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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도(目島)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산읍 방도리에 있는 무인도로 모양이 물고기 눈처럼 생겼다고 하여 부르게 되었고 세종실록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에는 동백도로 표기돼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부터 명칭이 춘도(椿島)로 바뀌었는데 청산해야 할 일제잔재이다. 일본에서는 동백나무를 한자로 춘(椿)자를 쓰는데 갑자기 생기는 불행한 일을 춘사(椿事)라고 한다. 식민사관의 일환으로 경주 양북 동해천(東海川)을 대종천(大鐘川)으로 바꾼 것처럼 목도(目島), 동백도(冬柏島)를 춘도(椿島)로 바꾼 것이다.

목도는 면적은 약 15047, 둘레는 440m으로 동해안 섬 중 유일한 상록수림(常綠樹林)으로 동백나무, 후박나무, 사철나무 등 각종 상록수림으로 절경을 이루어서 1962127일에 천연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다. 옛날에는 대나무가 많아서 대섬(竹島)이라고도 불렀고 신라 때에는 대나무를 길렀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주민들이 대나무 화살을 만들어 나라에 바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나무는 점점 사라지고 동백나무·후박나무 등 각종 상록수림이 그 자리를 메웠다.

1970, 80년대 울산 최고의 동백꽃 관광지로 꽃피는 봄이면 붉은 동백꽃을 보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고 45인승짜리 배 두 척이 운항했다. 그러나 점차 섬 생태계가 훼손되자 1992년부터 안식년제를 도입하면서 현재까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언젠가 생태계가 복원되어 개방되기를 손꼽아 기다릴 뿐이다.

목도를 소재로 한 대중가요도 있다. 가수 하춘화(河春花)197345에 부른 목도는 내 고향이다. 1970년대 울산이 농어촌에서 산업 도시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고향이 공장부지로 편입되어 고향을 떠나는 이주민들의 망향과 실향의 정서를 노래로 담고 있다.

 17세기 이곳 방도리(方島里)는 울산도호부 청량면 목도리 목도포구로써 안용복(安龍福)과 박어둔(朴於屯)1693년과 16962회에 걸쳐 독도로 출발한 포구이다. 이들은 독도를 지키기 위해 독도에서 돗토리현까지 건너가 싸웠다. 안용복은 이곳 목도 세거 광주 안씨 출신이다. 박어둔은 충청도 이산현(논산시 노성면) 소론명가 출신으로 증조부는 가선대부(2) 박잉석, 조부는 통정대부(3) 박국생이며 아버지는 정병 박기산이다. 조부 박국생이 1646(인조 24) 3월 그 지방의 유탁(柳擢)과 한양의 권대용(權大用)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을 하여 고향 이산현에서 살수가 없게 되자 울산으로 이사 왔다.

방도리(方島里)는 사방(四方)의 방()과 목도(目島)의 도()를 합성하여 만든 이름이다. 방도리에서 어부와 인어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동백도설화(冬柏島說話)라 하여 용왕의 딸인 인어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어부에 대한 보은담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옛적에 마음씨 착한 청년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다보니 그물에 인어가 들어 있었다. 다른 어부들은 인어를 팔아 돈을 벌 수 있다고 기대에 부풀었지만 이 어부는 인어가 불쌍해 풀어 주자고 하였다. 이 어부는 다른 어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어를 구해 주고 다른 어부들로부터 매를 맞고 쓰러졌다.

어부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부는 용궁에 있었다. 인어는 용왕의 딸이었다. 인어는 자신을 구해 준 어부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용궁으로 데려 온 것이다. 용궁에서 다시 만난 인어는 용왕에게 어부와 인간 세상에 나가 살겠다고 하였고 용왕은 딸을 위해 울산의 온산에 섬을 만들었다. 육지가 가까워지자 갑자기 하는 소리와 함께 물길이 하늘 높이 치솟으며 바다로부터 섬이 솟아올라와 지금 모양의 목도가 되었다. 이후 섬에서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갔다.

 현재 목도는 쌍용정유공장에 둘러싸여 외롭게 홀로 떠 있다. 낚시꾼들이 가끔씩 찾아 와서 외로움을 달래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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