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의령은 의병의 고장으로 곽재우 장군이 태어났고 장군을 기리는 유적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충익사(忠翼祀)와 현고수(懸鼓樹), 정암나루 그리고 생가이다. 충익사는 곽재우 장군과 7장령의 위패를 모신 곳이고 현고수는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이 큰북을 매달아 치면서 전국 최초로 의병(義兵)을 모았다는 느티나무이다. 그리고 정암나루는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이 대승을 거둔 곳이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 장군과 17장령의 위패를 모신 충익사(忠翼祀)

남해 고속도로 군북 IC에서 내려 10분 가량 달리면 남강을 만난다. 이 남강을 건너면 의령군 하리이고 정암나루와 의령관문을 통과하여 의령천을 따라가면 맞이하는 것이 충익사다. 먼저 의령천 둔치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의병교를 건너면 양쪽 기둥을 세워 둥근 고리로 층층이 쌓은 의병탑이 푸른 숲을 뚫고 그 위용을 자랑한다. 매년 의병제 개최 시 의병교와 의병탑을 화려한 오색불꽃으로 장식한다.

양쪽 기둥을 세워 둥근 고리로 층층이 쌓은 의병탑. 매년 의병제 개최 시 의병교와 의병탑을 화려한 오색불꽃으로 장식한다.

충익사는 임진왜란 때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켰던 망우당 곽재우 홍의장군과 17장령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충익사는 19781222일에 준공하였고 충익(忠翼)은 숙종이 곽재우 장군에게 내린 시호로서, 은 나라에 충절을 다하고 은 생각이 깊고 멀다는 뜻이다.

충익사 충의문

충익사 충의각(忠義閣,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22)곽재우 장군과 장군 17의 이름, 본관, , 벼슬 등이 적힌 명판을 보관한 곳이다. 원래 이 건물은 1910년도 합천 이씨 문중에서 의령읍 동동리의 관찰사를 지낸 이중하를 기리는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것을 1972년 재부산향우회에서 이를 매입하여 이곳으로 옮겨왔다. 앞면 2칸 옆면 1칸 다포양식의 팔작지붕으로 공포의 높이가 매우 높고 화려하며 지붕면적도 넓다. 극락세계에 가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상여모양을 본떠 지은 건물이다. 충의각은 어느 한 곳에도 쇠못을 치지 않은 우리나라 전통 목조건물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충의각(忠義閣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522 호)은 극락세계에 가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상여모양을 본떠 지은 건물이다 .
충의각은  곽재우 장군과 장군  17 의 이름 ,  본관 ,  호 ,  벼슬 등이 적힌 명판을 보관한 곳이다

모과나무(경상남도 기념물 제83) 높이 12m, 밑둘레 4m, 가슴높이 둘레 3.1m로 수령은 약 500년 정도로 추정되며, 이는 지금까지 조사된 모과나무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모과나무는 원래 가례면 수성마을을 지켜주고 보호하던 당산나무로 토속신앙의 대상이었으나 1978년에 충익사로 옮겨졌다.

모과나무 ( 경상남도 기념물 제 83 호 )
주목나무로 박정히 전 대통령이 기념식수(1978.12.22)한 나무다.

유곡면 세간리 현고수(懸鼓樹, 천연기념물 제493)

세간리 현고수는 유곡면 세간마을 앞에 위치하고 있는 느티나무로, 나이는 55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15m, 둘레는 7m이다. 이 느티나무가 현고수(懸鼓樹)라고 불리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연유가 있다.

조선(朝鮮) 선조(宣祖) 25(1592) 413일 왜적이 부산포로 침입하자 당시 41세의 유생이었던 곽재우가 422일 이곳 유곡면 세간리 이 느티나무에 큰 북을 매달아 치면서 전국 최초로 의병(義兵)을 모아 훈련을 시켰다고 하여 이때부터 현고수로 불렸다고 한다.

세간리 현고수(懸鼓樹, 천연기념물 제493호)

망우당 곽재우 생가와 세간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2)

곽재우 생가와 세간리 은행나무

망우당 곽재우 생가는 2005년에 복원한 것으로 조선 초기 건축양식으로 안채, 사랑채, 별당, 큰 곳간, 작은 곳간, 대문, 문간채등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양반가의 집이다. 1592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9일째 되는 날 이곳 곽재우 생가가 있는 마을에서 곽재우장군을 비롯한 17장령들과 함께 책과 붓을 던지고 가재를 던지고 의병을 일으켰다.

망우당 곽재우 생가는  조선초기 건축양식으로 2005 년에 복원함

곽재우(郭再祐)[1552~1617]는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諡號)는 충익(忠翼)이다. 아버지는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낸 곽월(郭越), 어머니는 목사(牧使)를 지낸 강응두(姜應斗)의 딸 진주 강씨(晉州姜氏)와 참봉(參奉)을 지낸 허경(許瓊)의 딸 김해 허씨(金海許氏)인데, 곽재우는 진주 강씨의 소생이다. 곽재우의 부인은 만호(萬戶)를 지낸 김행(金行)의 딸 정부인 상산 김씨(商山金氏)이다.

곽재우(郭再祐)1552(명종 7) 경상도 의령현(宜寧縣) 세간리(世干里)에서 출생하였는데 세간리는 곽재우의 외가가 있는 곳으로, 원래 곽재우의 선대는 경상도 현풍현 솔례리(率禮里,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대리)에 세거해 왔다. 곽재우는 어려서부터 기량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독서를 즐겼다고 한다. 1569(명종 22) 의령현 세간리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는데, 공부를 하다 여가가 생기면 활쏘기와 말타기를 하거나 병서(兵書)를 익혔다. 1574(선조 7) 의주 목사(義州牧使)로 부임한 아버지 곽월을 따라 2년 간 배행하였으며, 1578(선조 11)에는 동지사(冬至使)로 임명된 아버지와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그곳에서 관상 보는 사람이 곽재우를 보고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되어 천하에 이름을 떨칠 것이라 하였다.

사랑채

1586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묘소가 위치한 신당동(新堂洞,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에서 여묘 살이를 하였다. 1589년 상사(喪事)가 끝난 뒤에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의령현의 기강(岐江) 돈지(遯池)[지금의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마산리]에 정자를 짓고 한평생을 보낼 계획을 세웠다.

안채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즉시 사재를 털어 장사들을 모집한 뒤 의병을 일으켰다. 곽재우는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이름 짓고 위엄을 보이었다. 곽재우는 우선 의령현의 신번현(新繁縣)[지금의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일대]을 왜적으로부터 지켰으며, 이후 연전연승하였다. 곽재우는 처음 의병을 일으켰을 때 군사가 적었으므로, 매복전을 통해 왜적을 물리치니, 이들이 곽재우를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렀다. 특히 곽재우는 1592년에 정암진(鼎巖津) 전투와 제1차 진주성(晉州城) 전투에서 승리하여, 전라도를 수호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1617년 세상을 떠났는데, 묘소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에 있다.

곳간채

세간리 은행나무는 수령 60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며, 높이 24.5m, 둘레 9.1m이다. 마을의 동편 의병장 곽재우 생가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을 지켜주는 신성한 나무로 믿어지고 있다. 특히 남쪽가지에서 자란 두 개의 짧은 가지(돌기)가 여인의 젖꼭지 같이 생겼다고 해서 젖이 나오지 않는 산모들이 찾아와 정성들여 빌면 효력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세간리 은행나무 ( 천연기념물 제 302 호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