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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군 해안가 두호(豆湖) 마을은 봉대산 아래 자리 잡은 어촌마을로 죽성리 200번지 일대이고 마을 북쪽에는 원죽마을, 남쪽에는 월전 마을이 있다이곳은 신라시대부터 해안 방어를 위한 수군 요충지로써, 특히 왜구 침입을 대비 한 곳으로 신라토성, 두모포 진성이 있다. 그리고 시조문학 대가 고산 윤선도가 이곳에서 유배되어 즐겨 찾던 황학대가 있고 마을 뒤 언덕에는 수령 300년 되는 소나무 다섯 그루와 마을 제당인 국수당의 어울림은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케 한다.

두호마을(죽성항) 전경으로 좌로부터 용두대, 황학대가 보인다
해송과 국수당

이곳 마을 바닷가 방파제에는 주말이면 낚시꾼과 캠핑을 즐기는 가족단위 여행객으로 만원을 이루며 바다 건너 맞은편은 옛날부터 명당이라 불리어지고 동해바다를 향해 뻗어있는 용두대가 있다. 또한 SBS 드라마 드림촬영장소인 성당이 있어 연인들로 붐비며 해안가의 넓고 장대한 바위는 시원한 동해바다를 느끼려는 관광객을 유혹하고 있다. 더불어 조선말 민초들의 아픈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사암이 있어 여행 맛을 더해 주고 있다.

SBS 드라마 드림 촬영장소

두호의 옛 이름은 두모포(豆毛浦)이고 우리말로는 두모개라 부른다세종실록에 두모포는 현의 동쪽 5리에 있는데, 수군만호가 지킨다고 하였다1765년에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두모포영은 인조 7(1629)에 동래로 진을 옮겼다고 하였는데 그때 부산으로 옮기면서, 그곳 이름을 두모포진이라 불렀고 진영과 함께 이 곳 마을 이름까지 없어지게 되었다현재 육안으로 확인되는 두모포진성은 죽성천(청강천)이 굽어지는 곳에서 서남쪽으로 논을 가로질러 남아 있고 민가 뒤편 축대로 사용되고 있다.

마을 뒤 편과  논을 구분시켜주고 있는 두모포진성

고산 윤선도가 창작활동 했던 황학대(黃鶴臺)

마을 선착장 뒤에 위치한 황학대(黃鶴臺)는 원래는 송도(松島)라는 섬이었다고 하며 암반위에 소나무 숲이 있는 곳으로 옛날에는 주변이 백사장과 수령 백년의 해송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이곳 지역 선비들이 모여 시를 짓고 놀았으며 남쪽 암벽에는 이곳 출신 진사 방치주(方致周)의 이름이 각인 되어 있다. 황학대의 이름 유래는 이곳으로 유배 온 고산 윤선도가 송도가 지형이 꼭 황학이 나래를 펼치고 있는 모습이라 하여 이름을 짓고 매일 찾았다고 한다. 기장현읍지(機張縣邑誌) 형성조의하면 황학대는 군의 동쪽 10리에 있다 고 기록되어있다.

황학대에서 보이는 용두대
황학대 남쪽 암벽에는 이곳 출신 진사 방치주 ( 方致周 ) 의 이름이 각인 되어 있다

고산 윤선도는 1616(광해군 8) 12월 전횡을 일삼던 예조판서 이이첨을 벌할 것과 유희분, 박승종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화가 되어 함경도 경원으로 귀양을 갔다. 그런데 국경지대의 귀양지는 중국인과 내통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1618(광해군 8)에 죄인들을 남쪽으로 옮겼는데 이때 윤선도도 기장으로 이배(移配)되었다. 기장은 한양에서 1,000리나 떨어진 변방에 위치하여 많은 선비들이 이곳 기장으로 유배생활을 했으며 조선시대 14번째 순위에 드는 유배지였다.

고산 윤선도가 이곳에서 지은 시조 영계(詠鷄)

고산 윤선도는 이곳에서 7년간의 유배생활을 하면서 시조 영계(詠鷄), 영일일화(詠一日花) 등 여섯 수를 남겼고 마을 뒷산 봉대산에서 자주 약초를 캐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여 마을사람들에게는 의원님이라 불렀다고 한다한 번은 어린 하인이 산에 땔나무를 구하기 위해 갔다가 신선같이 보이는 한 노인이 암석 이에 앉아서 시 한수를 써 주며, 돌아가서 네 어른(윤선도)에게 드리라고 하였고 이 어린 하인은 이를 받았는데 잠깐사이에 그 노인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봉래산 한 골짜기 남쪽 땅에 떨어지니 그 절경 천하에 드문 곳임을 알게 되었네. 산은 비단 병풍을 두른 듯 북쪽으로 비스듬히 따랐고, 개울물은 옥대를 두른 듯 동쪽을 돌아 흐르네. 나무 틈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빛은 언덕을 비추고, 안개 속에 내리는 저녁 비는 들녘에 자욱하네. 성긴 숲을 마주 앉아 한 마디 말과 솔솔 부는 바람에 푸른 담쟁이 넝쿨이 흔들리네.  

마을을 지키는 다섯 그루 해송과 국수당의 어울림

두호마을 뒤 나지막한 언덕에는 다섯 그루 해송과 제당이 오랜 세월 동안 마을을 지켜주며 바라보고 있다. 제당은 어부의 무사귀환, 풍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장소로서 당산할배 제당, 국수당, 또는 국시당이라고도 부르며 개벽 당시 하늘에서 신이 지상으로 내려올 때 제일 먼저 발을 디딘 곳이라는 전설에서 유래하여 부르게 되었다.

다섯 그루의 나무가 모여 마치 한 그루의 큰나무 처럼 보이는 해송으로 수령은 약300년으로 추정되며 직경 30m, 높이가 약 10m에 달한다. 국수당의 건립연대는 1933(癸酉年) 710일이라고 적혀있고 기와 맞배지붕에 벽은 돌을 쌓아 시멘트로 마감한 구조물이고, 문은 여닫이 외짝 나무문이다. 제당의 문에는 태극도형이 그려져 있다.

이곳에서 매년 1회 마을 제를 지내는데 마을 이장이 제관 또는 제주를 선정하여 정월 보름날 정오에 무당을 불러 제를 지낸다. 5년에 한 번씩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별신굿을 음력 정월 3일에 거행한다. 별신굿은 마을의 무속적 축제의 하나로 요즈음 풍어제라 부른다.

별신굿은 고대 부족국가의 제천의식이었던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의 무천(舞天) 등 국가적인 행사가 마을행사로 축소되고, 한편으로는 해변 어촌의 행사로 변천해 간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에 따라 매년 또는 2, 3, 5, 7, 10년마다 행하는데 요즈음에는 행사의 빈도가 점차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별신굿은 마을의 평안과 풍어 및 선원의 안전을 기원하는 마을 축제로 무격들의 예능적 기능이 가미되어 무악(巫樂)과 창() 및 오락적 예능이 뛰어나 주민들을 동참케 하는 개방적인 축제이다.

뛰어난 풍광과 명당으로 유명한 용두대(龍頭臺)

용두대(龍頭臺)산봉우리가 세 겹으로 둘러싸여 해안에 있는 야산으로, 용두대 이름 유래는 산의 지세나 형태가 용머리처럼 생겼다고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두호 마을 방파제 북쪽방향 바다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고 정상에 올라서서 사방을 바라보면, 뛰어난 풍광만 아니라 지관들에 의하면 옛 부터 명당이라 하였다.

황학대 뒤에 보이는 용두대

기장현읍지(機張縣邑誌)명승조에 용두대는 "()의 동쪽 8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용두대의 지맥을 보면, 용의 머리에 붙은 용의 목 부분이 잘록하여 두 사람이 함께 걷기가 어려우며 양면이 날카롭게 생겼고 용의 허리는 완만하게 세번 굽어지고, 꼬리는 뚜렷이 한쪽으로 뻗어 있어 한 마리의 용이 바다에 떠 있는 형국(形局)이라 한다.

이 지방의 풍수가들은 황룡부해지형(黃龍浮海之形)이라 하여, 좌에 유온천(有溫泉) 하고, 용의 여의주처럼 용두대 앞 바다에는 큰 바위가 줄지어 서 있다고 한다.

드라마 드림 촬영장소 성당과 용두대

지금은 안타깝게도 천부교 집단 정착촌인 신앙촌 소유지로 갈 수가 없어 먼발치에서만 바라볼 뿐이다. 마을 방파제에서 용두대를 바라보며 여타 신앙촌은 유명무실하나 기장 신앙촌만이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 명당은 명당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용두대는 현재 천부교 신앙촌 소유지에 포함되어 있어 일반인 출입은 불가능하다

천부교(天父敎) 집단 정착촌인 기장 신앙촌

기장 신앙촌은 천부교에 의해 1970228일 기장읍 죽성리, 학리, 삼성리, 동부리, 신천리 일원의 약 130만 평 부지에 건설이 시작되었다. 천부교는 소사신앙촌(부천, 1957111), 덕소신앙촌(1962721), 기장신앙촌 등 신앙촌 건설을 했고 기장신앙촌이 제3신앙촌으로 불리며 가장 크다. 천부교 교리에 따르면 세상의 종말이 오면 감람나무가 나타나는데 천년성(千年城)인 신앙촌에 들어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천부교 죽성교회. 일반교회와 천부교회의 구별은 천부교회는 십자가 대신 감람나무 잎을 물고 있는 비둘기 상이 있다 .

이곳 기장신앙촌은 천부교 시온그룹 관련기업 한일물산주식회사(면직물, 의복류 제조업; 제과, 장유제조업), 시온합섬 공업주식회사(양말 제조업), 시온식품공업주식회사(다과류 제조업), 반도금속주식회사(볼트, 넛트 제조) 4개 회사가 있다. 건평 약 4만 평 속에 있으며 임직원 도합 약 1,200여 명이 된다. 2013년에 개교한 시온식품 과학고등학교는 비인가 대안학교로 운영 중에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생명물 두부와 생명물 간장, '' 요구르트, 신앙촌 스타킹 등 공산품이 많이 알려져 있다.

천부교는 개신교 장로 중 한 명이었던 박태선(1917~1990)1955년에 창시한 반기독교 성향의 신흥종교이다. 초기에는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 약칭 '전도관' 라 했다. 박태선은 평안남도 덕천시 출신으로 창동교회(김치선 목사)에서 장로 안수를 받았고 1950년대에는 통일교와 함께 한국 신흥종교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1970년 기성교회의 심한 반대에 직면하였고, 19756월 장남 박동명의 7공자 사건으로 알려진 윤리적 스캔들까지 겹쳐 이미지가 악화되자 1980년 교리를 대폭 수정하고 한국천부교회로 개칭했다. 그 후 19902월 박태선이 사망하자 3남 박윤명이 뒤를 이어 교회를 다스리며 시온그룹 회장을 맡고 있다. 일반교회와 천부교회의 구별은 천부교회는 십자가 대신 감람나무 잎을 물고 있는 비둘기 상이 있다.

민초들의 아픔이 담긴 어사암(御史岩)

방파제에서 드라마 드림 촬영장소 성당을 지나 해안가에 넓은 바위군락을 만나 볼 수 있는데 남쪽 부분은 둥근 형태로 펑퍼짐하고 동쪽 부분은 한 마리의 매가 남쪽을 바라보며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양새라 하여 매바위 또는 응암이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1882(고종 19) 암행어사 이도재(李道宰)가 다녀갔다 하여 해안가 바위에 글자를 새겼는데 이를 어사암이라고 불렸다.  이도재, 관기 월매 그리고 어사암(御史岩)이란 글자와 오언절귀가 새겨져 있었으나 오랜 세월로 마모되어 알아 볼 수가 없다.

암행어사 이도재(李道宰)가 다녀갔다 하여 해안가 바위에 글자를 새겼는데 이를 어사암이라고 불렸다. 이도재, 관기 월매 그리고 어사암(御史岩)이란 글자와 오언절귀가 새겨져 있었으나 오랜 세월로 마모되어 알아 볼 수가 없다.

어사암에 얽힌 이야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894(고종 20) 일광 독이방(禿伊坊)에 있는 해창(지금의 문동리)에서 양곡을 가득 실은 조운선이 부산포로 향하다 이곳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계속된 가뭄으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던 어민들이 난파선에서 바다 밑에 흩어진 가마니 곡식을 건져 먹었다. 기장현청에서 이 같은 일은 절도라면서 관아에 붙잡혀 가혹한 고문으로 죽어나는 사람이 생겨났다.

한편, 조정에서는 정부양곡이 운반 중 수장되었다는 그 진상과 어민들이 곡식을 도둑질해 갔는지 등 파악하기 위해 이도재를 어사로 보내 조사를 하게 하였는데 현지 오찬에 참석했던 기장 관기 월매가 주민들의 어려운 사정과 그동안 관리들의 행패를 이야기하였다. 매바위에서 현장조사를 하게 되었는데 함께 온 월매가 바위에서 춤과 노래와 교태로 어사를 즐겁게 하였다. 어사는 그간의 사건을 종합해 본 결과 바다 속에 그대로 두면 썩을 곡식인데 그것을 건져 먹은 것이 어찌 절도가 되는가 하면서 어민들을 모두 석방시키라고 하였고 그 자리에서 오언절구의 시를 짓고 어사암이라는 글자를 바위에 각자하였다.

천공경무물(天空更無物), 해활난위시(海闊難爲時),

환구구만리(環球九萬里), 일위가항지(一葦可航之).

하늘이 텅 비었으니 보이는 것이 없고,

사나운 바다는 시객을 위해 춤을 추는데,

저 멀리 돛단배는 언제 무사히 돌아오려나.

매바위에서 바라본 두호마을

그 후 세월이 흘러 그 각자가 비바람에 마멸되자 주민들은 그 당시의 이도재 어사의 은공과 기생 월매의 인정을 잊지 못하여 이형은(李衡殷)이라는 사람을 청하여 어사암에 이도재(李道宰)라는 성명과 기월매(妓月)라는 세 글자도 함께 새기게 하였다. 월매(月梅)는 뒤에 혼인하여 월매(月梅)라고 하지 않고 월매(月每)라고 각자를 하였다.

이도재 생사단비(李道宰 生祀壇碑)를 세우다

조운선 양곡 절도의 원만한 해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기리기 위해 마을사람들이 이도재 생산단비라는 비를 세웠다. 생사단이란 고향 출신의 수령이 부임한 경우, 이의 탄생지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을 가리킨다이도재 생사단비는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292번지 기장초등학교 앞 기장공덕비군 내에 있다.

비의 재질은 석재이고 비석 머리는 둥글고 받침돌은 없다비의 앞면에는 비의 제목 수사 이공도재 생사단(繡史李公道宰生祀壇)’이라 되어 있고, 내용은 우리 고을에 왜 이리도 늦게 오셨나/ 그래도 하늘은 기필코 도우시네/ 수많은 폐단들을 모두 바로잡으시니/ 천추에 영원토록 기리오리다[來何暮兮 天必佑之 百弊咸正 千秌永祀]”라고 적혀 있다.

이도재 생사단비는 기장읍성 앞 기장공덕비군 內(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285-7번지)에 있다.

뒷면에는 광서 계미년[1883] 봄에 세우다[光緖癸未春立]’라고 적혀 있고 건립자에 관한 기록은 없다. 비의 크기는 높이 92.5, 너비 36, 두께 13이다.

수사 이공도재 생사단(繡史李公道宰生祀壇)
비의 앞면에는 비의 제목 ‘수사 이공도재 생사단(繡史李公道宰生祀壇)’이라 되어 있고, 내용은 “우리 고을에 왜 이리도 늦게 오셨나/ 그래도 하늘은 기필코 도우시네/ 수많은 폐단들을 모두 바로잡으시니/ 천추에 영원토록 기리오리다[來何暮兮 天必佑之 百弊咸正 千秌永祀]”라고 적혀 있다.

 

잊히어 가는 古城, 신라 토성

죽성리 3거리에서 원죽마을 방향의 죽성로와 월전마을 방향의 기장해안로 갈림길에서 기장해안로 따로 50m가면 좌측에 공동묘지가 있고 그 앞을 지나는 좌측 샛길을 따라가면 도자기를 굽는 소름요가 나온다소름요 입구에서 앞 구릉지에 있는데 예전부터 옹산이라고 불리우지고 있다이곳에 신라토성(기장읍 죽성리 631번지)이 있으나 철조망이 놓여 있어 출입을 할 수가 없다. 이유는 신앙촌 소유의 사유지이기 때문이다. 죽성리 왜성 또한 그렇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국가의 역할을 생각하게 한다.

소름요 입구에서 앞 구릉지에 있는데 예전부터 옹산이라고 불리우지고 있다.
이곳에 신라토성(기장읍 죽성리 631번지)이 있으나 철조망이 놓여 있어 출입을 할 수가 없다. 이유는 신앙촌 소유의 사유지이기 때문이다.
왼쪽부터 소름요, 죽성항이 보인다.

사유지 안에 있어 방치 된 문화재 및 유적지는 국가에서 매입하여 발굴, 조사 연구하여 그 결과물을 국민에게 알리는 것이 선조들의 역사를 대하는 현 후손들의 바람직 행동 일 것이다. 역사를 통한 교훈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 일환의 시작을 국가가 하여야한다.

주변 신라시대 관련 유적으로 온산읍 봉화산 강양리 성터(하산성), 서생면 화정리 숙마산성 등 있는 것으로 주로 해안가의 강과 합수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회야강 중심으로 아래쪽에는 숙마산성, 위쪽에는 강양리 성터가 있다.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일본열도의 왜구가 배를 타고 서라벌까지 최대한 가까이 침입하는 통로를 합수지역에서 차단, 방호하기 위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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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한파에 바다가 얼었다. 어디일까? 주인공은 다대포해수욕장이다얇은 수심, 기수지역, 긴 모래사장의 조합이이라서 가능한 것 같다. 삭막한 코로나와 추운 겨울날씨 속에서도 나름의 기분전환을 위한 볼거리를 제공해 준다. 특히 아이들이 너무 좋아한다.

다대포해수욕장은 낙동강 하구 최남단에 위치한 해수욕장으로 길고 넓은 백사장과 고운모래와 얇은 수심으로 여름이면 피서객들에게서 인기가 많다. 낙동강물이 바닷물과 만나서 평균수온이 21도로 따뜻하고 수심이 300m 거리 바다까지 1.5m로 물놀이하기가 좋다. 또한 가까운 곳에 지하철이 있어 대중교통이용에도 좋다.

여름 해수욕장 이용할 때 가끔 너울성 파도가 생기는 관계로 해안에서 너무 떨어지는 것은 삼가 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수심이 얕아도 중간 중간 웅덩이가 있어 염두에 두고 물놀이하면 당황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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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군 달음산 자락 아래 일광면 원리에는 20채의 집에 47가구가 살고 있는 광산마을이 있다. 마을 바로 상공에는 부산·포항 고속도로 고가도로가 마을을 관통하고 있어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을 요란스럽게 하고 있다. 그러나 달음산에서 내려오는 계곡수가 마을을 가로질러 시원한 멋을 내고 있어 위로가 되는 것 같다.

조용한 산촌마을을 연상케 하는 광산마을
마을 바로 상공에는 부산·포항 고속도로 고가도로가 마을을 관통하고 있어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을 요란스럽게 하고 있다
달음산에서 내려오는 계곡수가 마을을 가로질러 시원한 멋을 내고 있다 .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 때인 1930년대 일본 회사이름인 스미토모(住友)의 광산기업 계열사인 스미토모광업주식회사가 국내 자원약탈 목적으로 구리광산을 개발 및 운영 했던 곳이다. 스미토모는 미쓰비시(三菱), 미쓰이(三井)같이 일본의 3대 기업집단(재벌)이자 대표적인 전범기업이다. 일광(日光)의 일본식 발음 ‘닛코’를 따서 ‘닛코광산’으로 부르기도 했고 식민지 조선 내 5대 구리 광산 중 하나였다.

그리고 구리광산개발에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하고 구리 채광작업에는 휴일도 없이 매일 주간과 야간 2교대로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일주일에 두세 번은 장안읍으로 가서 군사훈련까지 받았었다. 당시 일광광산(닛코광산)의 노무자는 200명 정도로, 가까운 일광과 좌천 등지에서 온 사람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스미토모광업주식회사의 일본인 관리자 청사

우리나라에 구리광산이 처음 생겨서 생산 된 곳은 지금으로부터 약 354년 전인 헌종 재위 9년(1668년 1월 19일) 경남 거제도이다. 헌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거제지역에서 구리가 생산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구리가 나지 않다가 지금 비로소 생산된 것이다.」

여기서 채굴된 구리 등은 곧장 좌천역으로 옮겨져 열차에 실렸다. 당시 좌천역에는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는 시설인 급수탑이 선로 옆에 있었다. 옛 좌천역은 1934년 12월 16일 해운대와 좌천을 잇는 동해남부선이 개통되면서 문을 열었다. 1935년 12월에는 좌천과 울산, 1936년 12월 울산과 경주 선로가 추가로 개통됐다.

1934년에 지어진 옛 좌천역사
은행나무 세 그루가 옛 좌천역사를 지키고 있다.
좌천역 주변의 옛 모습
마을공동 우물
사람들의 마음은 늘 같다.

해방 후 간헐적으로 이어오다가 70년대에 점차 채산성이 떨어져 폐광되어 구리광산 마을기능은 상실하였다. 지금은 한국광해관리공단에서 폐광산 입구에서 유출되는 수질을 정화하기 위한 광해방지시설을 설치하고 있어 폐광산 입구를 볼 수가 없다.

한국광해관리공단에서 폐광산 입구에서 유출되는 수질을 정화하기 위한 광해방지시설을 설치하고 있어 폐광산 입구를 볼 수가 없다 .

달음산(고도 588m)은 정관면과 일광면 원리와의 경계를 이루며 기장 8경 가운데 제1경이 되는 명산이다. 산정은 주상절리로 형성된 취봉과 옥녀봉으로 되어 있다. 북쪽 산록에서 좌광천, 남쪽에서는 일광천이 발원하고 옛날에는 달이 뜨는 산이라는 뜻의 월음산(月陰山)이라고도 하였다. 기장현읍지에서는 취봉산(鷲峰山)이라고 적혀 있는데 옛 기장 사람들은 추봉산 또는 축봉산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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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주거하는 집 형태는 천편일률적으로 아파트다. 재건축, 재개발하면 무조건 고층 아파트를 짓는다. 이러한 아파트 중 부산에서 아름다운 아파트가 있다. 바로 망미주공 테라스동 아파트다망미주공 아파트는 연제구 연산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2038세대 총 23동으로 198611월 준공하였다. 테라스동 아파트는 1층 단독형 4개동, 107~ 110동으로 구성되어 있고 언덕 경사를 활용한 도심 속의 전원주택이다.

 

테라스동 아파트의 주변 자연환경 또한 아름답다. 오랜 된 나무와 숲속 연못의 어울림은 마치 자연휴양림에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20155월 재건축이 확정되어 이 아름다운 아파트는 시한부 미를 가지게 되었다. 사라지게 될 테라스동 아파트를 바라보며 우리나라 주거형태도 테라스동 아파트로 보편화되기를 바랄뿐이다.

테라스동 아파트에 위치하고 있는 연못

망미(望美) 지명은 배산에서 유래된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배산의 기슭에는 성황당(城隍堂)이 있고, 신주(神主)는 배미산(盃美山) 산신이라고 전하고 있으며 이 산을 배미산 또는 잘미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현재의 수영동과 망미동사이의 산을 망산(望山)이라고 한다. 망미동은 망산의 ()’자와 배미산의()’자가 합쳐서 된 명칭으로 풀이된다. 또한 망미동은 수영성북문밖에 위치하고 있어 수영의 수사가 초하루와 보름에 망배(望拜)를 들어 임금을 사모한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혹은 고려의종 때에 귀양 온 정서(鄭敍)가 북쪽을 바라보며[] 임금[]에게 절을 했다는 뜻에서 명칭이 생겨났다는 설 등이 있다.

멀리 광안대교가 어렴풋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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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일몰 풍광이 뛰어난 곳 중 한곳이 사하구 다대포의 몰운대이다. 서해바다를 느끼게 하는 다대포 해수욕장은 근처 을숙도와 더불어 바닷가 해안도로 라인 풍광이 아름답다. 또한 다대포는 부산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어 지질탐사를 하는 탐사객의 발길이 잦다.

 

수심이 얕고 넓은 백사장이라서 인기 많은 다대포해수욕장

 

몰운대 초입부터 울창한 소나무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몰운대(沒雲臺, 부산시 기념물 제27)는 강원도 태백산에서 시작하여 부산 다대포 몰운대 까지 370km에 이르는 낙동 정맥의 끝자락이고 금정산지의 끝자락이 대한해협으로 유입하여 형성된 곳으로 16세기까지 몰운도(沒雲島)라 부르는 섬이었다.

이후 낙동강의 퇴적물로 다대포육지와 연결되어 육계도가 되었다. 남쪽 끝은 해식애와 해식동이 발달되어 있고 배후인 육지는 모래해안이 발달하여 다대포해수욕장 같은 아름다운 해수욕장으로 생겼다. 몰운대 지명은 낙동강 하구에 안개와 구름이 끼는 날에는 그 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선조40년 동래부사 이춘원이 몰운대의 아름다움을 시로 남겼다.

다대(多大)라는 이름을 답달(畓達), 다다라(多多羅), 다다라(多多良)에서 변하여 생긴 이름으로 부산의 지명 중 그 유래가 가장 오래되었다. 다대항은 2001년 부산 아시안게임 때 북한 응원단을 실은 만경호가 입항한 곳으로 다대진이라고도 불렸다.

다대포는 신라시대 부터 왜구를 막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이다. 임진왜란이후 경상좌도 7(부산, 다대, 서평, 포이, 개운, 두모, 서행) 중 의 하나로 부산진과 함께 다른 진보다 더 중요시되어 2배의 병선을 보유하고 있다. 태종 7(1407) 궁궐(한양)에서 바라볼 때 경상도를 좌우로 나누어 낙동강 동쪽을 경상좌도, 서쪽을 경상우도로 불렸다.

대동여지도 : 동래
대동여지도 : 다대포와 몰운대

조선시대에는 군사적 요충지에는 영()을 설치하였는데 다수의 육군인 경우는 병영(兵營), 수군인 경우는 수영(水營)을 설치 및 운영하였고 주로 성곽 형태로 되어 있다. 이를 지휘하는 직위는 병영은 병마절도사(병사), 수영은 수군절도사(수사)로 품계는 각각 종2, 3품이다.

경상좌도 해안 방어를 지휘한 좌수영의 위치는 동래현 부산포이고 태종 때 울산 개운포로 옮겼다. 1592년 동래남촌(수영구 수영동)으로 옮겼고 1636(인조14) 감만이포(勘蠻夷浦, 감만1)로 옮겼다. 1652(효종 3) 동래남촌으로 다시 옮긴 후 1895(고종 23) 영이 폐지 될 때까지 존재하였다. 경상우도 우수영의 위치는 거제이며 1604(선조37) 고성(통영)으로 옮겼다.

그리고 전라좌도 좌수영의 위치1479(성종 10)는 여수이며 전라우도 우수영의 위치는 1377년 고려 우왕3년 무안(당곶포)에 수군이 처음 설치 된 후, 1440(세종 22) 무안에서 해남(황원관)으로 옮겼고 1465(세조 11)에 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하였다. 충청도 수영의 위치는 보령(오천항)이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삼도의 수군을 총지휘하는 수군통제사 또는 삼도수군통제사는 종2품으로 1593(선조 26)에 생긴 직제이다. 초대 수군통제사는 이순신장군으로 지휘하는 통제영(統制營), 통영(統營)의 위치는 1593(선조26) 한산도에 두었다가 임진왜란 끝난 후 1604(선조 37) 통영(두룡포)로 옮겼다.

몰운대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광

다대포 객사 회원관(懷遠館,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3)은 조선후기 다대 첨절제사영의 부속 건물이고 첨절제사의 품계는 종3품이다. 다대포 객사의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여러 차례 중건하였다가 1825(순조 25)에 마지막으로 중수했다. 다대초등학교(다대1) 내에 있던 것을 1970년에 현재의 자리로 원형 그대로 이전 복원하였다.

객사는 조선시대 관아건물로서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임금을 상징 하는 궐자를 새긴 위패)를 보관하고, 고을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망배를 드린 곳이며, 행정업무와 사신의 숙소로도 이용하였다. 객사구조는 일반적으로 궐패를 모시는 전청 또는 주사(主舍)와 좌우 한 단계 낮은 건물인 동서 익랑, 또는 익사(翼舍)로 되어 있으나 다대포 객사는 정면 3, 측면 2, 팔작지붕의 벽이 없는 전청만 있다.

조선시대 행정편제는 한양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관아인 경직관아(京職官衙)와 지방 행정시설인 외직관아(外職官衙)로 구성되어 있다. 외직관아는 전국 8개도와 아래에 부, 대도호부, , 도호부, , 현 등을 두었고 각 도의 관찰사 아래에는 부윤(府尹), 부사, 목사, 군수, 현령 등의 행정계통 관리조직과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 등 군사조직으로 되어있다.

8개도에는 중앙에서 관찰사를 파견하고 이들이 집무를 수행하는 곳을 감영(監營)이라고 부른다. 감영은 관찰사(觀察使). 판관(判官), 도사(都事)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8개도아래의 여러 행전단위를 읍치(邑治)라고 부르며 읍치는 대개 읍성을 갖는 경우가 많다. 읍치에는 중앙으로부터 지방관이 파견되어 지역행정을 총괄하는데 지방관의 집무 및 생활의 공간을 통칭하여 동헌(東軒)이라고 하고 중심건물이 동헌 정청이다. 내아(內衙)는 지방관의 사적공간이다.

몰운대 내 민간인 출입통제지역에는 정운공 순의비(부산시 기념물 제20)가 있다. 이 비는 1592년 이순신 장군의 우부장으로 출전하여 왜의 군함 500척과 싸워 크게 승리한 부산포해전에서 순절한 녹두만호 정운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1798(정조 22) 8대손 정혁이 다대첨사로 왔을 때 세운 것이다. 만호의 품계는 종4품이며, 첨사는 정3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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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군 연화리에 있는 용왕단은 바닷가 높은 암반 위에 조성 된 하얀 정각으로 지붕에는 백탑모양을, 네 모서리에는 용두가 장식되어 있다. 이 용왕단에 모신 용왕은 도교의 영향을 받은 인자하신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여는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용왕의 모습이다. 이 용왕단은 해광사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1941년 해광 스님이 주지로 부임해 오면서 큰 불사를 일으키면서 그 때 조성되었다. 당시 대규모 불사가 현재 사찰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소원성취 기도를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방문객들

해광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범어사의 말사로서 약 100년 전 김목암 거사(居士)가 창건하였고 당시 돌담을 쌓고, 초가로 네 칸의 법당을 지어 바다에서 인양한 목조 불상을 봉안하였으며 절 이름을 해불암이라 짓고 승려가 되었다고 전해져 온다. 1974년 법당에 모신 목조 불상이 바닷물에 오랫동안 잠겨 있었던 것을 보존 처리를 하지 않았던 연유로 불상 표면이 크게 훼손되어 법당 뒤 언덕에 묻고, 절 이름도 해광사로 바꾸었다.

해광사 앞 공터는 캠핑장이 조성되어 주말에는 캠핑을 즐기는 인파로 가득하다

지금 이곳에는 소원성취를 이루고자 잠시 기도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일몰, 일출을 출사하는 사진애호가들이 즐겨 찾고 입구 공터는 캠핑장이 조성되어 있어 주말에는 캠핑을 즐기는 사람으로 가득하다. 용왕단으로 가는 길에는 무당굿으로 인한 쓰레기가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또한 주변 바위 낙서가 무척 심하여 아름다운 풍광에 상처를 주고 있다.

소원성취를 하고자 기도하는 내용이 참으로 다양하여 쓴 웃음이 나온다.

이 지역은 정확하게 전하는 설화는 없으나 옛날 기장에 유배 온 친구를 찾아온 선비 5명이 절경에 취해 술을 마시며 가무를 즐기고 시를 읊은 데서 비롯되었다는 오랑대가 전해지고 있으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현재 해광사 자리 또는 용왕단 우측에 있는 군 경계초소 자리로 추측된다.

바위에는 낙서가 가득하고 전방에는 해안경계초소가 보인다.

동양에서 용은 기린, 거북, 봉황과 함께 4()의 하나이며 박쥐 날개에 하늘을 날며 불을 뿜는 서양의 용과는 달리 동양의 용은 구름을 날개삼아 날아다닌다. 이러한 용을 사찰에 가면 법당의 기둥, , 처마 밑, 닫집, 계단 소맷돌, 범종 등 장식으로 된 용 모습을 볼 수 있다. 고대 인도에서는 뱀을 신격화한 용신(龍神)이었는데 불교의 성립과 함께 불교에 수용되어 불법과 사찰을 수호하는 호법신(護法神)이 되었다.

용왕단 가는 길이 정겹다.

특히 불교에서 용은 불법수호, 정법구현, 경전봉안, 부처님 수호 등이며 불교 경전 불본행집경에 의하면 석가모니가 깨우침을 얻은 후 맨 먼저 귀의한 신도가 용왕이었고 인연승호경에 의하면 용왕이 여자로 변신하여 기원정사로 가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용왕은 용궁 속에 경전을 봉안하고 있으며, 화엄경은 용수보살이 용궁에 있던 것을 꺼내어 세상에 유포시킨 것이고 부처님이 세상에 날 때 두 용왕이 부처님의 몸을 씻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부처님이 정각을 이룰 때 비를 막아주었다고 한다.

용왕단에서 본 대변항

구체적으로 불교의 용은 천왕팔부중의 하나이며 천, ,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니라, 마후라가를 말한다. 또한 불교경전 묘법연화경서품(序品)에 의하면 석가모니불의 설법을 들으러 온 참석자들 중에는 여덟 용왕이 있었으니 난타용왕, 발란타용왕, 사가라용왕, 화수길용왕, 덕차가용왕이며 각각 여러 백천 권속과 함께 있었다고 한다.

기장군 장안읍 척판암에 있는 용왕각으로 내륙지방에 있는 용왕각은 대부분 주위에 샘이나 우물이 있다.

용의 순수 한글 이름은 미르이며 현재 우리 나라에서 전해지는 용의 출생지는 인도에서 온 불교적인 용, 중국의 도교나 유교에서 온 용, 그리고 이 땅의 순수 토종용이다. 종합적으로 용의 역할을 보면 호법, 수신(水神), 호국, 예시예언자, 등이다용의 모습 및 외형에 관한 기록은 중국 뇌운문광아에 잘 묘사되어 있어 낙타머리에 사슴뿔, 토끼눈, 소귀, 뱀, 조개 배, 잉어바늘, 호랑이발, 매 발톱을 갖고 있고 입가에는 긴 수염이 있으며 비늘의 수는 81개로 되어있다.

경주시 외동읍 원원사지 용왕각으로 내부에는 우물이 있다.

그리고 용의 아홉 아들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로는 무거운 것을 들기 좋아해서 돌비석 기단에 조각되는 비희, 높은 곳을 좋아해서 전각의 지붕이나 비석의 이수에 장식되는 이문, 소리가 우렁차서 범종의 용뉴에 새겨지는 포뢰, 힘이 있어서 옥문에 장식되는 폐안, 놀기 먹기를 좋아해서 식기나 반상기에 새겨지는 도철, 물을 좋아해서 다리 기둥에 새겨지는 공하, 살생을 좋아해서 칼의 콧등이나 손잡이에 새겨지는 애차, 불을 좋아해서 불대좌나 용좌에 새겨지는 산예, 나비나 나방처럼 생겨서 방문의 문고리 등에 새겨지는 초도 등이 있다고 한다.

경주시 외동읍 원원사지 용왕각 안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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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소리 떠난 송정마을

동네 한바퀴/부산광역시 2020. 1. 5. 18:31 Posted by 추야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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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을 대표하는 해수욕장은 단연 해운대해수욕장이다. 이에 뒤지지 않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송정에 있는 송정해수욕장이다. 송정에는 사시사철 여행객이 찾는 송정해수욕장을 비롯하여 석양과 일몰을 즐기기에 좋은 죽도공원이 있고 구덕포 광어골에는 맛 집과 카페들이 해안선 따라 즐비하게 있으며 야경 또한 아름답다.

동해남부선 폐구간 트레킹코스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이기도 하다. 기적소리가 멈춘 송정역에는 현재 환경개선 작업이 진행 중이다. 특히 역사건물에는 40년대 건축양식 중 하나인 아르누보 양식을 가진 건축물도 있어 영화촬영장소로도 이용되고 있다.

송정(松亭)이란 지명은 본래 갈개 또는 가래포(加來浦), 가을포(加乙浦)라고 불렀다. 갈개는 갈대의 지방 방언으로 갈대가 많이 서식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으로 전하며, 가래포의 가래는 갈대의 사투리이다. 가을포는 가래포의 차음에서 나왔다고 한다.

가을포를 송정으로 부르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이곳의 세거 씨족인 광주 노씨(光州盧氏)가 해송림이 울창한 언덕에 정자를 지은 데서 유래하였다고도 하고, 또 하나는 죽도(竹島) 앞 거북 바위에 서 있는 일송정(一松亭)에서 따왔다고도 한다. 이 나무는 풀 한 포기 자라기 힘든 섬의 바위 위에서 수백 년 동안 자라 마을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으나, 6·25 전쟁 당시 주둔한 영국군이 표적 삼아 사격 연습을 하면서 고사하였다고 한다.

송정 마을[송정동]의 명확한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에 기장현의 9포 중 제일 포구인 가을포(加乙浦)로 기록되어 있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기장현읍지(機張縣邑誌)[1831]에 기장현 남면 송정방으로 기록되어 있다.

1880(고종 17) 기장현의 전부와 양산군의 일부가 동래군으로 편입되며 동래군 기장면 송정리로 되었으나 기장군읍지(機張郡邑誌)[1899]에는 다시 기장군 남면 송정리로 나타난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으로 동래군 기장면 송정리 송정 마을이 되었다.

1963년 부산시가 부산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해운대출장소에 편입되어 송정리 송정 마을이 되었고, 1966년 송정리가 송정동으로 개칭되었다. 1970년부터 5개년에 걸쳐 토지구획 정리 사업을 시행한 송정천 일대 늪지 매립으로 대규모 택지가 조성되며 마을의 북쪽이 개발되었다. 1980년 해운대출장소가 해운대구로 승격하였으며, 1995년 부산 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하며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송정동 송정 마을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일제 강점기 때 명창 선우일선이 부른 송정의 노래가 다음과 같으며 대한팔경의 노래가사를 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에헤 광어골 열두골은 골마다 기염(氣焰)이요

다리돌(청사포와 구덕포 경계 바다 속의 바위) 바라보니 여름의 나그네라

에헤야 좋구나 좋다. 에헤야 좋구나 좋아

명승의 송정이 자랑이로구나.

에헤 대섬(죽도)에 일본송(一本松)은 못 보면 한이 되고

섬 위에 돋는 달은 볼수록 찬란하네.

에헤야 좋구나 좋다. 에헤야 좋구나 좋아

명승의 송정이 자랑이로구나.

에헤 간진암(오륙도 쪽으로 바다 속에 있는 바위) 열두봉은 봉마다 기암이요

우뚝 선 망덕봉은 평온을 지켜주네

에헤야 좋구나 좋다. 지화자 좋구나 좋아

명승의 송정이 자랑이로구나.」

망덕봉은 해운대 송정동과 기장읍을 경계하고 있는 봉우리다. 고종 때 충신이던 흠재 노영경 대감이 태어날 때 그의 모친이 이 산 정상에 보름달이 뜨는 꿈을 꾸었다고 하여 망덕봉이라 하였다 한다. ()은 보름달을 뜻하기도 한다. 이 산은 봉우리가 말의 머리 형상을 닮았다고 하여 멍두산, 망아지머리산, 마두봉이라 불리고 있다. 송정과 기장 지역에는 노영경 대감의 후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개발로부터 살아난 송정해수욕장과 송정항

기장군과 경계에 있는 송정해수욕장은 도회적이고 화려한 해운대해수욕장에 비해 아담하고 순수한 아름다운 해수욕장이다. 요즘 서핀을 타는 젊은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현재 송정해수욕장 모습을 가지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1968년 부산직할시는 5개년 사업의 일환으로 송정해수욕장을 어항으로 만들기 위한 3차 공사를 시행하였다. 방파제 기초 조성사업인 석축 공사가 죽도에서 해수욕장 중심부를 향해 약 30%쯤 진행되고 있었을 때, 당시 송정동에 거주하던 모 기관장인 김낙희 라는 분이 이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어항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속적으로 반대한 결과 공사를 중단시키고 어항은 동쪽(죽도공원 뒤편)으로 옮기게 되었고 이에 따라 지금 규모의 아름다운 송정해수욕장 가지게 되었다.

소금배가 지나갔던 송정천(松亭川)

해운대구 송정동과 기장군 기장읍 당사마을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송정천은 장산 동편 앵림산에서 발원되어 동해바다로 유입되고 있다. 옛날에는 강폭이 넓고 수심도 깊어서(일제 강점기 때 측량된 지적도에는 강폭이 약 200m 이상 되는 것 같다.) 큰 배가 오르내릴 수 있었고, 앞바다에서 소금배가 하구에서 상류까지 짐을 싣고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강 중간 당사리 앞쪽 강변에는 천석바위가 있는데 다음과 같은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어느 옛날 천석의 소금을 가득 싣고 장사꾼들을 태운 큰 배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서 이곳 강으로 대피하였으나 사나운 태풍과 폭우로 끝내 이 천석바위 근처에서 뒤집히고 장사꾼 들은 강물에 빠졌다.

사람들은 격류에 떠내려가던 중 강가에 있는 이 바위에 걸려 구조될 수 있었다. 그 후부터 천석의 소금 배를 구출하였다 하여 이 바위를 천석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대나무가 많아서 지어진 죽도(竹島)와 죽도공원

죽도라는 지명은 현재는 공원 일대에 대나무가 많이 없지만 예전에는 경상 좌수영의 전시용(戰時用) 화살이 제조될 정도로 많은 대나무가 자라고 있어서 붙여졌다고 한다.

현재 죽도의 모습은 송정천에서 내린 모래로 바다가 메워져 육지와 이어져 있지만 옛날에는 육지와 떨어진 섬 이였다.

죽도의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시민들에게 휴식 공간을 제공하기 위하여 197147일 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일몰 감상하기 좋은 장소로 유명하다.

1940년대 역사 건축양식을 가진 송정역사(驛舍)

송정역은 194012월 건립된 역사(驛舍)로써 70년 역사를 간직한 목조단층 기와지붕 형태의 건물로 전체적으로 건립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건축사적 보존 가치가 매우 높다. 철제 창고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했던 아르누보 양식을 띠고 있어 건축사적 가치가 크고 2006124일에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302호로 지정되었다.

바닷가에 위치한 동해남부선 송정역은 지금은 세월의 뒤안길에서 기적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19341216일 역원을 배치하지 않은 간이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여 194151일 송정역이 준공되자, 동년 61일 보통 역으로 승격되었다. 19767월에는 차급화물 업무가 중지됐다.

또한 송정역은 해운역과 기장역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여름철에는 피서객 이 몰리는 곳이였다.  최근에는 송정역 주변이 각종 영화 촬영 장소로 많이 이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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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은 동양에서 용, 기린, 봉황과 함께 4()의 하나로 길상과 장수를 상징하고 벽사의 역할을 한다. 특히 십장생의 하나로 우리의 문학이나 전통미술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 가운데 하나다.

 

주변을 살펴보면 문창살, 사찰단청, 귀뉴라 하여 도장의 손잡이에 길상과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을 볼 수 있고 거북빗장은 벽사와 길상을 상징하고 있다. 집을 지울 때 상량고사를 지내는데 이때 상량문 좌우 양 끝에 자와 자를 서로 마주 대하게 하여 쓰는데 이는 화재예방을 위한 염원이고 해남 미황사 대웅전 주춧돌과 부도에 거북이가 조각 되어 있어 이는 어로의 안전을 기원하는 것이다.

옛 석비는 귀부, 비신, 이수로 구성되어 있고 받침돌이 귀부(龜趺)인데 물명고(物名考)에 의하면 고개를 든 거북을 사()라하고 고개를 숙인 거북을 영()이라 한다. 또 역동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튼 것도 있는데 여주의 민유중 신도비와 원주의 김제남 신도비의 귀부가 그런 예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거북류는 바다거북과(바다거북), 장수거북과(장수거북), 남생이과(남생이, 붉은귀거북), 자라과(자라)이고 주로 바다 고깃배 거물에 잡히는 거북은 바다거북이며 장수거북은 깊은 심해에 살기 때문에 보기가 어렵다. 남생이와 자라는 민물에 살고 남생이는 환경부에서 법적으로 보호야생동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옛 사람들은 거북을 구()라하고 자라를 별()이라고 구분하였다. 특히 자라는 한번 물면 떨어지지 않는 습성을 가지고 있고 손가락을 끊어버릴 정도로 강력한 이빨이 있어 이를 경험한 사람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이 생겼다

옛날 해운대 일대 즉 지금의 중1동은 갈대밭이고 거북이가 많이 서식하여 옛 이름은 구남(龜南)이라 하였고 동백섬도 거북섬으로 불렸다. 또한 황옥공주에 나오는 거북을 고려하면 그 당시 거북은 바다거북과로 추정된다.

또한 해운대는 거북관련 행사들이 있으며 그 중 거북 방생과 용왕굿을 한다. 매년 정월 보름날에는 동백섬 갯바위나 백사장에서 수산업(어업)에 종사하는 많은 분들이 바다에서의 무사편안, 사업 번창을 기원하기 위하여 용왕제를 올리고 있다. 최근 거북 방생과 관련하여 붉은귀거북이를 방생하고 있는데 이 종은 외래종으로 미국 미시시피 계곡이 원산지로 현재 전 세계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그리고 국내에는 천적이 없는 관계로 우리나라 고유어류와 수서곤충 등을 마구 잡아먹고 있어 생태계 먹이사슬을 교란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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