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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군 달음산 자락 아래 일광면 원리에는 20채의 집에 47가구가 살고 있는 광산마을이 있다. 마을 바로 상공에는 부산·포항 고속도로 고가도로가 마을을 관통하고 있어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을 요란스럽게 하고 있다. 그러나 달음산에서 내려오는 계곡수가 마을을 가로질러 시원한 멋을 내고 있어 위로가 되는 것 같다.

조용한 산촌마을을 연상케 하는 광산마을
마을 바로 상공에는 부산·포항 고속도로 고가도로가 마을을 관통하고 있어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을 요란스럽게 하고 있다
달음산에서 내려오는 계곡수가 마을을 가로질러 시원한 멋을 내고 있다 .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 때인 1930년대 일본 회사이름인 스미토모(住友)의 광산기업 계열사인 스미토모광업주식회사가 국내 자원약탈 목적으로 구리광산을 개발 및 운영 했던 곳이다. 스미토모는 미쓰비시(三菱), 미쓰이(三井)같이 일본의 3대 기업집단(재벌)이자 대표적인 전범기업이다. 일광(日光)의 일본식 발음 ‘닛코’를 따서 ‘닛코광산’으로 부르기도 했고 식민지 조선 내 5대 구리 광산 중 하나였다.

그리고 구리광산개발에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하고 구리 채광작업에는 휴일도 없이 매일 주간과 야간 2교대로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일주일에 두세 번은 장안읍으로 가서 군사훈련까지 받았었다. 당시 일광광산(닛코광산)의 노무자는 200명 정도로, 가까운 일광과 좌천 등지에서 온 사람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스미토모광업주식회사의 일본인 관리자 청사

우리나라에 구리광산이 처음 생겨서 생산 된 곳은 지금으로부터 약 354년 전인 헌종 재위 9년(1668년 1월 19일) 경남 거제도이다. 헌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거제지역에서 구리가 생산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구리가 나지 않다가 지금 비로소 생산된 것이다.」

여기서 채굴된 구리 등은 곧장 좌천역으로 옮겨져 열차에 실렸다. 당시 좌천역에는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는 시설인 급수탑이 선로 옆에 있었다. 옛 좌천역은 1934년 12월 16일 해운대와 좌천을 잇는 동해남부선이 개통되면서 문을 열었다. 1935년 12월에는 좌천과 울산, 1936년 12월 울산과 경주 선로가 추가로 개통됐다.

1934년에 지어진 옛 좌천역사
은행나무 세 그루가 옛 좌천역사를 지키고 있다.
좌천역 주변의 옛 모습
마을공동 우물
사람들의 마음은 늘 같다.

해방 후 간헐적으로 이어오다가 70년대에 점차 채산성이 떨어져 폐광되어 구리광산 마을기능은 상실하였다. 지금은 한국광해관리공단에서 폐광산 입구에서 유출되는 수질을 정화하기 위한 광해방지시설을 설치하고 있어 폐광산 입구를 볼 수가 없다.

한국광해관리공단에서 폐광산 입구에서 유출되는 수질을 정화하기 위한 광해방지시설을 설치하고 있어 폐광산 입구를 볼 수가 없다 .

달음산(고도 588m)은 정관면과 일광면 원리와의 경계를 이루며 기장 8경 가운데 제1경이 되는 명산이다. 산정은 주상절리로 형성된 취봉과 옥녀봉으로 되어 있다. 북쪽 산록에서 좌광천, 남쪽에서는 일광천이 발원하고 옛날에는 달이 뜨는 산이라는 뜻의 월음산(月陰山)이라고도 하였다. 기장현읍지에서는 취봉산(鷲峰山)이라고 적혀 있는데 옛 기장 사람들은 추봉산 또는 축봉산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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