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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일몰 풍광이 뛰어난 곳 중 한곳이 사하구 다대포의 몰운대이다. 서해바다를 느끼게 하는 다대포 해수욕장은 근처 을숙도와 더불어 바닷가 해안도로 라인 풍광이 아름답다. 또한 다대포는 부산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어 지질탐사를 하는 탐사객의 발길이 잦다.

 

수심이 얕고 넓은 백사장이라서 인기 많은 다대포해수욕장

 

몰운대 초입부터 울창한 소나무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몰운대(沒雲臺, 부산시 기념물 제27)는 강원도 태백산에서 시작하여 부산 다대포 몰운대 까지 370km에 이르는 낙동 정맥의 끝자락이고 금정산지의 끝자락이 대한해협으로 유입하여 형성된 곳으로 16세기까지 몰운도(沒雲島)라 부르는 섬이었다.

이후 낙동강의 퇴적물로 다대포육지와 연결되어 육계도가 되었다. 남쪽 끝은 해식애와 해식동이 발달되어 있고 배후인 육지는 모래해안이 발달하여 다대포해수욕장 같은 아름다운 해수욕장으로 생겼다. 몰운대 지명은 낙동강 하구에 안개와 구름이 끼는 날에는 그 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선조40년 동래부사 이춘원이 몰운대의 아름다움을 시로 남겼다.

다대(多大)라는 이름을 답달(畓達), 다다라(多多羅), 다다라(多多良)에서 변하여 생긴 이름으로 부산의 지명 중 그 유래가 가장 오래되었다. 다대항은 2001년 부산 아시안게임 때 북한 응원단을 실은 만경호가 입항한 곳으로 다대진이라고도 불렸다.

다대포는 신라시대 부터 왜구를 막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이다. 임진왜란이후 경상좌도 7(부산, 다대, 서평, 포이, 개운, 두모, 서행) 중 의 하나로 부산진과 함께 다른 진보다 더 중요시되어 2배의 병선을 보유하고 있다. 태종 7(1407) 궁궐(한양)에서 바라볼 때 경상도를 좌우로 나누어 낙동강 동쪽을 경상좌도, 서쪽을 경상우도로 불렸다.

대동여지도 : 동래
대동여지도 : 다대포와 몰운대

조선시대에는 군사적 요충지에는 영()을 설치하였는데 다수의 육군인 경우는 병영(兵營), 수군인 경우는 수영(水營)을 설치 및 운영하였고 주로 성곽 형태로 되어 있다. 이를 지휘하는 직위는 병영은 병마절도사(병사), 수영은 수군절도사(수사)로 품계는 각각 종2, 3품이다.

경상좌도 해안 방어를 지휘한 좌수영의 위치는 동래현 부산포이고 태종 때 울산 개운포로 옮겼다. 1592년 동래남촌(수영구 수영동)으로 옮겼고 1636(인조14) 감만이포(勘蠻夷浦, 감만1)로 옮겼다. 1652(효종 3) 동래남촌으로 다시 옮긴 후 1895(고종 23) 영이 폐지 될 때까지 존재하였다. 경상우도 우수영의 위치는 거제이며 1604(선조37) 고성(통영)으로 옮겼다.

그리고 전라좌도 좌수영의 위치1479(성종 10)는 여수이며 전라우도 우수영의 위치는 1377년 고려 우왕3년 무안(당곶포)에 수군이 처음 설치 된 후, 1440(세종 22) 무안에서 해남(황원관)으로 옮겼고 1465(세조 11)에 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하였다. 충청도 수영의 위치는 보령(오천항)이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삼도의 수군을 총지휘하는 수군통제사 또는 삼도수군통제사는 종2품으로 1593(선조 26)에 생긴 직제이다. 초대 수군통제사는 이순신장군으로 지휘하는 통제영(統制營), 통영(統營)의 위치는 1593(선조26) 한산도에 두었다가 임진왜란 끝난 후 1604(선조 37) 통영(두룡포)로 옮겼다.

몰운대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광

다대포 객사 회원관(懷遠館,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3)은 조선후기 다대 첨절제사영의 부속 건물이고 첨절제사의 품계는 종3품이다. 다대포 객사의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여러 차례 중건하였다가 1825(순조 25)에 마지막으로 중수했다. 다대초등학교(다대1) 내에 있던 것을 1970년에 현재의 자리로 원형 그대로 이전 복원하였다.

객사는 조선시대 관아건물로서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임금을 상징 하는 궐자를 새긴 위패)를 보관하고, 고을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망배를 드린 곳이며, 행정업무와 사신의 숙소로도 이용하였다. 객사구조는 일반적으로 궐패를 모시는 전청 또는 주사(主舍)와 좌우 한 단계 낮은 건물인 동서 익랑, 또는 익사(翼舍)로 되어 있으나 다대포 객사는 정면 3, 측면 2, 팔작지붕의 벽이 없는 전청만 있다.

조선시대 행정편제는 한양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관아인 경직관아(京職官衙)와 지방 행정시설인 외직관아(外職官衙)로 구성되어 있다. 외직관아는 전국 8개도와 아래에 부, 대도호부, , 도호부, , 현 등을 두었고 각 도의 관찰사 아래에는 부윤(府尹), 부사, 목사, 군수, 현령 등의 행정계통 관리조직과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 등 군사조직으로 되어있다.

8개도에는 중앙에서 관찰사를 파견하고 이들이 집무를 수행하는 곳을 감영(監營)이라고 부른다. 감영은 관찰사(觀察使). 판관(判官), 도사(都事)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8개도아래의 여러 행전단위를 읍치(邑治)라고 부르며 읍치는 대개 읍성을 갖는 경우가 많다. 읍치에는 중앙으로부터 지방관이 파견되어 지역행정을 총괄하는데 지방관의 집무 및 생활의 공간을 통칭하여 동헌(東軒)이라고 하고 중심건물이 동헌 정청이다. 내아(內衙)는 지방관의 사적공간이다.

몰운대 내 민간인 출입통제지역에는 정운공 순의비(부산시 기념물 제20)가 있다. 이 비는 1592년 이순신 장군의 우부장으로 출전하여 왜의 군함 500척과 싸워 크게 승리한 부산포해전에서 순절한 녹두만호 정운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1798(정조 22) 8대손 정혁이 다대첨사로 왔을 때 세운 것이다. 만호의 품계는 종4품이며, 첨사는 정3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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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군 연화리에 있는 용왕단은 바닷가 높은 암반 위에 조성 된 하얀 정각으로 지붕에는 백탑모양을, 네 모서리에는 용두가 장식되어 있다. 이 용왕단에 모신 용왕은 도교의 영향을 받은 인자하신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여는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용왕의 모습이다. 이 용왕단은 해광사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1941년 해광 스님이 주지로 부임해 오면서 큰 불사를 일으키면서 그 때 조성되었다. 당시 대규모 불사가 현재 사찰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소원성취 기도를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방문객들

해광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범어사의 말사로서 약 100년 전 김목암 거사(居士)가 창건하였고 당시 돌담을 쌓고, 초가로 네 칸의 법당을 지어 바다에서 인양한 목조 불상을 봉안하였으며 절 이름을 해불암이라 짓고 승려가 되었다고 전해져 온다. 1974년 법당에 모신 목조 불상이 바닷물에 오랫동안 잠겨 있었던 것을 보존 처리를 하지 않았던 연유로 불상 표면이 크게 훼손되어 법당 뒤 언덕에 묻고, 절 이름도 해광사로 바꾸었다.

해광사 앞 공터는 캠핑장이 조성되어 주말에는 캠핑을 즐기는 인파로 가득하다

지금 이곳에는 소원성취를 이루고자 잠시 기도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일몰, 일출을 출사하는 사진애호가들이 즐겨 찾고 입구 공터는 캠핑장이 조성되어 있어 주말에는 캠핑을 즐기는 사람으로 가득하다. 용왕단으로 가는 길에는 무당굿으로 인한 쓰레기가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또한 주변 바위 낙서가 무척 심하여 아름다운 풍광에 상처를 주고 있다.

소원성취를 하고자 기도하는 내용이 참으로 다양하여 쓴 웃음이 나온다.

이 지역은 정확하게 전하는 설화는 없으나 옛날 기장에 유배 온 친구를 찾아온 선비 5명이 절경에 취해 술을 마시며 가무를 즐기고 시를 읊은 데서 비롯되었다는 오랑대가 전해지고 있으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현재 해광사 자리 또는 용왕단 우측에 있는 군 경계초소 자리로 추측된다.

바위에는 낙서가 가득하고 전방에는 해안경계초소가 보인다.

동양에서 용은 기린, 거북, 봉황과 함께 4()의 하나이며 박쥐 날개에 하늘을 날며 불을 뿜는 서양의 용과는 달리 동양의 용은 구름을 날개삼아 날아다닌다. 이러한 용을 사찰에 가면 법당의 기둥, , 처마 밑, 닫집, 계단 소맷돌, 범종 등 장식으로 된 용 모습을 볼 수 있다. 고대 인도에서는 뱀을 신격화한 용신(龍神)이었는데 불교의 성립과 함께 불교에 수용되어 불법과 사찰을 수호하는 호법신(護法神)이 되었다.

용왕단 가는 길이 정겹다.

특히 불교에서 용은 불법수호, 정법구현, 경전봉안, 부처님 수호 등이며 불교 경전 불본행집경에 의하면 석가모니가 깨우침을 얻은 후 맨 먼저 귀의한 신도가 용왕이었고 인연승호경에 의하면 용왕이 여자로 변신하여 기원정사로 가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용왕은 용궁 속에 경전을 봉안하고 있으며, 화엄경은 용수보살이 용궁에 있던 것을 꺼내어 세상에 유포시킨 것이고 부처님이 세상에 날 때 두 용왕이 부처님의 몸을 씻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부처님이 정각을 이룰 때 비를 막아주었다고 한다.

용왕단에서 본 대변항

구체적으로 불교의 용은 천왕팔부중의 하나이며 천, ,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니라, 마후라가를 말한다. 또한 불교경전 묘법연화경서품(序品)에 의하면 석가모니불의 설법을 들으러 온 참석자들 중에는 여덟 용왕이 있었으니 난타용왕, 발란타용왕, 사가라용왕, 화수길용왕, 덕차가용왕이며 각각 여러 백천 권속과 함께 있었다고 한다.

기장군 장안읍 척판암에 있는 용왕각으로 내륙지방에 있는 용왕각은 대부분 주위에 샘이나 우물이 있다.

용의 순수 한글 이름은 미르이며 현재 우리 나라에서 전해지는 용의 출생지는 인도에서 온 불교적인 용, 중국의 도교나 유교에서 온 용, 그리고 이 땅의 순수 토종용이다. 종합적으로 용의 역할을 보면 호법, 수신(水神), 호국, 예시예언자, 등이다용의 모습 및 외형에 관한 기록은 중국 뇌운문광아에 잘 묘사되어 있어 낙타머리에 사슴뿔, 토끼눈, 소귀, 뱀, 조개 배, 잉어바늘, 호랑이발, 매 발톱을 갖고 있고 입가에는 긴 수염이 있으며 비늘의 수는 81개로 되어있다.

경주시 외동읍 원원사지 용왕각으로 내부에는 우물이 있다.

그리고 용의 아홉 아들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로는 무거운 것을 들기 좋아해서 돌비석 기단에 조각되는 비희, 높은 곳을 좋아해서 전각의 지붕이나 비석의 이수에 장식되는 이문, 소리가 우렁차서 범종의 용뉴에 새겨지는 포뢰, 힘이 있어서 옥문에 장식되는 폐안, 놀기 먹기를 좋아해서 식기나 반상기에 새겨지는 도철, 물을 좋아해서 다리 기둥에 새겨지는 공하, 살생을 좋아해서 칼의 콧등이나 손잡이에 새겨지는 애차, 불을 좋아해서 불대좌나 용좌에 새겨지는 산예, 나비나 나방처럼 생겨서 방문의 문고리 등에 새겨지는 초도 등이 있다고 한다.

경주시 외동읍 원원사지 용왕각 안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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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소리 떠난 송정마을

동네 한바퀴/부산광역시 2020. 1. 5. 18:31 Posted by 추야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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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을 대표하는 해수욕장은 단연 해운대해수욕장이다. 이에 뒤지지 않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송정에 있는 송정해수욕장이다. 송정에는 사시사철 여행객이 찾는 송정해수욕장을 비롯하여 석양과 일몰을 즐기기에 좋은 죽도공원이 있고 구덕포 광어골에는 맛 집과 카페들이 해안선 따라 즐비하게 있으며 야경 또한 아름답다.

동해남부선 폐구간 트레킹코스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이기도 하다. 기적소리가 멈춘 송정역에는 현재 환경개선 작업이 진행 중이다. 특히 역사건물에는 40년대 건축양식 중 하나인 아르누보 양식을 가진 건축물도 있어 영화촬영장소로도 이용되고 있다.

송정(松亭)이란 지명은 본래 갈개 또는 가래포(加來浦), 가을포(加乙浦)라고 불렀다. 갈개는 갈대의 지방 방언으로 갈대가 많이 서식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으로 전하며, 가래포의 가래는 갈대의 사투리이다. 가을포는 가래포의 차음에서 나왔다고 한다.

가을포를 송정으로 부르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이곳의 세거 씨족인 광주 노씨(光州盧氏)가 해송림이 울창한 언덕에 정자를 지은 데서 유래하였다고도 하고, 또 하나는 죽도(竹島) 앞 거북 바위에 서 있는 일송정(一松亭)에서 따왔다고도 한다. 이 나무는 풀 한 포기 자라기 힘든 섬의 바위 위에서 수백 년 동안 자라 마을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으나, 6·25 전쟁 당시 주둔한 영국군이 표적 삼아 사격 연습을 하면서 고사하였다고 한다.

송정 마을[송정동]의 명확한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에 기장현의 9포 중 제일 포구인 가을포(加乙浦)로 기록되어 있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기장현읍지(機張縣邑誌)[1831]에 기장현 남면 송정방으로 기록되어 있다.

1880(고종 17) 기장현의 전부와 양산군의 일부가 동래군으로 편입되며 동래군 기장면 송정리로 되었으나 기장군읍지(機張郡邑誌)[1899]에는 다시 기장군 남면 송정리로 나타난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으로 동래군 기장면 송정리 송정 마을이 되었다.

1963년 부산시가 부산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해운대출장소에 편입되어 송정리 송정 마을이 되었고, 1966년 송정리가 송정동으로 개칭되었다. 1970년부터 5개년에 걸쳐 토지구획 정리 사업을 시행한 송정천 일대 늪지 매립으로 대규모 택지가 조성되며 마을의 북쪽이 개발되었다. 1980년 해운대출장소가 해운대구로 승격하였으며, 1995년 부산 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하며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송정동 송정 마을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일제 강점기 때 명창 선우일선이 부른 송정의 노래가 다음과 같으며 대한팔경의 노래가사를 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에헤 광어골 열두골은 골마다 기염(氣焰)이요

다리돌(청사포와 구덕포 경계 바다 속의 바위) 바라보니 여름의 나그네라

에헤야 좋구나 좋다. 에헤야 좋구나 좋아

명승의 송정이 자랑이로구나.

에헤 대섬(죽도)에 일본송(一本松)은 못 보면 한이 되고

섬 위에 돋는 달은 볼수록 찬란하네.

에헤야 좋구나 좋다. 에헤야 좋구나 좋아

명승의 송정이 자랑이로구나.

에헤 간진암(오륙도 쪽으로 바다 속에 있는 바위) 열두봉은 봉마다 기암이요

우뚝 선 망덕봉은 평온을 지켜주네

에헤야 좋구나 좋다. 지화자 좋구나 좋아

명승의 송정이 자랑이로구나.」

망덕봉은 해운대 송정동과 기장읍을 경계하고 있는 봉우리다. 고종 때 충신이던 흠재 노영경 대감이 태어날 때 그의 모친이 이 산 정상에 보름달이 뜨는 꿈을 꾸었다고 하여 망덕봉이라 하였다 한다. ()은 보름달을 뜻하기도 한다. 이 산은 봉우리가 말의 머리 형상을 닮았다고 하여 멍두산, 망아지머리산, 마두봉이라 불리고 있다. 송정과 기장 지역에는 노영경 대감의 후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개발로부터 살아난 송정해수욕장과 송정항

기장군과 경계에 있는 송정해수욕장은 도회적이고 화려한 해운대해수욕장에 비해 아담하고 순수한 아름다운 해수욕장이다. 요즘 서핀을 타는 젊은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현재 송정해수욕장 모습을 가지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1968년 부산직할시는 5개년 사업의 일환으로 송정해수욕장을 어항으로 만들기 위한 3차 공사를 시행하였다. 방파제 기초 조성사업인 석축 공사가 죽도에서 해수욕장 중심부를 향해 약 30%쯤 진행되고 있었을 때, 당시 송정동에 거주하던 모 기관장인 김낙희 라는 분이 이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어항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속적으로 반대한 결과 공사를 중단시키고 어항은 동쪽(죽도공원 뒤편)으로 옮기게 되었고 이에 따라 지금 규모의 아름다운 송정해수욕장 가지게 되었다.

소금배가 지나갔던 송정천(松亭川)

해운대구 송정동과 기장군 기장읍 당사마을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송정천은 장산 동편 앵림산에서 발원되어 동해바다로 유입되고 있다. 옛날에는 강폭이 넓고 수심도 깊어서(일제 강점기 때 측량된 지적도에는 강폭이 약 200m 이상 되는 것 같다.) 큰 배가 오르내릴 수 있었고, 앞바다에서 소금배가 하구에서 상류까지 짐을 싣고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강 중간 당사리 앞쪽 강변에는 천석바위가 있는데 다음과 같은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어느 옛날 천석의 소금을 가득 싣고 장사꾼들을 태운 큰 배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서 이곳 강으로 대피하였으나 사나운 태풍과 폭우로 끝내 이 천석바위 근처에서 뒤집히고 장사꾼 들은 강물에 빠졌다.

사람들은 격류에 떠내려가던 중 강가에 있는 이 바위에 걸려 구조될 수 있었다. 그 후부터 천석의 소금 배를 구출하였다 하여 이 바위를 천석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대나무가 많아서 지어진 죽도(竹島)와 죽도공원

죽도라는 지명은 현재는 공원 일대에 대나무가 많이 없지만 예전에는 경상 좌수영의 전시용(戰時用) 화살이 제조될 정도로 많은 대나무가 자라고 있어서 붙여졌다고 한다.

현재 죽도의 모습은 송정천에서 내린 모래로 바다가 메워져 육지와 이어져 있지만 옛날에는 육지와 떨어진 섬 이였다.

죽도의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시민들에게 휴식 공간을 제공하기 위하여 197147일 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일몰 감상하기 좋은 장소로 유명하다.

1940년대 역사 건축양식을 가진 송정역사(驛舍)

송정역은 194012월 건립된 역사(驛舍)로써 70년 역사를 간직한 목조단층 기와지붕 형태의 건물로 전체적으로 건립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건축사적 보존 가치가 매우 높다. 철제 창고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했던 아르누보 양식을 띠고 있어 건축사적 가치가 크고 2006124일에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302호로 지정되었다.

바닷가에 위치한 동해남부선 송정역은 지금은 세월의 뒤안길에서 기적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19341216일 역원을 배치하지 않은 간이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여 194151일 송정역이 준공되자, 동년 61일 보통 역으로 승격되었다. 19767월에는 차급화물 업무가 중지됐다.

또한 송정역은 해운역과 기장역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여름철에는 피서객 이 몰리는 곳이였다.  최근에는 송정역 주변이 각종 영화 촬영 장소로 많이 이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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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는 신라 천년의 수도로써 시자체가 왕릉을 비롯하여 문화유산으로 묻혀 있어 마치 노천 박물관과 다름없다. 안압지, 계림, 황룡사지 주변에는 계절에 따라 청보리, 유채 등의 아름다운 색채가 고즈넉한 문화유산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또한 형형색색 맛 집과 카페 등으로 구성 된 황리단길은 젊은이들에게 경주를 찾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서 추령 터널을 통해 동해안을 향해 국도로 이동하면 푸른 평야와 감은사지, 동해구에서의 문무대왕암을 지나 남쪽 울산방향으로 가면 조그만 어촌항인 읍천항을 찾는다. 이곳은 바위가 해변에 너무 많아 항구역할이 힘 드는 지형에도 불구하고 1종 항구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으며 어민들은 미역, 전복으로 소득을 증대시키고 있다.

이곳에서 주상절리를 감상하려면 파도소리 길을 이용하는데 이 길은 산책길로 읍천항에서 하서4리 진리항까지 1.7km구간이 되는 해안 길로 몽돌길, 야생화길, 등대길, 데크길 등 해안 환경을 고려한 테마로 구성되어 있고 제주도, 울릉도 못지 않는 주상절리 절경을 만날 수 있다. 예전에는 해안가에 철책선이 있어 주상절리를 볼 수가 없었는데 경주시가 이를 2012925일 천연기념물 제536호로 지정하였고 관광 상품화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변모, 발전시켰다.

주상절리(柱狀節理)의 한자는 기둥 , 모양 , 마디 , 다스릴 로 기둥모양으로 쪼개진 돌을 형상화한 것으로 주로 화산지형에서 볼 수 있다. 양남의 주상절리는 신생대 제3기의 에오세(5400만 년 전)에서 마이오세(460만 년 전) 사이에 경주와 울산 해안지역 일대의 활발했던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10m가 넘는 정교한 돌기둥들이 1.7에 걸쳐 분포해 있으며, 주름치마, 꽃봉오리, 부채꼴 모양의 특이 주상절리를 비롯한 수평 방향의 주상절리가 대규모로 발달되어 있다.

지하의 기반암이 녹아 형성된 마그마는 지표로 나오면서 빠르게 식는다. 반 액체 상태인 마그마는 고체가 되는 과정에서 부피가 수축한다. 이때 수축면의 중심에서 각 꼭짓점의 거리가 동일한 육각형 모양의 절리가 만들어 지는데, 이것이 지표에 노출되어 기둥처럼 떨어져 나가면 비로소 주상절리가 탄생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주상절리의 발달에는 마그마의 급격한 냉각이 필수라는 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하에서 1,000도 가열된 마그마가 지표 밖으로 분출되어야 하므로 결국 주상절리의 발달은 분출암의 대표주자인 화산암과 관련 깊다.

양남면(陽南面)은 경주 동남쪽 동해변에 위치한 면으로 북쪽으로는 양북면, 서쪽으로는 외동읍, 남쪽으로는 울산광역시의 북구, 동쪽으로는 동해에 접해 있다. 신라시대에는 신라6부의 하나인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에 속하며 영역으로 상서지(웃섯골), 하서지(아랫섯골), 내아가 기록되어 있다. 하서지는 현재의 양남면 하서리 일대를, 내아는 나아리 일대를 가리킨다. 『동경잡기』에는 현재의 양남면과 양북면 및 감포읍 지역이 동해변(東海邊)이라는 1방으로 기록되어있다.

진리항은 진리마을에 있는 항구로 신라시대에는 밤나무가 많은 포구라 하여 율포(栗浦)라 불렸다고 하고 신라 눌지왕 때 충신 박제상이 왕명으로 왕자를 구하러 왜로 떠날 때 여기서 출범했다고 한다. 그 후 마을로 통하는 길이 없어 나룻배로 길을 건넜다고 나루 진(), 마을 리()를 합하여 진리(津里)라 이름 붙여졌다.

율포는 박제상이 왜로 출발한 항구로 그 위치가 논란이 되고 있는데 1989년 석굴암 연구회에서 울산 정자항을 율포라 여기고 유포석보 주변에 박제상 발선처비를 세웠다. 삼국유사 권제1 2 기이(紀異) 내물왕과 김제상에는 율포 바닷가로만 명시되어 있어 정확한 위치는 알 수가 없다.

진리항을 포함하고 있는 하서리(下西里)는 동해해변가의 온화한 기온에 옥토를 가진 농어업 겸업의 환경 좋은 마을이다. 신라 초기 육촌 중 배씨 세력지역으로 한기부(漢祇部)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에 해당되며 시조는 기타(祇陀)로 이곳을 입주, 개척한 후 하서지(下西知)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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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은 동양에서 용, 기린, 봉황과 함께 4()의 하나로 길상과 장수를 상징하고 벽사의 역할을 한다. 특히 십장생의 하나로 우리의 문학이나 전통미술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 가운데 하나다.

 

주변을 살펴보면 문창살, 사찰단청, 귀뉴라 하여 도장의 손잡이에 길상과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을 볼 수 있고 거북빗장은 벽사와 길상을 상징하고 있다. 집을 지울 때 상량고사를 지내는데 이때 상량문 좌우 양 끝에 자와 자를 서로 마주 대하게 하여 쓰는데 이는 화재예방을 위한 염원이고 해남 미황사 대웅전 주춧돌과 부도에 거북이가 조각 되어 있어 이는 어로의 안전을 기원하는 것이다.

옛 석비는 귀부, 비신, 이수로 구성되어 있고 받침돌이 귀부(龜趺)인데 물명고(物名考)에 의하면 고개를 든 거북을 사()라하고 고개를 숙인 거북을 영()이라 한다. 또 역동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튼 것도 있는데 여주의 민유중 신도비와 원주의 김제남 신도비의 귀부가 그런 예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거북류는 바다거북과(바다거북), 장수거북과(장수거북), 남생이과(남생이, 붉은귀거북), 자라과(자라)이고 주로 바다 고깃배 거물에 잡히는 거북은 바다거북이며 장수거북은 깊은 심해에 살기 때문에 보기가 어렵다. 남생이와 자라는 민물에 살고 남생이는 환경부에서 법적으로 보호야생동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옛 사람들은 거북을 구()라하고 자라를 별()이라고 구분하였다. 특히 자라는 한번 물면 떨어지지 않는 습성을 가지고 있고 손가락을 끊어버릴 정도로 강력한 이빨이 있어 이를 경험한 사람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이 생겼다

옛날 해운대 일대 즉 지금의 중1동은 갈대밭이고 거북이가 많이 서식하여 옛 이름은 구남(龜南)이라 하였고 동백섬도 거북섬으로 불렸다. 또한 황옥공주에 나오는 거북을 고려하면 그 당시 거북은 바다거북과로 추정된다.

또한 해운대는 거북관련 행사들이 있으며 그 중 거북 방생과 용왕굿을 한다. 매년 정월 보름날에는 동백섬 갯바위나 백사장에서 수산업(어업)에 종사하는 많은 분들이 바다에서의 무사편안, 사업 번창을 기원하기 위하여 용왕제를 올리고 있다. 최근 거북 방생과 관련하여 붉은귀거북이를 방생하고 있는데 이 종은 외래종으로 미국 미시시피 계곡이 원산지로 현재 전 세계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그리고 국내에는 천적이 없는 관계로 우리나라 고유어류와 수서곤충 등을 마구 잡아먹고 있어 생태계 먹이사슬을 교란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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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의 호랑이

동네 한바퀴/부산광역시 2019. 7. 24. 16:51 Posted by 추야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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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부터 우리나라에 호랑이가 많이 살고 있어 속담, 민담, 민화를 비롯하여 문학작품까지 등장하여 중국에서는 우리나라를 호담지국(虎談之國)라 불렀고 중국 문헌 후한서 동이전에도 호랑이를 신으로 받들어 제사지내는 나라라고 소개하고 있다.

호랑이는 박지원의 호질, 사신(청룡, 백호, 주작, 현무) 중 하나이며 산신각에는 산신을 시자(侍者)하는 신령한 동물로써 그 용맹스러움으로 권선징악과 벽사의 주재자로 신격화되어 있는 영물이다.

또한 호랑이의 민속적인 유형으로는 인간에 감화되어 인간을 돕는 보은형, 토끼 등 작은 동물에게 조롱받는 우화형, 여우처럼 둔갑하는 다중 인격적 변신형, 담배를 피우거나 까치와 놀고 있는 길상형,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호식형 등으로 다양하게 나누어진다.

호랑이는 범속에 속하며, 우리나라와 만주, 시베리아에는 백두산 호랑이로 분류되는 특산종으로 영명으로는 Amur Tiger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의 무분별한 포획으로 1918년 강원도 춘성군 가리산에서 수컷 1마리, 1922년 경주 대덕산에서 수컷 1마리, 평안북도 초산에서 1마리 사살된 것이 백두산 호랑이의 마지막 기록이다.

장산에서 호랑이 관련 이야기는 반여동 장산 산록에 굴이 있는데 중리마을 주민들은 범이 살았다 하여 범굴이라 부른다. 지금은 무속인들의 기도처로 변하였다. 재송동 새마을 당산 옆 계곡을 범전골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옛날 달밤에 범이  밭에 내려와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장산 양운폭포에도 숲이 우거져 호랑이가 내려왔다고 하고, 송정 지역에는 호랑이 새끼를 구해준 최씨의 부인이 범굴에서 해산을 했다는 보은(報恩)의 호랑이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금정구 서동의 부녀자들이 해방 전 장산에 나물 캐러 갔다가 바위 밑에서 호랑이 새끼를 발견하여 귀여워 그 새끼에게 다가가자 바위 위에서 어미 호랑이가 어흥하며 소리를   내어, 부녀자들이 놀라 신발이며 나물 캔 바구니를 두고 마을로 도망쳐 내려왔는데 다음 날 아침 마당에 신발과 나물   바구니가 고스란히 놓여있더라는 얘기도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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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팔경

동네 한바퀴/부산광역시 2019. 7. 7. 13:27 Posted by 추야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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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는 고운 최치원에 의해 지명이 형성 되었고 신라시대부터 온천으로 인해 유명해지기 시작하여 오늘 날의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경관이나 풍광이 뛰어난 곳을 가보면 팔경 또는 십이경이라 하여 아름다운 곳을 지정하여 그 곳을 찾아오는 이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해운대 또한 대한민국 대표 관광 명소로써 옛부터 해운대 팔경이 있어 그때나 지금이나 해운대는 모든 이가 찾는 유명한 지역이다

팔경(八景)의 유래는 중국 송()나라의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라는 회화(繪畵)에서 시작되어 중국의 경승지인 호남성(湖南省) 소상(瀟湘)에 있는 동정호 남쪽 언덕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의 물이 한데 모여 흐르는 지역에 경치가 좋은 여덟 곳을 그린 그림(繪畵)의 제목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고려 명종(明宗, 11701197)의 명으로 이광필이소상팔경도를 그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12세기 중엽에 도입된 것으로 보이며, 이후 전국 각지의 아름다운 경치에 팔경이란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① 해운대상(海雲臺上)

동백섬 바위 해운대란 각석이 있는 곳에서 보는 아름다운 경치이다. 이곳에 올라 끝없이 펼쳐진 앞바다를 보면, 저 멀리 수평 선 너머로 대마도가 아주 가깝게 보이고 우측으로는 바다 위에 오륙도가 떠있고 좌측에는 은모래 빛 광활한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그 옛날 고운 최치원이 진성여왕에게 시무10여조를 올려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망망대해와 뜬구름을 벗 삼아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해인사로 가서 종적을 감추었다.

② 구남온천(龜南溫泉)

해운대 온천의 옛 이름이 구남온천(龜南溫泉)이다. 옛날 이 일대는 갈대밭으로 거북이가 많이 서식하여 거북 ()’자를 따서 구남들, 구남평원이라 불려졌다. 또한 동래온천을 구야온천(龜也溫泉)이라고 하는데 비해 해운대온천은 남쪽에 있다 하여 구남온천으로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이 구남온천은 옛날부터 유명하여 신라 말 진성여왕이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이곳에서 목욕을 한 후 나았다는 전설이 있다.

③ 우산낙조(牛山落照)

달맞이 길에서 보는 해지는 풍경이다. 해운대 동쪽 관문격인 달맞이고개는 멀리서 달맞이고개를 바라보면 형상이 소가 누워있는 것 같다하여 옛 부터 우산 또는 와우산(臥牛山)이라 부른다. 이곳 우산에서 서쪽으로 해가 지는 모습을 말하는데 일몰 때 해운대 해수욕장과 오륙도를 품고 있는 바다를 바라다보면 아름다운 풍광에 압도당한다고 한다. 도시화 이전 석양이 찾아들면 바닷가 들판은 서산을 넘는 햇빛에 의해 홍조로 물들고, 이 광경을 와우산 위에서 바라보면 노을이 된 경치가 장관을 이루어 한 폭의 그림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시대가 흘러 요즈음은 해운대 야경이 이를 대신하고 있는데 옛 모습이 보고 싶다. 그리고 소의 꼬리 부분에 해당되는 곳이 미포(尾浦)이다.

④ 오륙귀범(五六歸帆)

오륙도 쪽에서 범선이 귀향하는 풍경이다. 저녁이면 만선을 이룬 배들이 흰 돛을 펼쳐 달고 오륙도를 지나 미포항으로 귀항을 하는데 이 광경을 미포, 동백섬, 와우산에서 바라보면 흰 돛단배 위로 갈매기가 맴돌고 하얗게 포말을 날리면서 뱃전에 부서지는 흰 파도가 오륙도와 함께 멀리 석양의 불그레한 노을빛과 어울려 황홀할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고 한다. 동력선 등 선박기술 발달로 흰 돛을 단 배를 볼 수가 없어 아쉽다.

이기대 스카이워크에서 바라본 해운대

오륙도(五六島)는 용호동 승두말로부터 부산만으로 향해 나란히 위치한 바위섬들이다. 오륙도가 밭섬(등대섬), 굴섬, 송곳섬, 수리섬, 방패섬, 솔섬 등 여섯 개 섬으로 이뤄졌으나 썰물 때 방패섬과 솔섬이 연결되어 다섯 개 섬으로 보이는 것에서 지명이 유래되었다. 원래 방패섬과 솔섬은 우삭도(于削島)라 불렸다.

이기대 스카이워크에서 바라본 오륙도
오륙도 각 섬에 대한 설명도

⑤ 봉대점화(烽臺點火)

간비오산의 봉화가 밤에 치솟는 풍경이다. 간비오산은 해운대의 주산인 장산에서 남쪽 동백섬으로 뻗어 내린 산맥 중간에 있는 산으로 우동 롯데 아파트 뒷산에 있는 산이다. 이곳에 봉수대가 있으며 봉수는 병란을 알리는 횃불로써 밤에는 불을, 낮에는 연기를 신호로서 연락하였다.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까지 해운포 일대를 감시하며 이곳에서 봉수를 올렸는데, 밤에 봉수대에 불을 점화하면 그 불꽃이 밤하늘을 뚫고 치솟아 올라 해운대 일대를 밝혀주어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⑥ 장지유수(萇旨流水)

해운대 장지천에서 흐르는 물과 물가의 버드나무 늘어진 광경이다. 장지천은 우동 해운대 중고교의 북쪽 장지봉 안봉골에서 발원하여 굽이굽이 곡선을 이루며 흐르다 춘천과 합류한다. 장지천 제방에는 버드나무, 개나리, 소나무가 울창하게 늘어서 있고, 흐르는 맑은 물은 속세를 떠나 무엇에도 속박되지 아니하고 조용하고 편한 마음으로 빠져들게 하는 선경을 이루니 이것이 장지유수이다. 신도시조성과 도시개발로 인해 하천은 복개되고 나무들도 사라졌다.

⑦ 춘천약어(春川躍魚)

해운대 춘천의 물고기가 뛰노는 풍경이다. 춘천 장산의 장산계곡과 구곡계곡에서 발원하여 폭포사, 석태암, 장산사, 대천공원을 지나 복개구간(삼정 그린 코아 아파트동백섬)을 거쳐 수영만으로 유입한다. 해운대 일대의 지명인 좌동, 우동의 기준은 춘천을 기준으로 명명하였다. 상류부는 급경사로 이곳에서 침식되는 물질이 하류의 해운대 해수욕장 모래의 공급원이었으나 도시개발로 인해 물길이 바뀌어 모래공급이 차단되었다.

장산에서 내려오는 춘천

옛날 달밤이면 춘천의 맑은 물에서 물고기들이 은빛을 내며 뛰노는 모습이 신비경을 이루었다고 한다. 지금은 대천공원 산책로가 조성되었고 수렵행위도 금지되어 대천공원에서 삼성 디지털 플라자까지 물고기들이 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삼정 그린 코아 아파트부터는 춘천이 복개되어 볼 수 없다.

수영강을 향하여 내려가는 춘천

⑧ 양운폭포(養雲瀑布)

좌동 장산에 있는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와 풍경의 아름다움이다. 장산의 지표수는 화산암으로 형성된 돌무더기 밑을 지나 좌동방향의 장산계곡으로 내린 물이 모여 장산 폭포사 위쪽에서 폭포를 이루는데 마치 구름이 피어나는 광경과 같다고 하여 양운폭포라 한다. 높이가 7~8m 가량으로 양운롱(養雲瀧) 또는 양운폭, 장산폭으로 불려왔으며 폭포가 떨어지는 곳에는 직경 10m 가량의 소()가 이루어져 있는데 가마솥처럼 생겼다고 가마소라 불리어 왔으며 물이 맑고 깊다. 주변 산수가 수려하고 자연풍치가 빼어나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양운폭포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양운폭포의 규모는 그리 크지는 않으나 물줄기가 마르지 않고 수질이 깨끗하여 1960년대까지만 해도 지역주민의 상수원 역할을 하였고 신시가지 조성 이전까지는 좌동은 물론 중동지역 일부와 해운대 각 호텔에까지 생활용수를 공급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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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동쪽 관문격인 달맞이고개는 일제강점기 때는 경마장으로, 1960년대까지 미군 골프장으로 사용되었다. 1970년부터 개발이 시작되어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하였고 1980년대부터 고급빌라가 바다를 바라보는 방향에 많이 지어졌다. 이후 카페, 음식점, 공방 등 다양한 문화시설이 들어섰다.

달맞이 고개에 위치한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원작가 김성종의 추리 문학관

특히 달맞이길(미포↔송정, 8km)은 15번 이상 굽어진다하여 15곡도(曲道)라고 부르며 가로수로써 벚나무가 가꾸어져 있어 드라이브 코스로 애용되고 있다. 그리고 해월정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2013년 동해와 남해의 경계로 정해져 있어 바다를 감상하는데 묘미를 제공하고 있다. 겨울날씨 좋은 아침 해월정에서는 대마도를 볼 수가 있다. 또한 문탠 로드(Moontan Road)라 하여 월출을 감상하기 위한 왕복 2km의 달빛 산책길도 조성되어 있다.

청사포 다릿골 전망대에서 바라본 송정

일제 강점기 때 자원수탈 목적으로 만들어진 동해남부선(부산↔포항구간 : 147.8km)이 근래 80년의 역사를 마치고 철거 되었다. 부산↔해운대 구간은 1934년에 연결되었는데 없어진 철길을 생각하니 예전 기차에서 바라본 달맞이 앞 바다가 그리워진다. 舊 철길의 우동↔송정구간에는 새로운 관광산업으로 걷기 코스(미포↔송정구간)와 해변열차(미포↔송정구간), 스카이 캡슐(미포↔청사포구간)이 운영하고 있다.

舊 철길의 걷기 코스(미포↔송정구간)에서 본 해운대 야경
달리는 해운대 해변열차(미포↔송정구간)

예전부터 달맞이고개는 해운팔경 중 하나인 우산낙조(牛山落潮)풍광을 보는 것으로 달맞이고개를 멀리서 바라보면 형상이 소가 누워있는 것 같다하여 옛 부터 우산 또는 와우산(臥牛山)이라 부른다. 이곳 우산에서 서쪽으로 해가 지는 모습을 말하는데 일몰 때 해운대 해수욕장과 오륙도를 품고 있는 바다를 바라다보면 아름다운 풍광에 압도당한다고 한다. 도시화 이전 석양이 찾아들면 바닷가 들판은 서산을 넘는 햇빛에 의해 홍조로 물들고, 이 광경을 와우산 위에서 바라보면 노을이 된 경치가 장관을 이루어 한 폭의 그림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시대가 흘러 요즈음은 해운대 야경이 이를 대신하고 있는데 옛 모습이 보고 싶다. 그리고 소의 꼬리 부분에 해당되는 곳이 미포(尾浦)이다.

끊어진 소의 등에는 인재는 사라지고

송정 구덕포에서 해안선을 따라 가면 조그만 포구가 있는 마을이 있어 이름이 청사포(靑沙浦)이다. 와우산(臥牛山)에서 소의 등(잘랭이)부분으로 일제강점기에 개설 된 동해 남부선 철도가 이 청사포 마을을 관통한다. 마을사람들은 이후 이 마을에서는 인재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옛날 이곳 마을에는 남달리 금슬이 좋은 정씨 부부가 고기잡이를 하며 살아 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고기잡이 나간 정씨가 돌아오지를 않자 기다리다 지친 정씨 부인이 소나무 두 그루를 심고 그 나무에 의지하여 바다를 바라보며 수년을 기다려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던 어느 하루, 바닷물을 가르고 푸른 구렁이(용왕)가 정씨 부인 앞에 나타나 물길을 인도하여 남편과 상면(相面)하게 되었으나 남편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나간 사람이 되었다. 이러한 전설(傳說)에서 청사포(靑沙浦)의 원래 지명(地名)은 청사포(靑蛇浦)로 모래 (沙字)가 아닌 뱀 (蛇字)였다고 전한다.

처녀를 사랑하는 송아지는 사람으로 환생되고

예로부터 달맞이로 유명하여 지어진 달맞이 고개에는 정월 대보름날 달집태우기, 연날리기 등 우리 고유의 민속놀이를 하고 있는데 이곳을 찾는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달은 보름을 단위로 초승달에서 반달로, 다시 만월로 옮겨가는 과정이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달이 끊임없이 생성-소멸-재생을 반복하기 때문에 소생과 생명력의 상징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달의 신비로움 때문에 소원을 빌고 달의 상태를 보고 풍년과 흉년을 미리 점()을 쳐보았다고 한다.

해운대 대보름달 관련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옛날 양반집 도령이 사냥을 좋아하여 매일 사냥을 나갔다. 어느 날 도령은 와우산 계곡에서 나물을 캐던 미모의 처녀를 만나게 되었다. 도령이 처녀에게 무슨 짐승을 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으니 처녀는 못 보았다고 대답하여 도령은 아쉬운 듯 지나갔다. 한참 후 어디서인지 송아지 한 마리가 나타나 처녀 앞에서 음매 음매 울며 갈 줄 모르더니, 날이 저물어 처녀가 집으로 귀가하자 송아지도 처녀의 집까지 따라왔다. 그 날 송아지는 처녀의 보호를 받으며 하루를 보냈고, 다음 날 처녀는 송아지를 데리고 어제 갔던 계곡으로 나물을 캐러 갔으나 이제까지 따라오던 송아지는 간 곳이 없고 어제 만났던 도령이 나타나 처녀와 인사를 나눈 후 헤어지면서 정월 대보름날 달이 떠오르면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다. 그 후 도령과 처녀는 정월 대보름달이 떠오를 때 다시 만나 달을 보고, 서로가 부부가 될 수 있도록 소원을 빌어 그 소원을 이루었으니, 그 때부터 정월 대보름날에는 선남선녀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와우산이 보이는 카페 작은창큰풍경에서 예쁜 풍경을 감상하다.

 

카페 입구

 

와우산과 청사포

 

청사포에서 맞이하는 신년 해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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