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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읍 대변리와 송정에는 시랑대, 오랑대, 국립수산과학관, 해동용궁사, 롯데 월드 어드벤처, 개관 준비 중인 오시리아 관광단지 등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있다. 이 중 탁 트인 해안 감상과 시원한 동해바람을 즐기기에는 시랑대가 제격이다. 시랑대는 시랑산(82m) 동쪽 해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전에는 군부대가 주둔하여 접근하기가 힘들었다. 지금은 태고종 사찰인 해동용궁사(海東龍宮寺, 시랑리 산 416-3번지)는 입구 우측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12지신상 석물을 지나 해동용궁사 입구(일주문) 주변 춘원 이광수 시비
해동용궁사 입구(일주문) 앞 교통안전기원탑
시랑대 방향 오솔길 입구
바로 좌측 오솔길로 걸어간다
오솔길 도중 만난 안내표지판

시랑대(侍郞臺)는 적선대, 삼성대, 황학대와 더불어 기장의 4대 명승지로써 시랑리 동암마을 남쪽 해변 바위에 세 글자 「시랑대」 와 시(詩)를 새긴 것을 가리킨다. 시랑(侍郞)은 이조참의 정3품 당상관의 옛 이름을 뜻한다.
1733년(영조 9년) 권적(權樀, 1675~1755)이 이조참의(吏曹參議)에서 기장현감으로 좌천되어 부임하여 이곳의 살펴보니 파도가 흰 거품을 물고 밀려올 때마다 조개들과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아낙네들이 쌀 씻는 소리와 같고, 그 위를 나는 비오리(기러기목 오리과의 새)의 군무는 오색찬란하며, 노송 우거진 절벽을 찾은 달빛은 가히 인간 세상에서 보기 드문 절경인지라, 그 감회를 바위에 시(詩)를 새겨 남겼다.

해동용궁사 옆 시랑대 입구

 

시랑대에서 공수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길이다. 공수 지명은 공수전(公須田)에서 유래된 것으로 공수전은 지방관청의 운영 경비에 충당되는 토지이다. 공수마을의 옛 이름으로 비옥포(非玉浦, 飛玉浦), 비오포(飛烏浦), 비오개 등 있다. 비오포(飛烏浦)는 오색찬란한 원앙새 같은 비오리가 출렁이는 파도를 타고 큰 무리를 짓고 까마귀 떼처럼 무리를 지어 날아다닌다 하여 비롯되었다.

 

시랑대로 가는 데크길
왼쪽 부터 국립수산과학관, 기장 힐튼호텔

권적은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경하(景賀), 호는 창백헌(蒼白軒), 남애(南厓),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그의 좌천 이유는 암행어사로 널리 알려진 박문수(朴文秀)의 호남 관찰사 임명을 반대하다가 영조의 미움을 받아 정3품 당상관인 이조참의(吏曹參議)에서 종6품의 기장 현감으로 좌천되었다. 권적이 당시 이곳에 왔을 때는 바위 위에는 가운데가 안방 같으며 방바닥처럼 평평하게 되어 있어 사오십 명이 앉아도 남을 만큼 널찍하고 시랑대의 뒤편은 기암괴석이 첩첩이 쌓여 병풍처럼 둘러쳐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중앙에서 고위 관료를 역임하다가 유배지로 유명한 이곳의 지방관으로 좌천된 기분을 귀양살이로 표현하며 울분과 서러움을 시로 남긴 것이다. 시랑대 절경에 마음의 응어리를 풀고 외로움을 달래며 지난 관직을 바위에 시랑으로 표현 하였던 것이다.
시랑대 권적의 각석시(刻石詩)
 
謫居猶得近蓬萊 人自天曺貳席來
三字丹書明翠壁 千秋留作侍郞臺
 
귀양 온 이곳이 봉래산과 가깝고
이 사람도 천조(天曹)의 이석(貳席)에서 왔다네.
석 자의 붉은 글씨 푸른 벽에 선명하니
천추에 전할 시를 시랑대에 남겨보네.

또한 고종 31년(1894) 홍문관 교리 손경현(孫庚鉉)이 기장군수로 부임하여 이곳에 와서 시랑대의 글귀와 절경을 본 후 주변 바위에 세 글자 학사암(學士岩)과 시(詩)를 남겼다. 그리고 『기장현 읍지』 형성조에 의하면 “기장 현감 과 홍문관 교리를 지낸 손경현이 놀러 와서 학사암(學士嵓)이라 부르기도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학사암 손경현의 각석시(刻石詩)
侍郞臺上一層巖 屹若支天何出凡
上下千年長在石 東南大海自任帆
民勤野壁秋將熟 郡小官閑事已監
喧雷忽送人間雨 不妨須臾濕我衫
乙未 仲夏 學士 孫庚鉉
시랑대 위로 바위 높이 얹혔으니
하늘을 버티는 듯 우뚝 얼마나 출중한가.
지난 세월 천년 동안 바윗돌 그대로요
동남쪽 넓은 바다에 돛단배 자유롭다.
부지런한 농민들 들녘을 열어 곡식은 익어가고
자그마한 고을 공무 한가로워 일은 이미 마쳤다네.
갑작스런 번개소리 홀연 비를 뿌리니
잠깐 새 내 적삼 적신들 어떠하랴.
을미년(1895) 중하 학사 손경현
그 후 권적은 마음을 바로 잡았어 일까? 1733년(영조 9) 5월에서 1734년(영조 10) 11월까지 기장 현감으로 재직할 때 그의 청렴하고 선정을 기리기 위해 1737년 3월 권적 청덕선정비(權擿淸德善政碑)가 건립되었다. 선정비의 위치는 기장읍성 앞 기장공덕비군 內(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285-7번지)에 있다. 비의 제목은 ‘전 이조참의 행현감 권공적 청덕선정비(前吏曹參議行縣監權公䙗淸德善政碑)’이다.
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政淸淮陽 學闡潮州 維石一片 不忘千秋
정사에 청렴하긴 회양후(淮陽侯)에 버금가고
학문을 드높인 건 조주 자사(潮州刺史) 같도다.
한 조각 돌 위에 새겨 두는 뜻은
천추토록 길이 잊지 않기 위함일세.“
뒷면에는 “색리 허방익, 도감 유학 김징 숭정 기원 후 두 번째 정사년[1737] 삼월 일[色吏 許邦翊 都監 幼學 金澄 崇禎後再丁巳三月日]”이라고 적혀 있다.

1733 년 ( 영조  9) 5 월에서  1734 년 ( 영조  10) 11 월까지 기장 현감으로 재직할 때 그의 청렴하고 선정을 기리기 위해  1737 년  3 월 권적 청덕선정비 ( 權擿淸德善政碑 ) 가 건립되었다 .  선정비의 위치는 기장읍성 앞 기장공덕비군  內 (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285-7 번지 ) 에 있다 .

 

시랑대 외의 다른 자연석에 ‘엄신영 제우영(嚴信永弟宇永)’이라는 각자를 비롯하여 엄신영(嚴信永), 이후서 등을 비롯한 많은 인물들이 찾아 시를 남겨 놓았으나  1960년대 들어 구들장용으로 시랑대의 바위를 마구 훼손되어 지금은 겨우 두 수의 시문(詩文)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시랑대로 부르기 전에는 원앙대(鴛鴦臺)라 불리었고    이곳에 용녀와 얽힌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가뭄이 심하던 어느 여름날 마을 사람들은 미랑 스님과 함께 원앙대 아래 제룡단에서 기우제를 올렸다. 제가 끝나고 미랑 스님은 홀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지고 어느덧 달빛이 내리는데 용궁에서 동굴을 통하여 아름다운 용녀가 나타나 미랑 스님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어느덧 용녀는 만삭이 되었다.
원앙대에서 출산의 산고를 겪고 막 순산하여 탯줄을 끊을 여는 순간 큰 파도가 덮치려했다. 이 순간을 하늘의 옥황상제가 내려다보고서 평소에 착하기 짝이 없던 용녀를 구하기 위해 천마를 내려 보내 이들 모녀를 구해 천상의 옥녀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때 미랑 스님은 파도에 휩싸여 갔다.
지금도 원앙대 아래에는 용녀의 탯줄이 붉은 줄로 길게 바위에 박혀 있고 탯줄을 끊은 가위는 돌바닥에 모양이 남아 있다고 전한다. 그리고 파도가 치면 애절한 미랑 스님의 절규가 들려온다고 한다.

카페 공극에서 본 공수 해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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