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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릉에서 언양 쪽으로 가는 사거리에서 포석로를 따라 300m정도 가면 탑정주요소가 보이는데 여기서 옆길로 올라가면 나정이 나온다. 나정은 남산 서북쪽 송림이 울창한 구릉지대에서 위치하고 신라시조(新羅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가 태어난 전설을 가지고 있는 우물이다나정(蘿井)의 뜻은 담쟁이 덩굴이 우거진 우물이라는 것이다.

남산 서북쪽 송림이 울창한 구릉지대에서 위치하고 있는 나정(蘿井)

박혁거세(朴赫居世)가 나정에서 태어나서 13년 후 기원전 57년부터 신라 992녀의 장구한 역사가 시작되었다. 나정은 2002년부터 2005년까지 모두 4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하였다. 발굴 전에는 비각(碑閣)이 있었고 뒤편에 중앙 위치에 판석이 놓여져 있고 주위에는 4개의 돌이 규칙적으로 사방에 둘러져 있었다. 이 판석이 우물을 덮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비각 안에는 1803년(순조 3년) 2월 직제학 남공철(南公轍1760 ~ 1840)이 찬(撰)한 것을 경주부윤 최헌중(崔獻重) 쓰고 숭덕전 참봉 박광검(朴光儉), 도감 박사로(朴師魯) 등 박씨 문중이 세운 시조탄강유허비(始祖誕降遺墟碑)가 있었다.
비문 내용은 직제학 남공철이 43세 때 영남을 유람할 때 이곳 박씨 일족들이 찾아와서 우물을 옛 사람들이 메워버려 쉽게 그 전하는 바를 잃어버렸다고 하면서 혁거세의 탄생을 기념하는 비문을 청하였다고 한다. 이에 비문이 지었고 그 후 세월이 흘러 비문글자가 훼손되어 1929년에 참봉 박희동이 본인 부담으로 비석을 새로이 세웠다.
박씨 일족들의 시조 비문요청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유교의 장자상속제와 17세기 말 성행한 보학(譜學)과 관련이 있다.

1929년에 참봉 박희동이 본인 부담으로 비석을 새로이 세운 시조탄강유허비(始祖誕降遺墟碑)

나정에 대한 4차례의 발굴조사(2002년 ~ 2005년) 결과로 팔각 건물지, 청동기시대 주거지, 기타 유구 등이 확인되었고 1,39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시기별로 1차 시설에서 4차 시설로 구분되는데 1, 3차 시설 유구는 잘 남아있으나 2, 4차 시설은 파괴되었다. 이중 팔각건물지가 돋보이는데 국가제사시설로 보고 있다.
1차 시설에는 수혈유구(竪穴遺構), 주혈군(柱穴群), 구상유구(溝狀遺構), 목책 시설(木柵施設) 등 있고 조성 시기는 초기 철기시대이다. 수혈(竪穴)은 평면 타원형으로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이고 주혈군(柱穴群)은 가운데 수혈유구(竪穴遺構) 중심으로 원형으로 배치된 것으로 기둥을 이용한 상부시설물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4 차례의 발굴조사 (2002 년~ 2005 년 ) 결과로 발굴된 석재들

구상유구(溝狀遺構)는 수혈유구(竪穴遺構)를 중심으로 사방 외곽으로 변경 약 5m 떨어진 지점에 원형으로 둘러져 있다. 목책시설(木柵施設)은 수혈유구의 외곽을 감싸는 원형으로 설치되었고 직경은 약 28m 내외이다. 목책과 구상유구와 같은 2중의 경계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제의적 성격의 시설로 추정하고 있다.
3차 시설에는 가운데 팔각건물지와 남쪽의 회랑, 담장 등 있다. 팔각건물지의 축조 시기는 의봉 4년 개토(儀鳳四年皆土)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 기와가 출토 되어 문무왕 19년(679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679년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궁궐을 중수하고 동궁을 창건하는 시기이다. 따라서 나정의 3차 시설 역시 이 시기에 2차 시설을 폐기하고 확대, 조성하였다.

팔각건물지의 기단 한 변은 약 8m, 내부 면적은 약 300㎡이다. 팔각건물지 남쪽 중앙부에는 계단시설과 이와 연접하는 보도시설이 있다. 담장은 남쪽 회랑을 제외한 삼면에 만들어 졌다. 회랑은 후대에 축조된 축대와 도로로 인하여 일부 파괴되었으나 남-북 2칸, 동-서 16칸이며 가운데에 출입구가 있다.
발굴조사 결과, 나정의 자연지형은 원래 중앙부가 높은 완만한 등선이었다. 그런데 팔각건물지를 축조하기 위하여 2차 시설을 폐기하고 땅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그럼 박혁거세(朴赫居世)가 태어난 진짜 나정의 위치는 어디일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알천(閼川)과 동천(東泉), 양산(楊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6부 촌장들이 알천(閼川) 언덕 위에서 남쪽 방향으로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이라는 우물을 보았는데, 알천은 토함산 북쪽 황룡골에서 발원하여 보문단지를 거쳐서 내려와서 동, 서로 흐르는 북천(北川)의 신라시대 이름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박혁거세가 목욕한 동천(東泉)은 먼저 동천사의 위치가 중요한데 동천사(東泉寺)는 현재 동천동의 서북일대로 보고 있다. 그래서 동천은 알천 즉 북천의 지류로 낭산 방향으로 남북으로 흐르는 소하천으로 추정된다. 또한 양산(楊山) 알천의 남쪽에 있는 산으로 현재 낭산이 언제부터인가 양산이 개칭되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박혁거세는 낭산에 있는 어는 우물에서 태어났고 동천에서 목욕을 한 것이다.

국가제사시설인  팔각건물지로 사뭇 웅장한 느낌을 준다.

박혁거세 출생 관련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거서간 즉위년조와 삼국유사 기이제일 신라시조 혁거세왕조 내용을 살펴보자.
먼저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 박혁거세거서간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옆의 숲 사이에 말이 꿇어 앉아 울고 있었다. 그가 즉시 가서 보니 말은 갑자기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이 있었다. 이것을 쪼개자 그 속에서 어린아이가 나왔다.
그는 이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아이의 나이 10여 세가 되자 지각이 들고 영리하며 행동이 조신하였다. 6부 사람들이 그의 출생을 기이하게 여겨 높이 받들다가, 이때에 이르러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한 사람들은 호(匏)를 “박”이라고 하였는데, 처음의 큰 알이 박의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그의 성을 박이라고 하였다. 거서간을 진한에서는 왕이라고 하였다[혹은 귀인을 칭하는 말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1 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왕(赫居世王)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元年) 임자(壬子; 69, 고본古本에는 건호建虎 원년元年이라 했고, 건원建元 3년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잘못이다) 3월 초하루에 상부(上部)의 조상들은 저마다 자제(子弟)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 의논했다.
우리들은 위로 임금이 없어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모두 방자하여 저 하고자 하는 대로 하고 있다. 그러니 어찌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서 임금을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에 그들이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이라는 우물가에 번갯빛처럼 이상한 기운이 땅에 닿도록 비치고 있다. 그리고 흰 말 한 마리가 땅에 굻어 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곳을 찾아가 조사해 보았더니 거기에는 자줏빛 알 한 개(혹은 푸른 큰 알이라고도 함)가 있다.

그러나 말은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알을 깨고서 어린 사내아이를 얻으니, 그는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 놀라 이상하게 여겨 그 아이를 동천(東泉; 동천사東泉寺는 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에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따라서 춤을 췄다.
이내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 이에 그 아이를 혁거세왕(赫居世王)이라고 이름하고(이 혁거세赫居世는 필경 향언鄕言일 것이다.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니 밝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해설하는 자는 말하기를, “이는 서술성모西述聖母가 낳을 때의 일이다. 그런 때문에 중국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양한 말에, 어진 이를 낳아서 나라를 세웠다는 말이 있으니 바로 이 까닭이다한다.
또 계룡雞龍이 상서祥瑞를 나타내어 알영閼英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어찌 서술성모西述聖母의 현신現身을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위호(位號)를 거슬감(居瑟邯)이라고 했다(혹은 거居西干이라고도 하니 그가 처음 입을 열 때에 스스로 말하기를, “알영거서간閼英居西干이 한번 일어났다한 그 말로 인해서 일컬은 것이다. 이 뒤부터 모든 왕자王者의 존칭이 거서간居西干으로 되었다).

나정에서 보면 멀리 보이는 창림사지 삼층석탑

육부전(六部殿)과 육부촌(六部村)
육부전(六部殿)은 나정에서 동쪽으로 200m 가면 왼쪽에 자리 잡고 있다. 육부전은 육촌장(六村長)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1970년에 경주개발사업 때 건립되었고 양산재(楊山齋)로 부르다가 2019년에 강당을 새로 증축하고 육부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육부촌의 촌장의 실체는 고조선유민 또는 진인 등으로 추정되고 북방으로부터 각각 시간적 간격을 유지하며 경주지역에 도착 및 정착한 것으로 보고 있다. 돌산고허촌장과 무산대수촌장의 집단은 내륙으로 이동하여 왔으며, 나머지 네 집단은 동해의 해안을 따라 남하하거나, 해로를 이용하여 이동하여 왔다. 특히 명활산에 강림한 금산가리촌장 집단은 해로를 이용하여 현재 동해구가 있는 양북면에 도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육부촌장의 집단은 경주 중심지와 북쪽, 현곡면, 안강읍 남쪽 평야지대를 제외한 지역에 정착한 것이다.

육부촌 관련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거서간 즉위년조와 삼국유사 기이제일 신라시조 혁거세왕조 내용을 살펴보자.
삼국유사 기이(紀異) 1 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왕(赫居世王)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진한(辰韓) 땅에는 옛날에 여섯 촌()이 있었다.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이니 그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촌장(村長)은 알평(謁平)이니 처음에 하늘에서 표암봉(瓢嵓峰)에 내려왔으니 이가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노례왕弩禮王 9년에 부를 두어 급량부及梁部라고 했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940)에 중흥부中興部라고 이름을 고쳤다.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의 동촌東村이 여기에 소속된다).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이니, 촌장(村長)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처음에 형산(兄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량부(沙梁部; 은 도라고 읽고 혹 탁涿으로도 쓴다. 그러나 역시 도라고 읽는다)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 하여 구량벌(仇梁伐)마등오(麻等烏)도북(道北)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여기에 소속된다(지금이라고 한 것은 고려태조高麗太祖 때에 설치한 것이다. 아래도 이와 같다).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이다. 촌장(村長)은 구(; 라고도 씀) 예마(禮馬)이다. 처음에 이산(伊山; 개비산皆比山이라고도 함)에 내려왔으니 이가 점량부(漸梁(혹은 涿)),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한다. 여기에는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소속된다.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빈지賓之빙지冰之라고도 한다)이다. 촌장(村長)은 지백호(智伯虎)로 처음에 화산(花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본피부 최씨(本彼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 한다. 시파(柴杷) 등 동남촌(東南村)이 여기에 소속된다. 최치원(崔致遠)은 바로 본피부(本彼部) 사람이다. 지금은 황룡사(黃龍寺) 남쪽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옛 터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최후(崔侯)의 옛집임이 분명하다.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지금의 금강산金剛山 백율사栢栗寺 북쪽 산)이다. 촌장(村長)은 지타(祗沱; 혹은 지타只他)이다. 처음에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다. 지금은 임천부(臨川部)라고 하는데 물이촌(勿伊村)잉구미촌(仍仇弥村)궐곡(闕谷) 등 동북촌(東北村)이 여기에 소속되었다.
위의 글을 상고해 보건대, 이 여섯 부()의 조상들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다. 노례왕(弩禮王; 윤리왕倫理王) 9(32)에야 비로소 여섯 부()의 명칭을 고치고, 또 그들에게 여섯 성()을 주었다. 지금 풍속에는 중흥부(中興部)를 어머니로 삼고, 장복부(長福部)를 아버지, 임천부(臨川部)를 아들, 가덕군(加德郡)을 딸로 삼고 있다. 하지만 그 실상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 박혁거세거서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에 분산되어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의 양산촌이라 하고, 둘째는 돌산의 고허촌이라 하고, 셋째는 취산의 진지촌[혹은 간진촌이라고도 한다.]이라 하고, 넷째는 무산의 대수촌이라 하고, 다섯째는 금산의 가리촌이라 하고, 여섯째는 명활산의 고야촌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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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자락 남산동에 수백 년 된 배롱나무와 연꽃 그리고 정자가 어울러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서출지(書出池, 경주시 남산117)라고 불리는 신라시대 연못이 있다. 특히 배롱나무 꽃이 만발한 7~ 9월과 연꽃이 피는 7~ 8월에는 장관을 이루어 경주를 찾는 관광객이며 꼭 찾는 곳이다. 서출지에 있는 정자는 이름은 이요당(二樂堂)으로 팔작지붕의 정면 3, 측면2칸의 자형 건물로 조선 현종 5(1664) 풍천 임씨 임적이라는 사람이 지었다. 석조기둥을 사용하여 최대한 연못 가까이 세웠기 때문에 정자가 마치 연못에 떠있는 같이 보인다.

늦가을날 서출지의 이요당

서출지라는 연못의 이름 유래는 삼국유사 제1권 기이(紀異) 사금갑(射琴匣)과 관련 있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 21대 소지왕(炤智王) 또는 비처왕(毗處王) 즉위 10(戊辰, 488) 정월 15일남산 기슭에 있는 천천정(天泉亭)이라는 정자로 가고 있을 때, 까마귀와 쥐가 나타나서 그중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보시오하였다.

이때 왕이 기사(騎士)에게 명하여 까마귀를 따르게 했다. 기사가 남쪽 피촌(避村; 지금의 남산 동쪽 기슭 壤避寺村) 이 못에 이르러 보니,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다. 이것을 한참 쳐다보고 있다가 까마귀가 날아간 곳을 잃어 버려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때 한 노인이 못 속에서 나와 봉투를 기사(騎士)에게 건네줘 그것을 돌아와 왕에게 올렸다.

왕이 봉투를 살펴보니 겉봉에 이 봉투를 떼어 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떼어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에 왕은 두 사람을 죽게 하느니보다는 차라리 떼어 보지 않아 한 사람만 죽게 하는 것이 낫겠다.하여 봉투를 뜯지 않았다. 이때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두 사람이라 한 것은 서민(庶民)을 말한 것이요, 한 사람이란 바로 왕을 말한 것입니다.하여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떼어 내용을 보니 금갑(琴匣)을 쏘라(射琴匣]) 고 적혀 있었다. 왕은 곧 궁중으로 들어가 거문고 갑()을 쏘았다. 그 거문고 갑 속에는 내전(內殿)에서 분향수도(焚香修道)하고 있던 중이 궁주(宮主)와 은밀히 흉계를 꾸미고 있다가 발각되어 두 사람을 사형(死刑)에 처했다.

이 못에서 글이 나왔다 하여 못 이름을 서출지(書出池)라 하고, 정월 보름날은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오곡밥을 조금씩 담 위에 놓는데, 까마귀를 위함이다. 그리고 매년 정월 십이지일(十二支日) 중 첫 돼지날(上亥日), 첫 쥐날(上子日), 첫 말날(上午日)에는 모든 일을 조심하고 피하여 함부로 출입하지 않았다. 이언(俚言)에 이것을 달도(怛忉)라고 하였다.

신라의 불교 공인은 법흥왕 때 이루어졌다. 사금갑(射琴匣)을 통하여 불교 공인 이전부터 왕실에서는 불교를 믿고 궁궐 내에 절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화랑세기에 의하면 소지왕(炤智王)에게는 부인이 2명 있는데 정비 선혜부인과 후비 벽화부인이다. 여기에 등장한 궁주는 선혜부인이고 중은 묘심이다. 벽화부인은 당시 신라 사회에서 미모가 출중했으며 소지왕이 5009월 날이군(경북 영주)에 행차했을 때 후비로 맞이했고 그녀의 나이는 열여섯 살 이였다. 2개월 후 11월에 소지왕은 생을 마감했다. 벽화부인은 섬신공 파로와 벽아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녀의 남동생은 화랑의 시조인 위화랑이다.

소지왕은 20대 자비왕의 맏아들로 어릴 때부터 효성스러웠고, 겸손함과 타인을 공경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고 한다즉위 9(487)에 각 지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관도(官道)를 개척하였다. 또한 즉위 12(490)에는 도읍인 경주에 처음으로 시장을 열어 각 지역의 물자를 유통시킴으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강화, 확립하려했다. 또한 고구려 침입에 대비하여 즉위 15(493)에 백제 동성왕의 결혼요청을 받아들여 이찬(伊飡) 비지(比智)의 딸을 시집보냄으로써 결혼동맹을 맺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힘든 상황은 가뭄, 우박 등 천재지변과 고구려, , 말갈 등의 외침이었다. 말년에는 경국지색의 벽화에 마음이 사로잡힌 것이 그의 치세에 흠결 이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3 소지 마립간에 벽화와의 만남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2년 봄 3, 왜인이 장봉진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여름 4,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났다. 서울 사방에 누런 안개가 끼었다.

가을 9, 왕이 날이군에 행차하였다. 이 군에 살고 있는 파로라는 사람에게 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벽화라고 하였다. 나이는 열 여섯 살인데 실로 일국의 미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비단옷을 입혀 가마에 태우고 채색비단을 덮어 왕에게 바쳤다. 왕이 음식을 진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열어 보니 얌전한 어린 소녀였다. 왕은, 이는 정상적인 일이 아니라고 여겨 받지 않았다.

그러나 왕이 대궐에 돌아오자 그녀에 대한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왕은 두 세 차례 평복으로 갈아입고 그 집으로 찾아가 그녀와 관계를 맺었다. 어느 날은 도중에 고타군을 지나다가 한 노파의 집에 묵게 되었다. 왕이 노파에게 물었다.

오늘날 백성들은 국왕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노파가 대답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성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소. 왜냐 하면, 내가 듣건대 왕은 날이군에 사는 여자와 관계하면서 자주 평복을 입고 다닌다 하오. 무릇 용의 겉모습이 고기와 같이 생겼다면 어부의 손에 잡히는 것이라오. 지금의 왕은 만승의 지위에 있는데 스스로 신중하지 못하니 이런 사람이 성인이라면 누가 성인이 아니겠소?

왕은 이 말을 듣고 몹시 부끄러워하여, 즉시 남모르게 그녀를 맞이하여 별실에 두었다. 그녀는 아들을 하나 낳았다겨울 11, 왕이 별세하였다.

연꽃이 피는 7월 ~ 8월의 서출지와 이요당

서출지라는 연못은 강원도 강릉에도 있다. 강릉 남대천 남쪽 연화봉 아래에 있는 연못으로 전해 내려오는 전설은 다음과 같다.

신라 진평왕 때 무월랑이라는 풍류남아가 강릉에 고을살이로 왔고, 그때 강릉 땅에 연화라는 젊은 처녀가 있었다. 연화와 무월랑이 만나 사랑을 나누다가 무월랑이 경주로 되돌아가서 헤어졌을 때, 연화가 키운 잉어가 대신 편지를 전해주었다고 하여 서출지 또는 양어지라고 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결혼을 하여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이요당지(二樂堂池)에게 서출지 자리를 빼앗긴 양피제(讓避堤)

삼국유사사금갑에 나오는 피촌(避村), 피리사촌(壤避寺村)은 삼국유사 4권 피은(避隱) 8 염불사(念佛師)에 따르면 양피사지(讓避寺) , 서 삼층석탑 옆에 있는 양피저수지가 바로 서출지(書出池)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이요당이 있는 연못, 이요당지(二樂堂池)가 서출지(書出池)로 바뀌어졌다.

양피사지(讓避寺) 동 삼층석탑과 산수당(山水堂)
산수당과 양피저수지

동경잡기(東京雜記)에도 이요당(二樂堂)서출제(書出堤)에 대하여 지()와 제()로 구분하여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요당(二樂堂) 금오산 동쪽 기슭에 있다. 그 고을 사람 임적(任勣)이 지은 객당(客堂)이다. 앞쪽은 연못을 대하고 있는데 돌을 쌓아 층계를 만들고 인하여 누정(樓亭)을 지었다. 그 위에 올라가 보면 완연히 물 가운데 서있는 것 같다. 연못에 연꽃을 가득 심어 놓았는데 가을이면 무성하게 피어 만 떨기의 붉은 꽃이 찬란히 난간까지 비친다.

서출제(書出堤) 금오산 동쪽 기슭에 있다. 경주부 동쪽으로 15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17섬의 볍씨를 뿌린다.

양피저수지이자 서출제

양피저수지 옆에는 풍천 임씨(豊川 任氏) 소유의 산수당(山水堂)이 있다. 산수당은 풍천 임씨(豊川 任氏) 후손들이 1941년에 지어진 것을 2007년에 5칸 팔작지붕으로 증축했다. 3월에는 벚꽃, 7~ 10월에는 연꽃, 배롱나무 꽃이 절경을 이루어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풍천 임씨(豊川 任氏) 시조는 임온(任溫)으로 중국 소홍부 자계현 사람이다. 임온의 6세손 임주(任澍)1275년 고려 충렬왕의 왕비이자 원나라 황녀인 제국공주를 따라 고려에 들어와 귀화하여 대장군을 지내고 풍천(豐川)을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풍천은 황해도에 있었던 옛 지명이다. 임적은 풍천 임씨 19세손이다.

산수당과 양피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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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주(양남면·양북면·감포읍)지역 동해구의 문화유적답사 3각 포인트는 감은사지, 문무대왕릉, 이견대(利見臺). 이 중 감포읍(甘浦邑) 대본리 해안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는 이견대(利見臺)는 특히 사진애호가들이 일출 사진을 즐겨 찾는 곳이다. 맞은편에는 폐교된 대본초등학교가 있으며 이견대 아래는 바닷가와 인접한 횟집이 즐비하게 있고 좀 더 안쪽으로는 대본항이 있다. 이견대의 이름은 주역(周易)''비용재천(飛龍在天), 이견대인(利見大人)'이란 문구에서 따온 것으로 바다에 나타난 용을 보고 나라에 크게 이익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6825월 신문왕(神文王)이 이곳에서 동해용으로 부터 흑옥대(黑玉帶)만파식적(萬波息笛)을 만들 대나무를 얻었다.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아들 신문왕이 이곳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서라벌에서 수레를 타고 추령(楸嶺, 고도310m)고개를 넘어야 한다. 추령고개는 경주시의 동쪽에 있는 북천의 발원지인 황룡동과 대종천의 발원지인 양북면 장항리 사이에 있는 고개로 이름은 가래나무 추()’고개 령()’ 한자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다. 서낭당이 있어 서낭재라고도 불렀다. 경주시내와 동해안의 양북면·감포읍지역을 연결하는 최단코스이자 가장 낮은 곳이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때 4번 국도가 추령을 지나가게 건설되었다. 1998년에 추령터널이 개통되면서, 현재는 단풍구경을 위한 드라이브 코스로 이용되고 있다.

신문왕이 탄 수레가 추령고개를 넘어 용연폭포에서 점심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기림사에 도착하여 앞에 흐르는 대종천 지류인 호암천(虎岩川)에서 배를 타고 본류인 대종천을 만나기 위해 출발했을 것이다. 호암천(虎岩川)은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의 성황현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안동리에서 대종천에 합류하는 하천으로 호암(虎岩)은 순우리말 이름인 범바위에 대해 한자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다.

안동리에서 대종천을 만난 배는 동해방향인 하류를 따라 감은사 선착장에 도착하여 감은사에서 하루정도 묵으면서 여독을 풀었을 것이다. 다음날 감은사 뒤편 연화산 능선을 따라 이곳 이견대에 도착하여 부왕 문무대왕릉을 바라다보며 제를 지냈을 신문왕의 마음을 살펴보면 그의 효심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축성의 연대는 감은사와 문무대왕릉이 완공되는 시기로 추정되며 현재의 건물은 1970년대 발굴 때 건물지(建物址) 초석이 확인되어 이를 근거로 새로이 건립한 것이다. 이견대의 내부에 걸려있는 <利見臺記>에 의하면 신라五嶽조사단의 발굴로 문무대왕 해중릉이 대왕암으로 고증되면서 역사의 부침 속에 잊혀진 채 기우단(祈雨壇)이나 역원(譯院)으로 쓰였던 이곳 이견대도 함께 중건되었다는 내력을 전하고 있다.

이견대 관련 내용을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2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보면 다음과 같다.

31대 신문대왕(神文大王)의 이름은 정명(政明), 성은 김씨(金氏)이다. 개요(開耀) 원년(元年) 신사(辛巳; 681) 77일에 즉위했다. 아버지 문무대왕(文武大王)을 위하여 동해(東海) 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절 안에 있는 기록에는 이렇게 말했다. 문무왕(文武王)이 왜병(倭兵)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처음 창건(創建)했는데 끝내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왕위(王位)에 올라 개요(開耀) 2(682)에 공사를 끝냈다. 금당(金堂) 뜰아래에 동쪽을 향해서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으니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위한 것이다. 대개 유언(遺言)으로 유골(遺骨)을 간직해 둔 곳은 대왕암(大王岩)이고, 절 이름은 감은사(感恩寺)이다. 뒤에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했다.

이듬해 임오(壬午) 5월 초하루에 해관(海官) 파진찬(波珍飡) 박숙청(朴夙淸)이 아뢰었다. “동해 속에 있는 작은 산 하나가 물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는데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합니다.” 왕이 이상히 여겨 일관(日官) 김춘질(金春質; 혹은 춘일春日)을 명하여 점을 치게 했다. “대왕의 아버님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三韓)을 진호(鎭護)하고 계십니다. 또 김유신공(金庾信公)도 삼삼천(三三天)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 세계에 내려와 대신(大臣)이 되었습니다. 이 두 성인(聖人)이 덕()을 함께 하여 이 성을 지킬 보물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만일 폐하께서 바닷가로 나가시면 반드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얻으실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여 그달 7일에 이견대(利見臺)로 나가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살펴보도록 했다.

산 모양은 마치 거북의 머리처럼 생겼는데 산 위에 한 개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합해서 하나가 되었다. 사자(使者)가 와서 사실대로 아뢰었다. 왕은 감은사에서 묵는데 이튿날 점심 때 보니 대나무가 합쳐져서 하나가 되는데, 천지(天地)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치며 7일 동안이나 어두웠다. 그 달 16일에 가니 용 한 마리가 검은 옥대(玉帶)를 받들어 바친다. 왕은 용을 맞아 함께 앉아서 묻는다. “이 산이 대나무와 함께 혹은 갈라지고 혹은 합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용이 대답한다. “비유해 말씀드리자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오니, 성왕(聖王)께서는 소리로 천하를 다스리실 징조입니다. 왕께서는 이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부시면 온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이제 대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다 속의 큰 용이 되셨고 유신은 다시 천신(天神)이 되어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 하여 이런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보내시어 나로 하여금 바치게 한 것입니다.” 왕은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五色) 비단과 금()과 옥()을 주고는 사자(使者)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 가지고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때 산과 용은 갑자기 모양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왕이 감은사에서 묵고 17일에 지림사(祗林寺)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太子) 이공(理恭; 즉 효소대왕孝昭大王)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와서 하례하고는 천천히 살펴보고 아뢰었다. “이 옥대(玉帶)의 여러 쪽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 왕이 말한다. “네가 어찌 그것을 아느냐.” “이 쪽 하나를 떼어 물에 넣어 보십시오.” 이에 옥대의 왼편 둘째 쪽을 떼어서 시냇물에 넣으니 금시에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이내 못이 되었으니 그 못을 용연(龍淵)이라고 불렀다.

왕이 대궐로 돌아오자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천존고(月城天尊庫)에 간직해 두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병(敵兵)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 지면 날이 개며, 바람이 멎고 물결이 가라앉는다. 이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國寶)로 삼았다. 효소왕(孝昭王) 때에 이르러 천수(天授) 4년 계사(癸巳; 693)에 부례랑(夫禮郞)이 살아서 돌아온 이상한 일로 해서 다시 이름을 고쳐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했다. 자세한 것은 그의 전기(傳記)에 실려 있다.

감포의 이름은 지형이()’자처럼 생겨서 만들어졌다는 설, 감은포라 부르다자가 생략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둘 다 확실하지는 않다. 우리나라 마을의 순우리말 이름대부분이 한자의뜻이나 소리를 따서 기록하였다는 점에 기초하면, 감포리에 있는 순우리말이름인 감디 또는 감딧골과 물가를 의미하는가 합하여 한자의 소리와 뜻을 따서 감포리(甘浦里)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특히 감포항은 바다가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어 항구의 발달에 유리한 지형을 하고 있어 어항으로 발달하였다.

이견대(利見臺) 위치 진위 논란

이견대 위치에 대한 진위 논란의 발단은 황수영 박사가 불교신문(2002. 4. 30)에 기고한 佛跡逸話 경주 이견대칼럼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1961년 감은사지 발굴 이후로 인접한 이견대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1965년 오악조사를 계기로 이견대지를 본격적으로 탐사하게 되었다. 당시 이견대의 위치를 현재의 이견정(利見亭) 뒤쪽에 있는 산 위로 비정하는 주장과, 대본리 해변가로 보는 의견이 있었다. 산상설은 경주 유적에 밝은 최남주 선생이 주장하였고, 해변설은 마을의 노인들에 의한 것이었다. 나는 일단 촌로들의 말을 따라 그들이 말하는 지역을 1주일 동안 시굴해 보았다. 그 결과 비록 몹시 교란되기는 했으나 분명한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그리하여 이 자리를 이견대로 지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 자리는 조선시대의 역원(驛院)터일 뿐 신라시대의 이견대는 아닌 듯하다.

1965년의 시굴 직후 나는 일단 이견정의 위치를 발굴지로 비정하기는 하였으나 삼국유사등의 문헌에 보이는 축성(築成)’의 자취를 찾지 못한 것이 못내 개운치 못하였다. 그래서 그 뒤로도 부근의 해안가를 두루 둘러보았으나 여전히 그 자취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1995년 가을 예전에 최남주 선생이 말하던 산 위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그곳은 대본초등학교 뒷산으로, 현재의 이견정에서 국도를 건너면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내가 이 지역을 새삼스레 주목한 것은 최남주 선생의 말 외에 문무대왕릉 관리인인 김도진씨의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즉 그의 말이 현재는 없어졌으나 옛날에는 대본부락에서 감은사로 넘어 가는 길이 이 산으로 해서 나 있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인도로 산 위에 올라가 보았는데, 과연 약 4500평의 너른 대지가 있고 그 삼면에 인공으로 축석된 자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부근에 신라시대 와편이 보였고, 또한 커다란 민묘와 석비 1기가 있었다. 석비는 조선시대에 세워진 것인데, 비문 가운데 이견대(利見坮)’라는 글자가 보이기도 하였다. 이곳이 과연 고문헌에 보이는 이견대인지는 발굴 등의 정밀조사가 있어야 하겠으나, 한 눈에 동해구가 조망 되는데다가 서쪽으로는 감은사로 통하는 옛길의 존재도 짐작되었다. 이렇게 되면 삼국유사에 기록된 것처럼 신문왕이 이견대에서 동해의 문무왕릉을 참배한 뒤 만파식적을 얻은 다음 감은사로 가서 묵었다는 행적과도 일치된다. 그러므로 이곳이 이견대일 가능성은 매우 높아 보인다. 그리고 현재의 이견정 자리는 조선시대에 설치되었던 역원인 이견원(利見院)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칼럼의 핵심은 현재 이견대의 자리는 조선시대 역원인 이견원 자리인 것이다. 즉 이견대 내부에 걸려있는 <利見臺記>에 현재 자리가 기우단(祈雨壇)이나 역원(譯院)으로 쓰였던 곳이라고 기록한 배경을 술회한 것이다. 역원(驛院)조선 시대에 도성과 지방을 연결하던 교통 및 통신제도로써 도로로 연결된 중요한 곳에 역과 원을 설치해 왕명이 지방에 신속히 전달되도록 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는 데 기여한 제도이다. 역(驛), 원(阮)은 30리(11km)마다 설치하여 중앙관청의 공문을 지방관청에 전달하는 등 공무를 집행하는 관리들의 숙소와 교통 편의(말 제공 및 교환)를 제공하는 곳으로 역과 원은 서로 밀접한 관련 하에 설치되기 때문에 흔히 역원이라 일컬었다

현재 이견대 맞은편 대본초등학교는 폐교가 되었고 학교 뒤편 길을 따라 뒷산을 올라보면 넓은 평지와 함께 묘가 여러 개 있고 이 중 한 묘의 묘비에는 이견대 5(1.5m) 주변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주변을 살펴보면 석축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있고 마을에서는 뒷산을 뜸북재라고 부르는데 소로가 있어 감은사지는 물론이고 양북면 사무소까지 갈 수 있는 길이다. 여기서 문무대왕릉을 바라보면 동해의 절경에 한 폭의 그림 같다.

이견대 맞은편 폐교 된 대본초등학교 뒤편 길을 따라 뒷산을 올라가는 중 바라본 문무대왕릉
뒷산(뜸북재) 정상 초입
뒷산(뜸북재) 주변 축성의 흔적

 

뒷산(뜸북재) 정상을 올라보면 넓은 평지와 함께 묘가 여러 개 있다.
이 중 한 묘의 묘비에는 이견대 5자(약 1.5m) 주변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뒷산(뜸북재) 정상에서 문무대왕릉을 바라보면 동해의 절경에 한 폭의 그림 같다.

옛 문헌 중 이견대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이며 퇴계 성리학의 맥을 이은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 1541~1596)은 농암 이현보의 증손으로 그의 경주(동경) 여행기인 동경유록(東京遊錄)에는

1587418일 신라시대 감은사 터이다. 동쪽 산 한 줄기는 곧장 바닷가로 달려와 한쪽 모퉁이에서 끊어지는데, 깎아지를 듯 서있는 바위는 높이가 십여 길이나 되었다. 그 위에 단청(丹靑)된 누각이 우뚝 솟아 있으니, 이른바 이견대(利見臺). 동헌에 앉아 둘러보니 파도가 하늘에 닿을 듯 드넓게 넘실거렸다. 또 남쪽 포구에 바위가 솟아 몰아치는 파도와 거센 물결 가운데 우뚝 하였으니, 이른바 대왕암이다.

상기 문헌의 기록으로 이견대 위치를 유추해 보면 평지에서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 수 가 있어 뜸북재 민묘가 있는 주변이 이견대 위치로 합당하다고 여겨지고 현재 이견대(利見臺)는 이견원(利見阮)으로 공무를 띤 관리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주요도로에 설치된 관청으로 판단된다.

양북면 봉길리에서 바라본 대본초등학교 뒷산(뜸북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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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의당(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3)은 조선중기 무신 최계종(崔繼宗)이 말년을 보낸 조선후기 가옥이다. 동경잡기에는 다음과 같이 육의당에 대한 내용이 있다. 부의 동쪽 30리 토상호(吐上湖)가에 있다. 아름다운 경치는 또한 하나의 별천지이다. 현감 최계종이 지은 것이다육의당 앞에는 저수지가 있어 이를 옛적에는 토상호(吐上湖)라 불렸던 것 같다. 이 저수지 중심으로 둑을 쌓고 마석산(磨石山) 아래 안쪽에는 촌락이 형성되어 있고 바깥쪽에는 논농사를 하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마석산(磨石山)은 높이 531m로 산 정상에 있는 바위가 맷돌처럼 생겨 일명 맷돌산, 뺏돌산이라 부른다.

경주시 외동읍 제내리에 위치한 육의당 전경
현판에는 육의당, 석호정사라고 적혀있고 좌우에는 영쌍창이 보인다.

최계종(1570~ 1647)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승(慶承), 호는 육의당(六宜堂)이다. 인조 때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잠와(潛窩) 최진립(崔震立)의 동생이다. 임진왜란 때 숙부 최봉천(崔奉天), 형 최진립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4(선조 27) 무과에 급제하여 서생포(西生浦) 수군첨절제사를 거쳐 남포현감(藍浦縣監)에 제수되었으나 1618(광해군 10)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서궁유폐(西宮幽閉) 사건 때 벼슬을 거역한 죄로 유배되었다가 이후 풀려나 이곳 제내(堤內)에 그의 호를 딴 육의당을 지어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육의(六宜)는 돌을 다듬어 단을 쌓고 꽃을 심어 사시와 조석으로 알맞게 즐긴다는 뜻이다.

육의당 앞에 위치한 저수지로서 이름은 토상호라 생각된다.

육의당은 1619(광해군 11)에 세워진 후 4차례 걸쳐 중수하였다. 현재 후손인 최해구씨가 소유, 관리하고 있다. 건물의 정면 4, 측면은 1칸이지만 측면 기둥 간격이 다소 넓다. 안쪽 대청과 온돌방사이의 경계벽에는 사이 기둥을 두어 안에서는 마치 2칸처럼 보이게 한 점이 특이하다. 아담한 규모에 영쌍창을 비롯하여 창호형식이 눈길을 끈다. 영쌍창은 창문틀 가운데 설주를 세우고 이를 중심으로 양쪽에 외여닫이문을 쌍창처럼 설치한 것이다. 문보다 창의 기능이 강조된형식이다. 건물 정면 2개의 현판에는 육의당과 석호정사(石壕精舍)라고 적혀있다.

제내 마을의 드 넓은 평야로 사로국 때는 중요한 곡창지대로 생각된다.

이 곳 마을 이름은 '제내(堤內)', '돌매', '토상촌(吐上村)', '석동(石洞)'이라고 부르다가, 마을 앞의 토성계(土城谿)에 못을 막고부터 '제내(堤內) '이라 불렀고, 해방 후부터 '제내'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제내(堤內)는 순우리말 못 안 또는 줄 못 안에 대해 한자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다. 줄 못은 줄이라는 풀이 많은 못이라는 뜻이다.

외동(外東)의 지명은 동경잡기에 도음방도에서 하신까지가 외방(外坊)이라고 기록되어있는데, 현재의 외동읍보다는 범위가 좁다. 해동지도(경주)에 조선 후기 사료에 외방면으로 기록되어 있다. 1905년에 동쪽 방향의 면 중 바깥쪽에 있다는 뜻 의 외동면(外東面)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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