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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7.22 청산리대첩의 잊혀진 영웅과 장산 모정원(母情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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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근호(姜槿虎) 선생(아명 : 강난선, 이명 : 강화린, 강화인)1898113일 함경남도 정평군 신상면 조양리 277번지에서 부친 강형석(姜亨錫)과 모친 신해운(申海雲)의 차남으로 출생하여 1916년 만주로 망명, 1920년 초 신흥(新興)무관 학교를 졸업하고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사관연성소 구대장과 교관을 역임한 청산리 전투의 주역이다.

청산리전투라 하면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 장군과 개인회고록을 남긴 철기 이범석 연성대장을 제외하면 널리 알려진 전사(戰士)는 거의 없다. 청산리 전역에서 직접 총을 들고 조국독립을 위해 여러 전투에 참전했던 650여 명에 달하는   무장독립군의 활약상은 아직도 묻혀 있다.

여기 애국지사 강근호 선생도 그들 중의 한 명이었다. 강근호 애국지사의 조국 광복 투쟁은 지난 2002년 그의  전기(傳記) 만주벌의 이름 없는 전사들이 출간됨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독립 후 선생의 나이 52세 때인 1949년에 육군사관학교 제84차로 입교하여 육군소위로 임관되어 한국동란에 참전하는 등 군인으로서 임무를 다하고 1956년 육군중령으로 전역하였다.

부산으로 이주한 선생은 영도구 영선동에서 정착하여 살다가, 1960년 향년 63세로 세상을 떠났다생전에 부인 이정희 여사에게 내 자식들이 성장하면 청산리전투에서 산화한 독립군을 위해 작은 돌비석이라도 하나 세워주기 바란다.”는 말씀을 유언처럼 이야기 하였다.

처음에는 그의 유해(遺骸)를 제대로 눕힐 공간조차 없어 영도 봉래산에 가 매장한 것을, 1964년 장산 모정원으로 이장하였다. 그 후 26여 년 동안 아내가 세워준 비목(碑木) 곁에 잠들어 있다가, 지난 1990년 드디어 그에게 대한민국 건국 애국훈장이 추서되었고, 그 해 127일에 유해가 대전국립묘지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다시 이장되었다.

모정원은 강근호 애국지사의 아내 이정희 여사가 1964년 해운대 장산 개척단장으로 있을 때부터 생활 하던 곳으로 자식을 그리는 어머니의 애틋한 심정을 생각나게 하는 동산이란 뜻이며 강근호 애국지사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정희 여사는 20161021일 소천 할 때까지 여기서 만년을 보냈으며 대전국립묘지 현충원에 강근호 애국지사와  함께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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