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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의당(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3)은 조선중기 무신 최계종(崔繼宗)이 말년을 보낸 조선후기 가옥이다. 동경잡기에는 다음과 같이 육의당에 대한 내용이 있다. 부의 동쪽 30리 토상호(吐上湖)가에 있다. 아름다운 경치는 또한 하나의 별천지이다. 현감 최계종이 지은 것이다육의당 앞에는 저수지가 있어 이를 옛적에는 토상호(吐上湖)라 불렸던 것 같다. 이 저수지 중심으로 둑을 쌓고 마석산(磨石山) 아래 안쪽에는 촌락이 형성되어 있고 바깥쪽에는 논농사를 하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마석산(磨石山)은 높이 531m로 산 정상에 있는 바위가 맷돌처럼 생겨 일명 맷돌산, 뺏돌산이라 부른다.

경주시 외동읍 제내리에 위치한 육의당 전경
현판에는 육의당, 석호정사라고 적혀있고 좌우에는 영쌍창이 보인다.

최계종(1570~ 1647)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승(慶承), 호는 육의당(六宜堂)이다. 인조 때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잠와(潛窩) 최진립(崔震立)의 동생이다. 임진왜란 때 숙부 최봉천(崔奉天), 형 최진립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4(선조 27) 무과에 급제하여 서생포(西生浦) 수군첨절제사를 거쳐 남포현감(藍浦縣監)에 제수되었으나 1618(광해군 10)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서궁유폐(西宮幽閉) 사건 때 벼슬을 거역한 죄로 유배되었다가 이후 풀려나 이곳 제내(堤內)에 그의 호를 딴 육의당을 지어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육의(六宜)는 돌을 다듬어 단을 쌓고 꽃을 심어 사시와 조석으로 알맞게 즐긴다는 뜻이다.

육의당 앞에 위치한 저수지로서 이름은 토상호라 생각된다.

육의당은 1619(광해군 11)에 세워진 후 4차례 걸쳐 중수하였다. 현재 후손인 최해구씨가 소유, 관리하고 있다. 건물의 정면 4, 측면은 1칸이지만 측면 기둥 간격이 다소 넓다. 안쪽 대청과 온돌방사이의 경계벽에는 사이 기둥을 두어 안에서는 마치 2칸처럼 보이게 한 점이 특이하다. 아담한 규모에 영쌍창을 비롯하여 창호형식이 눈길을 끈다. 영쌍창은 창문틀 가운데 설주를 세우고 이를 중심으로 양쪽에 외여닫이문을 쌍창처럼 설치한 것이다. 문보다 창의 기능이 강조된형식이다. 건물 정면 2개의 현판에는 육의당과 석호정사(石壕精舍)라고 적혀있다.

제내 마을의 드 넓은 평야로 사로국 때는 중요한 곡창지대로 생각된다.

이 곳 마을 이름은 '제내(堤內)', '돌매', '토상촌(吐上村)', '석동(石洞)'이라고 부르다가, 마을 앞의 토성계(土城谿)에 못을 막고부터 '제내(堤內) '이라 불렀고, 해방 후부터 '제내'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제내(堤內)는 순우리말 못 안 또는 줄 못 안에 대해 한자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다. 줄 못은 줄이라는 풀이 많은 못이라는 뜻이다.

외동(外東)의 지명은 동경잡기에 도음방도에서 하신까지가 외방(外坊)이라고 기록되어있는데, 현재의 외동읍보다는 범위가 좁다. 해동지도(경주)에 조선 후기 사료에 외방면으로 기록되어 있다. 1905년에 동쪽 방향의 면 중 바깥쪽에 있다는 뜻 의 외동면(外東面)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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