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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군 불광산(佛光山, 659m)에 위치한 척판암은 673년(문무왕 13년)에 원효대사가 장안사(長安寺)와 함께 창건하였다. 척반암에 가는 방법은 장안사 주차장에서 산길을 도보로 가면 20 ~ 30분 소요되고 포장 된 도로로 자동차로 가면 5분이 걸린다. 백련암에서 도보로 가는 산길을 이용하면 15분이 소요된다. 산길은 소로를 따라 걸어가는 나름의 맛이 있고 자동차를 이용하면 크고 장대한 수림 속을 감상할 수가 있다.

산길을 도보로 척판암으로 가는 경우 초입의 안내판
산길로 가면 맞이하는 척판암 천왕문

척판암(擲板庵)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원효 대사가 이곳에서 수행 중 중국 종남산(終南山)의 운제사(雲際寺) 대웅전에서 예불을 하고 있는 1천여 명의 승려들에게 위급한 사태를 알리고자 소반에 ‘해동원효척반구중(海東元曉擲盤救衆)’이라는 여덟 자를 적어서 운제사(雲際寺) 대웅전까지 하늘 높이 힘껏 던진 곳이라 하여 척판암(擲板庵)이라고 하였다. 위급한 사태라는 것은 종남산(終南山)의 운제사(雲際寺) 대웅전 대들보가 썩어서 막 무너지려고 하는 것을 원효가 보고 소반을 던졌고 던져진 소반은 운제사의 대웅전 앞뜰 위에서 윙윙거리며 공중에 맴돌았다. 막 예불을 마친 승려들은 이 신기한 광경을 구경하려고 모두가 재빨리 대웅전 앞뜰로 나왔다. 이때 굉음과 함께 대웅전이 폭삭 무너지고 공중을 맴돌던 소반도 땅에 떨어졌다. 깜짝 놀란 승려들은 땅에 떨어진 소반에 적힌 글자를 보고는 자기들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 신라의 원효임을 알게 되었다.

1천여 명의 승려들은 이로 인하여 길을 떠나 양산군 천성산 석굴에 있던 원효를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원효의 오묘한 법문과 가르침을 받고서 모두 성인(聖人)이 되었으며, 모두가 끝내 이곳에서 열반을 하였는데 열반한 육신은 그대로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 산은 1천 명의 성인들이 나왔다는 뜻으로 천성산(千聖山)이라 하였고 천성산 바위들은 그 성인들의 변신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척판암은 창건 이후의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1938년에 경허(擎虛)가 중수한 후 장안사의 부속 암자로 있다가 최근에 독립하였다. 1972년 경운이 3층 석탑을 세우고 부처 사리 5과를 봉안하였다. 천왕문, 척판암, 용왕당, 극락전, 산신각 등으로 구성 되어 있고 암벽 밑에 위치해 경내가 좁은 편이다.  ‘척판암(擲板庵)’이라는 현판이 있는 불전에는 조선 시대에 조성한 아미타여래 좌상과 근래 조성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좌우에 자리하고 있다. 극락전과 용왕전은 2010년 건립하였고 독성각 또한 최근에 건립하였다.

척판암(擲板庵) 현판이 있는 불전에는 조선 시대에 조성한 아미타여래 좌상과 근래 조성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좌우에 자리하고 있다.

온화한 인상에 미소를 짓고 있는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척판암 석조여래좌상은 조선 후기에 제작된 석불로 높이가 37.5㎝로 당시 각 지역마다 작은 크기로 제작하여 소규모의 불전에 봉안하였다. 척판암 석조여래좌상은 불상 바닥 면에 복장공(腹藏孔)이 있고 범어가 적힌 한지로 막았으며 복장물(腹藏物)은 도난을 당해 없고 1996년에 개금 불사를 하면서 복장물을 새로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2008년 4월 2일에 부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41호로 지정되었다.

머리의 형태는 육계(肉髻)와 머리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으며, 검은 모발을 칠하지 않은 채 도금한 색깔 그대로 정상 계주(頂上髻珠)를 표현하였다. 머리 중앙에는 흰색과 홍색의 원호를 넣은 중앙 계주(中央髻珠)를 표현하였다. 양손은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무릎 위에 올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크고 어깨와 무릎이 좁으며, 고개가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
통견(通肩)의 대의(大衣)를 입고 있으며, 승각기(僧脚崎)는 표현하지 않고 가슴 아래에서 두 줄의 평행 띠로 하의인 군의(裙衣)를 묶고 있다. 전체적으로 신체의 비율이 맞지 않아 안정적인 형태를 이루지 못하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미소를 짓고 있는 상호(相好)는 비교적 온화한 인상을 준다.
신체에 비해 비교적 큰 방형의 얼굴, 대의를 입고 있는 모습과 배 부분에서 두 줄의 평행 띠로 군의를 묶은 모습 등에서 전형적인 조선 후기 불상 조각에서 나타나는 도식적이고 딱딱한 옷 주름 표현을 볼 수 있다. 또한 석조 재질에서 볼 수 있는 양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에 얹은 모습, 발과 옷 주름 표현이 두껍고 세밀하게 조각되지 못한 점 등에서 조각적인 한계를 보이고 있다.

용왕전
1972년 경운이 3층 석탑을 세우고 부처 사리 5과를 봉안하였다.
멀리 보이는 대운산
극락전
극락전 앞 극락교
자동차를 이용하여 5분이면 도착하는 주차장에서 보이는 산신각 안내판
큰 바위 중간에 조성한 산신각

원효대사(617~686년)는 한국불교사에 길이 남을 학자이자 사상가이다. 파계와 이적을 보인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고승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성은 설씨이고 원효는 법명이다. 현존하는 그의 저술에는 20부 22권이 있으며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100여부 240여권이나 된다. 특히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 하여 즐겨 인용하였고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은 고승이 아니고서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대작이다.
또한 당시 왕실 중심의 귀족화된 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꾸는데 크게 공헌하였고 종파주의적 방향으로 달리던 불교이론을 고차원적 입장에서 회통(會通)시키려 하였다. 그것을 오늘날 화쟁(和諍)사상이라 부른다. 이것은 인간의 심식(心識)을 깊이 통찰하여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 곧 귀일심원(貴一心源)을 궁극의 목표로 설정하고 육바라밀의 실천을 강조하는 일심(一心)사상 그리고 일체의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는 뜻의 무애(無㝵)사상과 함께 원효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자동차로 포장 된 도로로 척판암까지 도착하려면 5분이 걸린다.
백연암 앞에서 척판암 가는 안내판
자동차로 척판암 가는 중에 만나는 백련암 입구와 낮잠자는 백구 모습

 

백련암 지나서 만나는 안내판

불광산(佛光山)은 팔기산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8개나 되는 봉우리를 올라야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불광산의 명칭 유래에서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불광산은 북동쪽으로 대운산(大雲山), 남동쪽으로는 삼각산(三角山) 줄기와 이어져 장안읍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대운산과 이어지는 북동쪽 기슭에서는 대운천(大雲川)이 북동쪽으로 흐르고, 삼각산과 이어지는 남쪽 기슭에서는 장안천(長安川)이 발원해 동쪽으로 흘러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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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은 경주분지의 남쪽에 위치하고 신라시대 불교유적의 보고(寶庫)이자 영산(靈山)이다. 7세기 초를 시작으로 신라가 국운을 다하는 10세기 초엽까지 끊임없이 사원이 건립되었고 고려시대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점차 하나둘씩 쇠락의 길을 걸어 왔다. 현재 불상 118구, 탑 96기, 절터 147곳이 남아 있고 최대 절터는 용장사지이다. 신라시대 220개 사찰 중 약 70%가 남산에 있었다.

봉화골 칠불암 가는 길에 진달래꽃들이 산행인들을 맞이하고 있다.

남산은 해발 494m로 금오봉(468m)과 고위봉(494m)의 두 봉우리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남북길이가 8km, 동서 폭은 4km이고 동남산은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지형이고 서남산은 경사가 급한 형태이다. 또한 남산은 전체가 바위로 이루어진 악산으로 35개 내외의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칠불암(七佛庵)은 남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고위봉 동쪽 봉화골 기슭에 자리 잡고 있고 동남산 남쪽 끝자락에 위치하여 동쪽으로 터진 골짜기라서 계곡이 깊은 곳이다. 통일전(統一殿)에서 출발하면 약 3.5㎞로 1시간가량 소요된다.

절 이름을 칠불암이라 부르는 것은 1930년대 이후에 이곳에 암자를 새로 짓고 나서부터다. 이곳에   8세기 초, 통일 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7구의 마애불로 남아 있어 칠불암이라 했다 한다. 통일신라시대 당시 절 이름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실전(失傳)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이곳에서 출토된 기와에 사□사(四□寺)라는 명문이 있었다 하니 혹시 사불사(四佛寺)는 아니었는지 추정할 뿐이다.

칠불암 초입에서 만나는 시누대와 오솔길

칠불암(七佛庵)의 마애불상군은 남산에 있는 통일신라의 마애불상 가운데 가장 연대가 빠르고 장대한 규모 그리고 석경(石經)의 파편(破片) 존재와 화려한 꽃무늬로 장식된 막새기와 조각들이 출토되고 있음으로 미루어 국가적 차원에서 세운 큰 가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석경(石經)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등 불교의 경전을 화강암에다 새긴 것으로, 창림사지(昌林寺址)에서도 발견되었고 주로 불전 내부의 벽체를 장엄하게 위해 사용한다.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각황전(覺皇殿)에서 장식 된 석경을 볼 수 있으며 이곳 칠불암이 석경 사용의 기원이 된 곳이다.

칠불암의 석경 파편

 

칠불암 초입 계단 왼쪽에 있는 약수터는 경주지역 향토사학자들에 의하면 『三國遺事』, 「紀異」第一, 〈書出池〉條의 기록으로 미루어, 488년 정월 15일에 炤知王이 행차하고자 하였던 天泉亭의 ‘天泉’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三國遺事』, 「紀異」第一, 〈書出池〉條 기록의 488년 정월 15일 炤知王이 행차하고자 하였던 天泉亭의 天泉으로추정하고 있는 칠불암 약수터

칠불암 터는 동향하고 있는데 서쪽으로는 하늘에 닿을 듯이 거대한 암봉(巖峰)을 배경으로 하고, 경사가 가파르고 험한 동쪽과 북쪽의 능선상은 절 터를 마련하기 위해 석축을 쌓았다. 석축은 북쪽에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 있으며, 15∼16단으로 높이는 8m이다. 동쪽은 잡목과 무너진 흙더미로 덮여 있어 정확한 절 규모를 확인하기 어렵다. 남북 16.40m, 동서 13m의 대지(臺地) 위에 서쪽에는 3단으로 층계를 이룬 2m 높이의 석축을 쌓아 불전(佛殿)을 마련하였다. 불전의 서쪽 끝에는 비교적 규모가 큰 반원형(半圓形) 바위가 놓여 있는데 동향(東向)한 부분에 삼존불이 부조(浮彫)되어 있고 삼존불 바위면에서 동쪽으로 석주(石柱)가 서 있는데 각 면마다 여래상을 새긴 사방불(四方佛)이 있다.

특히 삼존불이 조각되어 있는 바위의 배면(背面)과 측면(側面)에는 목조건축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방형공(方形孔)이 있는데 배면의 경우 윗부분에는 7개, 아래 부분에는 4개 아래위로 각 2개소씩 있고 측면은 남쪽에 4개, 북쪽에는 1개가 있다. 그리고 사방불에도 위에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북쪽과 남쪽 두 곳이 있어 삼존불과 사방불이 놓여 있는 불전은 목조로 된 건물 안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불전 남쪽이 출입구로 생각된다. 따라서 삼존불과 사방불이 있는 불전은 벽면을 석경으로 구축하고 지붕은 가구(架構)한 반 석굴(半石窟) 형식(形式)으로 추정된다.
인도 굽타 양식의 마애삼존불
마애삼존불 중 본존불은 석가불상으로 추정되고 높이 5m, 너비 8m로 된 반원형 바위 면에 동향(東向)하여 높은 부조(浮彫)로 새겨져 있으며, 두 겹으로 핀 넓은 연꽃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있다. 우견편단(右肩編袒)에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맺고 있는데, 항마촉지인의 경우 통일신라기인 8세기 초 새로이 유행하기 시작하는 수인이다. 불두(佛頭)는 소발(素髮)의 머리위에 육계(肉髻)가 끈으로 동여맨 듯이 나타나 있으며, 코는 파손된 것을 시멘트로 보수하였다.

삼존불과 사방불 중 남면의 보생불상(寶生佛像)

본존불의 왼쪽 협시보살은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으로, 본존불 대좌의 복련대(覆蓮帶) 꽃잎과 같은 모양의 연화대좌 위에 서서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집어 가슴 앞에 올려들고 오른손은 아래로 떨어뜨린 채 정병(淨甁)을 들고 있다. 보살은 몸을 약간 틀고 허리를 굽힌 삼곡(三曲)자세이며 얼굴과 시선이 본존상을 향하고 있다. 머리는 삼면두식(三面頭飾)으로 장식을 하고, 왼쪽 어개에서 비스듬히 내려온 승기지(僧祗支)는 가슴을 감싸고 있으며 남은 자락이 아래로 물결을 그리며 흘러 내렸다. 두 어깨에는 보발(寶髮)이 덮여 있고 목에는 영락(瓔珞)이 걸려 있다. 허리를 감싸고 있는 치마 주름 위를 과판(銙板)이 달린 띠로써 동여매고, 흘러내린 치마 자락은 발등을 덮고 양 옆으로 퍼지면서 가느다랗게 주름잡아 처리하였다. 넓은 천의(天衣)는 어깨에 걸쳐 두 팔을 감싸며 양 옆으로 흘러 내렸고 팔목에는 팔찌가 장식되었다. 머리 뒤에는 보주형(寶珠形) 두광이 새겨져 있다.

삼존불 중 본존불 석가불상과 오른쪽 협시보살 다라보살상(多羅菩薩像), 사방불 중 북면의 세간왕불상(世間王佛像)과 남면의 보생불상(寶生佛像)

오른쪽 협시보살은 다라보살상(多羅菩薩像)으로 추정되며 복련꽃 대좌 위에 서서 오른손에는 보상화(寶相華)를 들어 가슴 앞에 올리고 왼손은 아래로 떨어뜨린 채 천의자락을 잡고 있다. 얼굴은 본존상 방향으로 반쯤 돌리고 있으며, 머리에는 삼면두식(三面頭飾)으로 된 관을 썼고 두 어깨는 보발로 덮여 있다. 목에는 영락을 하고 있으며, 승기지(僧祗支)가 비스듬히 가슴을 감싸고 왼쪽 어깨에 걸쳐 있다. 허리를 감싸고 있는 치마 주름 위를 끈으로 매었다. 어개에 걸친 천의가 두 팔을 감싸고 아래로 흘러내린 것과 발등을 덮고 있는 옷자락이 양 옆으로 퍼지면서 주름잡고 있는 모습 그리고 팔목에 간단한 팔찌가 끼어져 있는 것과 머리 뒤에 무늬 없는 보주형의 두광이 배치된 것 등은 오른쪽 보살상과 같다.
본존불과 보살상들은 두광(頭光)만 보주형(寶珠形)으로 각기 처리하였으며, 신광(身光)의 경우는 달리 표현하지 않고 바위 면을 그대로 이용한 것처럼 보인다. 칠불암 마애불은 우리나라 촉지인(觸地印) 여래좌상(如來坐像)의 시원형식(始原形式)으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고 촉지인의 수인과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걸친 대의의 착의법(着衣法), 그리고 가부좌한 양다리 사이로 부챗살 모양으로 삐쳐 나온 옷자락의 형식 등은 이후의 석굴암 본존불에서 완전한 정형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양식적 특징은 탄력성 넘치는 육체미를 통한 생명력의 구현으로 한 조형미는 인도 굽타양식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점이다. 약간 모나면서 딱 벌어진 어깨와 잘록한 허리로 인해 신체의 건장함이 두드러져 보이는데, 위엄 어린 표정의 네모진 얼굴은 약간 이국적이며 생동감 넘치는 신체 구조이다. 가부좌한 양다리 사이로 부챗살 모양으로 구불구불하게 삐쳐 나온 옷자락의 모습이나 연꽃 대좌의 연꽃잎이 두 겹으로 맞붙은 형태도 인도의 조각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이다.
협시보살 역시 양발을 옆으로 벌린 어정쩡한 자세에, 조각이 다소 투박하지만 가슴에 대각선 방향으로 걸친 천의(天衣)의 한 쪽 끝이 뒤로 돌려졌다가 다시 앞으로 늘어진 형태는 인도적인 요소이다.
사방을 평정하여 삼한통일로 천하의 주인임을 표방한 사방불(四方佛)
사방불(四方佛) 가운데 동면(東面) 약사불상(藥師佛像)은 밑으로 쳐진 복련과 앙련의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다. 왼손은 약 그릇을 들어 무릎 위에 놓고 오른 손은 엄지와 둘째 손가락을 집어 가슴에 올려 설법인(說法印)을 표시하고 있다. 소발(素髮)의 머리 위에 육계가 솟아 있다. 불의(佛衣) 깃 사이로 길게 드러나 보이는 앞가슴에 비스듬히 승각기가 가려져 있고 옷끈 매듭이 부챗살 모양으로 드러나 보인다. 무릎을 덮고 흘러내린 옷자락이 대좌의 윗부분을 덮고 있다. 두광은 무늬 없는 보주형으로 삼존불과 같이 처리하였다.

삼존불 중 본존불 석가불상과 왼쪽 협시보살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 사방불 중 동면의 약사불상 ( 藥師佛像 )과 남면의 보생불상(寶生佛像)

서면(西面)의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은 불신(佛身)만 부조(浮彫)로 조각하였으나 연화대좌는 선각(線刻)으로 표현되었다.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오른손은 엄지와 둘째 손가락을 집어 가슴 앞에 올리고, 왼손은 엄지와 셋째․넷째․다섯째 손가락을 굽히고 둘째손가락만 펴서 무릎 밑으로 내린 설법인상(說法印像)을 하고 있다. 불의(佛衣) 깃 사이로 드러난 앞가슴에 승각기가 보이며 동여맨 옷끈은 저고리 옷고름처럼 매듭을 지었다. 왼쪽 팔에 걸쳐서 흘러내린 옷자락은 왼쪽 무릎 위에 얹혀 있는 오른발 끝을 덮고 있어 발은 일부만 드러나 있다. 머리 뒤의 두광은 윗부분이 떨어져 나가 원형처럼 보인다.
남면(南面)의 보생불상(寶生佛像)은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두 손은 서면의 불상과 같이 설법인을 표시하고 있다. 결가부좌를 하고 앉은 발은 흘러내린 옷자락 속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다. 소발(素髮)의 머리 위에는 육계가 단정히 솟아 있다. 두광은 무늬가 없는 보주형으로 되어 있다.

삼존불과 사방불 중 남면의 보생불상(寶生佛像)

북면의 세간왕불상(世間王佛像)은 서쪽의 아래 부분이 결실된 까닭에 가장 좁은 면이다. 따라서 불상도 동쪽 윗면에 조그맣게 나타나 있다. 복련의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설법인하는 모습과 무늬가 없는 보주형 두광으로 장엄된 것 등은 다른 상들과 같은 형태이다. 그러나 다른 불상들과는 달리 앞가슴의 승각기 아래로 보이는 옷근은 매듭을 지었고 두 무릎 위에는 두 발이 나타나 있다. 무릎 아래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역시 주름이 잡혀서 연화대좌 위를 덮고 있다.
입방체형(立方體形)의 사방불은 사방을 평정하여 삼한통일로 통일신라를 이룩한 것을 천하에 표방한 것으로 이후 성행하는 석탑 사방불의 선구작으로, 네 면의 여래상은 수인과 앉은 자세, 연화좌의 형태가 서로 유사하다.

구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암 마애관음보살
칠불암 불전(佛殿) 오른쪽으로 난 소로를 따라 암반 사이로 약 150m 정도 오르면 봉화대봉(烽火臺峰, 476m) 정상과 신선암 마애관음보살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난 소로를 따라 암반으로 형성된 절벽위로 가다 바위를 돌면 마애관음보살을 만날 수 있다. 절벽 아래로 보이는 칠불암이 마치 손에 닿을 듯 가까이 느껴지는데 약 40m 정도의 거리이다. 통일신라 당시에는 부속 암자였을 것으로는 짐작되지만, 근래까지 이곳에 신선암(神仙庵)이라는 암자가 있었으므로 신선암 마애관음보살상으로 부르고 있다.

신선암 마애관음보살상 만나러 가는 길에서 만난 풍광

절벽 위 중앙에 거대한 바위가 동쪽과 남쪽으로 전망 있게 위치하며, 그 바위 동쪽 암반에 난간을 설치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는 원형의 석공(石孔) 6개소가 있다. 중앙에 놓인 바위의 남면에는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을 부조(浮彫)로 나타내었다. 보살상 전면의 공간은 2∼3m 정도로 협소하며 그 앞은 절벽을 이루고 있다. 보살상이 조각된 바위 면은 비가와도 불상이 젖지 않도록 윗부분이 조금 앞으로 나오게 경사를 지어 깎아내고 그 아래로 보주형 광배를 감실(龕室) 모양으로 조성했다. 아울러 보살상 위에는 가로 1.54m, 세로 10.5㎝, 깊이 6㎝의 홈이 마련되어 있는데 창양 또는 바위 아래로 흘러내리는 빗물이 보살상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관음보살상은 옷자락으로 덮여 있는 의자 위에 걸터앉아 한 손으로 설법인을 표시하며 깊은 생각에 잠긴 채 구름을 타고 속계(俗界)로 내려오는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크게 들어 올리고 둘레는 삼면두식(三面頭飾)으로 장식을 하였다. 장식을 동여맨 끈은 머리 좌우에서 매듭을 짓고, 그 자락이 두 귀의 언저리로 흘러내려 두 어깨 위에 드리워져 있다. 두 귀에는 귀걸이가 달려 있고 목에는 구슬목걸이가 걸려 있다. 두 어깨 위에는 연꽃송이로 장식된 수발(垂髮)이 덮여 있는데 수발에 연꽃을 장식한 것은 다른 불상에는 볼 수 없는 경우이다.

오른손에는 보상화(寶相華) 가지를 들었고 왼손에는 설법인을 표시하여 왼쪽 가슴에 들었으며, 중지와 넷째 손가락을 굽혀 엄지와 마주잡고 둘째와 셋째 손가락을 펴서 손바닥을 앞으로 향하여 들었다. 손목에는 팔찌가 끼여 있으며 손과 손 사이로 승각기 자락이 보인다. 허리에는 치마끈이 매어지고 그 자락의 의자 위로 흘렀는데 왼쪽 발은 그 자락 위에 편안히 얹어 놓고 오른발은 의자 아래로 내려 걸터앉아 있는 유희좌(遊戱坐)의 자세로서 구름 속에서 연화대좌에 앉아 있다. 뒤에는 신광과 두광을 둥글게 선각으로 나타내었고 얇은 감실은 그대로 주형(舟形) 광배(光背)의 형상을 하고 있다. 특히유희좌의 경우는 통일신라시대의 불보살상으로는 이 보살상이 유일하다.

봉화골은 동남산의 여러 계곡 가운데 가장 깊은 골짜기로 계곡의 명칭은 조선시대 또는 그 이전 시기부터 칠불암 동남쪽의 봉화대봉(烽火臺峰, 476m)에 있던 봉화대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봉화대는 남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고위산(高位山, 490m)과 인접한 까닭에 ‘고위산 봉수’로 불렸다.
1940(소화 15) 경주 남산 칠불암과 신선암의 모습
일제 강점기 때 경주 남산의 불교유적을 본 일본인 小場恒吉 氏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 탑에 있어서도 기원을 대륙에서 받아서 이것을 표현하고 장식할 때는 오직 신라 독특의 취향을 표시하였기에 수에서 받아 수를 잊었고 당을 본떠서 당을 떠난 것에 신라의 불교예술은 어디까지나 신라문화 소산으로서의 생명을 볼 수 있다. 신라탑의 형식은 오늘 중국에서 볼 수 없고 특히 방형층탑의 균세의 미는 중국의 대탑에서 찾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는 신라의 층탑은 당식의 직사가 아니며 신라의 예술적 두뇌에서 창안된 것이라 하겠고 저 조상에서 본 바와 같은 원인에 의해 남북조 혹은 수당의 불교예술도 한토에 들어서서는 한인의 것이 되어서 신라예술로 화한 사실을 증명 할 수 있으니 유쾌하다. 」

칠불암 삼존불과 사방불

그리고 1929년 조선총독부가 남산일대에 사방공사를 시행하려 할 때, 일본인 교수 黑板勝美는 공사를 최소 5년 연기를 요청하면서, 경주남산 유적의 우수성을 조선총독부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 나는 반도 유수의 고적을 보존할 수 있어 조선통치 상 문화적 시설에 광채를 더함에 多大할 것을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 」
「생각건대 경주는 오늘 홀로 조선의 경주가 아니라 일본의 경주이며 또 세계에 알려진 명승이 되었다. 年年雲集하는 내외인의 증가는 이 같은 사실을 여실히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경주를 위해 특히 남산의 장래를 우려하는 바이다」라 했다.

신선암 매애관음보살상

경주 남산은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문화적 우수성을 일본 지식인도 간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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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도 여타 도시처럼 아름다운 풍광이 만발하여 밀양팔경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만어산(萬魚山, 고도 700m) 운해(雲海). 이곳 9부 능선에 위치한 만어사(萬魚寺)에서 새벽녘이나 봄비 내리는 날에는 운해(雲海)가 주변 천지를 뒤덮어 마치 백두대간 장관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맑은 소리 울리는 경석(磬石)이 유명하다.

만어사는 가야국 46년 김수로왕 때 창건되었고 고려 명종 1180년에 중창된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 만어사의 대웅전, 범종각, 미륵전은 근래에 지어졌지만 절 마당에 고려중기 삼층석탑(보물 제466)이 있어 고색창연한 사찰 모습을 대변해주고 있다.

만어사 미륵전 아래 산비탈에는 너비 100m, 길이 500m 규모의 너덜지대, 암괴류가 있는데 마치 물고기들이 무리지어 입질하는 모습이자 강물처럼 흘러가는 모습이다. 이곳 돌들을 만어석(萬魚石)이라고 불리는데 동해의 물고기들이 변한 것이라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암괴류는 3만년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섬록암, 반려암,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형태는 거무스름하고 둥근 편이다. 이 바위를 두드리면 종소리처럼 맑은 소리가 난다하여 경석(磬石)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화강암 성분 차이에 따른 현상이다.

일반적으로 경석은 국악기 중 타악기인 편경(編磬)과 특경(特磬)을 만드는 재료가 되는 돌이다. 옥돌이라고도 한다. 편경은 궁중제례악에 사용되는 돌로 된 유율 타악기로 자 모양의 돌 16개를 두 단으로 된 나무틀에 매달아 놓고 치는 악기이다. 특경은 편경과 달리 자 모양의 돌 1개를 나무틀에 매달아 놓고 치는 악기이다. 초기에는 중국에서 수입했으나 세종 7(1425) 경기도 남양에서 경()이 발견되어 국내에서 제작되었다. 남양 이외에 평안도 성천과 함경도 단천에서도 채취, 생산되는데 남양 경돌 품질이 가장 좋다고 한다.

어산불영(魚山佛影)어산(魚山)에 서린 부처님의 그림자라는 뜻으로 삼국유사에서 관련 내용을 정리하면, 가락국을 세운 수로왕 때 이 나라의 옥지라는 연못에 살던 독룡과 만어산에 살던 나찰녀(불교에서 말하는 사람 잡아 먹는 귀신)가 서로 사귀면서 번개와 우박을 내려 4년 동안 농사를 망쳤다.

수로왕이 주술로써 이들의 악행을 막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자, 부처에게 설법을 청하여 이들에게 오계를 받게 하였다. 이때 동해의 수많은 고기와 용들이 불법에 감동을 받아 만어산으로 모여들어 돌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지금의 만어사 앞의 어산불영이다. 이 바위는 두드리면 맑은 쇳소리를 내었다. 특히 서북쪽의 큰 바위는 용왕의 아들이 변해서 된 것이라고 전하는데, 멀리서보면 부처의 모습이 나타나고 가까이서 보면 그 모습이 사라진다고 한다.

경내 미륵전에는 미륵바위(미륵불상)으로 불리는 높이 5m 크기의 자연석 바위가 있는데 표면에 붉은색이 감도는 부분은 마치 부처님 가사(袈裟)와 같다. 미륵전은 최근 미륵바위를 보호하기 위해 지었다. 이 미륵바위는 사명대사 표충비처럼 임진왜란, 갑오농민전쟁, 한국전쟁, 4.19혁명 등 나라에 큰 일이 생길 때면 바위표면에서 땀을 흘렸다고 하다.

미륵전으로 가는 길

미륵전 옆에는 소원을 빌며 쌓아올린 돌탑 무더기가 있는 바위의 아래쪽 틈에 작은 샘이 있는데, 이 샘물은 낙동강의 조수에 따라 물 높이가 달라진다고 한다. 이는 너덜지대(암괴류) 아래에 물이 흐른다는 것이다.

최근 노출 된 미륵바위를 보호하기 위해 미륵전을 지었다

제작연도가 고려 중기인 삼층석탑은 절이 자리한 위치와는 떨어져 있으나 석탑의 뒤편에 건물터로 보이는 널찍한 대지가 있어 이곳이 본래의 법당터로 여겨진다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이 모두 한 돌로 구성되어 있다.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3단이다. 탑의 머리장식에는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얹혀 있으나 후에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탑의 바닥돌이 드러나 있고 지붕돌이 약간 파손된 상태이지만,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어 정돈된 모습을 보이는 뛰어난 작품이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 제4 어산불영(魚山佛影)

<고기(古記)>에 이렇게 말했다. “만어산(萬魚山)은 옛날의 자성산(慈成山), 또는 아야사산(阿耶斯山; 이것은 마땅히 마야사摩耶斯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어를 말한 것이다)이니, 그 곁에 가라국(呵囉國)이 있었다. 옛날 하늘에서 알이 바닷가로 내려와서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이가 바로 수로왕(首露王)이다. 이때 국경 안에 옥지(玉池)가 있었고 못 속에는 독룡(毒龍)이 살고 있었다. 만어산(萬魚山)에 나찰녀(羅刹女) 다섯이 있어서 독룡과 왕래하면서 사귀었다. 그런 때문에 때때로 번개가 치고 비가 내려 4년 동안 오곡(五穀)이 익지 못했다. 왕은 주문(呪文)을 외어 이것을 금하려 했으나 금하지 못하고 머리를 숙이고 부처를 청하여 설법(說法)한 뒤에 나찰녀(羅刹女)는 오계(五戒)를 받아 그 후로는 재앙이 없어졌다. 때문에 동해의 물고기와 용()이 마침내 화()하여 골짜기 속에 가득 찬 돌이 되어서 각각 쇠북과 경쇠의 소리가 났다.”(이상은 <고기古記>에 있다).

또 상고해 보면, 대정(大定) 12년 경자(庚子; 1180)는 곧 고려 명종(明宗) 11년인데 이때 비로소 만어사(萬魚寺)를 세웠다. 동량(棟梁) 보림(寶林)이 임금에게 글을 올렸는데 그 글에 말했다. “이 산 속의 기이한 자취가 북천축(北天竺) 가라국(訶羅國) 부처의 영상(影像)과 서로 같은 것이 세 가지가 있다. 그 첫째는 산 가까운 곳이 양주(梁州) 경계의 옥지(玉池)인데 여기에도 역시 독룡(毒龍)이 살고 있다는 것이요, 둘째는 때때로 강가에서 구름 기운이 일어나서 산마루에까지 이르는데, 그 구름 속에서 음악소리가 나는 것이요, 셋째는 부처 영상(影像)의 서북쪽에 반석(盤石)이 있어 항상 물이 괴어 없어지지 않는데, 이것은 부처가 가사(袈裟)를 빨던 곳이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이상은 모두 보림(寶林)의 말인데, 지금 친히 와서 모두 참례(參禮)하고 보니 또한 분명히 공경하고 믿을 만한 일이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골짜기 속의 돌이 전체의 3분의 2는 모두 금과 옥의 소리를 내는 것이 그 하나요, 멀리서 보면 나타나고 가까이서 보면 보이지 않아서 혹은 보이기도 하고 혹은 보이지 않기도 하는 것이 그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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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암 석굴사원에서 바라본 경관

미타암은 통도사(通度寺)의 말사로써 천성산 원적봉 8부 능선 아래에 자리 잡고 있어 천애의 자연과 더불어 조망과 비경이 웅장하고 수려하다. 웅상, 덕계, 서창을 한눈에 조망을 할 수 있고 대운산, 달음산 등 인근 명산을 볼 수가 있다. 구름이 깔린 날씨 일 때는 가히 천상의 낙원인 것 같다. 신라시대 고승 원효대사도 깨달음과 불교 대중화를 위해 이런 훌륭한 지리적 위치를 고려하였을까?

그리고 미타암의 석굴사원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성행하던 석굴 사원 조영의 한 단면을 살필 수 있고 통일신라 8세기 중후반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제998호인 석조아미타여래입상 있어 극락왕생과 소원성취를 위한 기도처로서 영험하다고 알려져 있어 여타 지역의 불교 신도들도 많이 찾는다. 특히 국보 제82호 경주 감산사(甘山寺) 석조아미타불입상(石造阿彌陀佛立像, 719)과 유사한 양식적 특징을 보이고 있어 신라 아미타신앙의 전개 과정과 불교 고미술을 연구하는 사람들로 발길이 잦다.

또한 이 석조아미타불입상(石造阿彌陀佛立像)은 삼국유사 제5권 피은 제8 포천산(布川山) 5비구(五比丘) 경덕왕대(景德王代)에 나오는 포천산이 웅상읍의 천성산으로 추정되고 석조아미타여래입상은 서방 극락세계로 날아간 다섯 비구가 수도하던 석굴에 모셔진 불상으로 판단되어 더욱 그러하다.

미타암으로 가는 길은 국도 7호선에서 덕계와 서창의 중간 지점에 있는 양산시 웅상읍 주진마을로 가야한다. 주진마을은 지형이 배[] 형국이고, 옛날에 해일이 일면 나룻배를 매어 놓았다하여 주진(舟津)이라고 표기하였다고 한다. 이곳 주진저수지를 지나 천성산 임도를 이용하여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올라가면 화장실과 천성산 안내문이 있는 첫 주차장을 만나고 여기서 미타암 가는 산길을 이용하거나 또는 지나서 화엄사 주차장에서부터 산길을 따라 미타암까지 가는 2가지 길이 있다. 미타암 가는 산길은 매우 가파른데 소요시간은 약 20분 정도이다.

미타암 가는 산길은 매우 가파른데 소요시간은 약 20분 정도이다.
미타암 초입에서 객을 맞이하는 부처님

미타암에 도착하여 둘러보면 매우 깨끗하고 단정하게 꾸며져 있다. 특히 꽃이 만발한 화분은 보는 이의 마음을 정갈하게 해 준다. 장대한 나무 또한 높은 기상과 지난 옛 세월을 보여주는 것 같다. 휴식공간에는 커피, 숭늉, 사탕 등 무척 정성스럽게 준비하여 일반객에게 이용하기에 준 사찰에 감사할 따름이다.

미타암에 도착하여 둘러보면 매우 깨끗하고 단정하게 꾸며져 있다. 특히 꽃이 만발한 화분은 보는 이의 마음을 정갈하게 해 준다.
장대한 나무 또한 높은 기상과 지난 옛 세월을 보여주는 것 같다.

미타암은 646(선덕여왕 15)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원효대사가 창건한 89암자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920(경명왕 4)에 지공대사가 중창하였고 1376(우왕 2)에 중창했으며, 1888(조선 고종 25)에 다시 정진(正眞)이 중창하였다. 구한말에 우리나라의 선사상을 부흥시킨 경허(鏡虛)의 제자 혜명(慧明)[1861~1937]이 주석했으며, 현재 그의 비석이 남아 있다.

깨끗한 경내 안을 대웅보전과 옥불전을 지나서 계단을 따라 걸어가면 천애의 절벽 아래 비석 군을 만나고 석조아미타불입상(石造阿彌陀佛立像)이 봉안 된 석굴사원(미타굴)을 마주하게 된다. 석굴사원은 수성암으로 이루어진 천연 동굴에 인공을 가해 조성한 것으로 길이 30m, 3~5m, 높이 2~3m이다석조아미타불입상(石造阿彌陀佛立像)은 높이가 205cm로 입구에서 9m 정도 들어간 석굴 속에 안치되어 있다.

대웅보전
옥불전
미타암에는 일반 절에서 볼 수 없는 옥불전이 있다.
구한말에 우리나라의 선사상을 부흥시킨 경허(鏡虛)의 제자 혜명(慧明)[1861~1937]이 주석했으며, 현재 그의 비석이 남아 있다.

 불상(佛像), 광배(光背), 대좌(臺坐)가 모두 한 돌로 조각되었으며 시원스럽고 넓은 어깨의 당당한 체구에 정면관을 취하고 있는데 여러 점에서 경주 감산사(甘山寺) 석조아미타불입상(石造阿彌陀佛立像)과 유사한 양식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즉 머리의 큼직한 육계와 어깨까지 내려온 긴 귀, 풍만하면서도 우아한 상호(相好)는 물론 왼손을 몸에 곧바로 내리고 오른손은 가슴에 댄 모습, 그리고 둥근 어깨선과 평판적인 가슴 및 대좌 위에 직립한 자세 등의 신체적 특징은 모두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의 양식을 이어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통견(通肩)의 대의(大衣)는 부드러운 주름을 형성하며 전신을 감싸고 있고, 양 팔을 걸쳐 지그재그 모양으로 내려간 옷자락은 발목에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

이 특징들은 모두 감산사 불상과 직결되는 동일한 양식이지만 옷 주름이나 띠 매듭 표현 같은 세부기법에서는 경직된 면이 드러나고 있어 시대 하강에 따른 변화를 느낄 수 있다. 광배는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인데 전체적인 윤곽이나 3조선으로 이루어진 두광, 신광의 구분, 그 구획 안의 꽃무늬 배치, 그리고 외연부의 화염문(火焰文) 등 역시 감산사 불상 광배와 유사한 모습이다.

미암타은 통도사(通度寺)의 말사로써 천성산 원적봉 8부 능선 아래에 자리 잡고 있어 천애의 자연과 더불어 조망과 비경이 웅장하고 수려하다. 웅상, 덕계, 서창을 한눈에 조망을 할 수 있고 대운산, 달음산 등 인근 명산을 볼 수가 있다.

대좌는 2단의 원형연화문대(圓形蓮花文帶)와 그 아래의 사각받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4각의 각 면에는 2구씩의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연판(蓮瓣) 안에 꽃무늬가 새겨진 연화좌(蓮花坐)의 모습은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石造彌勒菩薩立像)의 것과 거의 같다. 이렇게 이 불상은 세부표현에서 다소 이완된 면을 보이지만, 불신뿐만 아니라 광배와 대좌까지 모두 감산사 불상과 같은 양식을 보이고 있다.

구름이 깔린 날씨 일 때는 가히 천상의 낙원인 것 같다. 신라시대 고승 원효대사도 깨달음과 불교 대중화를 위해 이런 훌륭한 지리적 위치를 고려하였을까?

 주목할 것은 이 석불이 포천산(布川山) 5비구(五比丘) 경덕왕대(景德王代)에 나오는 포천산(布川山) 석굴로 비정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 제5권 피은 제8 포천산(布川山) 5비구(五比丘) 경덕왕대(景德王代)

「삽량주(歃良州)의 동북쪽 20리가량 되는 곳에 포천산(布川山)이 있는데 석굴(石窟)이 기이하고 빼어나 마치 사람이 깍아 만든 것 같았다. 성명이 자세치 않은 다섯 비구(比丘)가 있었는데 여기에 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외면서 서방정토(西方淨土)를 구하기 몇 십 년에 홀연히 성중(聖衆)이 서쪽으로부터 와서 그들을 맞이했다. 이에 다섯 비구가 각기 연화대에 앉아 하늘로 날아 올라가다가 통도사(通度寺) 문밖에 이르러 머물러 있는데 하늘의 음악이 간간이 들려 왔다. 절의 중이 나와 보니 다섯 비구는 무상고공(無常苦空)의 이치를 설명하고 유해를 벗어 버리더니 큰 광명을 내비치면서 서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들이 유해를 버린 곳에 절의 중이 정자(亭子)를 짓고 이름을 치루(置樓)라 했으니, 지금도 남아있다.」

화엄사 주차장에서 위로 30m 정도 가면 1992년 혜문 스님이 진신사리 6과를 봉안하고 건립한 화엄사 적멸보궁을 볼 수 있는데 꽃 창살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이곳 또한 오래 전 작은 토굴에서 시작하였고 수려한 산세와 감로수가 유명하여 수행하는 스님들이 많이 찾았다고 한다. 또한 불교 신도들의 기도처로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1992년 혜문스님이 석굴 암벽 속에서 고려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 석가모니 불상을 발견하였는데 복장 속에서 진신사리 6과와 부적 다라니경, 항마진언 등이 나왔었다. 그리고 복장 속에서 발견 된 글을 보면 1856년에 월석우해, 운거공시 두 스님이 진신사리 6과를 복장 속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화엄사 주차장에서 위로 30m 정도 가면 1992년 혜문 스님이 진신사리 6과를 봉안하고 건립한 화엄사 적멸보궁을 볼 수 있는데 꽃 창살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천성산(千聖山, 고도 : 921m)은 원적산(圓寂山), 원효산(元曉山), 소금강산(小金剛山) 등으로 알려졌다. 북쪽의 정족산에서 산줄기가 이어져 내려왔고 산 북사면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내원사가 위치하며 그 주변이 가지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양산)진산은 원적산(圓寂山)이다. 천성산(千聖山)이라고도 부르며,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부른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대부분의 조선시대 사료에는 원적산으로 기재되어있다. 한편 조선지지자료의 하북면에 천성산, 웅상면 소주동과 상북면 대석동에 원적산이 기재되어 있으며, 조선지형도(양산)에 원효산(元曉山)과 천성산으로 분리·표기되어 있다. 이를 통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산을 봉우리에 따라 분리해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시에서는 과거 원효산(921m)이라고 부르던 것을 천성산제1(주봉), 천성산(812m)이라 부르던 것을 천성산 제2봉으로 정정했다. ‘천성산(千聖山)’ 지명은 원효대사가 당나라에서 건너온 1,000명의[] 스님에게 화엄경을 설법하여 모두 성인이[] 되게 한 곳이라는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전한다.

해우소 가는 길에서

 

나이 드신 할아버지 및 할머니를 위한 만든 모노레일로 화엄사 주차장에서 승차하여 올 수 있는 수송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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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말사 중 하나인 극락암은 「여기 극락에는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는가? 시바세계를 무대로 멋지게 살아라.」라는 법어로 유명한 근·현대의 선승 경봉(鏡峰, 1892∼1982) 스님이 주석한 암자로 유명하다.  1968년 이후 경봉스님이  홍예(虹橋), 조사각(祖師閣), 단하각(丹荷閣), 수세전(壽世殿) 등, 가람 전체를 크게 중수하였다.

1927년 11월 20일 삼경 「삼소굴」에서 경봉스님이 확철대오(確撤大悟)의 대도(大道)를 성취 하였는데 방안의 촛불이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자성(自性)을 깨닫고는 기쁨 마음에 문을 박차고 나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시, 서, 화, 선, 차까지 두루 갖춰 오절로 불리었던 경봉스님은 「기껏 살아봐야 백년을 더 사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니 언제나 쾌활하고 낙관적인 기분으로 활기찬 생활을 해야 한다.

지금껏 생활해 온 모든 사고방식과 생활 관념에 잘못이 있으면 텅 비워 버리고 바르고 참되고 활발한 산 정신으로 살아가야한다」라고 말씀하셨다. 1982년 7월 17일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하시며 열반에 들었다.

경봉스님이 입적 할 당시, 이 지역에는 가뭄이 발생하여 농사를 짓는 데 큰 어려움을 있었다. 그러나 다비를 마친 후에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가뭄이 해소되었다고 한다.


극락암의 핫 플레이스가 2곳이 있다. 하나가 극락영지와 홍예로 이곳은 사진촬영하려는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다. 사계절이 제각각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다. 다른 하나는 단하각(丹荷閣)으로 소원성취를 위해 찾는 중장년층이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극락암은 1344년(충혜왕 복위 5)에 창건됐으며, 창건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소실 된 법당들을 1758년(영조 34)에 지홍대사(智弘大師)가 중창하였다. 고종 30년(1893)에 무량수각을 중건하였다. 주요 건물로는 삼소굴(三笑窟), 무량수각, 수세전(壽世殿), 설법전(說法殿)과 영월루(暎月樓), 조사각(祖師閣)과 원광제(員光齊), 단하각(丹荷閣), 등 있다. 극락암은 수덕사 전 방장 원담스님, 은해사 전 조실 일타스님, 해인사 원로 도견스님, 화엄사 전 주지 도광스님 등 제방의 조실스님들이 모두 이곳에서 정진하는 등 한강 이남의 제일가는 호국선원이다.

극락암의 일주문인 여여문

극락영지는 극락암 앞 연못으로 통도팔경 중 제5경이고 영축산의 산봉과 산록의 그림자가 연못에 비친다고 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연못과 담장이 넝쿨 로 감싸인 홍예는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봄에는 한그루의 벚나무에서 꽃이 피고, 여름에는 수련 꽃이 만발하고 가을이면 단풍 물든 영축산이 잠기고 겨울이면 맑은 하늘 구름이 노닐고 가는 곳이다. 극락영지의 조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홍교(虹橋)인 극락교는 극락세상으로 가기 위해 건너는 다리로 경봉스님이 71세 때인 1962년 만들었다.

극락영지는 극락암 앞 연못으로 통도팔경 중 제5경이고 영축산의 산봉과 산록의 그림자가 연못에 비친다고 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극락암에는 조선 말기에 제작된 지름 85.5~85.8㎝ 크기의 청동반자(靑銅飯子)가 있다. 옆면에 반원형의 고리 두 개가 붙어 있어 반자를 고정시키고 있고 범어[梵語] ‘옴’자를 돋을새김(음각)의 새겨 총 44개의 ‘옴’ 자 원형문으로 2열 배열하여 새겨져 있다. 일반적으로 서방 정토에 극락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옴마니반메훔」를 육자대명주(六字大明呪)라 하여 여섯 자를 새기고 있다.

극락암 청동반자

앞면 중앙에는 돋을새김의 태극원문 당좌(撞座)가 있고 오른쪽 방향에는 ‘대황제폐하만만세(大皇帝陛下萬萬歲)’, ‘순비저하수제년(淳妃邸下壽齊年)’, ‘영친왕저하수제년(英親王邸下壽齊年)’ 왼쪽 방향에는 ‘황태자전하천천세(皇太子殿下千千歲)’, ‘황태자비전하수제년(皇太子妃殿下壽齊年)’이라는 글이 주조되어 있다. 이를 통해 제작시기와 대한제국 황실의 수복(壽福)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뒷면에는 직경 65㎝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다. 

앞면 중앙에는 돋을새김의 태극원문 당좌(撞座)가 있고 오른쪽 방향에는 대황제폐하만만세(大皇帝陛下萬萬歲), 순비저하수제년(淳妃邸下壽齊年),영친왕저하수제년(英親王邸下壽齊年),왼쪽 방향에 황태자전하천천세(皇太子殿下千千歲), 황태자비전하수제년(皇太子妃殿下壽齊年)이라는 글이 주조되어 있다.
순비저하수제년(淳妃邸下壽齊年), 영친왕저하수제년(英親王邸下壽齊年), 대황제폐하만만세(大皇帝陛下萬萬歲)
황태자비전하수제년(皇太子妃殿下壽齊年),&nbsp;황태자전하천천세(皇太子殿下千千歲)
옆면에 범어[梵語] 옴자를 돋을새김(음각)의 새겨 총 44개의 옴자 원형문으로 2열 배열하여 새겨져 있다.
옆면에 반원형의 고리 두 개가 붙어 있어 반자를 고정시키고 있고 뒷면에는 직경 65㎝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다.

설법전(說法殿)이자 영월루(暎月樓)는 법회장소이며 달그림자가 비치는 모습을 즐기는 누각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광무3년(1899)에 건축되었고 1967년 경봉스님 때 단청을 하였다. 설법전 현판과 주련은 경봉스님 글씨이고 영월루 현판은 석재 서병오 글씨이며 정법안장(正法眼藏)은 청남 오제봉의 글씨이다.

설법전(說法殿)이자 영월루(暎月樓)는 법회장소이며 달그림자가 비치는 모습을 즐기는 누각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광무3년(1899)에 건축되었다.

수세전(壽世殿)은 인간의 수명과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도교의 칠성신앙이 불교화한 것으로 1820년 대 양산 군수가 왕명을 받들어 고종 황실의 명복이나 황족의 무병장수를 기원할 목적으로 세운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1967년 7월 경봉스님이 단청 보수를 하였다.

수세전(壽世殿)은 1820년 대 양산 군수가 왕명을 받들어 고종 황실의 명복이나 황족의 무병장수를 기원할 목적으로 세운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삼소굴(三笑窟)은 맞배지붕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경봉스님이 36세부터 91세로 입적하기까지 50년을 생활을 했던 곳이다. 경봉스님의 영정은 불교화가 김범수가 그렸다. 본래 이 건물은 순조 31년(1831)에 영봉 스님이 토굴로 지었고 이후 영봉헌으로 불리다가 철종 6년(1855) 봉흡 스님이 보수하였다. 1927년 경봉스님이 이곳에서 득도한 후 「삼소굴」로 바뀌었고 삼소(三笑)는 깨달음의 웃음을 의미한다. 삼소굴 현판은 대구출신 팔능거사(八能居士) 석재 서병오 글씨이며 방장(方丈) 현판은 경봉스님의 글씨이다.

삼소굴 경봉스님의 영정
삼소굴(三笑窟)은 맞배지붕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경봉스님이 36세부터 91세로 입적하기까지 50년을 생활을 했던 곳이다.
고양이와 삼소굴 안내문
삼소굴 뒷편의 산수유나무
산수유 열매
삼소굴 마루에 낮잠을 자는 고양이. 이곳 극락암에는 고양이들을 쉽게 만날수 있다.

조사각(祖師閣)이자 원광제(員光齊)는 33분의 조사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 정면 9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1955년 극락선원 조실이었던 경봉스님이 건립하였다. 지금은 선원으로 경봉스님의 유품을 보관하고 스님들이 수행하는 곳이다. 매년 음력 10월 30일 역대조사의 뜻을 기리는 추모대재를 봉행 할 때 일반인에게 개방한다. 현판 원광제(員光齊)는 석재 서병오의 글씨로 원광은 경봉 스님의 호이다. 호쾌대활(好快大活)은 추사 김정희, 무진장(無盡藏)은 경봉 스님 글씨이다.

조사각(祖師閣)이자 원광제(員光齊)는 33분의 조사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 정면 9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1955년 극락선원 조실이었던 경봉스님이 건립하였다.

단하각(丹荷閣)은 나반존자를 모신 독성각으로 정면1칸, 측면1칸의 팔작지붕으로 극락암에서 가장 작은 건물로 1955년에 경봉스님 때 지었다. 나반존자 소상(塑像)은 신상균氏 작품이다. 이곳 나반존자는 영험하다하여 주변 여러 지역에서 찾아오는 이가 많다.

영축산(靈鷲山)은 북쪽 신불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로 형성 된 산으로 취서산(鷲棲山, 鷲栖山), 축서산, 영취산으로도 불리고 양산시와 울산광역시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가지산도립공원 內 산으로 영남 알프스 구봉 중 하나로 고도는 1,081m 이다. 산 모양이 독수리 머리같이 생겼다고 하여 영취산이고 독수리가 깃들다, 독수리가 산다하여 취서산이다. 산 이름은 인도의 영축산과 닮아 유래하였는데 본래 영축산은 인도의 옛 마가다국에 있는 산으로 삭가모니가 “법화경”을 설한 곳으로 유명하다.

『세종실록지리지』(양산)에“취서산(鷲棲山)은 군의 북쪽에 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부터 취서산으로 부른 것으로 보인다. 이후 사료에도 취서산(鷲棲山, 鷲栖山)으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통도사 일주문에는 「영축산 통도사」라고 기록되어 있어 일찍부터 영축산이라고도 부른 것을 알 수 있다. 2001년 취서산, 축서산, 영축산, 영취산 등으로 부르던 산을 영축산으로 정식 고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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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말사 중 하나인 비로암은 극락암에서 북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곳에 자리한 암자로 고려 충목왕 원년(1345) 영숙(靈淑)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선조 11(1578) 태근(太釿)대사가 중건하였고 이후 원명화상이 중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비로암 전경에는 정족산, 천성산으로 형성 된 큰 능선과 백련암, 옥련암을 품고 있는 작은 능선이 앞, 뒤가 조화롭게 펼쳐져 있다. 영취산 자락에 위치한 암자이기에 가능한 경관이다. 종무소 옆 샘물은 영축산 암능을 타고 내려온 석간수로 산정약수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 샘물은 효능이 좋다고 알려져 찾는 이가 많다. 소위 영축산 정기를 담고 있어 몸과 마음 치유에 좋다고 한다.

  비로암 전경에는 정족산, 천성산으로 형성 된 큰 능선과 백련암, 옥련암을 품고 있는 작은 능선이 앞, 뒤가 조화롭게 펼쳐져 있다. 영취산 자락에 위치한 암자이기에 가능한 경관이다.

 비로암의 서쪽에 발달한 계류(溪流)에 형성된 폭포로 소리가 일품이라 하여 통도팔경 중 제3경인 비로폭포가 있다. 영축산에서 발원되는 비로천에서 생성된 폭포로 유량이 풍부했던 예전에는 낙수 소리가 비로암과 영축산의 계곡을 삼킬 만큼 우렁찼다고 한다.

종무소 옆 샘물은 영축산 암능을 타고 내려온 석간수로 산정약수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 샘물은 효능이 좋다고 알려져 찾는 이가 많다. 소위 영축산 정기를 담고 있어 몸과 마음 치유에 좋다고 한다.

조선 후기 불화(佛畵) 연구에 귀중한 비로암 탱화(毘盧庵幀畵)

비로암에는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모니후불탱화를 비롯하여 극락탱화, 칠성탱화, 비로암에는 산신탱화, 독성탱화, 조왕탱화8점의 불화(佛畵)를 가리키는 귀중한 탱화가 있다. 화기(畵記)에 따르면 1899(고종 36) 비구 주화(周華) 등이 주도하여 조성한 후 비로암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현재 8점 중 3점은 비로암, 나머지 5점은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봉안되어 있다.

이들 탱화는 주제가 다양하고 연대가 확실하여 조선시대 불교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석가모니후불탱화는 조선 후기 불화의 특징을 보여 주는 가로로 긴 그림인 가로구도법을 사용하였다. 또한 중간 색조의 차분한 색감보다 원색에 가까운 색깔이 사용되었다.

석가모니후불탱화는 크게 삼세불화(三世佛畵)와 독존도(獨尊圖)로 나뉘는데, 비로암 대웅전의 석가모니후불탱화는 독존도에 해당한다. 크기는 가로 165, 세로 128이고 비단에 채색하여 그렸다. 불화의 구도는 중앙에 석가모니불상을 두고 좌우를 각각 2단으로 나누어 아래쪽에는 두 사람의 보살, 위쪽에는 석가모니불 좌우에 가섭과 아난 두 명의 제자, 바깥쪽에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배치하였다.

석가모니의 피부는 황색으로 채색하였으며 계주(髻珠)와 정상계주(頂上髻珠)는 붉은색 바탕에 흰색 선으로 바림하였다. 광배(光背)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둥글게 표현하였고 테두리는 흰색 선으로 처리하였으며, 그 안에 군청색과 붉은색 2조의 선으로 원을 만들었다. 두광은 안쪽을 녹청색을 칠하였으며, 신광은 안쪽에 녹청색·황색·군청색·붉은색 띠를 차례대로 배열하여 빛을 형상화하였다.

석가모니 협시보살은 아래쪽 보살들의 경우 두광은 흰색 테두리 안을 녹청색으로 처리하였고 신광은 붉은색을 발랐고, 위쪽 보살들은 두광과 신광 모두 안쪽을 녹청색으로 처리하였다. 가섭과 아난은 녹청색의 두광만 표현하였다. 보살들은 모두 의자에 앉은 모습인데 오른쪽 다리는 내리고 왼쪽 다리는 올린 유희좌(遊戱座)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가섭과 아난 두 제자는 손을 가슴에서 모아 합장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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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여타 광역시 보다 관할 내 산이 많고 사연 또한 다양하다일제 강점기 때 일본 제국주의는 대륙침략과 한반도 병참기지화와 이를 위한 자원수탈 목적으로 국토의 산을 유린하였고 무차별 광산을 개발하였다. 부산지역의 산 또한 예외가 없었고 금과 구리 채굴목적으로 광산을 개발하였고 황령산, 금련산, 백양산, 이기대, 기장군 달음산 등이 도륙을 당한 산이다. 특히 이기대 구리광산은 폐광유출수로 인한 중금속 오염이 심각하였다.

황령산은 퇴적암, 금련산은 화산암으로 암석구성이 되어 있고 당시 황령산 및 금련산 일대는 구리 및 아연 제련소도 있었다. 황령산은 금을 채굴하였고 금련산은 구리를 채굴하기 위해 광산을 개발하였으며 지금은 폐광되어 막혀있거나 묻혀 버렸지만 80년대까지는 폐광 갱도가 여름철 피서장소로 인근 주민들이 사용하였다.

우암사에서 바라 본 전경

 

이곳 우암사는 폐광 된 갱도2곳을 매입하여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고 사찰 입구 진입로의 경사가 매우 가파르다. 겨울에는 빙판길이 우려 되어 차량이용하기가 어렵고 대중교통을 이용해야만 안전할 것 같다. 첫 번째 맞이하는 우미사의 갱도 사찰은 두 번째에 비하여 길이가 길다. 갱도 곳곳에 불교용품으로 사찰을 장식하였고 마지막 부분에는 불상으로 마무리했다. 그러나 실제 갱도 끝은 아니고 단지 안전을 위한 방법인 것 같다. 두 번째 갱도 사찰은 길이는 짧지만 끝 부분은 넓고 분위기는 첫 번째에 비해 경건함과 숙연함을 많이 느껴진다. 다만 소원성취 돌이 있어 아쉽다.

첫 번째 갱도 사찰 입구
두 번째 갱도 사찰 입구

무엇보다도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 자원수탈 일환으로 이러한 갱도 건설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강제징용을 당하였고 가혹한 노동착취를 시달렸는지 여기서 그분들의 고통을 가늠 해본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본성은 침략과 지배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이곳 망미1동 광산촌 마을은 당시 광산에서 일하던 광부들이 터를 잡기 시작하여 조성 된 마을로 6.25 전쟁을 거치면서 현재는 100여 가구 200여명으로 대부분 노인들이 살고 있는 산동네다. 금련산 중턱 가파른 곳에 위치한 관계로 집들이 밀접하게 자리 잡고 있고 골목길 또한 좁다. 그렇지만 원색의 지붕 색깔과 산 아래 자연 환경과의 어울림이 조화를 이루어 전체 마을모습은 정겹고 아늑하다.

우암사 사찰 앞 광산촌 마을
금련산 중턱이라서 마을주민이 염소도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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