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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고속도로 군북 IC에서 빠져나와 의령을 향해 출발하면 먼발치에서 맞이하는 것이 의령관문이고 의령교로 건너는 강이 남강(南江)이다. 그리고 가마솥을 닮은 바위 하나가 남강에 있으니 그 이름이 솥 바위(정암 : 鼎巖). 그래서 의령을 찾는 여행객이면 먼저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의 승전지인 정암진과 솥 바위를 둘러보는 것이 좋다.

정암 철교와 의령교

정암진은 정암루(鼎巖樓)에서 둘러보는 것과 정암 철교 인도에서 바라보는 것이 각각 즐거움이 다르다. 솥 바위 또한 원거리와 근거리에서 보는 맛이 다르다. 일찍이 남강은 뛰어난 경치로 인해 선비와 가객들이 찾아 시를 읊고 자연을 노래했으리라. 또한 나룻배를 타고 왕래했던 교통의 요충지였던 정암진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이 왜적을 몰살시킨 승전지로 유명하다.

정암 철교

정암 철교는 경남 의령군과 함안군을 연결하는 교량으로서 1935년에 준공되었다. 6.25전쟁으로 파괴된 후 1958년 남아있던 2개의 경간을 그대로 살려 상부는 철골트러스 형식으로 재건하였다.

정암루(鼎巖樓)

정면 3, 측면 2칸 팔작지붕 겹처마 익공양식의 정암루는 자연암반 위에 장대석 기단을 놓아 지어졌다. 기둥은 원기둥으로, 누하주는 화강석을, 누상주는 목재를 사용하였다. 계단은 전면 중앙 한 곳에 두었고 기둥 상부 공포는 연화로 장식된 이익공을 결구하여 겹처마로 구성하였다. 마루는 우물마루이며 계자난간을 둘렸다.

현재 정암루 자리는 조서 중기 대제학을 지낸 용재(容齋) 이행(李荇)이 귀양살이를 하며 지은 취원루(聚遠樓)가 있었던 곳으로 1935년 임진왜란 승첩지를 기리고자 지었다. 그 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정암루가 소실되었으나 1963년에 재건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정암진(鼎巖津, 정암나루) 전투

남강은 함양군 서상면 남덕유산에서 발원하여 진주시를 거쳐 함안군과 의령군의 경계를 따라 흐르다가 낙동강에 합류한다낙동강과 더불어 일찍 뱃길이 열렸던 남강은 임진왜란 때 왜적이 호남으로 진출하는 침략의 길이 되었고 의령의 관문인 정암진은 홍의장군 곽재우의 최대 승첩지 중 하나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 장군은 1592(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고, 같은 해 5월 의령 정암진(鼎巖津)에서 왜적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의병 활동 초기에는 의령 정암진과 세간리(世干里)에 지휘 본부를 두고 의령을 고수하면서 현풍·창녕·영산·진주까지를 작전 지역으로 삼으면서 유사시에 대처하였다. 당시 곽재우는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여 적군과 아군에게 위엄을 보였으며, 의병(疑兵, 적을 혼란스럽게 하는 위장 병사)을 둔 위장 전술과 적을 유인하는 매복 작전, 그리고 유격전 등을 펼쳐 가며 적을 섬멸하였다.

정암 철교에서 바라본 정암루와 솥 바위

의병 활동 초기에는 의령 정암진(鼎巖津)과 세간리(世干里)에 지휘 본부를 설치하여 의령을 고수하는 한편, 이웃 고을인 현풍·창녕·영산·진주까지를 작전 지역으로 삼아 유사시에 대처했다.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여 적군과 아군의 장졸에게 위엄을 보이고, 단기(單騎)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의병(疑兵, 적이 의심하도록 하기 위한 위장 병사)을 구사해 위장 전술을 펴서 적을 직접 공격했다. 그리고 적을 유인해 매복병으로 하여금 급습을 가한다든가, 유격전을 펴서 적을 섬멸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솥 바위는 임진왜란 당시의 격전지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15925월 하순경 함안군을 완전 점령하고 정암진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적을 맞아 2,000인에 이르는 병력을 휘하에 거느리고 대승을 거둠으로써 왜적의 호남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정암 철교에서 바라본 정암진

정암(鼎巖, 솥바위)

정암(鼎巖)은 가마솥 다리처럼 세 개의 다리를 뻗고 물 위에 드러난 암석이 마치 솥뚜껑처럼 보인다고 해서 생긴 명칭이고 솥바위라고 부른다. 한자로 정()'솥 정'이라 하고, ()'바위 암'이다외형을 살펴보면 약 20ton 가량의 커다란 바위가 아래를 받치고 있고, 그 위로 높이 8m가량의 작은 바위가 탑 층을 이루고 있다조선 말기 한 도사가 이 바위 수면 아래 세 개의 발이 가리키는 주변 20(8)에 큰 부자가 나올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북쪽 의령군 정곡면에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 남쪽 진주 지수면에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회장, GS그룹 창업주 허만정 회장, 동남쪽 함안 군북면에 효성 창업주 조홍제 회장 등 4명의 재벌 총수가 태어났다. 그래서 창업과 입시를 목전에 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기도를 한다. 의령에는 부와 성공을 상징하는 3대 바위가 있는데  "솥 바위", "탑 바위"와 "코끼리 바위"이다.

여기서 이병철 생가 정곡면 중교리 까지는 9.410여분 정도 소요된다그곳에서 태어난 이병철은 결혼해 분가하기 전까지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건희 회장도 의령 친할머니 슬하에서 3살까지 자랐다. 1,907(577) 크기의 생가는 남서향으로 크게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된 한옥이다. 대문에서 오른쪽으로는 큰 바위가 있고, 뒤쪽으로 대나무 숲이 있는 구조다. 마당에는 안채 쪽과 대문 쪽에 2개의 우물이 있고 곳곳에 벽오동과 회화나무가 있다.

지수면 승산리 지수초등학교에는 1921년 개교 당시 1회 입학생이던 LG 창업주 구인회 회장, 효성 창업주 조홍제 회장,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함께 심고 가꾼 소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부자 소나무'로 불린다. 지수초등학교는 학생 수 감소로 2009년 인근 송정초교와 통합됐다. 옛 지수초교는 ‘K-기업가정신센터로 변모했다.

창업주 4인의 인연

조홍제 회장은 유년 시절 의령에 있는 이병철 회장의 형 이병각과 교류를 많이 해 자연스레 친구 동생인 이병철 회장도 알게 됐다. 이병각은 진주에서 제분업 사업을, 마산에서 양조장 사업도 했다. 이병각의 장인 하겸진은 진주 수곡면 출신이다. 조홍제 회장의 장인 하세진 역시 진주 수곡면 출신으로 하겸진과는 친척이다. 조홍제 회장은 해방 후 이병철 회장이 서울에서 설립한 삼성물산공사에 투자를 해 동업을 했다.

조홍제 회장과 구인회 회장과의 관계는 동네 대항 축구 시합을 하면서 교류해 이웃한 마을 친구로 지냈다. 서울에 있는 중앙고등학교 2학년까지 함께 보냈다. 그 후 각자 사업을 하면서도 교류는 왕성해 구인회가 플라스틱 연구를 할 때 일본에서 도서를 구입해 주는 등 구씨 집안과 아주 절친한 관계로 지내왔다.

구인회 회장과 이병철 회장은 1922년 지수보통학교 3학년 1학기를 함께 공부했다. 이병철 회장이 생활한 매형 집이 구인회 회장 본가와 옆집이라 일찍 결혼한 구인회 회장이 의령에서 유학 온 이병철 회장을 불러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했다. 1957년 구인회 회장의 3남 구자학과 이병철 회장의 차녀가 결혼해 두 사람은 사돈 관계가 되었다. 1960년대 두 사람은 방송사업 동업을 한 인연도 있다.

허만정 회장은 194512, 부산에서 무역업을 하던 구인회 회장을 찾아가 사돈이 하는 사업에 자금을 투자하겠소, 그리고 내 셋째 아들 준구를 맡기겠소.” “준구야, 경영은 구씨 집안이 잘한다. 나서지 말거라하는 가르침을 남겼다이것이 구씨와 허씨의 첫 공동사업의 진행이고 LGGS로 분리하기까지 50년 넘게 불협화음이 없었다.

허만정 회장은 이병철 회장이 부산에서 제일제당을 경영할 때 장남 허정구를 보내면서 삼성에도 자본을 투자했다. 이병철 회장의 매형 허순구가 이웃한 집 허만정 회장과 친척이라 자연스레 이병철 회장과 허만정 회장이 연결된 것으로 보여 진다. 조홍제 회장의 처남 하영진은 허만정 회장의 유고집에 조카관계로 기록되어 있다. 조홍제 회장과 허만정 회장도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의령 여씨(宜寧 余氏) 시조제단비(始祖祭壇碑)와 향제시도록(享祭時到錄)

의령 여씨 시조 제단비는 정암루 동쪽 절벽 아래 솥바위 가는 길에 위치하며 의령 여씨 시조 여선재에게 제사를 지내 던 제단에 세워진 비석이다. 1807년에 세워진 비석에는 여선재를 우음곡에 모셨다는 족보의 내용 바탕으로 묘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끝내 찾지못 하였고 우음곡과 뜻이 비슷한 지금의 위치에 제단 비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글은 대사간을 지낸 의성인 김한동(金翰東)이 짓고, 글씨는 단성에 거주하던 선비 합천인 이의선(李宜璿)이 쓴 것이다.

향제시도록의 표제는 시도기(時到記)로 되어 있고 책등에는 향제시도록이라 적혀 있으며, 필사본이다. 여중묵(余重默)의 친필로 보이는 비단일록서(碑壇日錄序)2면이 권두에 실려 있으며, 1면에 178행씩 적혀 있다그 뒤 정서(淨書)되어 있는 본문은 1면당 총 10(평균적으로 120자씩 기록)으로 총 461면이다. 책의 내용은 비단일록 및 시도기의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체 461면 가운데, 비단일록은 4-19면까지 기록되어 있으며, 나머지는 시도기에 해당하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비단일록은 여중묵이 안동을 출발하는 때인 1807226일로부터 의령 정암에 비석을 세우는 일자인 동년 124일까지 일의 진행 과정 및 관련 사항들을 기록하고 있다. 1807년으로부터 1943년까지 총 136년간의 기록이 수록되어 있어 당시 제향과 관련한 지역별 종회의 참여율, 소요된 경비 및 출자 금액 등의 경제 상황, 의령 여씨 가문의 봉선(奉先) 의식 등을 사적인 흐름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써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82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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