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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군 불광산(佛光山, 659m)에 위치한 척판암은 673년(문무왕 13년)에 원효대사가 장안사(長安寺)와 함께 창건하였다. 척반암에 가는 방법은 장안사 주차장에서 산길을 도보로 가면 20 ~ 30분 소요되고 포장 된 도로로 자동차로 가면 5분이 걸린다. 백련암에서 도보로 가는 산길을 이용하면 15분이 소요된다. 산길은 소로를 따라 걸어가는 나름의 맛이 있고 자동차를 이용하면 크고 장대한 수림 속을 감상할 수가 있다.

산길을 도보로 척판암으로 가는 경우 초입의 안내판
산길로 가면 맞이하는 척판암 천왕문

척판암(擲板庵)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원효 대사가 이곳에서 수행 중 중국 종남산(終南山)의 운제사(雲際寺) 대웅전에서 예불을 하고 있는 1천여 명의 승려들에게 위급한 사태를 알리고자 소반에 ‘해동원효척반구중(海東元曉擲盤救衆)’이라는 여덟 자를 적어서 운제사(雲際寺) 대웅전까지 하늘 높이 힘껏 던진 곳이라 하여 척판암(擲板庵)이라고 하였다. 위급한 사태라는 것은 종남산(終南山)의 운제사(雲際寺) 대웅전 대들보가 썩어서 막 무너지려고 하는 것을 원효가 보고 소반을 던졌고 던져진 소반은 운제사의 대웅전 앞뜰 위에서 윙윙거리며 공중에 맴돌았다. 막 예불을 마친 승려들은 이 신기한 광경을 구경하려고 모두가 재빨리 대웅전 앞뜰로 나왔다. 이때 굉음과 함께 대웅전이 폭삭 무너지고 공중을 맴돌던 소반도 땅에 떨어졌다. 깜짝 놀란 승려들은 땅에 떨어진 소반에 적힌 글자를 보고는 자기들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 신라의 원효임을 알게 되었다.

1천여 명의 승려들은 이로 인하여 길을 떠나 양산군 천성산 석굴에 있던 원효를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원효의 오묘한 법문과 가르침을 받고서 모두 성인(聖人)이 되었으며, 모두가 끝내 이곳에서 열반을 하였는데 열반한 육신은 그대로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 산은 1천 명의 성인들이 나왔다는 뜻으로 천성산(千聖山)이라 하였고 천성산 바위들은 그 성인들의 변신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척판암은 창건 이후의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1938년에 경허(擎虛)가 중수한 후 장안사의 부속 암자로 있다가 최근에 독립하였다. 1972년 경운이 3층 석탑을 세우고 부처 사리 5과를 봉안하였다. 천왕문, 척판암, 용왕당, 극락전, 산신각 등으로 구성 되어 있고 암벽 밑에 위치해 경내가 좁은 편이다.  ‘척판암(擲板庵)’이라는 현판이 있는 불전에는 조선 시대에 조성한 아미타여래 좌상과 근래 조성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좌우에 자리하고 있다. 극락전과 용왕전은 2010년 건립하였고 독성각 또한 최근에 건립하였다.

척판암(擲板庵) 현판이 있는 불전에는 조선 시대에 조성한 아미타여래 좌상과 근래 조성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좌우에 자리하고 있다.

온화한 인상에 미소를 짓고 있는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척판암 석조여래좌상은 조선 후기에 제작된 석불로 높이가 37.5㎝로 당시 각 지역마다 작은 크기로 제작하여 소규모의 불전에 봉안하였다. 척판암 석조여래좌상은 불상 바닥 면에 복장공(腹藏孔)이 있고 범어가 적힌 한지로 막았으며 복장물(腹藏物)은 도난을 당해 없고 1996년에 개금 불사를 하면서 복장물을 새로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2008년 4월 2일에 부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41호로 지정되었다.

머리의 형태는 육계(肉髻)와 머리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으며, 검은 모발을 칠하지 않은 채 도금한 색깔 그대로 정상 계주(頂上髻珠)를 표현하였다. 머리 중앙에는 흰색과 홍색의 원호를 넣은 중앙 계주(中央髻珠)를 표현하였다. 양손은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무릎 위에 올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크고 어깨와 무릎이 좁으며, 고개가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
통견(通肩)의 대의(大衣)를 입고 있으며, 승각기(僧脚崎)는 표현하지 않고 가슴 아래에서 두 줄의 평행 띠로 하의인 군의(裙衣)를 묶고 있다. 전체적으로 신체의 비율이 맞지 않아 안정적인 형태를 이루지 못하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미소를 짓고 있는 상호(相好)는 비교적 온화한 인상을 준다.
신체에 비해 비교적 큰 방형의 얼굴, 대의를 입고 있는 모습과 배 부분에서 두 줄의 평행 띠로 군의를 묶은 모습 등에서 전형적인 조선 후기 불상 조각에서 나타나는 도식적이고 딱딱한 옷 주름 표현을 볼 수 있다. 또한 석조 재질에서 볼 수 있는 양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에 얹은 모습, 발과 옷 주름 표현이 두껍고 세밀하게 조각되지 못한 점 등에서 조각적인 한계를 보이고 있다.

용왕전
1972년 경운이 3층 석탑을 세우고 부처 사리 5과를 봉안하였다.
멀리 보이는 대운산
극락전
극락전 앞 극락교
자동차를 이용하여 5분이면 도착하는 주차장에서 보이는 산신각 안내판
큰 바위 중간에 조성한 산신각

원효대사(617~686년)는 한국불교사에 길이 남을 학자이자 사상가이다. 파계와 이적을 보인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고승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성은 설씨이고 원효는 법명이다. 현존하는 그의 저술에는 20부 22권이 있으며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100여부 240여권이나 된다. 특히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 하여 즐겨 인용하였고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은 고승이 아니고서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대작이다.
또한 당시 왕실 중심의 귀족화된 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꾸는데 크게 공헌하였고 종파주의적 방향으로 달리던 불교이론을 고차원적 입장에서 회통(會通)시키려 하였다. 그것을 오늘날 화쟁(和諍)사상이라 부른다. 이것은 인간의 심식(心識)을 깊이 통찰하여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 곧 귀일심원(貴一心源)을 궁극의 목표로 설정하고 육바라밀의 실천을 강조하는 일심(一心)사상 그리고 일체의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는 뜻의 무애(無㝵)사상과 함께 원효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자동차로 포장 된 도로로 척판암까지 도착하려면 5분이 걸린다.
백연암 앞에서 척판암 가는 안내판
자동차로 척판암 가는 중에 만나는 백련암 입구와 낮잠자는 백구 모습

 

백련암 지나서 만나는 안내판

불광산(佛光山)은 팔기산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8개나 되는 봉우리를 올라야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불광산의 명칭 유래에서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불광산은 북동쪽으로 대운산(大雲山), 남동쪽으로는 삼각산(三角山) 줄기와 이어져 장안읍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대운산과 이어지는 북동쪽 기슭에서는 대운천(大雲川)이 북동쪽으로 흐르고, 삼각산과 이어지는 남쪽 기슭에서는 장안천(長安川)이 발원해 동쪽으로 흘러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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