를 덮고 있다.
입방체형(立方體形)의 사방불은 사방을 평정하여 삼한통일로 통일신라를 이룩한 것을 천하에 표방한 것으로 이후 성행하는 석탑 사방불의 선구작으로, 네 면의 여래상은 수인과 앉은 자세, 연화좌의 형태가 서로 유사하다.

구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암 마애관음보살
칠불암 불전(佛殿) 오른쪽으로 난 소로를 따라 암반 사이로 약 150m 정도 오르면 봉화대봉(烽火臺峰, 476m) 정상과 신선암 마애관음보살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난 소로를 따라 암반으로 형성된 절벽위로 가다 바위를 돌면 마애관음보살을 만날 수 있다. 절벽 아래로 보이는 칠불암이 마치 손에 닿을 듯 가까이 느껴지는데 약 40m 정도의 거리이다. 통일신라 당시에는 부속 암자였을 것으로는 짐작되지만, 근래까지 이곳에 신선암(神仙庵)이라는 암자가 있었으므로 신선암 마애관음보살상으로 부르고 있다.

신선암 마애관음보살상 만나러 가는 길에서 만난 풍광

절벽 위 중앙에 거대한 바위가 동쪽과 남쪽으로 전망 있게 위치하며, 그 바위 동쪽 암반에 난간을 설치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는 원형의 석공(石孔) 6개소가 있다. 중앙에 놓인 바위의 남면에는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을 부조(浮彫)로 나타내었다. 보살상 전면의 공간은 2∼3m 정도로 협소하며 그 앞은 절벽을 이루고 있다. 보살상이 조각된 바위 면은 비가와도 불상이 젖지 않도록 윗부분이 조금 앞으로 나오게 경사를 지어 깎아내고 그 아래로 보주형 광배를 감실(龕室) 모양으로 조성했다. 아울러 보살상 위에는 가로 1.54m, 세로 10.5㎝, 깊이 6㎝의 홈이 마련되어 있는데 창양 또는 바위 아래로 흘러내리는 빗물이 보살상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관음보살상은 옷자락으로 덮여 있는 의자 위에 걸터앉아 한 손으로 설법인을 표시하며 깊은 생각에 잠긴 채 구름을 타고 속계(俗界)로 내려오는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크게 들어 올리고 둘레는 삼면두식(三面頭飾)으로 장식을 하였다. 장식을 동여맨 끈은 머리 좌우에서 매듭을 짓고, 그 자락이 두 귀의 언저리로 흘러내려 두 어깨 위에 드리워져 있다. 두 귀에는 귀걸이가 달려 있고 목에는 구슬목걸이가 걸려 있다. 두 어깨 위에는 연꽃송이로 장식된 수발(垂髮)이 덮여 있는데 수발에 연꽃을 장식한 것은 다른 불상에는 볼 수 없는 경우이다.

오른손에는 보상화(寶相華) 가지를 들었고 왼손에는 설법인을 표시하여 왼쪽 가슴에 들었으며, 중지와 넷째 손가락을 굽혀 엄지와 마주잡고 둘째와 셋째 손가락을 펴서 손바닥을 앞으로 향하여 들었다. 손목에는 팔찌가 끼여 있으며 손과 손 사이로 승각기 자락이 보인다. 허리에는 치마끈이 매어지고 그 자락의 의자 위로 흘렀는데 왼쪽 발은 그 자락 위에 편안히 얹어 놓고 오른발은 의자 아래로 내려 걸터앉아 있는 유희좌(遊戱坐)의 자세로서 구름 속에서 연화대좌에 앉아 있다. 뒤에는 신광과 두광을 둥글게 선각으로 나타내었고 얇은 감실은 그대로 주형(舟形) 광배(光背)의 형상을 하고 있다. 특히유희좌의 경우는 통일신라시대의 불보살상으로는 이 보살상이 유일하다.

봉화골은 동남산의 여러 계곡 가운데 가장 깊은 골짜기로 계곡의 명칭은 조선시대 또는 그 이전 시기부터 칠불암 동남쪽의 봉화대봉(烽火臺峰, 476m)에 있던 봉화대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봉화대는 남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고위산(高位山, 490m)과 인접한 까닭에 ‘고위산 봉수’로 불렸다.
1940(소화 15) 경주 남산 칠불암과 신선암의 모습
일제 강점기 때 경주 남산의 불교유적을 본 일본인 小場恒吉 氏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 탑에 있어서도 기원을 대륙에서 받아서 이것을 표현하고 장식할 때는 오직 신라 독특의 취향을 표시하였기에 수에서 받아 수를 잊었고 당을 본떠서 당을 떠난 것에 신라의 불교예술은 어디까지나 신라문화 소산으로서의 생명을 볼 수 있다. 신라탑의 형식은 오늘 중국에서 볼 수 없고 특히 방형층탑의 균세의 미는 중국의 대탑에서 찾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는 신라의 층탑은 당식의 직사가 아니며 신라의 예술적 두뇌에서 창안된 것이라 하겠고 저 조상에서 본 바와 같은 원인에 의해 남북조 혹은 수당의 불교예술도 한토에 들어서서는 한인의 것이 되어서 신라예술로 화한 사실을 증명 할 수 있으니 유쾌하다. 」

칠불암 삼존불과 사방불

그리고 1929년 조선총독부가 남산일대에 사방공사를 시행하려 할 때, 일본인 교수 黑板勝美는 공사를 최소 5년 연기를 요청하면서, 경주남산 유적의 우수성을 조선총독부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 나는 반도 유수의 고적을 보존할 수 있어 조선통치 상 문화적 시설에 광채를 더함에 多大할 것을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 」
「생각건대 경주는 오늘 홀로 조선의 경주가 아니라 일본의 경주이며 또 세계에 알려진 명승이 되었다. 年年雲集하는 내외인의 증가는 이 같은 사실을 여실히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경주를 위해 특히 남산의 장래를 우려하는 바이다」라 했다.

신선암 매애관음보살상

경주 남산은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문화적 우수성을 일본 지식인도 간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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