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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 앵림산(鶯林山, 491m) 기슭에 위치한 안적사(安寂寺)는 신라 시대인 661(문무왕 원년) 원효(元曉)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초창에 관한 문헌 자료는 전하지 않으나 해운대구 반송동 운봉 부락 뒤편에 있었던 운봉사(雲峰寺)가 연원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운봉사는 석탑 옥개석을 비롯해서 기와·토기·청자 파편 등이 발견되어 신라 말 고려 초의 사찰로 추정된다. 운봉사가 임진왜란으로 폐사되자 현재 지역으로 옮겨와 안적사가 되었다고 한다.

주차장에서 계단따라 올라가면 맞이하는 원통문

1592(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이후 범어사(梵魚寺) 묘전 화상(妙全和尙)이 중건하였다. 1873년에는 대웅전, 수선실 등을 경허(慶虛), 해령(海嶺)이 중수하였으나 광복 후 거의 폐사되고 소실되었다. 1973년부터 남곡덕명(南谷德明)이 대웅전, 삼성각, 수선실, 요사채, 종무소 등을 다시 지어 지금의 가람 배치를 갖추었다.

일주문

현재 안적사 경내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삼성각, 설현당, 보림원 등 10동의 건물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로 1990년 무렵 지어졌으며, 아미타여래 좌상과 관음보살·대세지보살이 모셔져 있다그리고 대웅전 에는 아미타여래가 서방 극락세계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그린 아미타극락회상도(阿彌陀極樂會上圖)가 있는데 1874년에 제작 된 탱화로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0호이다. 보통 극락전의 본존불인 아미타여래의 후불탱화나 감로 탱화 등의 상단탱화로 주로 사용되고 있다.

천왕문
천왕문에서 바라 본 일주문
천왕문 겸 반야문 사방벽면에는 12지상이 벽화로 꾸며져있다.
공포가 아름다운 종각

특징은 화면 상단에 등장하는 나한의 묘사에서 두드러지는데, 아미타 삼존을 비롯한 문수·보현 동자의 표현이 조선 후기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면, 나한상 6위의 얼굴 표현은 주색(朱色) 바림의 음영을 통해 얼굴의 굴곡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어, 음영을 부각시켜 인물의 개성을 표현하는 근대 불화의 성격으로 조선 후기 불화에서 근대 불화로 전환되는 과도기적인 변화 단계를 보여주고 있는 자료이다.

또한 중생의 사후 세계를 관장하는 지장보살과 명부(冥府)에서 중생들의 죄질을 심판하는 십대 명왕들, 그리고 그 권속들을 도설하고 있는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가 있었으나 현재 범어사 성보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1919년에 제작된 작품이기는 하나 전통 기법을 가진 고식적인 구도, 독특한 표현 기법,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양, 유려한 선 처리 등 이 시대 작품으로는 보기 드문 아름다운 작품으로 주목받는 문화재이다.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9호이다.

삼층탑에 진신사리3과를 봉안하여 여래진신사리보탑이라고 칭함

대웅전 바로 옆에 삼성각에는 칠성탱·산신탱·신중탱과 원효·의상(義湘동산(東山)의 진영이 있다. 대웅전 왼편에 요사인 설현당(說玄堂), 오른편에 보림원(寶林院)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 뒤편으로 삼소굴(三笑窟)이라는  선원이 자리하고 있다. 최근에 조성한 3층 석탑도 경내에 있다.

안적사 전경

안적사는 비록 건축물은 최근에 지어졌지만 신라 시대 승려 원효와 의상이 젊었을 때 화엄경을 깊이 연구하였다고 전해지는 사찰로 신심이 깊은 신도와 수선납자가 꾸준히 이 절을 찾고 있다. 현재 범어사의 수사찰(首寺刹)이고 신라시대의 맥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앵림산(鶯林山)은 산속에 꾀꼬리 떼들이 모였다 하여 붙은 이름으로 장산의 북쪽 연봉으로, 북서쪽 골짜기에서는 내동천이 발원해 내동 마을의 내리교를 가로질러 흘러내린다. 앵림산 주변에는 억새 군락지가 형성되어 있고 해송이 주를 이루며, 사방으로 너덜겅이 있다. 그리고 2시간에서 7~8시간에 이르는 다양한 산행 코스와 시원하고 조용한 계곡도 있어 등산객과 여름철 가족 피서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앵림산(鶯林山)과 원효(元曉)와 의상(義湘)대사의 이야기

원효(元曉)대사와 의상(義湘)대사는 젊었을 때 불교의 경전인 화엄경을 깊이 연구하며 안적사에서 정진하였다. 안적사(安寂寺)가 있는 곳은 동해의 푸른 바다가 아른거리고, 숲이 울창하며, 기후가 따뜻하여 온갖 새가 지저귀고 있는 극락같이 아름다운 곳이다. 더욱이 따뜻한 남쪽 나라에만 있는 꾀꼬리와 극락조가 짝을 지어 지저귀고, 사람들의 팔과 어깨에 앉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곳을 앵림산(鶯林山)이라 했다. 이 극락 같은 곳에서 원효대사는 안적사 자리에 토굴을 만들고, 의상대사는 꾀꼬리 떼가 많이 서식하는 그 아래에 토굴을 만들어 주석하였다. 의상대사는 탁발하지도 않고 선녀가 올리는 공양을 받고 있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이를 자랑하고 싶어 사형으로 모시고 있는 원효대가를 공양에 초대하였다. 그런데 이날 어김없이 공양을 올리던 선녀는 끝내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기다리다 못해 되돌아 간 후에 나타난 선녀에게 의상대사는 무안을 당한 화풀이를 하였다. 선녀는 원효대사가 앉은 곳에 화광이 충전하여 접근할 수 없었다고 변명하였다. 그때 의상스님은 원효스님이 금강 삼매에 들어 신통을 부린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 의상스님은 교만심을 버리게 되어 크게 득도하였다고 한다.

1973년 불사에 크게 기여한 신도의 무덤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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