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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대표적인 축제 중 하나가 처용문화제이다. 명성과는 걸맞지 않는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처용암과 주변 환경이다. 인근 산업공단 공해영향인지 조용하다 못해 쓸쓸하고 적막하다. 그 옛날 동해용과 일곱 아들이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던 곳이라고는 무색하게 한다. 처용암은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4호로 207000규모의 바위섬으로 울산광역시 남구 황성동 세죽마을 해변에서 약 150m 떨어진 외황강 하구에 있다. 현재 황성동 일대는 울산 미포국가산업단지와 인접해 있다처용암 이름은 동해용과 그 아들이 나타난 바위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처용암과 관련되는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 2권 기이(紀異) “처용랑(處容郞)과 망해사(望海寺)” 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알 수가 있다.

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재위 875-886) 때에는 서울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연하고 초가(草家)는 하나도 없었다. 음악과 노래가 길에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어느 날 대왕(大王)이 개운포(開雲浦)에서 놀다가 돌아가려고 낮에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서 길을 잃었다. 왕이 괴상히 여겨 좌우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뢴다. “이것은 동해(東海) ()의 조화이오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해서 풀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왕은 일을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짓게 했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으므로 그곳을 개운포라 했다.

동해의 용은 기뻐해서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의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여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중의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들어가서 왕의 정사를 도우니 그의 이름을 처용(處容)이라 했다. 왕은 아름다운 여자로 처용의 아내를 삼아 머물러 있도록 하고, 또 급간(級干)이라는 관직(官職)까지 주었다. 처용의 아내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에 역신(疫神)이 흠모해서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그 집에 가서 남몰래 동침했다. 처용이 밖에서 자기 집에 돌아와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보자 이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나왔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동경(東京) 밝은 달에, 밤들어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 가랑이 넷일러라.

둘은 내해이고, 둘은 뉘해인고.

본디 내해지만, 빼앗겼으니 어찌할꼬.

그때 역신이 본래의 모양을 나타내어 처용의 앞에 꿇어앉아 말했다. “내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이제 잘못을 저질렀으나 공은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맹세코 이제부터는 공의 모양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 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그려 붙여서 사귀(邪鬼)를 물리치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아들이게 되었다.

왕은 서울로 돌아오자 이내 영취산(靈鷲山) 동쪽 기슭의 경치 좋은 곳을 가려서 절을 세우고 이름을 망해사(望海寺)라 했다. 또는 이 절을 신방사(新房寺)라 했으니 이것은 용을 위해서 세운 것이다.

이후 신라 사람들은 처용의 춤과 노래는 전염병을 옮기는 역신(疫神)을 쫓아내는 힘이 있다고 판단하여 역신을 쫓기 위해 처용의 얼굴을 그려 대문에 붙이고, 특별한 날 처용의 탈을 만들어 쓰고, 처용이 역신을 쫓을 때 추었다는 춤을 추었다. 처용무(處容舞)는 고려시대를 이어 조선시대 국가 행사에서도 재연되었다.

성현의 용재총화 처용희(處容戱) 편을 살펴보면 매년 섣달그믐밤이면 창경궁과 창덕궁에서 처용희를 하였고 창경궁에서는 기악(妓樂), 창덕궁에서는 가동(歌童)을 하였으며 새벽까지 노래와 춤을 하였는데 이는 사귀(邪鬼)를 물리치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제현의 시에 조개 같은 이와 붉은 얼굴로 달밤에 노래하는데, 솔개같은 어깨에 붉은 소매가 봄바람에 춤춘다.라고 묘사하였다.

현재 학계에서 처용랑(處容郞)의 역사적 실체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며 하나씩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아라비아인이라는 견해

  - 경주 괘릉(원성왕릉)의 무인석을 보면 우람한 체격에 높은 코, 파마를 한 듯한 턱수염 등 아라비아인 모습에 가깝고        당시 신라에서 당으로 가 는 바닷길은 울산인근 포구 → 남해안 → 서해안 흑산도 → 당(중국)이다. 그리고 9세기           이슬람 문헌에 「중국의 동쪽에 6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금이 풍부하다. 그곳에 간 무슬림들        은 좋은 환경 에 매료되어 영구 정착해버리곤 한다.」라고 기록되어있음

2. 신라말기 지방 호족의 아들이라는 설

  - 중앙의 골품 귀족정권의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처용의 상경으로 정략결혼 등 지방에 대한 포섭 견제하려 하였으      나 결국 실패로 돌아가는 과정을 반영한 것이고 당시 서라벌을 도덕성을 상실한 퇴폐적이고 병든 도시로 상징하고        있음

3. 향가연구에서 승려나 용으로 보는 견해

4. 의무주술사(醫巫呪術師)로 보는 견해

5. 귀족문화에 대항하는 지방문학이라는 견해

6. 화랑도로 보는 견해

7. 선신(善神)인 용신(처용)과 악신(惡神)인 역신(疫神)의 설화로 보는 견해

8. 신라 하대 유명한 가면극 배우로써 임금의 총애를 받던 배우이라는 견해

9. 해(日)의 신으로 보는 견해

집단이주로 사라진 세죽(細竹)마을은 70년대 외황강 상류에 석유화학공단이 들어서면서 공해로 말미암아 주민이 살 수 없는 공해지역으로 변해 1990년대부터 다운동으로 집단이주 시작하여 1999년에 완료하였다.

울산공업도시 개발이전 세죽마을은 외황강 하구의 수산물 집산지로 횟집과 상점이 즐비하였다. 수산물 중 아나고(붕장어)와 꼬시래기(망둥어)가 유명했다. 특히 꼬시래기(망둥어)는 일본으로 수출될 정도로 맛이 뛰어났다당시 이곳 바닷가 사람들은 남창장에 해산물을 팔고 생활필수품을 구했다.

지금 세죽나루 선착장은 선박 몇 척만 보이는 작고 낡은 콘크리트 선착장이지만 예전에는 목심장이라 불리던 5일장 열리는 온산읍 방도리와 맞은편 처용리로 오가던 뱃길과 목도(동백섬)로 가는 유람선 뱃길이 있었다. 특히 목도는 동백꽃이 유명하여 동백섬으로 부르며 조선시대에도 명성이 자자하여 지방 수령들이 개운포에서 동백섬으로 뱃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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