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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양지(位良池)는 밀양 부북면 위양리 동쪽에 위치한 저수지로 가운데에 5개의 작은 섬과 정자로 구성되어 있고 신라시대 때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축조된 저수지다. 이 저수지의 물로 아래쪽에 있는 넓은 들판에 물을 대어 위양리 일대에 농사를 지었다. 백성들을 위한다는 의미에서 위양지(位良池)라고도 하고 또는 양양지(陽良地)라고도 부른다.

위양지의 제방(堤防) 둘레는 원래 1.7km에 달하는 저수지였으나 지금은 수리구역(水利區域)의 제방으로 바뀌어 제방 길이가 160m 로 줄어들었다.

위양지 작은 섬에 있는 정자, 완재정(宛在亭)

밀주구지(密州舊誌)"위양동 조(位良洞 條)"에 의하면 인조 12(1634)에 임진왜란으로 훼철(毁撤)된 제방을 부사(府使) 이유달(李惟達)이 수축(修築)한 기록이 남아 있다.

완재정(宛在亭)은 위양지 작은 섬에 있는 정자로 정면 3, 측면 2칸 크기에 팔작지붕 건물로 온돌방과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고 입향조(入鄕祖)인 안동 권씨 위양 종중의  학산(鶴山) 권삼변(權三變, 1577~1645)을 추모하기 위해 1900년 후손들이 세운 정자다.

당시 권삼변은 위양지 섬 중에 한곳에 정자를 세우고 싶어 미리 완재(宛在)라는 정자 이름까지 지었으나 이루지 못했다. 250년 지난 후, 안동 권씨 후손들이 섬 위에 정자를 지었고 이름도 완재정(宛在亭)으로 지었다. 처음에는 완재정(宛在亭)에 배로 출입했으나 후대에 다리를 놓아 아무 때나 접근이 가능토록 되었다.

 매년 5월이면 위양지 제방은 이팝나무 꽃이 만발하여 꽃구름을 만들고 멀리서는 흰 눈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한번 핀 꽃은 20일 이상 은은한 향기를 발산하여 천지를 진동시킨다. 또한 팽나무, 왕버들 나무가 조화롭게 심어져 있어 싱그러운 녹음과 하얀 꽃 세상을 만든다.

이팝나무는 소복이 쌓인 꽃송이가 사발에 얹힌 흰 쌀밥처럼 보여서, 조선시대 왕족이나 양반 李氏들만 먹는다고 이밥나무로 불렷다가 이팝나무으로 변했다. 또는 꽃이 입하 때 핀다하여 입하목(入夏木)으로 불렸다가, 입하가 연음되어 이파, 이팝으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고욤나무

이팝나무는 한해의 풍년을 점치는 나무로 알려져 있는데 꽃이 많이 필 때는 그해는 풍년이고 적게 필 때는 흉년이 든다고 한다.

이팝나무와 관련 전설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어느 마을에 열여덟에 시집온 착한 며느리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시부모님께 순종하며 쉴 틈 없이 집안일을 하고 살았지만 시어머니는 끊임없이 트집을 잡고 구박하며 시집살이를 시켰다. 온 동네 사람들은 이 며느리를 칭송하는 한편 동정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큰 제사가 있어 며느리는 조상들께 드리는 쌀밥을 짓게 되었다. 항상 잡곡만 짓다가 모처럼 쌀밥을 지으려니 혹 밥을 잘못지어 시어머니에게 꾸중을 들을 것이 겁난 며느리는 밥에 뜸이 잘들었나 밥알 몇 개를 떠서 먹었다. 그러나 공교롭게 그 순간 시어머니가 부엌에 들어왔다가 그 광경을 보고 제사에 쓸 멧밥을 며느리가 먼저 퍼먹는다며 온갖 학대를 하였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며느리는 그 길로 뒷산에 올라가 목을 매어 죽었고 이듬해 이 며느리가 묻힌 무덤가에서 나무가 자라더니 흰 꽃을 나무 가득 피워냈다. 이밥에 한이 맺힌 며느리가 죽어서 된 나무라 하여 동네 사람들은 이 나무를 이팝나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봄꽃이 만발하는 5월에 위양지 흰꽃구름속의 제방길 산책은 꽃 향기에 취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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