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임랑(林浪) 해수욕장의 멋은 월호추월(月湖秋月)이라!

임랑해수욕장에서 바라본 월래와 고리원자력발전소

예로부터 호수처럼 맑고 잔잔한 바다에 떠오르는 달을 월호(月湖)라 하고 그 월호에서의 가을 달맞이가 경승(勝景)이라 하였고 병풍처럼 펼쳐진 송림 위에 달이 떠오르면 조각배를 타고 달구경을 하면서 뱃놀이를 즐겼던 곳으로 차성팔경 중 하나가 임랑해수욕장이다. 이러한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옛 문헌에서는 동산(東山) 위에 달이 떴으니 월호(月湖)에 선유(船遊)한다 라고 예찬하였다.

임랑해수욕장은 정관에서 흘러온 좌광천(임랑천)이 유입하여 모래톱을 형성하면서 생긴 해수욕장으로 모래사장 길이가 1km이다. 예전에는 백사장 주변이 노송으로 병풍처럼 푸른 숲을 이루었고 좌광천이 맑아 쏘가리 천렵(川獵)을 했다고 한다. 현재는 정관 신도시로 인하여 수질이 좋지는 않고 송림도 많이 사라졌지만 요즈음 문화에 맞는 볼거리와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임랑교 아래 정관에서 흘러온  좌광천의 모습
임랑해수욕장 방파제 사이를 지나  동해로 유입하는 좌광천
임랑교 상부
임랑교에서 바라 본 좌광천

임랑해수욕장은 울주군 서생면과 경계를 두는 기장군 장안읍에 위치하고 있는 해수욕장으로 여름철이면 피서객이 많이 찾는 해수욕장이다. 특히 최근에는 캠핑 붐으로 인해 사계절 내내 여행객으로 붐비는 곳이다. 또한 부산 갈맷길의 출발점이기에 중년의 부부, 중장년층 단체 관광객 등 트레킹을 찾는 이들과 정관과 임랑 사이에 흐르는 좌광천을 따라 달리는 MTB 및 사이클 동호회 인으로 분주하고 역동적인 해수욕장이다.

청암 박태준 기념관

여행에 여유가 있다면 기업가이자 정치가인 청암 박태준 기념관을 둘러보는 것도 솔솔한 재미가 있다.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의 고향이 임랑이고 생가가 여기에 있다. 임랑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기념관에서 60 ~ 70년대 대한민국의 경제적 상황, 시대모습 그리고 포항제철(포스코) 창립, 성장과정을 엿 볼 수 있다.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의 젊음 때의 모습
기념관 옆에 위치하고 있는 박태준 전 회장의 생가
임랑해수욕장 민박주변의 골목길

그리고 따뜻한 커피 한잔에 파도를 감상하고자 하면 가수 정훈희가 운영하는 카페 Garden Flowers(꽃밭에서)를 찾는 곳도 좋을 듯하다. 카페 이름 "꽃밭에서는" 그녀가 불렸던 노래 제목이다. 최근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애잔한 심금을 울리는 노래 안개”는 정훈희와 송창식이 듀엣으로 불렀던 노래로서 최근 방문객의 발길이 잦다. 사실 정훈희는 70년대를 대표하는 여자가수로 몇 차례 국제음악대회에서 수상을 했다.

가수 정훈희가 운영하는 카페 Garden Flowers(꽃밭에서)

임랑(林浪)의 옛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당시 임계안(林溪岸) 뒷산에 왜적들이 성을 쌓고 이 성을 임성(林城)이라 하였는데 그 후 유(), (), (), (), ()씨 등이 정착하여 이들 다섯 성씨가 본 마을의 숲이 울창하고 물결이 아름답다 하여 수풀 임()자와 물결 랑()자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는 임랑(林浪)의 옛 이름은 임을랑(林乙浪)’이며 임랑으로 바뀐 것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마을에 숲이 우거지고 바다 물결이 아름다워, ‘수풀 림()’ 자와 물결 랑()’ 자를 따서 불렀다고 한다.

반응형
반응형

장안읍은 기장군 북부에 위치한 읍으로 장안의 유래는 이 고장의 이름난 사찰인 장안사에서 따온 것으로 생각된다. 한자(漢字)를 보면 길게, 오랫동안의 장()과 편안할 안()을 합하여, 오래도록 편안하고 평화스러운 읍()라는 뜻이다. 불광산(佛光山) 골짜기에서 발원하는 장안천이 역내(域內) 중앙부를 남북으로 관류하고 있고 이를 중심으로 좌우에 명례장안기룡용소반룡월내길천 등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지역  중심은 기룡리 하근마을이다. 장안천은 옛날에는 건천(乾川), 용천(龍川)이라 하였다. 건천은 마르내고, 용천은 미리내다. 모두 머리내로서 큰 내, 으뜸가는 내라는 뜻이다.

옛 부터 이 지역 마을에 다섯 마리의 용이 있는데기룡, 반룡, 용소, 대룡와 개천마을로 이름하여 오룡(五龍)이다. 개천마을에도 용이 있다는 것이다. 오룡 (五龍) 중 용소의 용은 등천하였으니 등천룡이고, 개천의 용은 강속에 누워있으니 와룡이고, 반룡의 용은 등천하려고 몸을 서리고 있는 반룡이고, 대룡의 용은 큰 바위로 화하였으니 대암룡이고, 기룡의 용은 강을 기어가고 있으니 복룡이라는 것이다.

신라 문무왕이 심은 장안리 느티나무

장안읍 장안사로 가는 길의 윗 장안마을 우측에 천년을 살아온 느티나무가 있다. 수령은 1,300년으로 신라 문무왕이 지나가다 심은 나무로 애장왕이 쉬어가기도 하였다는 유서 깊은 노거수다. 높이 25m, 둘레 8m1978년 보호수로 지정되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느티나무로 1999년 산림청에서 새천년을 맞이하여 대표하는 밀레니엄 나무로 지정됐다. 그러나 태풍 "매미" 의 피해를 받아 한쪽 큰 가지가 부러져 예전만큼 풍부한 녹음을 볼 수는 없지만 노쇠 되지 않은 푸르름은 지나가는 이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아홉 공주가 쌓은 우시산국(于尸山國)의 애절한 마지막 왕비 릉(王妃 陵)

장안읍은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에 동래지방을 중심으로 존재한 거칠산국(巨柒山國)과 일정한 정치적 연계를 가지고 존재하였을 것을 생각된다. 그리고 신라에 정복된 이후 신라의 갑화양곡현이 되었다. 통일신라 경덕왕 16(757)에 이르러서는 기장현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됨에 따라 그에 소속되었다. 이 시기 기장현은 동래군의 속현으로 존재하였다.

기룡리 장안초등학교를 지나서 하근마을 기룡다리로 기룡천을 건너 도로좌측의 송림에 옛날 왕비 능이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삼한시대 말엽쯤 오늘날의 울산시 울주군 웅촌면 검단리에 우시산국(于尸山國)이라는 작은 부족국가가 있었는데 신라의 침략을 받아 병합이 되었다그 침략으로 왕과 왕자는 포로로 잡혀가고 왕비만 아홉 공주를 데리고 탈출하여 지금의 기룡리 근처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곳도 신라의 손길이 뻗쳐 신라군이 왕비와 공주를 찾고 있었다. 왕비와 아홉 공주는 신분을 숨기고 평민으로 가장하여 남의 집 농사일을 도우는 품팔이를 하며 움막집에서 살았다.

지금 왕비 능으로 전해지고 있는 송림은 어느 문중의 소유로 넘어가 나무와 잡목이 무성해 사람이 들어가기 힘들 정도가 되었고 봉분 또한 잡풀이 자라서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그러는 가운데 왕비는 포로가 되어 끌려간 왕과 왕족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 생사 여부에 대한 근심, 걱정과 몸에 익숙지 못한 농사꾼의 고된 일에 몸과 마음이 지쳐 병을 얻어 숨지자 아홉 공주는 어머니 시신을 마당 한가운데 묻고 제각기 흩어져 살았다. 그러나 해마다 3월 보름이면 어머니 무덤가에 모여 치마폭에 흙을 담아 초라한 어머니 무덤을 밤을 꼬박 새워가며 봉분을 쌓았다.

그러고 나서 각자가 장만하여 온 화전과 음식을 차려놓고, 제문을 지어 어머니의 넋을 위로하였다. 해마다 치마폭에 담은 흙으로 쌓은 봉분은 세월이 갈수록 큰 봉분이 되어 왕릉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아홉 공주의 변함없는 효심과 자매간의 깊은 우애가 알려져 아홉 공주가 살고 있던 마을의 부녀들도 그날이 되면 모두 이곳 무덤에 모여서 아홉 공주의 아름다운 행실을 기리며 축제를 하게 되었다부녀자들은 이곳에 모여 아홉 공주의 효성과 우애를 기리는 작문도 하고 작시도 하고 시집살이의 고달픈 사연도 함께 호소하면서 이웃끼리 정도 두텁게 하였다. 이런 아름다운 풍습은 이곳 이웃마을에서 천오백년이나 끊임없이 이어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하여도 해마다 음력 315일이 되면 이러한 풍습은 계속 되었다. 그리고 계를 모아 그 돈으로 좋은 일도 많이 하였고 그 당시의 계 장부와 작문집도 시집간 어느 할머니가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그러나 이런 좋은 풍습이 계승되지 못하고 사라져 전설로만 남게 되었다. 지금 왕비 능이 있는 송림은 어느 문중의 소유로 넘어가 나무와 잡목이 무성해 사람이 들어가기 힘들 정도가 되었고 봉분 또한 잡풀이 자라서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과연 전설 그대로 이곳이 실제 왕비 능일까? 단지 능과 같이 한 주변 소나무는 알 것이다.

봉분 앞 무궁화꽃이 왕비의 넋을 위로 하듯 만발하게 피어있다.

보부상(褓負商) 배상기(裵常起) 업적을 기린 비석

고리원자력본부에서 임랑해수욕장 방향으로 장안천을 월내교로 건너면 우측에 송림이 울창한 공원이 있는데 명칭이 월내어린이공원이다. 이곳에 보부상 출신이었던 배상기(裵常起)의 업적을 기린 비석 3기가 나란히 서 있다제각각 세운 시기를 달리하면서 동일 인물의 비석 내용도 다르면서 한자리에 있는 것이 독특하다. 그 만큼 이곳에서 배상기의 공덕이 매우크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 비석을 통하여 일제강점기 때 보부상(褓負商)의 조직체계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배상기(裵常起)란 인물을 알아보면, 1842년 전북 익산 부잣집 종손으로 태어나서 구한말 민란 주모자로 연루되어 가족을 이끌고 고향을 떠나면서 보부상 무리에 섞여서 1860년대 월내에 정착하였다. 월내에 정착한 그는 동해안 보부상 최고 수령인 반수(班首)가 되었고 멸치잡이와 젓갈로 많이 번 돈으로 빈민 구제와 장학 사업에 매진했다. 1895년 갑오년 큰 흉년 때는 월내와 좌천 장날마다 가마솥을 장터에 내걸어 굶주린 사람을 구휼했다. 일제강점기 때 독립자금을 대기도 했던 그는 192079세를 일기를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장안읍 용소리 시명산 8부 능선에 있다.

세워진 시기 별로 비석을 살펴보면 1904(고종 8)에 세워진 좌우사 반수 배상기 휼상 영세불망비(左右社 班首 裵常起 恤商 永世不忘碑)이다. 좌우사 반수(左右社 班首)는 보부상 조직의 우두머리 직책이고 비석 전면 양쪽에 새겨진 반수, 접장(接長), 감역(監役) 들은 보부상 조직 직책이다. 세부적으로 보면 좌우사는 조선말기의 보부상 조직이고 반수는 보부상 조직의 우두머리이며 그 아래에 부반수, 주사, 접장, 감역, 공원 등이 있다.

부상(負商)과 보상(褓商)은 각 별개의 행상조합으로 성장하였으나, 1883년 혜상공국이 설치되면서 통합되었고, 1885년 상리국(商理局)으로 개칭되면서 부상을 좌단(左團) 좌사(左社)라 하였고, 보상을 우단(右團) 우사(右社)라고 하였다. 특이하게도 같은 비석의 후면에 다른 이의 공덕이 적혀있다. 즉 후면에는전 주사 접장 김상명 출의 영세불망비(前 主事 接長 金相明 出義 永世不忘碑)라 새기고 김상명이 성금을 낸 일을 기리는 내용이 담고 있다.

두 번째는 1913년에 세워진 비석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계 휼리비(通政大夫 裵公 常起 刱契 恤里碑)이다통정대부는 조선시대 문관 정3품 당상관의 품계이다. 비석이 세울 당시는 한일늑약 3년 뒤인 일제강점기 때 통정대부란 관직명을 사용 가능한지가 궁금하다. 비문에는 계를 형성하여 마을을 도운 일을 기리고 있다.

세 번째는 1917년에 세워진 비석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숙 장학비(通政大夫 裵公 常起 刱塾 獎學碑)이다. 비문에는 배상기가 글방을 열어 학문을 장려한 일을 기리고 있다.

왼쪽부터 비석명이 "좌우사 반수 배상기 휼상 영세불망비,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숙 장학비,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계 휼리비"이다
좌우사 반수 배상기 휼상 영세불망비(左右社 班首 裵常起 恤商 永世不忘碑)

捐金數千 惠我行賈

수천냥의 재산을 털어서 우리들 행상을 도와주셨네.

片石嵬然 咸曰某甫

우뚝한 한 조각 비석도 한 입으로 반수어른 칭송한다네.

時班首 金應寬 接長 金世洪 監役 明奎員 崔學柱 金大洪

시반수 김응관 접장 김세홍 감역 명규원 최학주 김대홍

전 주사 접장 김상명 출의 영세불망비(前 主事 接長 金相明 出義 永世不忘碑)

五百其緡 亦云不鮮

오백 꿰미의 돈이란 결코 적지 않나니

惟我賈民 豈忘少選

바라건대 우리 상인들 어찌 잠시라도 잊을소냐!

公員 朴璋鎭 朴泰邠 李起湊 張盛祚

공원 박장진 박태분 이기진 장성조

甲辰四月日立

갑진년(1904) 4월 일 세우다.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숙 장학비(通政大夫 裵公 常起 刱塾 獎學碑) 전면

疎財捐義 惠及我蒙

재화를 트이고 의연금 내놓으니 은덕이 우리 학생에게 이르렀도다.

春秋絃誦 里巷西東

춘추로 매번 책 읽고 외는 소리 골목마다 여기저기 들려온다네.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숙 장학비(通政大夫 裵公 常起 刱塾 獎學碑) 후면

丁巳五月二十五日立

정사년(1917) 5월 25일 세우다.

監董 秋斗高 金埰洙 朱在昊 張守珠

감동 추두고 김채수 주재호 장수주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계 휼리비(通政大夫 裵公 常起 刱契 恤里碑) 전면

坊境頌績 社旅竪功

마을에는 그의 공적 칭송하고 결사의 사람들 공을 치켜세우네.

養逆無憾 我深賴公

여행객 숙박에 유감없으니 우리가 공의 힘을 깊이 입었던 탓이라네.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계 휼리비(通政大夫 裵公 常起 刱契 恤里碑) 후면

大正貳年癸丑六月貳拾日

대정 2년(1913) 계축년 6월 20일

機張郡中北面月內洞西里契立碑

기장군 중북면 월내동 서리계에서 세우다.

有司 南順宗 朱仁權 李載成 韓桓 朴潤浩 金守萬

유사 남순종 주인권 이재성 한환 박윤호 김수만

월내마을은 월래포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고 월래포는 기장의 9대 포구(무지포, 이을포, 기을포, 동백포, 공수포, 기포, 독이포, 월래포, 화사을포) 중 하나다. 월내의 옛 이름은 월래(月來). 월래의 은 울타리의 과 같은 뜻이라고 한다. 즉 방어를 위한 책(), ()을 뜻한다. 월래의 는 내()라고도 표기한다. , 래는 나(, ), (), (), ()와 같은 의미로 나라[], (), () 등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래서 월내, 월래는 성책을 가진 마을의 의미.

예전 디젤기관차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서생역이 경전철인 동해선으로 변경됨으로써 역사가 새 건물로 바뀌었다. 옛 것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옛 건물을 찾고 거기서 옛 정서와 지난 추억을 돌이켜 본다.

구 서생역사 부속 건물

반응형
반응형

일광면 신평리에 위치하고 있는 신평소공원은 해안가에 조성한 조그마한 간이공원이다. 20092월 착공하여 20104월에 준공되었고 배 조형 전망대를 비롯하여 팔각정자, 야외무대 등이 구성되어 있다. 신평소공원 앞 해변에는 크고 넓고 긴 암반과 바위가 아름답고 멋있다. 주변에는 여느 바닷가처럼 카페가 즐비한데 커피 한잔에 바다풍광을 즐기는 여행객이 많이 온다.

그리고 바다 절경 중 하나가 크고 넓은 암반의 윷판대(擲柶臺)이다.

척사대(擲柶臺)라 하고 윷바위 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유래를 살펴보면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우리나라 장수와 왜나라 장수가 몇 날을 겨루었으나 승부가 나지 않아 윷놀이로 승부를 결정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바위에 윷판을 칼로 새기고 종일 겨루어도 승부가 나지 않고 저녁이 되자, 왜장이 바다 쪽으로 서서 윷판이 잘 보이도록 깊고 굵게 새기고() 있을 때 우리 장수가 왜장을 발길로 차서 바다에 던져버렸다() 하여 이곳을() 척사대로 불렀다고 전한다. ㅎ ㅎ 반칙 아니 인가~

카페 솔 앞에 있는 윷판대 안내판으로 관리 부족으로 잡풀에 묻혀있어 안타깝다.
윷판대로 추정하고 있는 암반

신평리(新平里)는 일광면의 동쪽 해안에 위치하여 북으로는 칠암리와 원리, 서쪽과 남쪽으로는 동백리와 접한다. 옛 이름은 새들, 이를 한자로 표기한 지명이다. 평탄한 들 가운데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새들은 새버든, 새버들이라고도 하며 새각단이라고도 불렀다.

 

반응형
반응형

해리단길은 옛 해운대역사 뒤편 약 1.3에 카페와 맛 집, 책방, 공방 등 60여 곳의 상권지역으로 부산 해운대구와 지역공동체가 함께 조성하여 성공한 도시 재생 사례다. 2018년부터 젊은 소상공인들이 시작으로 지금의 모습으로 이르렀고 해운대의 새로운 명소가 되었다.

우동3구역 주택 재개발 정비 사업에 대한 대응으로 출발한 해리단길은 2018년 부산연구원의 부산 10대 히트상품으로 선정된 데 이어 2019년에는 행정안전부의 지역 골목상권 활성화 우수사례 발표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다락방이 있는 카페는 옛 아파트 1층을 리모델링하여 만든 카페로 정다운 분위기와 맛난 커피, 귀여운 강아지가 한번 발길을 꾸준히 매혹시킨다. 다락방 발코니의 예쁜 꽃은 지친 마음을 달래주고 아득한 옛 정서를 되살려 준다.

반응형
반응형

부산시 주변지역에 인기 있는 해수욕장 중 하나가 일광해수욕장이다. 특히 동해남부선 전철역이 있어 부산시민이 많이 찾아오고 주말이면 더욱 관광객으로 넘친다. 회와 장어를 즐기는 사람, 낚시를 하는 사람, 바다와 카페를 찾는 사람 가족나들이와 연인들로 다양하다. 이로 인해 삼성1리 주민들이 교통체증으로 인해 생활의 불편함을 호소한다.

일광해수욕장은 가수 최백호와 인연이 깊다. 최백호는 일광초등학교 34회 졸업생으로 결핵 때문에 군 생활을 의과사로 제대하고 일광해수욕장 주변에서 2년간 월세로 생활을 하며 건강을 관리하며 요양했다. 그리고 가진 돈이 없어 기타하나 들고 산에 들어가 오막살이를 하며 노래연습을 했고 이것이 훗날 가수로써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특히 그가 작사/작곡한 노래 낭만에 대하여는 이곳 주변 소라다방에서 만들었다. 그의 노래 낭만에 대하여를 들으며 일광해수욕장 백사장을 거닐어 본다.

이천가화교에 있는 가수 최백호 사진
보이는 좌측 이천리, 우측 학리

일광해수욕장은 수심이 얕고 삼성1리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이천리, 우측에는 학리로 해안선이 반원에 가까운 모습을 갖추고 있다. 백사장 길이는 1.8으로 평균 수심이 1.2m. 고산 윤선도가 유배 왔을 때 풍광은 삼성대(三聖臺)가 백사장 가운데 솟아 있고 해안선을 따라 일반 방풍림처럼 해송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고 전하지만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당시 백사장의 모래는 금사(金沙)라 하여 반짝이고 영롱하여 매우 아름다웠다고 전해지며 일제강점기 때는 해당화가 아름답게 수를 놓았으며 약간의 노송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카페와 횟집, 다양한 식당이 그 모습을 대신하고 있다.

고산 윤선도의 스토리텔링 주제로 한 포토 존
일광해수욕장 내 공연장소

삼성대의 삼성(三聖)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이곳 향토에서는 고려 말의 삼은(三隱)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등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 외 삼성교(三聖敎)에서 모시는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 등을 가리킨다는 설과 원효(元曉), 의상(義湘), 윤필(尹弼) 등을 가리킨다는 설 등이다.

 근래에는 세미성대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세미성대를 줄이면 세성대가 되고 이를 한자식으로 바꾸면 삼성대(三聖臺)’가 되기 때문이다. ‘세미성세미의 사투리 발음이고, ‘이 발음의 편의상 변이된 것으로 보인다. ‘은 배를 정박하기 위해 배 밑에 대는 나무를 가리키는 말로 요즘의 서까래와 같은 말로 보인다. 삼성대의 남쪽에 약수터가 있고, 삼성대 앞의 모래사장에는 배를 대기 위한 섞이 깔려 있기 때문에 샘과 섞을 합해져 세미섞이 되었고 이것이 삼성이 되어 삼성대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삼성대는 옛날 일광 바다풍경을 조망하는 모래둔덕이다.

 삼성대는 옛날 일광 바다풍경을 조망하는 모래둔덕으로 기장에 유배 온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621(광해군 13) 서제(庶弟)인 윤선양(尹善養)과 이별하면서 증별소제(贈別少弟)2수를 지은 곳으로 유명하며, 삼성대 아래왼쪽에는 삼성대라는 표지석이 있고 오른쪽에 20054월 이를 기념한 고산 윤선도 선생 시비가 세워져있다.

고산 윤선도 선생 시비

학리(鶴里)는 일광해수욕장 우측에 있는 마을로 주말이면 방파제에 낚시꾼으로 가득하다. 또한 회센터, 카페, 펜션이 있어 이를 이용하는 사람으로 붐비다. 소설 갯마을 작가 오영수(1909-1979)가 이곳에서 낚시를 하면서 소설을 구상했다고 한다. 난계(蘭溪) 오영수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출신으로 1937년 도쿄 국민예술원을 졸업하였고 1943년 부산 동래 기장 일광면의 서기를 하면서 이곳에서 김동리(金東里)를 만나 문학적 영향을 받고 일광을 소설 갯마을의 배경으로 삼게 되었다.

학리항, 학포 전경

갯마을은 멸치 후리를 하는 갯마을 주민들의 생활상을 담았는데, 오영수가 일광면사무소의 서기로 근무하면서 직접 보고 느낀 생활상을 소재로 한 것이다. 일광 해수욕장 북쪽 강송교 사이 근린공원인 별님 공원에 오영수 갯마을 문학비가 세워져 있고 기장문인협회에서 관리하고 있다작품집으로 머루, 갯마을, 명암, 메아리, 수련, 황혼, 잃어버린 도원등 다수가 있다. 1959년 아세아 자유 문학상 수상, 1977년 제22회 대한민국 예술원상, 문화 훈장을 수상하였다.

일광 해수욕장 북쪽 강송교 사이 근린공원인 별님 공원에 오영수 갯마을 문학비

학리의 옛 이름은 항곶이(項串), 항구지(項串浦). 한문이름으로는 마을이름이 항리(項里)였다. ()은 목덜미라는 뜻으로 잘록한 곶()을 말한다.  마을 남쪽 산마루가 잘룩하여 이전부터 이 곳을 황새목이라 하고 학항(鶴項)이라 표기하였다. 항곶(項串)이 항과 황새목의 학이 모두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항리(項里)를 학리(鶴里)로 이름이 바뀌었다.

학리에서 본 일광해수욕장

 

학리에서 본 이천리

이천리(伊川里)는 일광해수욕장 우측에 있는 마을로 일광천을 경계로 삼성리와 구분된다. 1965년 오영수의 소설을 영화화한 김수용 감독 신영균, 고은아 주연의 갯마을을 촬영한 곳으로 유명하다. 영화는 출어 중 폭풍을 만나 실종된 이 마을 부자(父子)의 실존인물 이야기다. 동해로 유입하는 일광천은 과거 1960년대에는 주변이 갈대밭이었고 참게와 재첩이 유명했다.

이천가화교에 있는 영화 갯마을의 주요 장면들
동해로 유입하는 일광천은 과거 1960년대에는 주변이 갈대밭이었고 참게와 재첩이 유명했다. 일광천(日光川)은 일광면을 흐르는 하천으로 아홉산(361m) 북쪽 산록에서 발원하여 용천저수지를 지나 남동쪽으로 흐르면서 일광읍내에서 동해의 이천포 일대로 유입한다.
이천리 해안선 따라 카페와 횟집이 즐비하여 주말이면 관광객으로 붐빈다 .
이천항, 이천포

 

이곳 또한 해안선 따라 카페와 횟집이 즐비하여 주말이면 관광객으로 붐빈다. 마을 제당과 강송정(江松亭) 주위에 수령이 150년 된 노송이 있어 바다풍경과 함께 운치가 있다. 도로가 있는 가게 중 찐빵집이 유명하고 특이하게 수석(壽石)을 파는 가게가 몇 군데 보이는데 이유는 80년대 이곳에서 한때 수석바람이 불어 해녀들이 바다에서 해산물보다 수석을 건져 올렸고 그 때의 수석가게가 지금까지 남아 곳이다.

오영수의 소설 갯마을 일부 발췌한 내용
1965 년 오영수의 소설을 영화화한 김수용 감독 신영균, 고은아 주연의 《 갯마을 》 주요 장면
이천리 마을 제당 주위에 수령이150 년 된 노송이 있어 바다풍경과 함께 운치가 있다
일광해수욕장 야경
이천리 해안 야경

이천리(伊川里)의 옛 이름은 일개이다. 개는 갯가를 뜻하는 포(), 개를 이었다는 뜻이라고 한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이을포(伊乙浦)는 현에서 동쪽 6리에 있다. 어량(魚梁)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어량[강물의 물살을 막은 뒤 통발을 놓아 고기를 잡는 시설]을 이곳에서는 일개혹은 이을개라 불러 지명이 유래되었다고도 전한다. 이천리는 이을포와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 천()’ 자가 합성되어 비롯되었다고 한다

일광천(日光川)은 일광면을 흐르는 하천으로 아홉산(361m) 북쪽 산록에서 발원하여 용천저수지를 지나 남동쪽으로 흐르면서 일광읍내에서 동해의 이천포 일대로 유입한다. 지명은 이곳 면 지명인 일광면에서 비롯되었다. 향토에서는 취정천으로 부르고 있다. 기장읍지에는취정천은 일광천을 일컫는다. 하나의 원류에서나왔는데 현의 동쪽 15리에 있는 수리골에서 이천포로 흘러들어 간다.”라는 기록이 있다.

기장방면에서 일광해수욕장으로 가는 도로 왼쪽에 있는 삼성마을제당에는 특이하게 천하대장군 장승이 있다.

반응형
반응형

기장읍 대변리와 송정에는 시랑대, 오랑대, 국립수산과학관, 해동용궁사, 롯데 월드 어드벤처, 개관 준비 중인 오시리아 관광단지 등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있다. 이 중 탁 트인 해안 감상과 시원한 동해바람을 즐기기에는 시랑대가 제격이다. 시랑대는 시랑산(82m) 동쪽 해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전에는 군부대가 주둔하여 접근하기가 힘들었다. 지금은 태고종 사찰인 해동용궁사(海東龍宮寺, 시랑리 산 416-3번지)는 입구 우측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12지신상 석물을 지나 해동용궁사 입구(일주문) 주변 춘원 이광수 시비
해동용궁사 입구(일주문) 앞 교통안전기원탑
시랑대 방향 오솔길 입구
바로 좌측 오솔길로 걸어간다
오솔길 도중 만난 안내표지판

시랑대(侍郞臺)는 적선대, 삼성대, 황학대와 더불어 기장의 4대 명승지로써 시랑리 동암마을 남쪽 해변 바위에 세 글자 「시랑대」 와 시(詩)를 새긴 것을 가리킨다. 시랑(侍郞)은 이조참의 정3품 당상관의 옛 이름을 뜻한다.
1733년(영조 9년) 권적(權樀, 1675~1755)이 이조참의(吏曹參議)에서 기장현감으로 좌천되어 부임하여 이곳의 살펴보니 파도가 흰 거품을 물고 밀려올 때마다 조개들과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아낙네들이 쌀 씻는 소리와 같고, 그 위를 나는 비오리(기러기목 오리과의 새)의 군무는 오색찬란하며, 노송 우거진 절벽을 찾은 달빛은 가히 인간 세상에서 보기 드문 절경인지라, 그 감회를 바위에 시(詩)를 새겨 남겼다.

해동용궁사 옆 시랑대 입구

 

시랑대에서 공수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길이다. 공수 지명은 공수전(公須田)에서 유래된 것으로 공수전은 지방관청의 운영 경비에 충당되는 토지이다. 공수마을의 옛 이름으로 비옥포(非玉浦, 飛玉浦), 비오포(飛烏浦), 비오개 등 있다. 비오포(飛烏浦)는 오색찬란한 원앙새 같은 비오리가 출렁이는 파도를 타고 큰 무리를 짓고 까마귀 떼처럼 무리를 지어 날아다닌다 하여 비롯되었다.

 

시랑대로 가는 데크길
왼쪽 부터 국립수산과학관, 기장 힐튼호텔

권적은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경하(景賀), 호는 창백헌(蒼白軒), 남애(南厓),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그의 좌천 이유는 암행어사로 널리 알려진 박문수(朴文秀)의 호남 관찰사 임명을 반대하다가 영조의 미움을 받아 정3품 당상관인 이조참의(吏曹參議)에서 종6품의 기장 현감으로 좌천되었다. 권적이 당시 이곳에 왔을 때는 바위 위에는 가운데가 안방 같으며 방바닥처럼 평평하게 되어 있어 사오십 명이 앉아도 남을 만큼 널찍하고 시랑대의 뒤편은 기암괴석이 첩첩이 쌓여 병풍처럼 둘러쳐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중앙에서 고위 관료를 역임하다가 유배지로 유명한 이곳의 지방관으로 좌천된 기분을 귀양살이로 표현하며 울분과 서러움을 시로 남긴 것이다. 시랑대 절경에 마음의 응어리를 풀고 외로움을 달래며 지난 관직을 바위에 시랑으로 표현 하였던 것이다.
시랑대 권적의 각석시(刻石詩)
 
謫居猶得近蓬萊 人自天曺貳席來
三字丹書明翠壁 千秋留作侍郞臺
 
귀양 온 이곳이 봉래산과 가깝고
이 사람도 천조(天曹)의 이석(貳席)에서 왔다네.
석 자의 붉은 글씨 푸른 벽에 선명하니
천추에 전할 시를 시랑대에 남겨보네.

또한 고종 31년(1894) 홍문관 교리 손경현(孫庚鉉)이 기장군수로 부임하여 이곳에 와서 시랑대의 글귀와 절경을 본 후 주변 바위에 세 글자 학사암(學士岩)과 시(詩)를 남겼다. 그리고 『기장현 읍지』 형성조에 의하면 “기장 현감 과 홍문관 교리를 지낸 손경현이 놀러 와서 학사암(學士嵓)이라 부르기도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학사암 손경현의 각석시(刻石詩)
侍郞臺上一層巖 屹若支天何出凡
上下千年長在石 東南大海自任帆
民勤野壁秋將熟 郡小官閑事已監
喧雷忽送人間雨 不妨須臾濕我衫
乙未 仲夏 學士 孫庚鉉
시랑대 위로 바위 높이 얹혔으니
하늘을 버티는 듯 우뚝 얼마나 출중한가.
지난 세월 천년 동안 바윗돌 그대로요
동남쪽 넓은 바다에 돛단배 자유롭다.
부지런한 농민들 들녘을 열어 곡식은 익어가고
자그마한 고을 공무 한가로워 일은 이미 마쳤다네.
갑작스런 번개소리 홀연 비를 뿌리니
잠깐 새 내 적삼 적신들 어떠하랴.
을미년(1895) 중하 학사 손경현
그 후 권적은 마음을 바로 잡았어 일까? 1733년(영조 9) 5월에서 1734년(영조 10) 11월까지 기장 현감으로 재직할 때 그의 청렴하고 선정을 기리기 위해 1737년 3월 권적 청덕선정비(權擿淸德善政碑)가 건립되었다. 선정비의 위치는 기장읍성 앞 기장공덕비군 內(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285-7번지)에 있다. 비의 제목은 ‘전 이조참의 행현감 권공적 청덕선정비(前吏曹參議行縣監權公䙗淸德善政碑)’이다.
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政淸淮陽 學闡潮州 維石一片 不忘千秋
정사에 청렴하긴 회양후(淮陽侯)에 버금가고
학문을 드높인 건 조주 자사(潮州刺史) 같도다.
한 조각 돌 위에 새겨 두는 뜻은
천추토록 길이 잊지 않기 위함일세.“
뒷면에는 “색리 허방익, 도감 유학 김징 숭정 기원 후 두 번째 정사년[1737] 삼월 일[色吏 許邦翊 都監 幼學 金澄 崇禎後再丁巳三月日]”이라고 적혀 있다.

1733 년 ( 영조  9) 5 월에서  1734 년 ( 영조  10) 11 월까지 기장 현감으로 재직할 때 그의 청렴하고 선정을 기리기 위해  1737 년  3 월 권적 청덕선정비 ( 權擿淸德善政碑 ) 가 건립되었다 .  선정비의 위치는 기장읍성 앞 기장공덕비군  內 (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285-7 번지 ) 에 있다 .

 

시랑대 외의 다른 자연석에 ‘엄신영 제우영(嚴信永弟宇永)’이라는 각자를 비롯하여 엄신영(嚴信永), 이후서 등을 비롯한 많은 인물들이 찾아 시를 남겨 놓았으나  1960년대 들어 구들장용으로 시랑대의 바위를 마구 훼손되어 지금은 겨우 두 수의 시문(詩文)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시랑대로 부르기 전에는 원앙대(鴛鴦臺)라 불리었고    이곳에 용녀와 얽힌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가뭄이 심하던 어느 여름날 마을 사람들은 미랑 스님과 함께 원앙대 아래 제룡단에서 기우제를 올렸다. 제가 끝나고 미랑 스님은 홀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지고 어느덧 달빛이 내리는데 용궁에서 동굴을 통하여 아름다운 용녀가 나타나 미랑 스님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어느덧 용녀는 만삭이 되었다.
원앙대에서 출산의 산고를 겪고 막 순산하여 탯줄을 끊을 여는 순간 큰 파도가 덮치려했다. 이 순간을 하늘의 옥황상제가 내려다보고서 평소에 착하기 짝이 없던 용녀를 구하기 위해 천마를 내려 보내 이들 모녀를 구해 천상의 옥녀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때 미랑 스님은 파도에 휩싸여 갔다.
지금도 원앙대 아래에는 용녀의 탯줄이 붉은 줄로 길게 바위에 박혀 있고 탯줄을 끊은 가위는 돌바닥에 모양이 남아 있다고 전한다. 그리고 파도가 치면 애절한 미랑 스님의 절규가 들려온다고 한다.

카페 공극에서 본 공수 해안가

 
 
 
 

반응형
반응형

기장군 대변리 대변항부터 죽성리 월전마을까지 기장해안로를 따라 가면 아름다운 해안 절경이 펼쳐진다. 횟집, 펜션, 카페 등 즐비하여 주말이면 교통 체증이 발생한다. 특히 아스팔트 도로 폭이 좁아 교통체증에 곤욕을 치른다. 그래서 월드컵기념 등대공원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도보로 풍광과 바다바람을 보고 즐기고 느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적선대는 선인(仙人)이 죄를 짓고 귀양 와서 기거했던 곳으로 예로부터 수려하고 아름다운 절경으로 인하여 시랑대, 삼성대, 황학대와 더불어 기장의 4대 경승지이다. 특히 해송과 바위사이의 일출 장관이 뛰어나다고 한다이곳 해안가 중 어느 한곳이나 적선대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가 없다.

멀리 보이는 기장 아난티코브와 힐튼호텔

해안가 주변을 살펴보면 해송과 장대한 바위의 아름다운 조화는 동해 파도와 더불어 나그네의 걸음을 멈추게 할 것 같다. 특히 다양한 바위의 형상은 자연의 묘미를 느끼게 하고 아이들과 함께 오면 지질공부에 유익할 것이다.

읍파정은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 파도가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면서 밀려오는 듯하다하여 붙여진 조선후기 누정이다. 차성가(車城歌, 1860)에 나오는 것으로 보면 100년 전에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적선대 위에 지었다고 하니 이 또한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다. 차성가는 조선후기 기장 지역의 경치와 유적 등 소재로 한 가사문학 작품이름으로 차성은 고려시대 기장의 별호(別號)이다. 이곳 해안가 어디를 가나 절경이니 적선대와 읍파정은 머리에 두고 현재의 풍광으로 가슴으로 즐길 뿐이다.

대변항은 조선시대에는 대변포(大邊浦)라 불리던 곳으로 이곳에 대동고(大同庫)가 있었다. 대동고는 지방관청이 백성에게서 거둔 곡식을 보관하는 곳이다. 그래서 대동고가 있는 갯가라는 뜻인 대동고변포(大同庫邊浦)를 줄여서 대변포라 불렀다고 한다. 옛날 이곳은 수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두포(船頭浦)라고 부르기도 하고, 전선창(戰船廠), 주사창(舟師廠)이라고 하였고, 무지포(無知浦)라고도 불렀다.

월전 마을의 옛 이름은 달밭[月田]이다. 마을 앞 포구를 달밭개라고 불렀다은 높다, 또는 산이라는 뜻이다. 이 마을은 남산(南山) 기슭의 언덕 산을 개간하여 생긴 마을로서, 경작지가 높은 곳에 있는 밭, 또는 산에 있는 밭이라는 뜻에서 달밭이라 하였다고 한다. 즉 달밭은 고전(高田), 산전(山田)이란 뜻이다. 달밭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달 자를 따서 월전이 되었다고 한다. 달밭개를 월전포(月田浦)라고 불렀다.

 

 

 

 

 

반응형
반응형

기장읍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는 연화리(蓮花里)는 주말이면 해물포장마차에서 해산물과 전복죽을 즐기고 커피를 마시며 바다 풍광을 보며 여유를 즐기는 인파로 가득하다. 심지어 교통체증까지 발생한다. 이곳에는 기장 8경 중 하나로 형상이 거북을 닮은 작은 섬 죽도(1,500)가 있다.

연화리 지명은 연화리와 석산리의 경계를 이루는 마을 뒷산 봉우리모습이 연꽃처럼 생겼다 하여 연화봉(蓮花峯, 154m)로 불리우지고 있어 비롯되었다옛날 기장고을의 형국을 말할 때 옥녀가 비단을 짜고 있는 옥녀직금(玉女織錦)형이라고 하고, 이러한 형국에서 연화봉은 연꽃무늬의 비단 폭에 해당되는 산봉우리이다.

지금 죽도는 매립과 연죽교(蓮竹橋)라는 다리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육지와 200m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배로 왕래할 수 있는 곳이었다죽도의 원명은 무지포도(無只浦島)이나 대나무 숲이 울창하여 지명이 비롯되었으나, 근래에는 대나무가 줄고 동백나무가 자생하여 가득하여 동백섬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조선환여승람도서조에 의하면 죽도는 기장군 남쪽 8리 무지포 앞바다에 있으며, 거북이가 물에 떠 있는 것과 같다. 섬의 길이가 40척이고 넓이는 20척인데 섬 안에 대()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섬에는 대나무가 자생하고 시원한 샘, 암자(죽도암) 그리고 옥녀당(玉女堂)이라는 당집이 있었으며 옥녀를 위해 정월 초하루, 시월 초하루에는 마을에서 당제(堂祭)를 올렸으나 그 유래는 알 수 없다고 한다. 비오는 밤에는 댓잎의 떨림과 빗소리가 문풍지와 함께 화음을 내면서 많은 멋과 낭만을 전해주기에 죽도야우(竹島夜雨)의 승경이라 하였다. 그래서 예부터 많은 묵객들이 자주 찾았던 기장의 대표적인 명소였다.

그러나 지금은 천부교 기장신앙촌 소유하고 주변이 철조망이 둘러 싸여 외부인의 접근을 금하고 있다. 섬 밖에서 보면 별장, 관리건물, 그리고 큰 담벼락이 보이며 그 곳을 갈 수 없음이 매우 안타깝다. 기장의 명소가 기장신앙촌 소유로 갈 수 없는 것이 용두대, 신라토성, 죽도 등 이다. 천부교는 대승적 차원에서 이들 명소에 대해서는 일반인에게 일부 개방하는 것이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바람직한 종교의 참모습일 것이다.

연화리는 신암마을과 서암마을로 구성되어 있고 신암마을 해안가에 있는 섬이 죽도이다. 신암의 옛 이름은 무재다. 기장현읍지에는 이곳을 무지포(無知浦), 무차포(武次浦)라 적고 있다. 지금의 대변항까지를 포함하여 무지포라 불렀는데, 기장에서 가장 큰 포구다. 이곳은 예부터 수군영이 있는 변방의 요충지였다. 옛 이름인 무재에서 무는 물의 고어이고, 재는 잣이라고도 부르는데 성()의 고어이다. 따라서 무재 즉 물재는 수군영을 뜻하는 수성(水城)의 의미다.

연화리는 신암마을과 서암마을로 구성되어 있고 신암마을 해안가에 있는 섬이 죽도이다 .  신암의 옛 이름은 무재다 .  기장현읍지에는 이곳을 무지포 ( 無知浦 ),  무차포 ( 武次浦 ) 라 적고 있다 .
대변항 전경. 기장현읍지에는 지금의 대변항까지를 포함하여 무지포라 불렀는데, 기장에서 가장 큰 포구다. 이곳은 예부터 수군영이 있는 변방의 요충지였다.

신암의 신은 새롭다는 뜻으로 해 뜨는 곳, 동쪽의 의미다. 암은 바오의 와음(訛音)으로 보고 있다. 바오는 영의 옛말이다. 따라서 신암은 원래는 새바오 즉 동영(東營)을 의미한다. 무지포에 있는 수군영을 새바오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잘못 새바우로 발음하고,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신암(新岩)으로 표기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신암을 신촌(新村)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돌이켜 보면 부산은 다양한 신흥 종교의 발원지로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바다를 끼고 있는 지리적 조건으로 새로운 외래 문물의 수용이 수월하기 때문 일까? 부산 사하구 감천2동 태극도 본산, 동구 범일6동 안창마을 통일교 성지(수정산 자락에서 문선명 교주가 통일교 기초와 원리를 세웠다고 한다), 기장군 기장읍 천부교 신앙촌, 영도구 동삼동 천리교 본부, 남산동 '이슬람 부산성원' 등 부산에서 발원한 신흥 종교이다.

신암마을 해변가에 있는 것으로 누군가 옥녀를 위해 제(祭 )를 올리는 것 같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