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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읍은 기장군 북부에 위치한 읍으로 장안의 유래는 이 고장의 이름난 사찰인 장안사에서 따온 것으로 생각된다. 한자(漢字)를 보면 길게, 오랫동안의 장()과 편안할 안()을 합하여, 오래도록 편안하고 평화스러운 읍()라는 뜻이다. 불광산(佛光山) 골짜기에서 발원하는 장안천이 역내(域內) 중앙부를 남북으로 관류하고 있고 이를 중심으로 좌우에 명례장안기룡용소반룡월내길천 등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지역  중심은 기룡리 하근마을이다. 장안천은 옛날에는 건천(乾川), 용천(龍川)이라 하였다. 건천은 마르내고, 용천은 미리내다. 모두 머리내로서 큰 내, 으뜸가는 내라는 뜻이다.

옛 부터 이 지역 마을에 다섯 마리의 용이 있는데기룡, 반룡, 용소, 대룡와 개천마을로 이름하여 오룡(五龍)이다. 개천마을에도 용이 있다는 것이다. 오룡 (五龍) 중 용소의 용은 등천하였으니 등천룡이고, 개천의 용은 강속에 누워있으니 와룡이고, 반룡의 용은 등천하려고 몸을 서리고 있는 반룡이고, 대룡의 용은 큰 바위로 화하였으니 대암룡이고, 기룡의 용은 강을 기어가고 있으니 복룡이라는 것이다.

신라 문무왕이 심은 장안리 느티나무

장안읍 장안사로 가는 길의 윗 장안마을 우측에 천년을 살아온 느티나무가 있다. 수령은 1,300년으로 신라 문무왕이 지나가다 심은 나무로 애장왕이 쉬어가기도 하였다는 유서 깊은 노거수다. 높이 25m, 둘레 8m1978년 보호수로 지정되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느티나무로 1999년 산림청에서 새천년을 맞이하여 대표하는 밀레니엄 나무로 지정됐다. 그러나 태풍 "매미" 의 피해를 받아 한쪽 큰 가지가 부러져 예전만큼 풍부한 녹음을 볼 수는 없지만 노쇠 되지 않은 푸르름은 지나가는 이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아홉 공주가 쌓은 우시산국(于尸山國)의 애절한 마지막 왕비 릉(王妃 陵)

장안읍은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에 동래지방을 중심으로 존재한 거칠산국(巨柒山國)과 일정한 정치적 연계를 가지고 존재하였을 것을 생각된다. 그리고 신라에 정복된 이후 신라의 갑화양곡현이 되었다. 통일신라 경덕왕 16(757)에 이르러서는 기장현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됨에 따라 그에 소속되었다. 이 시기 기장현은 동래군의 속현으로 존재하였다.

기룡리 장안초등학교를 지나서 하근마을 기룡다리로 기룡천을 건너 도로좌측의 송림에 옛날 왕비 능이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삼한시대 말엽쯤 오늘날의 울산시 울주군 웅촌면 검단리에 우시산국(于尸山國)이라는 작은 부족국가가 있었는데 신라의 침략을 받아 병합이 되었다그 침략으로 왕과 왕자는 포로로 잡혀가고 왕비만 아홉 공주를 데리고 탈출하여 지금의 기룡리 근처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곳도 신라의 손길이 뻗쳐 신라군이 왕비와 공주를 찾고 있었다. 왕비와 아홉 공주는 신분을 숨기고 평민으로 가장하여 남의 집 농사일을 도우는 품팔이를 하며 움막집에서 살았다.

지금 왕비 능으로 전해지고 있는 송림은 어느 문중의 소유로 넘어가 나무와 잡목이 무성해 사람이 들어가기 힘들 정도가 되었고 봉분 또한 잡풀이 자라서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그러는 가운데 왕비는 포로가 되어 끌려간 왕과 왕족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 생사 여부에 대한 근심, 걱정과 몸에 익숙지 못한 농사꾼의 고된 일에 몸과 마음이 지쳐 병을 얻어 숨지자 아홉 공주는 어머니 시신을 마당 한가운데 묻고 제각기 흩어져 살았다. 그러나 해마다 3월 보름이면 어머니 무덤가에 모여 치마폭에 흙을 담아 초라한 어머니 무덤을 밤을 꼬박 새워가며 봉분을 쌓았다.

그러고 나서 각자가 장만하여 온 화전과 음식을 차려놓고, 제문을 지어 어머니의 넋을 위로하였다. 해마다 치마폭에 담은 흙으로 쌓은 봉분은 세월이 갈수록 큰 봉분이 되어 왕릉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아홉 공주의 변함없는 효심과 자매간의 깊은 우애가 알려져 아홉 공주가 살고 있던 마을의 부녀들도 그날이 되면 모두 이곳 무덤에 모여서 아홉 공주의 아름다운 행실을 기리며 축제를 하게 되었다부녀자들은 이곳에 모여 아홉 공주의 효성과 우애를 기리는 작문도 하고 작시도 하고 시집살이의 고달픈 사연도 함께 호소하면서 이웃끼리 정도 두텁게 하였다. 이런 아름다운 풍습은 이곳 이웃마을에서 천오백년이나 끊임없이 이어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하여도 해마다 음력 315일이 되면 이러한 풍습은 계속 되었다. 그리고 계를 모아 그 돈으로 좋은 일도 많이 하였고 그 당시의 계 장부와 작문집도 시집간 어느 할머니가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그러나 이런 좋은 풍습이 계승되지 못하고 사라져 전설로만 남게 되었다. 지금 왕비 능이 있는 송림은 어느 문중의 소유로 넘어가 나무와 잡목이 무성해 사람이 들어가기 힘들 정도가 되었고 봉분 또한 잡풀이 자라서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과연 전설 그대로 이곳이 실제 왕비 능일까? 단지 능과 같이 한 주변 소나무는 알 것이다.

봉분 앞 무궁화꽃이 왕비의 넋을 위로 하듯 만발하게 피어있다.

보부상(褓負商) 배상기(裵常起) 업적을 기린 비석

고리원자력본부에서 임랑해수욕장 방향으로 장안천을 월내교로 건너면 우측에 송림이 울창한 공원이 있는데 명칭이 월내어린이공원이다. 이곳에 보부상 출신이었던 배상기(裵常起)의 업적을 기린 비석 3기가 나란히 서 있다제각각 세운 시기를 달리하면서 동일 인물의 비석 내용도 다르면서 한자리에 있는 것이 독특하다. 그 만큼 이곳에서 배상기의 공덕이 매우크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 비석을 통하여 일제강점기 때 보부상(褓負商)의 조직체계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배상기(裵常起)란 인물을 알아보면, 1842년 전북 익산 부잣집 종손으로 태어나서 구한말 민란 주모자로 연루되어 가족을 이끌고 고향을 떠나면서 보부상 무리에 섞여서 1860년대 월내에 정착하였다. 월내에 정착한 그는 동해안 보부상 최고 수령인 반수(班首)가 되었고 멸치잡이와 젓갈로 많이 번 돈으로 빈민 구제와 장학 사업에 매진했다. 1895년 갑오년 큰 흉년 때는 월내와 좌천 장날마다 가마솥을 장터에 내걸어 굶주린 사람을 구휼했다. 일제강점기 때 독립자금을 대기도 했던 그는 192079세를 일기를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장안읍 용소리 시명산 8부 능선에 있다.

세워진 시기 별로 비석을 살펴보면 1904(고종 8)에 세워진 좌우사 반수 배상기 휼상 영세불망비(左右社 班首 裵常起 恤商 永世不忘碑)이다. 좌우사 반수(左右社 班首)는 보부상 조직의 우두머리 직책이고 비석 전면 양쪽에 새겨진 반수, 접장(接長), 감역(監役) 들은 보부상 조직 직책이다. 세부적으로 보면 좌우사는 조선말기의 보부상 조직이고 반수는 보부상 조직의 우두머리이며 그 아래에 부반수, 주사, 접장, 감역, 공원 등이 있다.

부상(負商)과 보상(褓商)은 각 별개의 행상조합으로 성장하였으나, 1883년 혜상공국이 설치되면서 통합되었고, 1885년 상리국(商理局)으로 개칭되면서 부상을 좌단(左團) 좌사(左社)라 하였고, 보상을 우단(右團) 우사(右社)라고 하였다. 특이하게도 같은 비석의 후면에 다른 이의 공덕이 적혀있다. 즉 후면에는전 주사 접장 김상명 출의 영세불망비(前 主事 接長 金相明 出義 永世不忘碑)라 새기고 김상명이 성금을 낸 일을 기리는 내용이 담고 있다.

두 번째는 1913년에 세워진 비석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계 휼리비(通政大夫 裵公 常起 刱契 恤里碑)이다통정대부는 조선시대 문관 정3품 당상관의 품계이다. 비석이 세울 당시는 한일늑약 3년 뒤인 일제강점기 때 통정대부란 관직명을 사용 가능한지가 궁금하다. 비문에는 계를 형성하여 마을을 도운 일을 기리고 있다.

세 번째는 1917년에 세워진 비석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숙 장학비(通政大夫 裵公 常起 刱塾 獎學碑)이다. 비문에는 배상기가 글방을 열어 학문을 장려한 일을 기리고 있다.

왼쪽부터 비석명이 "좌우사 반수 배상기 휼상 영세불망비,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숙 장학비,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계 휼리비"이다
좌우사 반수 배상기 휼상 영세불망비(左右社 班首 裵常起 恤商 永世不忘碑)

捐金數千 惠我行賈

수천냥의 재산을 털어서 우리들 행상을 도와주셨네.

片石嵬然 咸曰某甫

우뚝한 한 조각 비석도 한 입으로 반수어른 칭송한다네.

時班首 金應寬 接長 金世洪 監役 明奎員 崔學柱 金大洪

시반수 김응관 접장 김세홍 감역 명규원 최학주 김대홍

전 주사 접장 김상명 출의 영세불망비(前 主事 接長 金相明 出義 永世不忘碑)

五百其緡 亦云不鮮

오백 꿰미의 돈이란 결코 적지 않나니

惟我賈民 豈忘少選

바라건대 우리 상인들 어찌 잠시라도 잊을소냐!

公員 朴璋鎭 朴泰邠 李起湊 張盛祚

공원 박장진 박태분 이기진 장성조

甲辰四月日立

갑진년(1904) 4월 일 세우다.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숙 장학비(通政大夫 裵公 常起 刱塾 獎學碑) 전면

疎財捐義 惠及我蒙

재화를 트이고 의연금 내놓으니 은덕이 우리 학생에게 이르렀도다.

春秋絃誦 里巷西東

춘추로 매번 책 읽고 외는 소리 골목마다 여기저기 들려온다네.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숙 장학비(通政大夫 裵公 常起 刱塾 獎學碑) 후면

丁巳五月二十五日立

정사년(1917) 5월 25일 세우다.

監董 秋斗高 金埰洙 朱在昊 張守珠

감동 추두고 김채수 주재호 장수주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계 휼리비(通政大夫 裵公 常起 刱契 恤里碑) 전면

坊境頌績 社旅竪功

마을에는 그의 공적 칭송하고 결사의 사람들 공을 치켜세우네.

養逆無憾 我深賴公

여행객 숙박에 유감없으니 우리가 공의 힘을 깊이 입었던 탓이라네.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계 휼리비(通政大夫 裵公 常起 刱契 恤里碑) 후면

大正貳年癸丑六月貳拾日

대정 2년(1913) 계축년 6월 20일

機張郡中北面月內洞西里契立碑

기장군 중북면 월내동 서리계에서 세우다.

有司 南順宗 朱仁權 李載成 韓桓 朴潤浩 金守萬

유사 남순종 주인권 이재성 한환 박윤호 김수만

월내마을은 월래포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고 월래포는 기장의 9대 포구(무지포, 이을포, 기을포, 동백포, 공수포, 기포, 독이포, 월래포, 화사을포) 중 하나다. 월내의 옛 이름은 월래(月來). 월래의 은 울타리의 과 같은 뜻이라고 한다. 즉 방어를 위한 책(), ()을 뜻한다. 월래의 는 내()라고도 표기한다. , 래는 나(, ), (), (), ()와 같은 의미로 나라[], (), () 등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래서 월내, 월래는 성책을 가진 마을의 의미.

예전 디젤기관차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서생역이 경전철인 동해선으로 변경됨으로써 역사가 새 건물로 바뀌었다. 옛 것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옛 건물을 찾고 거기서 옛 정서와 지난 추억을 돌이켜 본다.

구 서생역사 부속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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