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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군 해안가 두호(豆湖) 마을은 봉대산 아래 자리 잡은 어촌마을로 죽성리 200번지 일대이고 마을 북쪽에는 원죽마을, 남쪽에는 월전 마을이 있다이곳은 신라시대부터 해안 방어를 위한 수군 요충지로써, 특히 왜구 침입을 대비 한 곳으로 신라토성, 두모포 진성이 있다. 그리고 시조문학 대가 고산 윤선도가 이곳에서 유배되어 즐겨 찾던 황학대가 있고 마을 뒤 언덕에는 수령 300년 되는 소나무 다섯 그루와 마을 제당인 국수당의 어울림은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케 한다.

두호마을(죽성항) 전경으로 좌로부터 용두대, 황학대가 보인다
해송과 국수당

이곳 마을 바닷가 방파제에는 주말이면 낚시꾼과 캠핑을 즐기는 가족단위 여행객으로 만원을 이루며 바다 건너 맞은편은 옛날부터 명당이라 불리어지고 동해바다를 향해 뻗어있는 용두대가 있다. 또한 SBS 드라마 드림촬영장소인 성당이 있어 연인들로 붐비며 해안가의 넓고 장대한 바위는 시원한 동해바다를 느끼려는 관광객을 유혹하고 있다. 더불어 조선말 민초들의 아픈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사암이 있어 여행 맛을 더해 주고 있다.

SBS 드라마 드림 촬영장소

두호의 옛 이름은 두모포(豆毛浦)이고 우리말로는 두모개라 부른다세종실록에 두모포는 현의 동쪽 5리에 있는데, 수군만호가 지킨다고 하였다1765년에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두모포영은 인조 7(1629)에 동래로 진을 옮겼다고 하였는데 그때 부산으로 옮기면서, 그곳 이름을 두모포진이라 불렀고 진영과 함께 이 곳 마을 이름까지 없어지게 되었다현재 육안으로 확인되는 두모포진성은 죽성천(청강천)이 굽어지는 곳에서 서남쪽으로 논을 가로질러 남아 있고 민가 뒤편 축대로 사용되고 있다.

마을 뒤 편과  논을 구분시켜주고 있는 두모포진성

고산 윤선도가 창작활동 했던 황학대(黃鶴臺)

마을 선착장 뒤에 위치한 황학대(黃鶴臺)는 원래는 송도(松島)라는 섬이었다고 하며 암반위에 소나무 숲이 있는 곳으로 옛날에는 주변이 백사장과 수령 백년의 해송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이곳 지역 선비들이 모여 시를 짓고 놀았으며 남쪽 암벽에는 이곳 출신 진사 방치주(方致周)의 이름이 각인 되어 있다. 황학대의 이름 유래는 이곳으로 유배 온 고산 윤선도가 송도가 지형이 꼭 황학이 나래를 펼치고 있는 모습이라 하여 이름을 짓고 매일 찾았다고 한다. 기장현읍지(機張縣邑誌) 형성조의하면 황학대는 군의 동쪽 10리에 있다 고 기록되어있다.

황학대에서 보이는 용두대
황학대 남쪽 암벽에는 이곳 출신 진사 방치주 ( 方致周 ) 의 이름이 각인 되어 있다

고산 윤선도는 1616(광해군 8) 12월 전횡을 일삼던 예조판서 이이첨을 벌할 것과 유희분, 박승종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화가 되어 함경도 경원으로 귀양을 갔다. 그런데 국경지대의 귀양지는 중국인과 내통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1618(광해군 8)에 죄인들을 남쪽으로 옮겼는데 이때 윤선도도 기장으로 이배(移配)되었다. 기장은 한양에서 1,000리나 떨어진 변방에 위치하여 많은 선비들이 이곳 기장으로 유배생활을 했으며 조선시대 14번째 순위에 드는 유배지였다.

고산 윤선도가 이곳에서 지은 시조 영계(詠鷄)

고산 윤선도는 이곳에서 7년간의 유배생활을 하면서 시조 영계(詠鷄), 영일일화(詠一日花) 등 여섯 수를 남겼고 마을 뒷산 봉대산에서 자주 약초를 캐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여 마을사람들에게는 의원님이라 불렀다고 한다한 번은 어린 하인이 산에 땔나무를 구하기 위해 갔다가 신선같이 보이는 한 노인이 암석 이에 앉아서 시 한수를 써 주며, 돌아가서 네 어른(윤선도)에게 드리라고 하였고 이 어린 하인은 이를 받았는데 잠깐사이에 그 노인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봉래산 한 골짜기 남쪽 땅에 떨어지니 그 절경 천하에 드문 곳임을 알게 되었네. 산은 비단 병풍을 두른 듯 북쪽으로 비스듬히 따랐고, 개울물은 옥대를 두른 듯 동쪽을 돌아 흐르네. 나무 틈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빛은 언덕을 비추고, 안개 속에 내리는 저녁 비는 들녘에 자욱하네. 성긴 숲을 마주 앉아 한 마디 말과 솔솔 부는 바람에 푸른 담쟁이 넝쿨이 흔들리네.  

마을을 지키는 다섯 그루 해송과 국수당의 어울림

두호마을 뒤 나지막한 언덕에는 다섯 그루 해송과 제당이 오랜 세월 동안 마을을 지켜주며 바라보고 있다. 제당은 어부의 무사귀환, 풍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장소로서 당산할배 제당, 국수당, 또는 국시당이라고도 부르며 개벽 당시 하늘에서 신이 지상으로 내려올 때 제일 먼저 발을 디딘 곳이라는 전설에서 유래하여 부르게 되었다.

다섯 그루의 나무가 모여 마치 한 그루의 큰나무 처럼 보이는 해송으로 수령은 약300년으로 추정되며 직경 30m, 높이가 약 10m에 달한다. 국수당의 건립연대는 1933(癸酉年) 710일이라고 적혀있고 기와 맞배지붕에 벽은 돌을 쌓아 시멘트로 마감한 구조물이고, 문은 여닫이 외짝 나무문이다. 제당의 문에는 태극도형이 그려져 있다.

이곳에서 매년 1회 마을 제를 지내는데 마을 이장이 제관 또는 제주를 선정하여 정월 보름날 정오에 무당을 불러 제를 지낸다. 5년에 한 번씩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별신굿을 음력 정월 3일에 거행한다. 별신굿은 마을의 무속적 축제의 하나로 요즈음 풍어제라 부른다.

별신굿은 고대 부족국가의 제천의식이었던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의 무천(舞天) 등 국가적인 행사가 마을행사로 축소되고, 한편으로는 해변 어촌의 행사로 변천해 간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에 따라 매년 또는 2, 3, 5, 7, 10년마다 행하는데 요즈음에는 행사의 빈도가 점차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별신굿은 마을의 평안과 풍어 및 선원의 안전을 기원하는 마을 축제로 무격들의 예능적 기능이 가미되어 무악(巫樂)과 창() 및 오락적 예능이 뛰어나 주민들을 동참케 하는 개방적인 축제이다.

뛰어난 풍광과 명당으로 유명한 용두대(龍頭臺)

용두대(龍頭臺)산봉우리가 세 겹으로 둘러싸여 해안에 있는 야산으로, 용두대 이름 유래는 산의 지세나 형태가 용머리처럼 생겼다고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두호 마을 방파제 북쪽방향 바다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고 정상에 올라서서 사방을 바라보면, 뛰어난 풍광만 아니라 지관들에 의하면 옛 부터 명당이라 하였다.

황학대 뒤에 보이는 용두대

기장현읍지(機張縣邑誌)명승조에 용두대는 "()의 동쪽 8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용두대의 지맥을 보면, 용의 머리에 붙은 용의 목 부분이 잘록하여 두 사람이 함께 걷기가 어려우며 양면이 날카롭게 생겼고 용의 허리는 완만하게 세번 굽어지고, 꼬리는 뚜렷이 한쪽으로 뻗어 있어 한 마리의 용이 바다에 떠 있는 형국(形局)이라 한다.

이 지방의 풍수가들은 황룡부해지형(黃龍浮海之形)이라 하여, 좌에 유온천(有溫泉) 하고, 용의 여의주처럼 용두대 앞 바다에는 큰 바위가 줄지어 서 있다고 한다.

드라마 드림 촬영장소 성당과 용두대

지금은 안타깝게도 천부교 집단 정착촌인 신앙촌 소유지로 갈 수가 없어 먼발치에서만 바라볼 뿐이다. 마을 방파제에서 용두대를 바라보며 여타 신앙촌은 유명무실하나 기장 신앙촌만이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 명당은 명당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용두대는 현재 천부교 신앙촌 소유지에 포함되어 있어 일반인 출입은 불가능하다

천부교(天父敎) 집단 정착촌인 기장 신앙촌

기장 신앙촌은 천부교에 의해 1970228일 기장읍 죽성리, 학리, 삼성리, 동부리, 신천리 일원의 약 130만 평 부지에 건설이 시작되었다. 천부교는 소사신앙촌(부천, 1957111), 덕소신앙촌(1962721), 기장신앙촌 등 신앙촌 건설을 했고 기장신앙촌이 제3신앙촌으로 불리며 가장 크다. 천부교 교리에 따르면 세상의 종말이 오면 감람나무가 나타나는데 천년성(千年城)인 신앙촌에 들어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천부교 죽성교회. 일반교회와 천부교회의 구별은 천부교회는 십자가 대신 감람나무 잎을 물고 있는 비둘기 상이 있다 .

이곳 기장신앙촌은 천부교 시온그룹 관련기업 한일물산주식회사(면직물, 의복류 제조업; 제과, 장유제조업), 시온합섬 공업주식회사(양말 제조업), 시온식품공업주식회사(다과류 제조업), 반도금속주식회사(볼트, 넛트 제조) 4개 회사가 있다. 건평 약 4만 평 속에 있으며 임직원 도합 약 1,200여 명이 된다. 2013년에 개교한 시온식품 과학고등학교는 비인가 대안학교로 운영 중에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생명물 두부와 생명물 간장, '' 요구르트, 신앙촌 스타킹 등 공산품이 많이 알려져 있다.

천부교는 개신교 장로 중 한 명이었던 박태선(1917~1990)1955년에 창시한 반기독교 성향의 신흥종교이다. 초기에는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 약칭 '전도관' 라 했다. 박태선은 평안남도 덕천시 출신으로 창동교회(김치선 목사)에서 장로 안수를 받았고 1950년대에는 통일교와 함께 한국 신흥종교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1970년 기성교회의 심한 반대에 직면하였고, 19756월 장남 박동명의 7공자 사건으로 알려진 윤리적 스캔들까지 겹쳐 이미지가 악화되자 1980년 교리를 대폭 수정하고 한국천부교회로 개칭했다. 그 후 19902월 박태선이 사망하자 3남 박윤명이 뒤를 이어 교회를 다스리며 시온그룹 회장을 맡고 있다. 일반교회와 천부교회의 구별은 천부교회는 십자가 대신 감람나무 잎을 물고 있는 비둘기 상이 있다.

민초들의 아픔이 담긴 어사암(御史岩)

방파제에서 드라마 드림 촬영장소 성당을 지나 해안가에 넓은 바위군락을 만나 볼 수 있는데 남쪽 부분은 둥근 형태로 펑퍼짐하고 동쪽 부분은 한 마리의 매가 남쪽을 바라보며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양새라 하여 매바위 또는 응암이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1882(고종 19) 암행어사 이도재(李道宰)가 다녀갔다 하여 해안가 바위에 글자를 새겼는데 이를 어사암이라고 불렸다.  이도재, 관기 월매 그리고 어사암(御史岩)이란 글자와 오언절귀가 새겨져 있었으나 오랜 세월로 마모되어 알아 볼 수가 없다.

암행어사 이도재(李道宰)가 다녀갔다 하여 해안가 바위에 글자를 새겼는데 이를 어사암이라고 불렸다. 이도재, 관기 월매 그리고 어사암(御史岩)이란 글자와 오언절귀가 새겨져 있었으나 오랜 세월로 마모되어 알아 볼 수가 없다.

어사암에 얽힌 이야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894(고종 20) 일광 독이방(禿伊坊)에 있는 해창(지금의 문동리)에서 양곡을 가득 실은 조운선이 부산포로 향하다 이곳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계속된 가뭄으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던 어민들이 난파선에서 바다 밑에 흩어진 가마니 곡식을 건져 먹었다. 기장현청에서 이 같은 일은 절도라면서 관아에 붙잡혀 가혹한 고문으로 죽어나는 사람이 생겨났다.

한편, 조정에서는 정부양곡이 운반 중 수장되었다는 그 진상과 어민들이 곡식을 도둑질해 갔는지 등 파악하기 위해 이도재를 어사로 보내 조사를 하게 하였는데 현지 오찬에 참석했던 기장 관기 월매가 주민들의 어려운 사정과 그동안 관리들의 행패를 이야기하였다. 매바위에서 현장조사를 하게 되었는데 함께 온 월매가 바위에서 춤과 노래와 교태로 어사를 즐겁게 하였다. 어사는 그간의 사건을 종합해 본 결과 바다 속에 그대로 두면 썩을 곡식인데 그것을 건져 먹은 것이 어찌 절도가 되는가 하면서 어민들을 모두 석방시키라고 하였고 그 자리에서 오언절구의 시를 짓고 어사암이라는 글자를 바위에 각자하였다.

천공경무물(天空更無物), 해활난위시(海闊難爲時),

환구구만리(環球九萬里), 일위가항지(一葦可航之).

하늘이 텅 비었으니 보이는 것이 없고,

사나운 바다는 시객을 위해 춤을 추는데,

저 멀리 돛단배는 언제 무사히 돌아오려나.

매바위에서 바라본 두호마을

그 후 세월이 흘러 그 각자가 비바람에 마멸되자 주민들은 그 당시의 이도재 어사의 은공과 기생 월매의 인정을 잊지 못하여 이형은(李衡殷)이라는 사람을 청하여 어사암에 이도재(李道宰)라는 성명과 기월매(妓月)라는 세 글자도 함께 새기게 하였다. 월매(月梅)는 뒤에 혼인하여 월매(月梅)라고 하지 않고 월매(月每)라고 각자를 하였다.

이도재 생사단비(李道宰 生祀壇碑)를 세우다

조운선 양곡 절도의 원만한 해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기리기 위해 마을사람들이 이도재 생산단비라는 비를 세웠다. 생사단이란 고향 출신의 수령이 부임한 경우, 이의 탄생지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을 가리킨다이도재 생사단비는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292번지 기장초등학교 앞 기장공덕비군 내에 있다.

비의 재질은 석재이고 비석 머리는 둥글고 받침돌은 없다비의 앞면에는 비의 제목 수사 이공도재 생사단(繡史李公道宰生祀壇)’이라 되어 있고, 내용은 우리 고을에 왜 이리도 늦게 오셨나/ 그래도 하늘은 기필코 도우시네/ 수많은 폐단들을 모두 바로잡으시니/ 천추에 영원토록 기리오리다[來何暮兮 天必佑之 百弊咸正 千秌永祀]”라고 적혀 있다.

이도재 생사단비는 기장읍성 앞 기장공덕비군 內(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285-7번지)에 있다.

뒷면에는 광서 계미년[1883] 봄에 세우다[光緖癸未春立]’라고 적혀 있고 건립자에 관한 기록은 없다. 비의 크기는 높이 92.5, 너비 36, 두께 13이다.

수사 이공도재 생사단(繡史李公道宰生祀壇)
비의 앞면에는 비의 제목 ‘수사 이공도재 생사단(繡史李公道宰生祀壇)’이라 되어 있고, 내용은 “우리 고을에 왜 이리도 늦게 오셨나/ 그래도 하늘은 기필코 도우시네/ 수많은 폐단들을 모두 바로잡으시니/ 천추에 영원토록 기리오리다[來何暮兮 天必佑之 百弊咸正 千秌永祀]”라고 적혀 있다.

 

잊히어 가는 古城, 신라 토성

죽성리 3거리에서 원죽마을 방향의 죽성로와 월전마을 방향의 기장해안로 갈림길에서 기장해안로 따로 50m가면 좌측에 공동묘지가 있고 그 앞을 지나는 좌측 샛길을 따라가면 도자기를 굽는 소름요가 나온다소름요 입구에서 앞 구릉지에 있는데 예전부터 옹산이라고 불리우지고 있다이곳에 신라토성(기장읍 죽성리 631번지)이 있으나 철조망이 놓여 있어 출입을 할 수가 없다. 이유는 신앙촌 소유의 사유지이기 때문이다. 죽성리 왜성 또한 그렇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국가의 역할을 생각하게 한다.

소름요 입구에서 앞 구릉지에 있는데 예전부터 옹산이라고 불리우지고 있다.
이곳에 신라토성(기장읍 죽성리 631번지)이 있으나 철조망이 놓여 있어 출입을 할 수가 없다. 이유는 신앙촌 소유의 사유지이기 때문이다.
왼쪽부터 소름요, 죽성항이 보인다.

사유지 안에 있어 방치 된 문화재 및 유적지는 국가에서 매입하여 발굴, 조사 연구하여 그 결과물을 국민에게 알리는 것이 선조들의 역사를 대하는 현 후손들의 바람직 행동 일 것이다. 역사를 통한 교훈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 일환의 시작을 국가가 하여야한다.

주변 신라시대 관련 유적으로 온산읍 봉화산 강양리 성터(하산성), 서생면 화정리 숙마산성 등 있는 것으로 주로 해안가의 강과 합수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회야강 중심으로 아래쪽에는 숙마산성, 위쪽에는 강양리 성터가 있다.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일본열도의 왜구가 배를 타고 서라벌까지 최대한 가까이 침입하는 통로를 합수지역에서 차단, 방호하기 위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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