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봉화산(烽火山)은 해발 132.6m로 온산읍 강양리 산 66번지에 위치한 나지막한 산이다. 강양마을에서 바라다보면 2개의 봉우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북쪽 봉우리 아래는 저수지가 있어 낚시꾼이 가끔씩 찾고 있고 남쪽 봉우리에는  조선 전기에 축조 된 하산 봉수대(下山烽燧臺)가 있다.

특히 봉화산은 19744월부터 구리, 아연, 알루미늄 등 비철 금속 산업 육성을 위해 온산산업 기지개발 조성으로 정든 고향을 등져야했던 우봉마을, 당월마을 등 주민들이 떠나가는 모습과 환경오염에 의해 발생한 소위 한국판 이타이이타이병으로 알려진 공해병(公害病)인 온산병(溫山病)에 걸린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봉화산은 1974년 4월부터 구리, 아연, 알루미늄 등 비철 금속 산업 육성을 위해 온산산업 기지개발 조성으로 정든 고향을 등져야했던 우봉마을, 당월마을 등 주민들이 떠나가는 모습과 환경오염에 의해 발생한 소위 한국판 이타이이타이병으로 알려진 공해병(公害病)인 온산병(溫山病)에 걸린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우봉마을은 223세대 1,433명이 거주하였고 봉화산의 생김새가 소의 형상과 같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복어잡이 어획량이 국내최고로 유명한 어촌마을이며 해안가의 거북바위가 유명하였다. 그리고 당월마을은 335세대 1,975명이 거주하였고 예전에는 당포마을로 불렸으며 상어잡이 유명한 어촌마을이였다.

하산봉수대에서 바라본 화학공업단지로 변한 우봉 및 당월마을
하산봉수대 가는 길에서 바라본 우봉마을 바닷가 모습. 우봉마을은 223세대 1,433명이 거주하였고 봉화산의 생김새가 소의 형상과 같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복어잡이 어획량이 국내최고로 유명한 어촌마을이며 해안가의 거북바위가 유명하였다.

강양(江陽)’은 회야강(回夜江) 어귀에 있는 햇볕이 잘 들어오는 마을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한문 표기에서 ()’은 산의 남쪽, 강의 북쪽을 뜻하므로 회야강의 북쪽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조선 전기에 봉화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하산(下山)이라고 하였다. 조선 후기 정조(正祖) 때는 바다에서 볼 때 강()의 입구라서 강구(江口)라고 하였다.

하산 봉수대(下山烽燧臺)를 가기 위해서는 우봉리 바닷가 방향으로 봉화산 기슭에 위치한 금어사를 향하는 가파른 도로 따라 올라가서 도착한다. 그리고 사찰의 좌측 밭을 가로질러 오솔길을 따라 북서쪽으로 5분 정도 올라가면 하산 봉수대에 만날 수 있다. 유의할 것은 자동차를 몰고 오면 사찰 주차장이 마땅치 않아 도로변에 세워야한다.

하산 봉수대(下山烽燧臺)를 가기 위해서는 우봉리 바닷가 방향으로 봉화산 기슭에 위치한 금어사를 향하는 가파른 도로 따라 올라가서 도착한다. 그리고 사찰의 좌측 밭을 가로질러 오솔길을 따라 북서쪽으로 5분 정도 올라가면 하산 봉수대에 만날 수 있다. 유의할 것은 자동차를 몰고 오면 사찰 주차장이 마땅치 않아 도로변에 세워야한다.
봉화산은 낮은 해발에도 불구하고 수목이 아름답다. 하산 봉수대 가는 길은 그지 없이 아름답다.
금어사 주지 스님께서 매년 하산 봉수대(下山烽燧臺) 가는 길을 깔끔히 정리하신다.

 

금어사(金魚寺)는 주지 지월(智月)스님이 3년간 300만배를 수행한 사찰로 유명하다. 자정부터 새벽5시 까지 200배를 표시하는 바둑돌로 절한 숫자를 계산하며 하루 평균 2700배를 수행하였다. 지월스님이 속명은 김상봉으로 경남 진주 출신이다. 1980년 중반 폐결핵을 앓으며 부처님 가호로 물리친 뒤 불교를 만났고 1995년 부산 군수사령부 군무원으로 재직 중 지도법사를 수계, 1996년 구례 화엄사로 출가했으며 만나는 사람에게 세 번의 절을 하는 스님으로 유명했다. 이곳 우봉리에는 2001년 정착하여 금어사를 지었고 당시 미이주 40가구의 어린이 10명에게 수학, 영어 등 가르치는 등 선행을 실천하였다.

하산 봉수대는 부산 간비오 봉수(干飛烏烽燧)에서 시작된 봉화를 서울 목멱산[남산] 봉수로 전달하는 노선에 있는 다섯 번째 연변 봉수(沿邊烽燧)로써 문헌에 나타난 것은 1425년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부터이며, 이후 각종 지지서(地誌書)에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 축조되었고, 1895(고종 32) 전국 봉수 제도가 철폐되면서 폐지되었다. 경상도지리지에 울산군 소속의 하산 봉화(下山烽火)는 북쪽으로 가리 봉화(加里烽火)2317보의 거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금어사 주지 스님께서 매년 하산 봉수대(下山烽燧臺) 가는 길과 하산 봉수대 주변을 직접 낮으로 깨끗이 정리 하신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에는 울산군 소속의 하산 봉수는 군의 남쪽 50리에 소재하며 서쪽으로 이길곶 봉수(尒吉串烽燧), 동쪽으로 가리산 봉수(加里山烽燧)와 연결된다고 적혀 있다. 즉 남쪽의 울주군 서생면 나사리 이길 봉수(爾吉烽燧)에서 보내는 신호를 받아 북쪽의 남구 남화동의 가리 봉수(加里烽燧)로 보내는 역할을 하였다.

 

비교적 평탄한 산정에 남북장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현재 연대(煙臺)와 호() 등의 유구가 남아 있다. 불을 지폈던 연대의 아래는 방형(方形)으로, 위는 원형(圓形)으로 만들었다. 연대는 흙과 돌을 섞어 만들었으며, 남아 있는 높이는 3.5m 정도이다. 북동쪽이 무너져 정확한 둘레는 알기 어렵다. 'U'자형으로 판 방호벽은 북쪽에서만 뚜렷하게 확인되는데 너비가 5m 가량이다.

강양 해안길(강양 - 우봉)에서 바라 본 명선도

반응형
반응형

봉화앞들에서 본 신리해수욕장
봉화앞들에서 본 봉화산

봉화산은 해발 117m로 서생면 나사리에 위치한 나지막한 산이다나사 해수욕장과 간절곶을 품고 있는 봉화산은 산악 자전거와 트레킹 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용곡산 하늘길이라고 부르는 이 코스는 용곡산, 용골산, 울산전파관리소 중심으로 출발점은 동서남북으로 다양하다. 주로 발리에서 출발하여 서생포 왜성, 진하해수욕장 또는 송정마을로 도착하는 코스이나 위양리 위곡마을 위곡2, 나사리 봉화산 해맞이로 , 화정리 술마마을 술마길, 용리 덕골재길, 등 원하는 루트를 선택할 수 있다.

용곡산하늘길 종합안내도

봉화산은 국도31선을 따라 간절곶 방향으로 서생면사무소를 지나 신리해수욕장 뒤편 안내표지판과 함께 카페 HI FLORA를 찾으면 입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봉화산 정상에는 조선전기에 축조 된 나사봉수대(羅士烽燧臺) 또는 서생 이길 봉수대(西生爾吉烽燧臺)라고 불리는 연변(沿邊) 봉수대가 있다. 이 봉수대는 제2로 봉수로에 속하는 간봉(間烽) 중의 하나로 간비오 봉수대(干飛烏烽燧臺) 시작으로 기장군 장안읍 아이 봉수대(阿爾烽燧臺), 북쪽으로는 온산읍 강양리 하산봉수대(下山烽燧臺)로 차례로 연결된다.

봉화산은 국도31선을 따라 간절곶 방향으로 서생면사무소를 지나 신리해수욕장 뒤편 안내표지판과 함께 카페 HI FLORA를 찾으면 입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봉화산 초입 길은 시멘트길이나 200m정도 지나면 비포장길을 만난다.
봉화산 정상에는 조선전기에 축조 된 나사봉수대(羅士烽燧臺) 또는 서생 이길 봉수대(西生爾吉烽燧臺)라고 불리는 연변(沿邊) 봉수대가 있다.

이곳의 봉수대는 불을 지피던 연대(煙臺)의 평면형태는 말각방형에 가까우며 하부둘레 30m, 높이는 250cm내외이다. 연대의 동쪽은 많이 허물어진 상태이나 남쪽이 비교적 양호하게 잘 남아있다. 연대 상부 중앙에는 원형의 연소실이 잘 남아 있는데 직경 220 ~ 230cm, 높이 60~70cm, 상부 폭 80cm 이다. 또한 남쪽과 북쪽에 걸쳐 상부 폭 90cm의 단면 U 자형 출입시설이 있으며, 연대 주위에는 남쪽을 제외한 3면에 방어용 ()시설이 있는데 폭 3.5m이다.

 

문헌에 나타난 것은 1425년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부터이며, 이후 각종 지지서(地誌書)에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 축조되었고, 1895(고종 32) 전국 봉수 제도가 철폐되면서 폐지되었다. 경상도지리지에 울산군 소속의 이길 봉화(尒吉烽火)는 북쪽의 하산 봉화(下山烽火)39340보의 거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봉수(烽燧)는 봉화(烽火) 또는 낭연(狼煙)이라고도 하는데, 조망이 유리한 높은 산에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는 군사통신제도이다. 역마(驛馬)나 인편(人便)보다 시간이 단축되어 지방의 변고나 국경지방의 병란 등을 중앙과 진보(鎭堡)에 신속히 전달하여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는 군사통신 네트워크로, 국가의 안보와 국민의 안위를 지키는 목적으로 설치, 운영되었다.

우리나라의 봉수제도는 삼국시대 초기부터 사용되었다. 三國遺事駕洛國記에 의하면, 가락국의 김수로왕이 허황후를 맞이하기 위해 봉화를 사용했다는 기록에서 봉수의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봉수제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들이 나타난다. 高麗圖經에는 인종 원년(1123) 송나라 사신들의 도착 사실을 흑산도에서 왕성까지 봉화를 순차적으로 밝혀 중앙에 보고한 기록이 있으며, 高麗史에도 봉수 관련 기록들이 확인된다. 의종 3(1149) 봉수의 거화수를 규정하고 봉수군에게 생활대책을 마련하고 감독책임자를 배치한 기록, 우왕 3(1377) 강화에서 봉화를 올려 왜의 침입을 알린 기록, 우왕 14(1388) 왜의 침입에 따라 밤마다 봉화가 여러 번 올랐다는 기록 등이 이에 해당한다.

조선시대에는 종래에 계승되어 온 고려의 봉수제를 근간으로 세종 대에 5거제를 비롯한 조직과 기능을 전국적으로 확립하였다. 세종 원년(1419) 봉화의 수를 5거제로 구분하였으며, 세종 5(1423)에 중앙의 경봉수로 최종 집결하는 5거제의 노선이 확립되었다. 또한 세종 28(1446)부터 29(1447)까지의 대대적인 개혁을 통해 봉수제 전반에 걸쳐 체제를 정비하여 봉수제를 확립하였다. 이는 經國大典의 봉수조에 실린 규정의 원형을 이루었다.

이길봉수대에서 본 나사리 바다

 

그러나 봉수는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안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전쟁이 발생하였을 때에는 정작 제구실을 하지 못하거나 잘못 전달되는 등의 폐해가 많았다. 이로 인해 선조 30(1597), 서발(서울-의주), 북발(서울-경원), 남발(서울-동래)3대로를 근간으로 한 파발제도를 실시하여 이를 보완하였다. 이후 봉수제는 근대적인 통신방식이 도입됨에 따라 고종 31(1894)을 끝으로 폐지되었다.

봉수제가 확립된 조선시대는 전국의 봉수를 두만강, 압록강, 경상도, 전라도의 국경지역을 기점으로 5로의 직봉을 설치하여 경봉수인 중앙의 목멱산에 집결되도록 하였다. 여기서 제1·3·4로는 여진족 등 북방민족의 침입을, 2·5로는 왜의 침입에 대한 해안 방어를 목적으로 구축되었다.

봉수는 설치 목적과 성격에 따라 경봉수(京烽燧내지봉수(內地烽燧연변봉수(沿邊烽燧) 등으로 구분된다. 경봉수는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봉수로서 서울의 목멱산봉수가 이에 해당한다. 연변봉수는 해륙변경의 제1선에 설치하여 위치상 적의 접근을 알리는 최초의 봉수대인데, 적의 공격 목표가 되기 쉬운 시설물이었기 때문에 유사시에 대처할 수 있는 화기와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내지봉수는 육지의 내륙에 설치되어 연변봉수와 경봉수를 연결하는 중간봉수의 역할을 하였다. 그 밖에 군사적 요충지에 자체적으로 설치하여 한시적으로 운영한 권설봉수(權設烽燧)가 있다.

봉수대는 크게 중심시설과 보조시설로 대별된다. 중심시설은 봉수의 주기능인 대응봉수 간의 후망을 통한 신호전달의 시설로서 연조, 연대, 방호벽 등이 있다. 보조시설은 봉수대 군영을 위해 축조된 생활 관련 시설로서 주거지, 창고 등이 있다.

봉화산 초입에 위치한 카페 HI FLORA의 랜드마크인 호접란
호접란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