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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도(目島)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산읍 방도리에 있는 무인도로 모양이 물고기 눈처럼 생겼다고 하여 부르게 되었고 세종실록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에는 동백도로 표기돼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부터 명칭이 춘도(椿島)로 바뀌었는데 청산해야 할 일제잔재이다. 일본에서는 동백나무를 한자로 춘(椿)자를 쓰는데 갑자기 생기는 불행한 일을 춘사(椿事)라고 한다. 식민사관의 일환으로 경주 양북 동해천(東海川)을 대종천(大鐘川)으로 바꾼 것처럼 목도(目島), 동백도(冬柏島)를 춘도(椿島)로 바꾼 것이다.

목도는 면적은 약 15047, 둘레는 440m으로 동해안 섬 중 유일한 상록수림(常綠樹林)으로 동백나무, 후박나무, 사철나무 등 각종 상록수림으로 절경을 이루어서 1962127일에 천연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다. 옛날에는 대나무가 많아서 대섬(竹島)이라고도 불렀고 신라 때에는 대나무를 길렀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주민들이 대나무 화살을 만들어 나라에 바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나무는 점점 사라지고 동백나무·후박나무 등 각종 상록수림이 그 자리를 메웠다.

1970, 80년대 울산 최고의 동백꽃 관광지로 꽃피는 봄이면 붉은 동백꽃을 보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고 45인승짜리 배 두 척이 운항했다. 그러나 점차 섬 생태계가 훼손되자 1992년부터 안식년제를 도입하면서 현재까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언젠가 생태계가 복원되어 개방되기를 손꼽아 기다릴 뿐이다.

목도를 소재로 한 대중가요도 있다. 가수 하춘화(河春花)197345에 부른 목도는 내 고향이다. 1970년대 울산이 농어촌에서 산업 도시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고향이 공장부지로 편입되어 고향을 떠나는 이주민들의 망향과 실향의 정서를 노래로 담고 있다.

 17세기 이곳 방도리(方島里)는 울산도호부 청량면 목도리 목도포구로써 안용복(安龍福)과 박어둔(朴於屯)1693년과 16962회에 걸쳐 독도로 출발한 포구이다. 이들은 독도를 지키기 위해 독도에서 돗토리현까지 건너가 싸웠다. 안용복은 이곳 목도 세거 광주 안씨 출신이다. 박어둔은 충청도 이산현(논산시 노성면) 소론명가 출신으로 증조부는 가선대부(2) 박잉석, 조부는 통정대부(3) 박국생이며 아버지는 정병 박기산이다. 조부 박국생이 1646(인조 24) 3월 그 지방의 유탁(柳擢)과 한양의 권대용(權大用)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을 하여 고향 이산현에서 살수가 없게 되자 울산으로 이사 왔다.

방도리(方島里)는 사방(四方)의 방()과 목도(目島)의 도()를 합성하여 만든 이름이다. 방도리에서 어부와 인어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동백도설화(冬柏島說話)라 하여 용왕의 딸인 인어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어부에 대한 보은담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옛적에 마음씨 착한 청년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다보니 그물에 인어가 들어 있었다. 다른 어부들은 인어를 팔아 돈을 벌 수 있다고 기대에 부풀었지만 이 어부는 인어가 불쌍해 풀어 주자고 하였다. 이 어부는 다른 어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어를 구해 주고 다른 어부들로부터 매를 맞고 쓰러졌다.

어부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부는 용궁에 있었다. 인어는 용왕의 딸이었다. 인어는 자신을 구해 준 어부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용궁으로 데려 온 것이다. 용궁에서 다시 만난 인어는 용왕에게 어부와 인간 세상에 나가 살겠다고 하였고 용왕은 딸을 위해 울산의 온산에 섬을 만들었다. 육지가 가까워지자 갑자기 하는 소리와 함께 물길이 하늘 높이 치솟으며 바다로부터 섬이 솟아올라와 지금 모양의 목도가 되었다. 이후 섬에서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갔다.

 현재 목도는 쌍용정유공장에 둘러싸여 외롭게 홀로 떠 있다. 낚시꾼들이 가끔씩 찾아 와서 외로움을 달래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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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랑(林浪) 해수욕장의 멋은 월호추월(月湖秋月)이라!

임랑해수욕장에서 바라본 월래와 고리원자력발전소

예로부터 호수처럼 맑고 잔잔한 바다에 떠오르는 달을 월호(月湖)라 하고 그 월호에서의 가을 달맞이가 경승(勝景)이라 하였고 병풍처럼 펼쳐진 송림 위에 달이 떠오르면 조각배를 타고 달구경을 하면서 뱃놀이를 즐겼던 곳으로 차성팔경 중 하나가 임랑해수욕장이다. 이러한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옛 문헌에서는 동산(東山) 위에 달이 떴으니 월호(月湖)에 선유(船遊)한다 라고 예찬하였다.

임랑해수욕장은 정관에서 흘러온 좌광천(임랑천)이 유입하여 모래톱을 형성하면서 생긴 해수욕장으로 모래사장 길이가 1km이다. 예전에는 백사장 주변이 노송으로 병풍처럼 푸른 숲을 이루었고 좌광천이 맑아 쏘가리 천렵(川獵)을 했다고 한다. 현재는 정관 신도시로 인하여 수질이 좋지는 않고 송림도 많이 사라졌지만 요즈음 문화에 맞는 볼거리와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임랑교 아래 정관에서 흘러온  좌광천의 모습
임랑해수욕장 방파제 사이를 지나  동해로 유입하는 좌광천
임랑교 상부
임랑교에서 바라 본 좌광천

임랑해수욕장은 울주군 서생면과 경계를 두는 기장군 장안읍에 위치하고 있는 해수욕장으로 여름철이면 피서객이 많이 찾는 해수욕장이다. 특히 최근에는 캠핑 붐으로 인해 사계절 내내 여행객으로 붐비는 곳이다. 또한 부산 갈맷길의 출발점이기에 중년의 부부, 중장년층 단체 관광객 등 트레킹을 찾는 이들과 정관과 임랑 사이에 흐르는 좌광천을 따라 달리는 MTB 및 사이클 동호회 인으로 분주하고 역동적인 해수욕장이다.

청암 박태준 기념관

여행에 여유가 있다면 기업가이자 정치가인 청암 박태준 기념관을 둘러보는 것도 솔솔한 재미가 있다.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의 고향이 임랑이고 생가가 여기에 있다. 임랑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기념관에서 60 ~ 70년대 대한민국의 경제적 상황, 시대모습 그리고 포항제철(포스코) 창립, 성장과정을 엿 볼 수 있다.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의 젊음 때의 모습
기념관 옆에 위치하고 있는 박태준 전 회장의 생가
임랑해수욕장 민박주변의 골목길

그리고 따뜻한 커피 한잔에 파도를 감상하고자 하면 가수 정훈희가 운영하는 카페 Garden Flowers(꽃밭에서)를 찾는 곳도 좋을 듯하다. 카페 이름 "꽃밭에서는" 그녀가 불렸던 노래 제목이다. 최근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애잔한 심금을 울리는 노래 안개”는 정훈희와 송창식이 듀엣으로 불렀던 노래로서 최근 방문객의 발길이 잦다. 사실 정훈희는 70년대를 대표하는 여자가수로 몇 차례 국제음악대회에서 수상을 했다.

가수 정훈희가 운영하는 카페 Garden Flowers(꽃밭에서)

임랑(林浪)의 옛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당시 임계안(林溪岸) 뒷산에 왜적들이 성을 쌓고 이 성을 임성(林城)이라 하였는데 그 후 유(), (), (), (), ()씨 등이 정착하여 이들 다섯 성씨가 본 마을의 숲이 울창하고 물결이 아름답다 하여 수풀 임()자와 물결 랑()자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는 임랑(林浪)의 옛 이름은 임을랑(林乙浪)’이며 임랑으로 바뀐 것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마을에 숲이 우거지고 바다 물결이 아름다워, ‘수풀 림()’ 자와 물결 랑()’ 자를 따서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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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咸安)은 6가야 중 아라가야의 나라이자 생육신 중 한사람인 조려(趙旅, 1420~1489)가 태어난 곳이다. 그리고 이 지역 토착 세거 성씨 중 함안(파산, 巴山) 趙氏가 있는데 조려는 함안 조씨이고 현재 대부분 어계(漁溪) 조려의 후손들이다. 군복IC에서 나와 국도 79번을 따라서 가다가 지방도로 1004번로 진입하여 원북 마을에 다다르면 도로 우측에는 서산서원, 조열 신도비각, 쌍절각 그리고 도로 좌측 청풍대(淸風臺)라는 언덕 옆에 채미정이 있다.  

군북면 원북 마을에 위치한 채미정(採薇亭)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온 후 조려(趙旅)가 여생을 보낸 곳으로 이곳 유림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1693년에 건립하였다. 6.25 전쟁 때 소실되었는데 1954년에 재건하였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八作)지붕 겹처마로 정면 2칸, 측면2칸의 방이 한가운데 있고 나머지는 툇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연못이 있어 당시 조경 구조를 엿 볼 수 있다. 채미정 현판 오른편에 백세, 외편에 청풍이란 현판이 각각 있다.

어계(漁溪) 조려(趙旅)는 자가 주옹(主翁), 호는 어계은자(漁溪隱者),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단종 때 생육신[김시습(金時習), 원호(元昊), 이맹전(李孟專), 조려(趙旅),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 중 한사람으로 계유정난 이후 세조의 왕위찬탈에 격분하여 조정을 등지고 고향에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당시 조려(趙旅)는 1453년(단종1)에 성균관 진사시험에 합격하였다.

채미정( 採薇亭 ) 전경

고향에 온 후 조려(趙旅)는 스스로 어계처사(漁溪處士)라 하고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는데 그의 시문(詩文)에 고사리를 뜯어 먹으면서 은둔생활(隱遁生活)을 하겠다는 의미의 구절이 있어 그의 삶을 엿 볼 수 있다. 어계(漁溪)는 함안 방어산에서 발원하여 원북으로 흘러가는 하천으로 원래 이름은 원북계(院北溪)이다. 조려가 계유정란 때 고향으로 돌아와 이곳 시냇가에서 낚시질로 여생을 보냈기 때문에 스스로 하천이름을 어계라 칭하였다.

채미정 뒤편 언덕이 청풍대이고 문풍루가 보인다

채미(採薇)는 중국 주나라 무왕 때 상나라에서 주나라로 왕권이 바뀌자 수양산에 들어가 고비(고사리처럼 생긴 나물)를 채취하여 연명하다가 이거마저 거부하여 아사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조려의 지절과 비견되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채미정 앞쪽 멀리 보이는 산이 백이산(伯夷山)이다. 백이산(伯夷山, 369m)은 진주시와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이전 지명은 서산(西山), 쌍안산(雙安山)이었으나 후세 사람들이 백이산이라고 불렀다.

채미정 출입문

 

채미정 현판 오른편에 백세, 왼편에 청풍이란 현판이 있다.
채미정(採薇亭)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八作)지붕 겹처마로 정면 2칸, 측면2칸의 방이 한가운데 있고 나머지는 툇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1699(숙종25)에 단종의 왕위가 복위되자 이조참판을 추증(追贈)하고 1703년 경상도 유생 곽억령(郭抑齡) 등이 상소를 올려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의 예에 따라 생육신인 조려 등도 사당을 세워 제향하도록 조정에 건의하여 1706년 생전에 기거하던 백이산 아래 함안군 원북동에 사당을 세워 김시습 등과 함께 제향하였다. 사당은 1713년(숙종 39)에 사액(賜額)되어 서산 서원(西山書院)으로 이름 지어졌다.

바람의 소리를 듣는 누, 청풍대 문풍루(聞風樓)으로 가는 길

1781(정조 5년)에 그의 정충(精忠)과 고절(高節)에 감격하여 그에게 이조판서란 벼슬과 정절공(靖節公)이란 시호(諡號)를 내려 그의 충혼(忠魂)과 의백(義魄)을 위로하였다. 저서로는 『어계집(漁溪集)』이 전한다. 서산 서원(西山書院)은 대원군 때 훼철되었다가 1902년에 어계의 중종과 유림들이 다시 서원을 건립하였다. 1984년에 사촌리에서 이곳 원북리로 이전하였다.

청풍대에 위치하고 있는 문풍루(聞風樓)

 

조려 묘(趙旅墓)는 함안군 법수면 강주리 응암 마을 입구 산기슭에 있다.

충의공(忠毅公)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와 쌍절각(雙節閣)

문풍루(聞風樓)에서 본 조종도 ( 趙宗道 )의 쌍절각(雙節閣)

조종도(趙宗道)의 쌍절각(雙節閣)은 정면2칸 측면1칸 팔작지붕의 다포집이고 채미정 도로 건너편에 있다. 쌍절각(雙節閣)에는 조종도와 그의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 비가 있는데 빛바랜 단청과 지붕 위의 와솔에서 충의(忠毅)와 열녀(烈女)의 절개가 느껴진다. 조종도(趙宗道, 1537]1597)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남명 조식의 대표적인 제자로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한 의병장이다.

쌍절각(雙節閣) 출입문

생육신(生六臣) 어계은자(漁溪隱者) 조려(趙旅)의 오세손으로 1537(중종 32) 함안 원북동(院北洞)에서 출생하여 1597(선조 30) 정유재란 당시 가족까지 이끌고 안의(安義)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인솔한 적군과 싸우다가 음력 818일 전사하였다. 그의 나이 둘째 아들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날 그의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도 자결하였다. 둘째 아들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쌍절각 ( 雙節閣 ) 은 정면 2 칸 측면 1 칸 팔작지붕의 다포집이다.
쌍절각(雙節閣)에는 조종도와 그의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 비가 있는데 빛바랜 단청과 지붕 위의 와솔에서 충의(忠毅)와 열녀(烈女)의 절개가 느껴진다.

1616(광해 8) 조정에서 충신증자헌대부(忠臣贈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충의공(忠毅公) 함양군수지문(咸陽郡守之門)이란 정려(旌閭)를 내렸고 1732(영조8) 그의 부인에게도 열녀충의공(烈女忠毅公) 조종도처(趙宗道妻) 증정부인(贈貞夫人) 전의이씨지문(全義李氏之門)으로 동상정려(仝上旌閭)를 내렸다.

충신조종도려표비
그의 부인 열녀충의공(烈女忠毅公) 비가 파손되어 더욱 애절하다.

조종도의 선비관은 만물 가운데 가장 영적인 존재가 사람이고, 사람 가운데 가장 빼어난 것이 선비이다. 국가에 재난이 있으면 관직의 유무를 막론하고 선비 된 사람은 평소 닦은 바대로 행하여 천 리의 당당함을 지켜야 한다. 세상을 잊고 자신만을 깨끗이 간직하는 것을 능사로 삼아 명예만 추구하려는 사람은 옳은 것이 아니며, 문무를 겸하고서 옳은 일에 몸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 올바른 선비이다.

고려 공조전서(工曹典書) 금은(琴隱) 조열(趙悅) 신도비각(神道碑閣)

금은(琴隱) 조열(趙悅) 신도비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의 다포집으로 후손들이 세운 비각이다. 충의공(忠毅公)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의 쌍절각(雙節閣) 옆에 자리 잡고 있다.

금은(琴隱) 조열(趙悅)선생의 신도비각 출입문
신도비각은 정면  3 칸 ,  측면  1 칸의 팔작지붕의 다포집이다.

조열(趙悅) 본관은 함안(咸安). 호는 금은(琴隱)으로 아버지는 판도판서 조천계(趙天啓)이다. 고려공민왕(恭愍王) 때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면서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등과 교유하였고,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함안으로 낙향하여 거문고와 서화로 소일하였다. 조선 건국 후 출사를 권유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또한 태조3년 한양궁이 준공되어 낙성연(落成宴)을 열면서 팔도에 명하여 금서가무(琴書歌舞)에 능한 조열을 초청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조열(趙悅)은 아들 넷을 두었다. 큰아들 조이(趙彛)는 신호위(神虎衛)를 지냈고, 둘째 조녕(趙寧)은 현감을 셋째는 조항(趙恒)이고, 넷째는 조안(趙安)이다. 조안의 아들이 어계(漁溪) 조려(趙旅)이다.

함주지(咸州誌)인물조에서는 처음 함안의 평광(平廣)에 살다가 뒤에 산팔리(山八里) 원북동(院北洞)으로 옮겨 살았다고만 전한다. 조열의 행적은 맹사성(孟思誠)이 지은 만은(晩隱) 홍재(洪載)의 행장이 전해지면서 보다 자세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홍재의 행장에는 어느 날 밤 판서 성만용(成萬庸), 평리사(評理事) 변빈(卞贇), 박사 정몽주(鄭夢周), 전서 김성목(金成牧) 등이 대사성(大司成) 이색(李穡) 등과 함께 술을 마시며 회포를 논하였다. 이색이 말하기를 비간(比干)은 죽었고 미자(微子)는 떠났으며 기자(箕子)는 종이 되었으니, 우리도 각자 뜻을 따라서 처신하자.”고 하여 결의하였다고 한다.

홍재는 귀향하기로 마음먹고 삼가(三嘉) 대평촌(大坪村)으로 우거(寓居)하여 이곳을 두심동(杜尋洞)이라 하였다. 이때 함안에 우거하고 있던 조열과 이오가 이곳을 서로 왕래하면서 시사(時事)를 걱정하였다고 한다. 고려가 멸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세 사람이 모여서 울며 비가(悲歌)를 부르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맥수(麥秀), 채미(採薇)의 비가와 비유하였다. 후인들이 그 의리를 흠모하여 운구 서원(雲衢書院)을 지어 봉향하였다고 한다.

저서로 문집인 금은 실기(琴隱實記)가 있고 묘는 함안군 군북면 하림1길 에 있다.

어계(漁溪) 조려(趙旅) 생가(生家

어계(漁溪) 생가(生家)는 조려가 태어난 집으로 벼슬을 포기하고 낙향한 뒤 은거했던 곳이다. 채미정(採薇亭)에서 마을길을 따라 15분 정도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어계 생가(漁溪生家) 가는 길은 채미정(採薇亭)에서 마을길을 따라  15 분 정도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
어계(漁溪)는 함안 방어산에서 발원하여 원북으로 흘러가는 하천으로 원래 이름은 원북계(院北溪)이다. 조려가 계유정란 때 고향으로 돌아와 이곳 시냇가에서 낚시질로 여생을 보냈기 때문에 스스로 어계라 칭하였다.

어계 생가(漁溪生家)는 대문채, 원북재,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고 대문채는 3칸으로 중앙의 솟을대문에 좌우에 방이 있다. 주 건물인 원북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일자형 평면으로 부엌은 없고 침실, 대청으로 되어 있어 별채이거나 사랑채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건물 뒤편 사당에서는 3월 9일(초정일)에 조려와 그의 부인에게 항례를 치르고 있다. 그리고 어계(漁溪) 조려(趙旅)가 사용한 죽장(竹丈)과 동제향로(銅製香爐)가 보관되어 있다.

어계 생가(漁溪生家)의 대문채는 3칸으로 중앙의 솟을대문에 좌우에 방이 있다.

함안 조씨는 조정(趙鼎)을 시조로 하는 함안 지역의 토착 세거 성씨로 파산 조씨(巴山趙氏)' 라고도 한다. 시조 조정(趙鼎) 이후로 함안에 정착하여 대를 이어 살아서 함안 지역 최대의 성족(盛族)으로 발전한 성씨이다. 현재 함안에 세거하고 있는 함안 조씨는 대부분 어계조려의 후손들이다.

어계 생가에 있는 은행나무는 수령 500년, 수고 20m, 나무물레 340cm이다.

조정의 자는 우보(禹寶)이고, 호는 모당(慕唐)이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중국 후당인(後唐人)으로 신라 말에 두 아우 조부(趙釜)와 조당(趙鐺)을 데리고 한반도로 온 후 왕건(王建)을 도와 합천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931(고려 태조 14) 고창성(古昌城 지금의 안동)에서 후백제의 견훤(甄萱) 군사를 대파하여 동경(東京) 관할 하에 있던 주현(州縣)의 항복을 받아 고려 건국에 큰 공을 세웠다. 그가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 대장군 원윤(元尹)에 오름으로써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함안을 본관으로 하였다.

문헌으로 고증할 수 있는 함안과 관계가 있는 최초 인물은 고려 말의 금은조열이다.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에 있는 함안 조씨의 문중 묘역에서 가장 윗대가 금은 조열이다.

원북(院北)은 본동, 태실[台谷], 새절골[新寺谷]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있고 지명은 어속원(魚束院)의 북쪽에 있다 하여 원북이라 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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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양지(位良池)는 밀양 부북면 위양리 동쪽에 위치한 저수지로 가운데에 5개의 작은 섬과 정자로 구성되어 있고 신라시대 때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축조된 저수지다. 이 저수지의 물로 아래쪽에 있는 넓은 들판에 물을 대어 위양리 일대에 농사를 지었다. 백성들을 위한다는 의미에서 위양지(位良池)라고도 하고 또는 양양지(陽良地)라고도 부른다.

위양지의 제방(堤防) 둘레는 원래 1.7km에 달하는 저수지였으나 지금은 수리구역(水利區域)의 제방으로 바뀌어 제방 길이가 160m 로 줄어들었다.

위양지 작은 섬에 있는 정자, 완재정(宛在亭)

밀주구지(密州舊誌)"위양동 조(位良洞 條)"에 의하면 인조 12(1634)에 임진왜란으로 훼철(毁撤)된 제방을 부사(府使) 이유달(李惟達)이 수축(修築)한 기록이 남아 있다.

완재정(宛在亭)은 위양지 작은 섬에 있는 정자로 정면 3, 측면 2칸 크기에 팔작지붕 건물로 온돌방과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고 입향조(入鄕祖)인 안동 권씨 위양 종중의  학산(鶴山) 권삼변(權三變, 1577~1645)을 추모하기 위해 1900년 후손들이 세운 정자다.

당시 권삼변은 위양지 섬 중에 한곳에 정자를 세우고 싶어 미리 완재(宛在)라는 정자 이름까지 지었으나 이루지 못했다. 250년 지난 후, 안동 권씨 후손들이 섬 위에 정자를 지었고 이름도 완재정(宛在亭)으로 지었다. 처음에는 완재정(宛在亭)에 배로 출입했으나 후대에 다리를 놓아 아무 때나 접근이 가능토록 되었다.

 매년 5월이면 위양지 제방은 이팝나무 꽃이 만발하여 꽃구름을 만들고 멀리서는 흰 눈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한번 핀 꽃은 20일 이상 은은한 향기를 발산하여 천지를 진동시킨다. 또한 팽나무, 왕버들 나무가 조화롭게 심어져 있어 싱그러운 녹음과 하얀 꽃 세상을 만든다.

이팝나무는 소복이 쌓인 꽃송이가 사발에 얹힌 흰 쌀밥처럼 보여서, 조선시대 왕족이나 양반 李氏들만 먹는다고 이밥나무로 불렷다가 이팝나무으로 변했다. 또는 꽃이 입하 때 핀다하여 입하목(入夏木)으로 불렸다가, 입하가 연음되어 이파, 이팝으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고욤나무

이팝나무는 한해의 풍년을 점치는 나무로 알려져 있는데 꽃이 많이 필 때는 그해는 풍년이고 적게 필 때는 흉년이 든다고 한다.

이팝나무와 관련 전설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어느 마을에 열여덟에 시집온 착한 며느리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시부모님께 순종하며 쉴 틈 없이 집안일을 하고 살았지만 시어머니는 끊임없이 트집을 잡고 구박하며 시집살이를 시켰다. 온 동네 사람들은 이 며느리를 칭송하는 한편 동정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큰 제사가 있어 며느리는 조상들께 드리는 쌀밥을 짓게 되었다. 항상 잡곡만 짓다가 모처럼 쌀밥을 지으려니 혹 밥을 잘못지어 시어머니에게 꾸중을 들을 것이 겁난 며느리는 밥에 뜸이 잘들었나 밥알 몇 개를 떠서 먹었다. 그러나 공교롭게 그 순간 시어머니가 부엌에 들어왔다가 그 광경을 보고 제사에 쓸 멧밥을 며느리가 먼저 퍼먹는다며 온갖 학대를 하였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며느리는 그 길로 뒷산에 올라가 목을 매어 죽었고 이듬해 이 며느리가 묻힌 무덤가에서 나무가 자라더니 흰 꽃을 나무 가득 피워냈다. 이밥에 한이 맺힌 며느리가 죽어서 된 나무라 하여 동네 사람들은 이 나무를 이팝나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봄꽃이 만발하는 5월에 위양지 흰꽃구름속의 제방길 산책은 꽃 향기에 취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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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고속도로 군북 IC에서 빠져나와 의령을 향해 출발하면 먼발치에서 맞이하는 것이 의령관문이고 의령교로 건너는 강이 남강(南江)이다. 그리고 가마솥을 닮은 바위 하나가 남강에 있으니 그 이름이 솥 바위(정암 : 鼎巖). 그래서 의령을 찾는 여행객이면 먼저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의 승전지인 정암진과 솥 바위를 둘러보는 것이 좋다.

정암 철교와 의령교

정암진은 정암루(鼎巖樓)에서 둘러보는 것과 정암 철교 인도에서 바라보는 것이 각각 즐거움이 다르다. 솥 바위 또한 원거리와 근거리에서 보는 맛이 다르다. 일찍이 남강은 뛰어난 경치로 인해 선비와 가객들이 찾아 시를 읊고 자연을 노래했으리라. 또한 나룻배를 타고 왕래했던 교통의 요충지였던 정암진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이 왜적을 몰살시킨 승전지로 유명하다.

정암 철교

정암 철교는 경남 의령군과 함안군을 연결하는 교량으로서 1935년에 준공되었다. 6.25전쟁으로 파괴된 후 1958년 남아있던 2개의 경간을 그대로 살려 상부는 철골트러스 형식으로 재건하였다.

정암루(鼎巖樓)

정면 3, 측면 2칸 팔작지붕 겹처마 익공양식의 정암루는 자연암반 위에 장대석 기단을 놓아 지어졌다. 기둥은 원기둥으로, 누하주는 화강석을, 누상주는 목재를 사용하였다. 계단은 전면 중앙 한 곳에 두었고 기둥 상부 공포는 연화로 장식된 이익공을 결구하여 겹처마로 구성하였다. 마루는 우물마루이며 계자난간을 둘렸다.

현재 정암루 자리는 조서 중기 대제학을 지낸 용재(容齋) 이행(李荇)이 귀양살이를 하며 지은 취원루(聚遠樓)가 있었던 곳으로 1935년 임진왜란 승첩지를 기리고자 지었다. 그 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정암루가 소실되었으나 1963년에 재건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정암진(鼎巖津, 정암나루) 전투

남강은 함양군 서상면 남덕유산에서 발원하여 진주시를 거쳐 함안군과 의령군의 경계를 따라 흐르다가 낙동강에 합류한다낙동강과 더불어 일찍 뱃길이 열렸던 남강은 임진왜란 때 왜적이 호남으로 진출하는 침략의 길이 되었고 의령의 관문인 정암진은 홍의장군 곽재우의 최대 승첩지 중 하나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 장군은 1592(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고, 같은 해 5월 의령 정암진(鼎巖津)에서 왜적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의병 활동 초기에는 의령 정암진과 세간리(世干里)에 지휘 본부를 두고 의령을 고수하면서 현풍·창녕·영산·진주까지를 작전 지역으로 삼으면서 유사시에 대처하였다. 당시 곽재우는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여 적군과 아군에게 위엄을 보였으며, 의병(疑兵, 적을 혼란스럽게 하는 위장 병사)을 둔 위장 전술과 적을 유인하는 매복 작전, 그리고 유격전 등을 펼쳐 가며 적을 섬멸하였다.

정암 철교에서 바라본 정암루와 솥 바위

의병 활동 초기에는 의령 정암진(鼎巖津)과 세간리(世干里)에 지휘 본부를 설치하여 의령을 고수하는 한편, 이웃 고을인 현풍·창녕·영산·진주까지를 작전 지역으로 삼아 유사시에 대처했다.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여 적군과 아군의 장졸에게 위엄을 보이고, 단기(單騎)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의병(疑兵, 적이 의심하도록 하기 위한 위장 병사)을 구사해 위장 전술을 펴서 적을 직접 공격했다. 그리고 적을 유인해 매복병으로 하여금 급습을 가한다든가, 유격전을 펴서 적을 섬멸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솥 바위는 임진왜란 당시의 격전지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15925월 하순경 함안군을 완전 점령하고 정암진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적을 맞아 2,000인에 이르는 병력을 휘하에 거느리고 대승을 거둠으로써 왜적의 호남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정암 철교에서 바라본 정암진

정암(鼎巖, 솥바위)

정암(鼎巖)은 가마솥 다리처럼 세 개의 다리를 뻗고 물 위에 드러난 암석이 마치 솥뚜껑처럼 보인다고 해서 생긴 명칭이고 솥바위라고 부른다. 한자로 정()'솥 정'이라 하고, ()'바위 암'이다외형을 살펴보면 약 20ton 가량의 커다란 바위가 아래를 받치고 있고, 그 위로 높이 8m가량의 작은 바위가 탑 층을 이루고 있다조선 말기 한 도사가 이 바위 수면 아래 세 개의 발이 가리키는 주변 20(8)에 큰 부자가 나올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북쪽 의령군 정곡면에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 남쪽 진주 지수면에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회장, GS그룹 창업주 허만정 회장, 동남쪽 함안 군북면에 효성 창업주 조홍제 회장 등 4명의 재벌 총수가 태어났다. 그래서 창업과 입시를 목전에 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기도를 한다. 의령에는 부와 성공을 상징하는 3대 바위가 있는데  "솥 바위", "탑 바위"와 "코끼리 바위"이다.

여기서 이병철 생가 정곡면 중교리 까지는 9.410여분 정도 소요된다그곳에서 태어난 이병철은 결혼해 분가하기 전까지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건희 회장도 의령 친할머니 슬하에서 3살까지 자랐다. 1,907(577) 크기의 생가는 남서향으로 크게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된 한옥이다. 대문에서 오른쪽으로는 큰 바위가 있고, 뒤쪽으로 대나무 숲이 있는 구조다. 마당에는 안채 쪽과 대문 쪽에 2개의 우물이 있고 곳곳에 벽오동과 회화나무가 있다.

지수면 승산리 지수초등학교에는 1921년 개교 당시 1회 입학생이던 LG 창업주 구인회 회장, 효성 창업주 조홍제 회장,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함께 심고 가꾼 소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부자 소나무'로 불린다. 지수초등학교는 학생 수 감소로 2009년 인근 송정초교와 통합됐다. 옛 지수초교는 ‘K-기업가정신센터로 변모했다.

창업주 4인의 인연

조홍제 회장은 유년 시절 의령에 있는 이병철 회장의 형 이병각과 교류를 많이 해 자연스레 친구 동생인 이병철 회장도 알게 됐다. 이병각은 진주에서 제분업 사업을, 마산에서 양조장 사업도 했다. 이병각의 장인 하겸진은 진주 수곡면 출신이다. 조홍제 회장의 장인 하세진 역시 진주 수곡면 출신으로 하겸진과는 친척이다. 조홍제 회장은 해방 후 이병철 회장이 서울에서 설립한 삼성물산공사에 투자를 해 동업을 했다.

조홍제 회장과 구인회 회장과의 관계는 동네 대항 축구 시합을 하면서 교류해 이웃한 마을 친구로 지냈다. 서울에 있는 중앙고등학교 2학년까지 함께 보냈다. 그 후 각자 사업을 하면서도 교류는 왕성해 구인회가 플라스틱 연구를 할 때 일본에서 도서를 구입해 주는 등 구씨 집안과 아주 절친한 관계로 지내왔다.

구인회 회장과 이병철 회장은 1922년 지수보통학교 3학년 1학기를 함께 공부했다. 이병철 회장이 생활한 매형 집이 구인회 회장 본가와 옆집이라 일찍 결혼한 구인회 회장이 의령에서 유학 온 이병철 회장을 불러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했다. 1957년 구인회 회장의 3남 구자학과 이병철 회장의 차녀가 결혼해 두 사람은 사돈 관계가 되었다. 1960년대 두 사람은 방송사업 동업을 한 인연도 있다.

허만정 회장은 194512, 부산에서 무역업을 하던 구인회 회장을 찾아가 사돈이 하는 사업에 자금을 투자하겠소, 그리고 내 셋째 아들 준구를 맡기겠소.” “준구야, 경영은 구씨 집안이 잘한다. 나서지 말거라하는 가르침을 남겼다이것이 구씨와 허씨의 첫 공동사업의 진행이고 LGGS로 분리하기까지 50년 넘게 불협화음이 없었다.

허만정 회장은 이병철 회장이 부산에서 제일제당을 경영할 때 장남 허정구를 보내면서 삼성에도 자본을 투자했다. 이병철 회장의 매형 허순구가 이웃한 집 허만정 회장과 친척이라 자연스레 이병철 회장과 허만정 회장이 연결된 것으로 보여 진다. 조홍제 회장의 처남 하영진은 허만정 회장의 유고집에 조카관계로 기록되어 있다. 조홍제 회장과 허만정 회장도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의령 여씨(宜寧 余氏) 시조제단비(始祖祭壇碑)와 향제시도록(享祭時到錄)

의령 여씨 시조 제단비는 정암루 동쪽 절벽 아래 솥바위 가는 길에 위치하며 의령 여씨 시조 여선재에게 제사를 지내 던 제단에 세워진 비석이다. 1807년에 세워진 비석에는 여선재를 우음곡에 모셨다는 족보의 내용 바탕으로 묘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끝내 찾지못 하였고 우음곡과 뜻이 비슷한 지금의 위치에 제단 비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글은 대사간을 지낸 의성인 김한동(金翰東)이 짓고, 글씨는 단성에 거주하던 선비 합천인 이의선(李宜璿)이 쓴 것이다.

향제시도록의 표제는 시도기(時到記)로 되어 있고 책등에는 향제시도록이라 적혀 있으며, 필사본이다. 여중묵(余重默)의 친필로 보이는 비단일록서(碑壇日錄序)2면이 권두에 실려 있으며, 1면에 178행씩 적혀 있다그 뒤 정서(淨書)되어 있는 본문은 1면당 총 10(평균적으로 120자씩 기록)으로 총 461면이다. 책의 내용은 비단일록 및 시도기의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체 461면 가운데, 비단일록은 4-19면까지 기록되어 있으며, 나머지는 시도기에 해당하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비단일록은 여중묵이 안동을 출발하는 때인 1807226일로부터 의령 정암에 비석을 세우는 일자인 동년 124일까지 일의 진행 과정 및 관련 사항들을 기록하고 있다. 1807년으로부터 1943년까지 총 136년간의 기록이 수록되어 있어 당시 제향과 관련한 지역별 종회의 참여율, 소요된 경비 및 출자 금액 등의 경제 상황, 의령 여씨 가문의 봉선(奉先) 의식 등을 사적인 흐름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써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82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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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읍은 기장군 북부에 위치한 읍으로 장안의 유래는 이 고장의 이름난 사찰인 장안사에서 따온 것으로 생각된다. 한자(漢字)를 보면 길게, 오랫동안의 장()과 편안할 안()을 합하여, 오래도록 편안하고 평화스러운 읍()라는 뜻이다. 불광산(佛光山) 골짜기에서 발원하는 장안천이 역내(域內) 중앙부를 남북으로 관류하고 있고 이를 중심으로 좌우에 명례장안기룡용소반룡월내길천 등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지역  중심은 기룡리 하근마을이다. 장안천은 옛날에는 건천(乾川), 용천(龍川)이라 하였다. 건천은 마르내고, 용천은 미리내다. 모두 머리내로서 큰 내, 으뜸가는 내라는 뜻이다.

옛 부터 이 지역 마을에 다섯 마리의 용이 있는데기룡, 반룡, 용소, 대룡와 개천마을로 이름하여 오룡(五龍)이다. 개천마을에도 용이 있다는 것이다. 오룡 (五龍) 중 용소의 용은 등천하였으니 등천룡이고, 개천의 용은 강속에 누워있으니 와룡이고, 반룡의 용은 등천하려고 몸을 서리고 있는 반룡이고, 대룡의 용은 큰 바위로 화하였으니 대암룡이고, 기룡의 용은 강을 기어가고 있으니 복룡이라는 것이다.

신라 문무왕이 심은 장안리 느티나무

장안읍 장안사로 가는 길의 윗 장안마을 우측에 천년을 살아온 느티나무가 있다. 수령은 1,300년으로 신라 문무왕이 지나가다 심은 나무로 애장왕이 쉬어가기도 하였다는 유서 깊은 노거수다. 높이 25m, 둘레 8m1978년 보호수로 지정되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느티나무로 1999년 산림청에서 새천년을 맞이하여 대표하는 밀레니엄 나무로 지정됐다. 그러나 태풍 "매미" 의 피해를 받아 한쪽 큰 가지가 부러져 예전만큼 풍부한 녹음을 볼 수는 없지만 노쇠 되지 않은 푸르름은 지나가는 이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아홉 공주가 쌓은 우시산국(于尸山國)의 애절한 마지막 왕비 릉(王妃 陵)

장안읍은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에 동래지방을 중심으로 존재한 거칠산국(巨柒山國)과 일정한 정치적 연계를 가지고 존재하였을 것을 생각된다. 그리고 신라에 정복된 이후 신라의 갑화양곡현이 되었다. 통일신라 경덕왕 16(757)에 이르러서는 기장현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됨에 따라 그에 소속되었다. 이 시기 기장현은 동래군의 속현으로 존재하였다.

기룡리 장안초등학교를 지나서 하근마을 기룡다리로 기룡천을 건너 도로좌측의 송림에 옛날 왕비 능이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삼한시대 말엽쯤 오늘날의 울산시 울주군 웅촌면 검단리에 우시산국(于尸山國)이라는 작은 부족국가가 있었는데 신라의 침략을 받아 병합이 되었다그 침략으로 왕과 왕자는 포로로 잡혀가고 왕비만 아홉 공주를 데리고 탈출하여 지금의 기룡리 근처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곳도 신라의 손길이 뻗쳐 신라군이 왕비와 공주를 찾고 있었다. 왕비와 아홉 공주는 신분을 숨기고 평민으로 가장하여 남의 집 농사일을 도우는 품팔이를 하며 움막집에서 살았다.

지금 왕비 능으로 전해지고 있는 송림은 어느 문중의 소유로 넘어가 나무와 잡목이 무성해 사람이 들어가기 힘들 정도가 되었고 봉분 또한 잡풀이 자라서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그러는 가운데 왕비는 포로가 되어 끌려간 왕과 왕족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 생사 여부에 대한 근심, 걱정과 몸에 익숙지 못한 농사꾼의 고된 일에 몸과 마음이 지쳐 병을 얻어 숨지자 아홉 공주는 어머니 시신을 마당 한가운데 묻고 제각기 흩어져 살았다. 그러나 해마다 3월 보름이면 어머니 무덤가에 모여 치마폭에 흙을 담아 초라한 어머니 무덤을 밤을 꼬박 새워가며 봉분을 쌓았다.

그러고 나서 각자가 장만하여 온 화전과 음식을 차려놓고, 제문을 지어 어머니의 넋을 위로하였다. 해마다 치마폭에 담은 흙으로 쌓은 봉분은 세월이 갈수록 큰 봉분이 되어 왕릉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아홉 공주의 변함없는 효심과 자매간의 깊은 우애가 알려져 아홉 공주가 살고 있던 마을의 부녀들도 그날이 되면 모두 이곳 무덤에 모여서 아홉 공주의 아름다운 행실을 기리며 축제를 하게 되었다부녀자들은 이곳에 모여 아홉 공주의 효성과 우애를 기리는 작문도 하고 작시도 하고 시집살이의 고달픈 사연도 함께 호소하면서 이웃끼리 정도 두텁게 하였다. 이런 아름다운 풍습은 이곳 이웃마을에서 천오백년이나 끊임없이 이어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하여도 해마다 음력 315일이 되면 이러한 풍습은 계속 되었다. 그리고 계를 모아 그 돈으로 좋은 일도 많이 하였고 그 당시의 계 장부와 작문집도 시집간 어느 할머니가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그러나 이런 좋은 풍습이 계승되지 못하고 사라져 전설로만 남게 되었다. 지금 왕비 능이 있는 송림은 어느 문중의 소유로 넘어가 나무와 잡목이 무성해 사람이 들어가기 힘들 정도가 되었고 봉분 또한 잡풀이 자라서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과연 전설 그대로 이곳이 실제 왕비 능일까? 단지 능과 같이 한 주변 소나무는 알 것이다.

봉분 앞 무궁화꽃이 왕비의 넋을 위로 하듯 만발하게 피어있다.

보부상(褓負商) 배상기(裵常起) 업적을 기린 비석

고리원자력본부에서 임랑해수욕장 방향으로 장안천을 월내교로 건너면 우측에 송림이 울창한 공원이 있는데 명칭이 월내어린이공원이다. 이곳에 보부상 출신이었던 배상기(裵常起)의 업적을 기린 비석 3기가 나란히 서 있다제각각 세운 시기를 달리하면서 동일 인물의 비석 내용도 다르면서 한자리에 있는 것이 독특하다. 그 만큼 이곳에서 배상기의 공덕이 매우크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 비석을 통하여 일제강점기 때 보부상(褓負商)의 조직체계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배상기(裵常起)란 인물을 알아보면, 1842년 전북 익산 부잣집 종손으로 태어나서 구한말 민란 주모자로 연루되어 가족을 이끌고 고향을 떠나면서 보부상 무리에 섞여서 1860년대 월내에 정착하였다. 월내에 정착한 그는 동해안 보부상 최고 수령인 반수(班首)가 되었고 멸치잡이와 젓갈로 많이 번 돈으로 빈민 구제와 장학 사업에 매진했다. 1895년 갑오년 큰 흉년 때는 월내와 좌천 장날마다 가마솥을 장터에 내걸어 굶주린 사람을 구휼했다. 일제강점기 때 독립자금을 대기도 했던 그는 192079세를 일기를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장안읍 용소리 시명산 8부 능선에 있다.

세워진 시기 별로 비석을 살펴보면 1904(고종 8)에 세워진 좌우사 반수 배상기 휼상 영세불망비(左右社 班首 裵常起 恤商 永世不忘碑)이다. 좌우사 반수(左右社 班首)는 보부상 조직의 우두머리 직책이고 비석 전면 양쪽에 새겨진 반수, 접장(接長), 감역(監役) 들은 보부상 조직 직책이다. 세부적으로 보면 좌우사는 조선말기의 보부상 조직이고 반수는 보부상 조직의 우두머리이며 그 아래에 부반수, 주사, 접장, 감역, 공원 등이 있다.

부상(負商)과 보상(褓商)은 각 별개의 행상조합으로 성장하였으나, 1883년 혜상공국이 설치되면서 통합되었고, 1885년 상리국(商理局)으로 개칭되면서 부상을 좌단(左團) 좌사(左社)라 하였고, 보상을 우단(右團) 우사(右社)라고 하였다. 특이하게도 같은 비석의 후면에 다른 이의 공덕이 적혀있다. 즉 후면에는전 주사 접장 김상명 출의 영세불망비(前 主事 接長 金相明 出義 永世不忘碑)라 새기고 김상명이 성금을 낸 일을 기리는 내용이 담고 있다.

두 번째는 1913년에 세워진 비석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계 휼리비(通政大夫 裵公 常起 刱契 恤里碑)이다통정대부는 조선시대 문관 정3품 당상관의 품계이다. 비석이 세울 당시는 한일늑약 3년 뒤인 일제강점기 때 통정대부란 관직명을 사용 가능한지가 궁금하다. 비문에는 계를 형성하여 마을을 도운 일을 기리고 있다.

세 번째는 1917년에 세워진 비석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숙 장학비(通政大夫 裵公 常起 刱塾 獎學碑)이다. 비문에는 배상기가 글방을 열어 학문을 장려한 일을 기리고 있다.

왼쪽부터 비석명이 "좌우사 반수 배상기 휼상 영세불망비,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숙 장학비,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계 휼리비"이다
좌우사 반수 배상기 휼상 영세불망비(左右社 班首 裵常起 恤商 永世不忘碑)

捐金數千 惠我行賈

수천냥의 재산을 털어서 우리들 행상을 도와주셨네.

片石嵬然 咸曰某甫

우뚝한 한 조각 비석도 한 입으로 반수어른 칭송한다네.

時班首 金應寬 接長 金世洪 監役 明奎員 崔學柱 金大洪

시반수 김응관 접장 김세홍 감역 명규원 최학주 김대홍

전 주사 접장 김상명 출의 영세불망비(前 主事 接長 金相明 出義 永世不忘碑)

五百其緡 亦云不鮮

오백 꿰미의 돈이란 결코 적지 않나니

惟我賈民 豈忘少選

바라건대 우리 상인들 어찌 잠시라도 잊을소냐!

公員 朴璋鎭 朴泰邠 李起湊 張盛祚

공원 박장진 박태분 이기진 장성조

甲辰四月日立

갑진년(1904) 4월 일 세우다.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숙 장학비(通政大夫 裵公 常起 刱塾 獎學碑) 전면

疎財捐義 惠及我蒙

재화를 트이고 의연금 내놓으니 은덕이 우리 학생에게 이르렀도다.

春秋絃誦 里巷西東

춘추로 매번 책 읽고 외는 소리 골목마다 여기저기 들려온다네.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숙 장학비(通政大夫 裵公 常起 刱塾 獎學碑) 후면

丁巳五月二十五日立

정사년(1917) 5월 25일 세우다.

監董 秋斗高 金埰洙 朱在昊 張守珠

감동 추두고 김채수 주재호 장수주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계 휼리비(通政大夫 裵公 常起 刱契 恤里碑) 전면

坊境頌績 社旅竪功

마을에는 그의 공적 칭송하고 결사의 사람들 공을 치켜세우네.

養逆無憾 我深賴公

여행객 숙박에 유감없으니 우리가 공의 힘을 깊이 입었던 탓이라네.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계 휼리비(通政大夫 裵公 常起 刱契 恤里碑) 후면

大正貳年癸丑六月貳拾日

대정 2년(1913) 계축년 6월 20일

機張郡中北面月內洞西里契立碑

기장군 중북면 월내동 서리계에서 세우다.

有司 南順宗 朱仁權 李載成 韓桓 朴潤浩 金守萬

유사 남순종 주인권 이재성 한환 박윤호 김수만

월내마을은 월래포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고 월래포는 기장의 9대 포구(무지포, 이을포, 기을포, 동백포, 공수포, 기포, 독이포, 월래포, 화사을포) 중 하나다. 월내의 옛 이름은 월래(月來). 월래의 은 울타리의 과 같은 뜻이라고 한다. 즉 방어를 위한 책(), ()을 뜻한다. 월래의 는 내()라고도 표기한다. , 래는 나(, ), (), (), ()와 같은 의미로 나라[], (), () 등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래서 월내, 월래는 성책을 가진 마을의 의미.

예전 디젤기관차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서생역이 경전철인 동해선으로 변경됨으로써 역사가 새 건물로 바뀌었다. 옛 것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옛 건물을 찾고 거기서 옛 정서와 지난 추억을 돌이켜 본다.

구 서생역사 부속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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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면 신평리에 위치하고 있는 신평소공원은 해안가에 조성한 조그마한 간이공원이다. 20092월 착공하여 20104월에 준공되었고 배 조형 전망대를 비롯하여 팔각정자, 야외무대 등이 구성되어 있다. 신평소공원 앞 해변에는 크고 넓고 긴 암반과 바위가 아름답고 멋있다. 주변에는 여느 바닷가처럼 카페가 즐비한데 커피 한잔에 바다풍광을 즐기는 여행객이 많이 온다.

그리고 바다 절경 중 하나가 크고 넓은 암반의 윷판대(擲柶臺)이다.

척사대(擲柶臺)라 하고 윷바위 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유래를 살펴보면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우리나라 장수와 왜나라 장수가 몇 날을 겨루었으나 승부가 나지 않아 윷놀이로 승부를 결정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바위에 윷판을 칼로 새기고 종일 겨루어도 승부가 나지 않고 저녁이 되자, 왜장이 바다 쪽으로 서서 윷판이 잘 보이도록 깊고 굵게 새기고() 있을 때 우리 장수가 왜장을 발길로 차서 바다에 던져버렸다() 하여 이곳을() 척사대로 불렀다고 전한다. ㅎ ㅎ 반칙 아니 인가~

카페 솔 앞에 있는 윷판대 안내판으로 관리 부족으로 잡풀에 묻혀있어 안타깝다.
윷판대로 추정하고 있는 암반

신평리(新平里)는 일광면의 동쪽 해안에 위치하여 북으로는 칠암리와 원리, 서쪽과 남쪽으로는 동백리와 접한다. 옛 이름은 새들, 이를 한자로 표기한 지명이다. 평탄한 들 가운데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새들은 새버든, 새버들이라고도 하며 새각단이라고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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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곶(艮絶串) 우리나라 육지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으로 매년 새해 해맞이 축제를 개최하고 서생면 대송(大松)마을에 있는 곶이다. 이곳에서는 영일만의 호미곶 보다 1, 정동진보다도 5분 일찍 해돋이가 시작되고 매년 1231일에서 11일로 넘어가는 날에는 간절곶 해맞이축제가 열린다. 1231일 전야행사부터 시작하여 11일 재야행사까지 이어지며 관광객이 참여하는 레크리에이션, 가요제, 콘서트, 부대행사 등이 열려 특별한 신년맞이를 경험할 수 있다.

신암에서 바라본 간절곶

간절곶이라는 이름은 먼 바다를 항해하는 어부들이 동북방이나 서남방에서 이곳을 바라보면 지형이 뾰족하고 긴 간짓대(대나무 장대)]처럼 바다로 길게 뻗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유래한 지명이다. 한자로는 艮絶이라 표기한다. 간절곶을 조선 초기 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이길곶(爾吉串)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가 가지고 있는 뜻은 넓다이며 길()길다라는 뜻으로 역시 길게 튀어나왔다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1918년에 제작된 조선오만분일지형도(朝鮮五方分一地形圖)에는 간절갑(艮絶岬)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기운을 억누르기 위한 것 이었다.

간절곶은 서쪽 봉화산(烽火山) 산줄기가 동쪽으로 완경사를 이루다가 이곳에 이르면 매우 평탄한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대부분의 해안가는 바위와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이곳에서는 해안 절벽이 없다. 봉화산에는 조선 전기에 설치 된 봉수대가 있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이곳에는 항로를 인도하는 등대가 있었다.
이 때문에 2차 대전 때는 미군이 등대를 여러 번 폭격해 주위 주민들이 피해를 입은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등대는 광복 후 다시 복원돼 지금까지 운영이 되고 있다.

간절곶은 해맞이공원으로 조성되어 있고 주목할 만한 조형물이 있다. 바로 카보다호카(Cabo da Roca) 돌탑이다. 이 돌탑은 포르투갈 리스보아주의 관광도시인 신트라에 있는 카보다호카(일명 호카) 십자가 기념비를 모방한 돌탑이다. 신트라는 포르투갈 최서단(유럽대륙 최서단)에 위치하고 이곳의 곶의 이름이 카보다호카다.

돌탑에는 포르투갈 시인 루이스 카몽이스의 말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가 있고 지리적 위치, 신트라의 상징 로고 및 좌표와 고도가 새겨져 있다. 차이점은 돌탑의 상부에는 십자가가 없다.

카보다호카(Cabo da Roca) 돌탑으로 포르투갈 리스보아주의 관광도시인 신트라市에 있는 카보다호카(일명 호카) 십자가 기념비를 모방한 돌탑이다.
돌탑에는 포르투갈 시인 루이스 카몽이스의 말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가 있고 지리적 위치, 신트라의 상징 로고 및 좌표와 고도가 새겨져 있다.

한반도 동해 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대송(大松)마을은 앞이 확 트여 수평선을 가장 넓게 볼 수 있고 뒤로는 송림이 우거져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이 마을의 간절곶이 전국 명소가 되면서 마을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간절곶의 낭끝 바위는 가장 돌출 지역으로 이곳에서 해를 보는 것이 가장 빨리 볼 수 있다하여 명소가 되었다그러나 간절곶 앞 바다는 지형적으로 돌출지역이 되어 해류가 급해 옛날에는 이 해역을 지나는 배들이 많이 침몰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우체통인 소망우체통으로 너비가 약 2.4m, 높이가 5m로 사진 명소로도 유명한데 실제로 운영되고 있어 엽서를 넣으면 전국으로 발송이 된다. 느린 우체통은 아니며 남울산 우체국에서 매일 한 차례씩 우편물을 수집해 보내준다.

대송(大松)마을의 이전 명칭은 대륙동(大陸洞)이었는데 대운산 줄기가 바다로 뻗고 있어 이의 대()자와, 육지의 끝(간절곶)이 튀어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 후 대륙동의 대()자와 송정동(松亭洞)의 송()자를 따서 대송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이곳에는 항로를 인도하는 등대가 있었다. 이 때문에 2차 대전 때는 미군이 등대를 여러 번 폭격해 주위 주민들이 피해를 입은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등대는 광복 후 다시 복원돼 지금까지 운영이 되고 있다.

개발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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