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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생면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화정리(禾亭里)는 북으로는 온양과 온산, 동으로는 회야강이 흐르면서 온산과 경계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서생 그리고 서쪽으로는 위양이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앞 들판은 화장들이라 하고 옛날 이 지역에는 서생포 만호 진성과 숙마산성 등이 있어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화정리는 신라 때는 샛내, 조선 예종 때는 술이리라 하였고 정조 때는 수마리(水麻里)라 하였다. 300년 전 김해 김씨(金氏)와 남양(南陽) 홍씨(洪氏)가 입향(入鄕)한 것으로 전해지고 김씨와 홍씨는 처남 매부지간으로 지내오고 있다고 한다. 화정리는 화정마을과 술마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화정마을은 진하리 위에, 술마마을 아래에 위치하고 마을 앞으로 국도 31호선이 지나고 있다. 서생포 만호 진성이 화정터널 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비록 바다가 마을에서 가깝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벼농사보다는 과수와 원예 그리고 채소를 많이 키워 울산으로 팔고 있다. 특히 가을이 되면 국도변에 간이 상점을 만들어 배와 감 등 과일과 무·호박 등 채소를 팔아서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술마마을은 화정마을 위에 위치하고 윗술마와 아랫술마로 나누어져 있다. 두 마을 모두 국도31호선에서 안으로 들어간 자리에 있으며 가구수도 윗술마가 7가구, 아랫술마가 16가구로 모두 23가구의 한적하고 조용한 농촌마을이다.

숙마산성은 술마마을의 남서쪽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어 먼저 술마마을을 찾아야 한다. 술마마을에 도착하여 술마길로 마을초입을 지나 안쪽으로 가면 술마마을회관을 만나고 계속 시멘트 외길을 따라 올라간다. 마을을 벗어나 골짜기로 진입하여 좁은 시멘트 길로 가다보면 골짜기 좌측에 농막이 조성된 여러 곳을 보게 된다.

마을을 벗어나 골짜기로 진입하여 좁은 시멘트 길로 가다보면 골짜기 좌측에 농막이 조성된 여러 곳을 보게 된다 .

이들을 지나 얼마 못가서 숙마산성 안내판을 만나게 된다. 산성에 도착하여 살펴보면 대부분 무너져 있어서 정확한 구조는 알 수 없다. 성내의 시설과 축조 시기, 성격 등을 밝히기 위해서는 추가 조사가 필요할 것 같다. 마성(馬城)으로도 별칭 되는 이 성은 골짜기에서 산정의 능선까지 연결되는 석축성으로 보고 있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길이는 300m 정도이다. 성벽은 먼저 가공된 화강암으로 기단부를 만든 후 그 위에 사람머리 크기보다 조금 큰 돌을 가로쌓기 방법으로 협축 하였으며, 내부는 사람머리 크기의 화강암으로 막채우는 방법으로 마무리하였다. 잔존높이는 50㎝∼110이며 폭은 310정도이다.

숙마산성 안내판. 산성을 살펴보면 대부분 무너져 있어서 정확한 구조는 알 수 없다. 성내의 시설과 축조 시기, 성격 등을 밝히기 위한 추가 조사가 필요할 것 같다.
마성 ( 馬城 ) 으로도 별칭 되는 이 성은 골짜기에서 산정의 능선까지 연결되는 석축성으로 보고 있지만 ,  현재까지 확인된 길이는  300m  정도이다 .

 

성벽은 먼저 가공된 화강암으로 기단부를 만든 후 그 위에 사람머리 크기보다 조금 큰 돌을 가로쌓기 방법으로 협축 하였으며 ,  내부는 사람머리 크기의 화강암으로 막채우는 방법으로 마무리하였다 .  잔존높이는  50 ㎝∼ 110 ㎝ 이며 폭은  310 ㎝  정도이다 .

숙마산성을 지나 50m 올라가면 용곡산 하늘길을 조우하고 울산전파관리소를 만날 수 있다. 용곡산 하늘길이라고 부르는 이 코스는 용곡산, 용골산, 울산전파관리소 중심으로 출발점은 동서남북으로 다양하다. 주로 발리에서 출발하여 서생포 왜성, 진하해수욕장 또는 송정마을로 도착하는 코스이나 위양리 위곡마을 위곡2, 나사리 봉화산 해맞이로 , 화정리 술마마을 술마길, 용리 덕골재길, 등 원하는 루트를 선택할 수 있다.

숙마산성을 지나  50m  올라가면 용곡산 하늘길을 조우하고 울산전파관리소를 만날 수 있다 .
「 용곡산 하늘길 」 이라고 부르는 이 코스는 용곡산 ,  용골산 ,  울산전파관리소 중심으로 출발점은 동서남북으로 다양하다 .  주로 발리에서 출발하여 서생포 왜성 ,  진하해수욕장 또는 송정마을로 도착하는 코스이나 위양리 위곡마을 위곡 2 길 ,  나사리 봉화산 해맞이로  ,  화정리 술마마을 술마길 ,  용리 덕골재길 ,  등 원하는 루트를 선택할 수 있다 .

숙마산성을 마성이라고 보는 이유는 흥려승람(興麗勝覽)[1934]에 숙마성에 대해 일명 마성이라고 하며 서생에 있는데 언제 쌓았는지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고 울산읍지 고적조[1934]에도 숙마산성을 마성이라고 전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숙마성의 숙마(熟麻)는 말을 기른다는 의미를 지닌 숙마(熟馬)의 잘못된 표기로 판단하고 있고 입지나 축조방식이 울산지역 방어진 목장과 유사하여 일반적인 전투성과는 다른 모습이 보여 조선시대 이길곶 목장으로 보고 있다.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1469],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 의하면 울산 지역에 방어진 목장, 방암산 목장, 이길곶 목장 등 모두 3개의 목장이 설치되었으나, 이후 방암산 목장과 이길곶 목장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어 두 목장은 완성을 보지 못하고 폐지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성(馬城)은 말이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목장 둘레를 돌로 막아 쌓은 담장으로 목장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고대로부터 근세까지 국가에서 말 산업을 관장했다.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때 국영 말 목장이 174개소나 있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초기부터 군사, 교통 등 필요에 따라 많은 국영 목장을 설치했고 고려사에도 대표적인 말 목장 8개소가 등장한다. 조선시대에는 강원도를 뺀 제주와 전국7도 관찰사 아래 말 목장 감목관을 뒀다. 감목관은 외관직으로 말 목장을 관리했고 30개월 만기 종6품관으로 전국에 21명이 있었다고 한다. 가장 규모가 큰 목장이 제주목장이고 그 밖에 강화도, 진도, 도련포, 등 유명했다. 조선 초기 말 목장은 59개소에 불과했으나 순종 때는 172개소로 말 목장을 국가 관장사업으로 육성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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