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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기수원지는 양산시 동면 법기리 340번지에 위치한 수원지로 일제 강점기 때인 1927년에 착공하여 1932년에 준공한 흙댐으로 건립한 수원지다수원지의 최고 수위는 197.23m, 수심 14.7m, 높이 21m, 길이 260m, 둘레 6m이다. 총저수량 157만 톤으로 현재 수원지의 물은 범어사 정수장으로 보내어 정수된 뒤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두구동, 노포동, 청룡동, 남산동 일대 약 7,000여 세대에 공급하고 있다.

법기 수원지는 건립 이후 일반인에게 출입이 금지 되었으나 20117월 수원지 전체 68중에서 둑 주변과 수림지” 2만여를 일반인에게 개방하였다. 개방 이후 많은 관광객이 찾아와서 수목의 아름다움을 만끽 느끼고 간다. 이곳의 동식물 보호를 위해 음식물 반입을 금지하고 있다. 처음 왔을 때는 다람쥐 무리를 자주 보았는데 두 번째 왔을 때는 다람쥐는 보이지 않고 청설모가 보였다.

히말라시다(개잎갈나무)는 수령 98년으로 원산지가 히말라야 산맥으로 주로 히말라야 산맥 서부와 아프가니스탄 동부에 분포하고 있다. 평균 높이는 30m로 관상수로 이용되고 있다.

법기 수원지 안으로 들어서면 거대하고 장대한 히말라시다(개잎갈나무)에 압도되어 감탄사를 연발케 한다. 수령 98년으로 원산지가 히말라야 산맥으로 주로 히말라야 산맥 서부와 아프가니스탄 동부에 분포하고 있다. 평균 높이는 30m로 관상수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 수원지 수림지에는 히말라시다 59그루, 편백 413그루, 가래(추자)나무 25그루, 반송 14그루, 벚나무 131그루, 은행나무 3그루, 감나무 1그루 등 총 7644그루가 자라고 있다.

인간에게 유익한 피톤치드로 유명한 편백나무도 높이 30m로 수령 98년이다. 그리고 가래나무는 높이 20m로 수령 또한 98년이다. 댐 마루에 있는 7그루의 반송은 수령이 88년에서 138년으로 칠형제반송이라 부르고 있다.

당시 법기수원지 관사를 화장실로 개조하여 사용 중
반송나무
댐 마루 칠형제반송을 향하는 하늘계단(123개의 계단). 댐 마루에 있는 7그루의 반송은 수령이 88년에서 138년으로 칠형제반송이라 부르고 있다.
법기 수원지의 최고 수위는  197.23m,  수심  14.7m,  높이  21m,  길이  260m,  둘레  6m 이다 .  총저수량  157 만 톤으로 현재 수원지의 물은 범어사 정수장으로 보내어 정수된 뒤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두구동 ,  노포동 ,  청룡동 ,  남산동 일대 약  7,000 여 세대에 공급하고 있다 .
멀리 보이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취수탑
댐 마루 칠형제반송 중 한그루

수목의 수려한 모습과 수원지의 조화로 절경을 이루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과거 부산 군수 사령관 때인 19606월에 이곳에 와서 낚시를 하며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취수터널 상부에는 일제강점기 2차례(3, 5)의 조선 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트가 준공식(1932) 때 석각한 글로 원정윤군생(源淨潤群生)이 있다. 의미는 깨끗한 물은 많은 생명체를 윤택하게 한다.”이다. 사이토 마코트는 3대 조선 총독으로 있을 때 문화정치로 민족말살 정책의 장본인으로 독립운동가 강우규 의사의 폭탄투척에 살아남은 자이다.

사이토 마코트가 3대 조선 총독로 191992일 취임할 때 남대문 역에서 사이토 마코트의 마차에 강우규 의사가 폭탄투척을 하였으나 수행원, 일본경찰 등 37명의 사상자만 나왔다. 당시 강우규 의사의 나이는 65세였다 거사 15일 뒤 일본순사에 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사이토 마코트는 1936년 일본군부의 급진파 청년장교에 의해 친영미파로 지목되어 암살되었다.

취수터널 입구이며 석축상부에는 일제강점기 2차례(제3대, 5대)의 조선 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트가 준공식(1932년) 때 석각한 글로 원정윤군생(源淨潤群生)이 있다. 의미는 “깨끗한 물은 많은 생명체를 윤택하게 한다.”이다.
인간에게 유익한 피톤치드로 유명한 편백나무도 높이 30m로 수령 98년이다.
가래나무는 높이 20m로 수령 또한 98년이다
가래나무와 반송이 하늘을 덮고 있다.

동면(東面)의 유래는 양산읍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법기는 1897년 본법과 창기 마을이 합쳐져 만들어졌고 본법마을은 그 이전에 본의곡이라 불렀으며 1872년에 본의리, 그 후 본법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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