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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咸安)은 6가야 중 아라가야의 나라이자 생육신 중 한사람인 조려(趙旅, 1420~1489)가 태어난 곳이다. 그리고 이 지역 토착 세거 성씨 중 함안(파산, 巴山) 趙氏가 있는데 조려는 함안 조씨이고 현재 대부분 어계(漁溪) 조려의 후손들이다. 군복IC에서 나와 국도 79번을 따라서 가다가 지방도로 1004번로 진입하여 원북 마을에 다다르면 도로 우측에는 서산서원, 조열 신도비각, 쌍절각 그리고 도로 좌측 청풍대(淸風臺)라는 언덕 옆에 채미정이 있다.  

군북면 원북 마을에 위치한 채미정(採薇亭)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온 후 조려(趙旅)가 여생을 보낸 곳으로 이곳 유림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1693년에 건립하였다. 6.25 전쟁 때 소실되었는데 1954년에 재건하였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八作)지붕 겹처마로 정면 2칸, 측면2칸의 방이 한가운데 있고 나머지는 툇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연못이 있어 당시 조경 구조를 엿 볼 수 있다. 채미정 현판 오른편에 백세, 외편에 청풍이란 현판이 각각 있다.

어계(漁溪) 조려(趙旅)는 자가 주옹(主翁), 호는 어계은자(漁溪隱者),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단종 때 생육신[김시습(金時習), 원호(元昊), 이맹전(李孟專), 조려(趙旅),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 중 한사람으로 계유정난 이후 세조의 왕위찬탈에 격분하여 조정을 등지고 고향에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당시 조려(趙旅)는 1453년(단종1)에 성균관 진사시험에 합격하였다.

채미정( 採薇亭 ) 전경

고향에 온 후 조려(趙旅)는 스스로 어계처사(漁溪處士)라 하고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는데 그의 시문(詩文)에 고사리를 뜯어 먹으면서 은둔생활(隱遁生活)을 하겠다는 의미의 구절이 있어 그의 삶을 엿 볼 수 있다. 어계(漁溪)는 함안 방어산에서 발원하여 원북으로 흘러가는 하천으로 원래 이름은 원북계(院北溪)이다. 조려가 계유정란 때 고향으로 돌아와 이곳 시냇가에서 낚시질로 여생을 보냈기 때문에 스스로 하천이름을 어계라 칭하였다.

채미정 뒤편 언덕이 청풍대이고 문풍루가 보인다

채미(採薇)는 중국 주나라 무왕 때 상나라에서 주나라로 왕권이 바뀌자 수양산에 들어가 고비(고사리처럼 생긴 나물)를 채취하여 연명하다가 이거마저 거부하여 아사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조려의 지절과 비견되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채미정 앞쪽 멀리 보이는 산이 백이산(伯夷山)이다. 백이산(伯夷山, 369m)은 진주시와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이전 지명은 서산(西山), 쌍안산(雙安山)이었으나 후세 사람들이 백이산이라고 불렀다.

채미정 출입문

 

채미정 현판 오른편에 백세, 왼편에 청풍이란 현판이 있다.
채미정(採薇亭)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八作)지붕 겹처마로 정면 2칸, 측면2칸의 방이 한가운데 있고 나머지는 툇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1699(숙종25)에 단종의 왕위가 복위되자 이조참판을 추증(追贈)하고 1703년 경상도 유생 곽억령(郭抑齡) 등이 상소를 올려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의 예에 따라 생육신인 조려 등도 사당을 세워 제향하도록 조정에 건의하여 1706년 생전에 기거하던 백이산 아래 함안군 원북동에 사당을 세워 김시습 등과 함께 제향하였다. 사당은 1713년(숙종 39)에 사액(賜額)되어 서산 서원(西山書院)으로 이름 지어졌다.

바람의 소리를 듣는 누, 청풍대 문풍루(聞風樓)으로 가는 길

1781(정조 5년)에 그의 정충(精忠)과 고절(高節)에 감격하여 그에게 이조판서란 벼슬과 정절공(靖節公)이란 시호(諡號)를 내려 그의 충혼(忠魂)과 의백(義魄)을 위로하였다. 저서로는 『어계집(漁溪集)』이 전한다. 서산 서원(西山書院)은 대원군 때 훼철되었다가 1902년에 어계의 중종과 유림들이 다시 서원을 건립하였다. 1984년에 사촌리에서 이곳 원북리로 이전하였다.

청풍대에 위치하고 있는 문풍루(聞風樓)

 

조려 묘(趙旅墓)는 함안군 법수면 강주리 응암 마을 입구 산기슭에 있다.

충의공(忠毅公)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와 쌍절각(雙節閣)

문풍루(聞風樓)에서 본 조종도 ( 趙宗道 )의 쌍절각(雙節閣)

조종도(趙宗道)의 쌍절각(雙節閣)은 정면2칸 측면1칸 팔작지붕의 다포집이고 채미정 도로 건너편에 있다. 쌍절각(雙節閣)에는 조종도와 그의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 비가 있는데 빛바랜 단청과 지붕 위의 와솔에서 충의(忠毅)와 열녀(烈女)의 절개가 느껴진다. 조종도(趙宗道, 1537]1597)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남명 조식의 대표적인 제자로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한 의병장이다.

쌍절각(雙節閣) 출입문

생육신(生六臣) 어계은자(漁溪隱者) 조려(趙旅)의 오세손으로 1537(중종 32) 함안 원북동(院北洞)에서 출생하여 1597(선조 30) 정유재란 당시 가족까지 이끌고 안의(安義)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인솔한 적군과 싸우다가 음력 818일 전사하였다. 그의 나이 둘째 아들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날 그의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도 자결하였다. 둘째 아들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쌍절각 ( 雙節閣 ) 은 정면 2 칸 측면 1 칸 팔작지붕의 다포집이다.
쌍절각(雙節閣)에는 조종도와 그의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 비가 있는데 빛바랜 단청과 지붕 위의 와솔에서 충의(忠毅)와 열녀(烈女)의 절개가 느껴진다.

1616(광해 8) 조정에서 충신증자헌대부(忠臣贈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충의공(忠毅公) 함양군수지문(咸陽郡守之門)이란 정려(旌閭)를 내렸고 1732(영조8) 그의 부인에게도 열녀충의공(烈女忠毅公) 조종도처(趙宗道妻) 증정부인(贈貞夫人) 전의이씨지문(全義李氏之門)으로 동상정려(仝上旌閭)를 내렸다.

충신조종도려표비
그의 부인 열녀충의공(烈女忠毅公) 비가 파손되어 더욱 애절하다.

조종도의 선비관은 만물 가운데 가장 영적인 존재가 사람이고, 사람 가운데 가장 빼어난 것이 선비이다. 국가에 재난이 있으면 관직의 유무를 막론하고 선비 된 사람은 평소 닦은 바대로 행하여 천 리의 당당함을 지켜야 한다. 세상을 잊고 자신만을 깨끗이 간직하는 것을 능사로 삼아 명예만 추구하려는 사람은 옳은 것이 아니며, 문무를 겸하고서 옳은 일에 몸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 올바른 선비이다.

고려 공조전서(工曹典書) 금은(琴隱) 조열(趙悅) 신도비각(神道碑閣)

금은(琴隱) 조열(趙悅) 신도비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의 다포집으로 후손들이 세운 비각이다. 충의공(忠毅公)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의 쌍절각(雙節閣) 옆에 자리 잡고 있다.

금은(琴隱) 조열(趙悅)선생의 신도비각 출입문
신도비각은 정면  3 칸 ,  측면  1 칸의 팔작지붕의 다포집이다.

조열(趙悅) 본관은 함안(咸安). 호는 금은(琴隱)으로 아버지는 판도판서 조천계(趙天啓)이다. 고려공민왕(恭愍王) 때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면서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등과 교유하였고,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함안으로 낙향하여 거문고와 서화로 소일하였다. 조선 건국 후 출사를 권유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또한 태조3년 한양궁이 준공되어 낙성연(落成宴)을 열면서 팔도에 명하여 금서가무(琴書歌舞)에 능한 조열을 초청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조열(趙悅)은 아들 넷을 두었다. 큰아들 조이(趙彛)는 신호위(神虎衛)를 지냈고, 둘째 조녕(趙寧)은 현감을 셋째는 조항(趙恒)이고, 넷째는 조안(趙安)이다. 조안의 아들이 어계(漁溪) 조려(趙旅)이다.

함주지(咸州誌)인물조에서는 처음 함안의 평광(平廣)에 살다가 뒤에 산팔리(山八里) 원북동(院北洞)으로 옮겨 살았다고만 전한다. 조열의 행적은 맹사성(孟思誠)이 지은 만은(晩隱) 홍재(洪載)의 행장이 전해지면서 보다 자세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홍재의 행장에는 어느 날 밤 판서 성만용(成萬庸), 평리사(評理事) 변빈(卞贇), 박사 정몽주(鄭夢周), 전서 김성목(金成牧) 등이 대사성(大司成) 이색(李穡) 등과 함께 술을 마시며 회포를 논하였다. 이색이 말하기를 비간(比干)은 죽었고 미자(微子)는 떠났으며 기자(箕子)는 종이 되었으니, 우리도 각자 뜻을 따라서 처신하자.”고 하여 결의하였다고 한다.

홍재는 귀향하기로 마음먹고 삼가(三嘉) 대평촌(大坪村)으로 우거(寓居)하여 이곳을 두심동(杜尋洞)이라 하였다. 이때 함안에 우거하고 있던 조열과 이오가 이곳을 서로 왕래하면서 시사(時事)를 걱정하였다고 한다. 고려가 멸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세 사람이 모여서 울며 비가(悲歌)를 부르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맥수(麥秀), 채미(採薇)의 비가와 비유하였다. 후인들이 그 의리를 흠모하여 운구 서원(雲衢書院)을 지어 봉향하였다고 한다.

저서로 문집인 금은 실기(琴隱實記)가 있고 묘는 함안군 군북면 하림1길 에 있다.

어계(漁溪) 조려(趙旅) 생가(生家

어계(漁溪) 생가(生家)는 조려가 태어난 집으로 벼슬을 포기하고 낙향한 뒤 은거했던 곳이다. 채미정(採薇亭)에서 마을길을 따라 15분 정도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어계 생가(漁溪生家) 가는 길은 채미정(採薇亭)에서 마을길을 따라  15 분 정도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
어계(漁溪)는 함안 방어산에서 발원하여 원북으로 흘러가는 하천으로 원래 이름은 원북계(院北溪)이다. 조려가 계유정란 때 고향으로 돌아와 이곳 시냇가에서 낚시질로 여생을 보냈기 때문에 스스로 어계라 칭하였다.

어계 생가(漁溪生家)는 대문채, 원북재,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고 대문채는 3칸으로 중앙의 솟을대문에 좌우에 방이 있다. 주 건물인 원북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일자형 평면으로 부엌은 없고 침실, 대청으로 되어 있어 별채이거나 사랑채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건물 뒤편 사당에서는 3월 9일(초정일)에 조려와 그의 부인에게 항례를 치르고 있다. 그리고 어계(漁溪) 조려(趙旅)가 사용한 죽장(竹丈)과 동제향로(銅製香爐)가 보관되어 있다.

어계 생가(漁溪生家)의 대문채는 3칸으로 중앙의 솟을대문에 좌우에 방이 있다.

함안 조씨는 조정(趙鼎)을 시조로 하는 함안 지역의 토착 세거 성씨로 파산 조씨(巴山趙氏)' 라고도 한다. 시조 조정(趙鼎) 이후로 함안에 정착하여 대를 이어 살아서 함안 지역 최대의 성족(盛族)으로 발전한 성씨이다. 현재 함안에 세거하고 있는 함안 조씨는 대부분 어계조려의 후손들이다.

어계 생가에 있는 은행나무는 수령 500년, 수고 20m, 나무물레 340cm이다.

조정의 자는 우보(禹寶)이고, 호는 모당(慕唐)이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중국 후당인(後唐人)으로 신라 말에 두 아우 조부(趙釜)와 조당(趙鐺)을 데리고 한반도로 온 후 왕건(王建)을 도와 합천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931(고려 태조 14) 고창성(古昌城 지금의 안동)에서 후백제의 견훤(甄萱) 군사를 대파하여 동경(東京) 관할 하에 있던 주현(州縣)의 항복을 받아 고려 건국에 큰 공을 세웠다. 그가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 대장군 원윤(元尹)에 오름으로써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함안을 본관으로 하였다.

문헌으로 고증할 수 있는 함안과 관계가 있는 최초 인물은 고려 말의 금은조열이다.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에 있는 함안 조씨의 문중 묘역에서 가장 윗대가 금은 조열이다.

원북(院北)은 본동, 태실[台谷], 새절골[新寺谷]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있고 지명은 어속원(魚束院)의 북쪽에 있다 하여 원북이라 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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