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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군 서생면의 특산물인 서생 배는 맛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다해안 가까이 과수원이 있어 육풍과 해풍의 절묘한 조화로 맛이 좋을까그리고 서생 배와 함께 해안 경관 또한 아름답다서생면 해안은 신암, 신리, 나사항부터 시작하여 나사해수욕장, 간절곶, 송정공원, 솔개공원, 솔개해수욕장, 대바위공원, 진하해수욕장으로 절경이 이어진다.

카페를 찾는 사람, 트레킹을 하는 사람, 낚시를 즐기는 사람 등으로 주말이면 해안이 나들이 인파로 수를 넣는다. 특히 압도하게 수려한 경관, 화려하며 아름다운 분위기, 소박한 카페가 즐비하다. 각각의 분위기 다양하고 경관이 훌륭하여 카페천국이라고 불려도 무방하고 카페답사를 하여도 재미가 솔솔 할 것 같다. 또한 횟집을 비롯한 다양한 맛 집이 있어 여행객에게 입맛을 돋우게 한다.

아담하고 소박한 나사해수욕장과 솔개해수욕장에는 조용한 어촌 정취를 느끼고자 하는 관광객이 주로 찾는다. 또한 해파랑길의 한 구간으로 deck 길이 조성되어 단아한 해안절벽과 바다풍경을 즐길 수 있다. 해파랑길은 동해안의 떠오르는 해와 푸르른 동해바다를 벗 삼아 함께 걷는 길이란 뜻으로 부산 오륙도 해맞이 공원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를 잇는 약 770km의 광역 탐방로이다.

 

비학마을 해변가의 공동묘지

 

만발한 꽃들이 넋을 위로하는것 같다.
바다를 마주보는 한기의 무덤

학이 난다는 비학(飛鶴)마을은 이 마을의 가장 끝자락에 있는 동묘산이 마치 학의 입모습을 닮았다는 데서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고 하고 울주군 최남단으로 부산의 기장군과 경계를 하고 있다. 실제로 이곳에는 학이 많이 서식했고 이곳에서 가까운 온곡 삼거리 마을을 학이 춤을 춘다는 뜻의 무학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형적으로 마을을 보면 소백산 줄기의 대운산 자락이 되어 소위 명당이라고 불린다. 이 때문에 옛날에는 전국의 유명한 풍수학자들이 많이 다녀갔다고 한다. 현재 한수원 인재개발원이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이 옛날 '한림 명산'으로 불리는데 이곳에서 공부를 하던 선비들이 많았다고 한다.

 

신고리3,4호기 원자력발전소 부지에 편입되어 간절곶으로 이주 한 신암리 비학마을 망향비

비학 마을에 원자력 교육원이 처음 들어선 것은 1978년이고 이후 신고리1,23,4호기가 들어섰다. 마을 사람들은 원전이 들어서면서 큰 불편을 겪어야 했다. 우선 대부분의 땅이 개발제한 구역으로 묶이는 바람에 개발을 할 수 없어 재래식 농어촌 가옥을 그대로 사용해야 했다. 또 논과 밭 등 각종 부동산이 팔리지 않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따라서 이곳 주민들은 전력 생산도 좋고 개발도 좋지만 조상 대대로 살아온 이 땅이 지도상에서 없어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신리(新里)마을 지명은 운암(雲岩)마을의 이름을 따서 새운암으로 불려오다가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리(新里)로 바꾸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으며 당시 건립되었던 서생어업조합 사무실과 사택건물 등이 아직 남아 있다. 당시 일본의 수곡수산(守谷水産)이란 회사가 부산과 방어진간의 물류를 운반했는데 이 화물선이 신리항에서 출·입항 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의 제일무역회사가 출범, 어부들이 잡아온 붕장어(아나고)를 일본으로 수출하여 동해산 장어수출 기지항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후 1960년대에는 밀복잡이 주항으로서도 명성이 높았다.

카페와 맞집으로 어우러진 신리항
카페 히든 블루에서 본 신암항
카페 히든 블루에서 본 신리항
신암항 전경

면소재지가 있는 신암(新岩)마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시대 유물인 즐문토기(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된 곳으로 옛날부터 기후가 따뜻하고 바다와 접하여 먹을 것이 많았던 지역으로 가장 먼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살았던 지역으로 알려졌다. 이 유물은 서울 중앙국립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마을 앞 해변은 주로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때문에 사시사철 낚시꾼들이 모여들어 낚시를 즐기는데 흑돔과 노래미 등이 주로 잡힌다. 마을에는 신선암(神仙岩)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위가 넓고 펀펀한데 45덩이의 큰 바위가 첩첩으로 돼 있고 신선암(神仙岩)이라 불리게 된 것은 봄과 여름, 바다로부터 안개가 일어나 마치 신선이 옷을 입은 것 같아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바위에 오르면 아무리 더운 여름날이라 해도 선선하다고 한다.

 

신암(新岩)마을 이전 이름은 마을 앞에 구름 같이 희고 큰 바위가 보여 그 바위 모양을 따서 구름 '()'자와 바위 '()'자를 따서 운암동(雲岩洞)이라 정하였다고 한다. 마을 한 가운데는 마을의 역사를 증명하는 운암동(雲岩洞)’이란 표지석과 함께 울타리를 쳐서 바위를 보존하고 있다.

조용하고 한적한 신암항의 모래밭
나사해수욕장과 주변 해안

나사(羅士) 해수욕장의 모래사장 길이는 약 800m, 폭은 1020m로 여름이면 부산, 울산 등지에서 피서객이 몰려와 만원을 이룬다. 기후도 해양성 기후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마을 뒤쪽의 봉대산이 북풍을 막아주어 따뜻하다. 나사(羅士)라는 이름은 나사(羅沙)에서 바뀌진 것으로 모래가 계속 쌓여 육지로 변하여 모래가 뻗어나간다하여 '나사(羅沙)'라고 사용하다가 그 후 선비가 많이 배출되기를 원해 '나사(羅士)'로 사용했다.

 

카페 쿠즈베리에서 본 나사 바닷가
카페 나살에서 본 나사바닷가의 모래사장

나사(羅士) 멸치잡이가 유명한데 멸치를 잡는 방법으로 지인망을 사용한다. 지인망은 일명 후리라고 하는데 한쪽 그물 끝을 육지에 두고 다른 한쪽 끝은 어선에서 펼치면서 여러 사람이 양쪽을 끌어당겨 멸치를 잡는 방법을 말한다. 그러나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 방법으로 멸치를 많이 잡아 주민 소득이 높았으나 최근 들어서는 어획고가 고갈이 되면서 이런 모습을 찾기가 힘들다. 또 미역을 많이 생산하고 있어 마을 곳곳에서 미역을 말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이 마을 봉대산을 중심으로 금맥이 있다는 얘기가 전해지면서 일본 사람들이 금을 채굴했던 곳이기도 하다. 봉대산 서쪽에는 지금도 구덩이가 많아 당시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해방 이후에는 봉대산 금맥이 마을이 있는 해안까지 뻗었다고 해 한때는 마을 사람들도 금을 찾아 나섰으나 성공을 하지 못했다.

카페 AOP
서생 배를 형상화한 크림빵
카페 AOP의 규모는 무척 크다.
카페 AOP에서 본 나사 바닷가
카페 온돌라상에서 본 고양이
나사 바닷가에 위치한 카페 해밀

마들이 넓고 평평하다는 뜻의 평동(平洞)마을은 뒷산이 동서로 가로막고 있고 마을이 남쪽으로 향해 있어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다1910년 이전에는 마을이름이 새터 라고 불렀다고 한다. 1940년 이전까지 이 마을에는 천주교와 기독교의 예배터가 있었다고 하나 그동안 신자가 줄어들어 예배장소가 경작지로 바뀌었고 예전의 종교적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지금은 새예루살렘 공동체가 있다.

평동마을 바닷가 횟집거리의 일몰

한반도 동해 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대송(大松)마을은 마을 앞이 확 트여 서생면에서는 수평선을 가장 넓게 볼 수 있고 뒤로는 송림이 우거져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이 마을의 간절곶이 전국 명소가 되면서 마을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간절곶의 낭끝 바위는 가장 돌출 지역으로 이곳에서 해를 보는 것이 가장 빨리 볼 수 있다하여 명소가 되었다.

그러나 간절곶 앞 바다는 지형적으로 돌출지역이 되어 해류가 급해 옛날에는 이 해역을 지나는 배들이 많이 침몰되었다고 한다.

대송(大松)마을의 이전 명칭은 대륙동(大陸洞)이었는데 대운산 줄기가 바다로 뻗고 있어 이의 대()자와, 육지의 끝(간절곶)이 튀어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 후 대륙동의 대()자와 송정동(松亭洞)의 송()자를 따서 대송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이곳에는 항로를 인도하는 등대가 있었다. 이 때문에 2차 대전 때는 미군이 등대를 여러 번 폭격해 주위 주민들이 피해를 입은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등대는 광복 후 다시 복원돼 지금까지 운영이 되고 있다.

산 정상부에 위치한 카페 헤이메르에서 본 바닷가 절경
송정공원

송정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여 들판이 거의 없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서생, 용리, 나사, 대송 등 다른 마을로 나아가 농사를 지었다마을이름이 송정으로 불린 것은 옛날부터 소나무가 많았기 때문이고 지금도 국도 위쪽으로는 아름드리 해송이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다. 이 때문에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마을 사람들이 소나무 송진을 일본에 공출하기 위해 부역에 시달려야 했다.

 

송정공원 앞 바닷가

이 마을 사람들은 송정이라는 이름보다 1914년 이전부터 사용 된 '잿골'이라는 이름이 더 친근하다. 옛날부터 잿골이라고 불린 것은 기와를 구웠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잿골에서 구워진 기와는 서생첨사 관청을 건립할 때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송정공원과 솔개공원 구간의 해파랑길
송정공원과 송정항 구간의 해파랑길
송정항의 바다낚시터
배들의 피항

송정항은 주변에 어항이 개설되기 전에는 간절곶을 항해하던 어선이나 상선들이 계절풍을 만나면 간절곶을 넘기 힘들어 바람이 잘 때까지 정박하여 식수나 식량을 공급받는 피항지 구실을 해왔다.

솔개공원
솔개공원에서 본 진하해수욕장
솔개공원 해파랑길에서 본 솔개해수욕장
솔개해수욕장 주변 경관
대바위공원 입구

대바위공원 곳곳에 해송이 군집을 이루고 있어 경치 또한 좋은 곳이다. 대바위는 진하해수욕장과 솔개해수욕장 사이에 있는 거대한 바위이고 진하 8경 중 '대암초가(臺岩樵歌)' 라고 있는데 대바위에서 나무하는 초동들이 불렀던 노래 소리를 말한다. 대암(臺巖)은 여러 개의 큰 바위가 첩촉(疊矗)해 큰 대()를 이뤘다고 해 한자로 대암(臺巖)이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갯방풍과 해당화가 많이 자랐다고 하는데 지금은 찾기가 힘들다. 이중 특히 갯방풍은 중풍의 예방에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다른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꺾어가는 바람에 지금은 보기가 힘들다.

대바위공원에서 본 진하해수욕장
대바위공원과 솔개해수욕장 구간의 해파랑길
해파랑길에서 본 솔개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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