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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생면 해운산에 위치하고 있는 인성암(引聖庵)은 신라 무열왕(654~660)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고 북쪽 성인산(聖人山)이 있어 성자를 이끌어 들인다고 하여 유래가 된 이름이다. 서생팔경(西生八景) 중 성암모종(聖庵暮鍾)이라 하여 인성암의 저녁 무렵 종소리는 매우 아름다웠다고 알려졌다.

인성암 입구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가 서생포 왜성에서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여러 번에 걸쳐 담판을 하면서 이 사찰에 머물렀다고도 전해진다. 그럼 성자는 원효대사와 사명대사일까?

인성암 전각으로는 대웅전, 칠성각, 독성각, 산령각, 종각 등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 일본인들로 구성된 울산군교육회가 일본어로 펴낸 울산군향토지(蔚山郡鄕土誌)’에 조선인 불교 사찰은 9곳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백양사와 옥천암, 신흥사, 동축사, 월봉사, 인성암, 내원암, 문수암, 석남사 등이 당시에 존재했다. 건물 자체를 보면 근대에 지어진 것이다.

대웅전
칠성각
독성각과 산령각
종각

수령 400~500년 된 팽나무 한 그루가 있어 사찰의 긴 역사를 증명하듯 노거수의 장엄함이 보인다. 팽나무는 성암모종(聖庵暮鍾)의 저녁 종소리를 들었으리라. 지금은 사찰 방문객에게 귀속 말로 그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는 듯하다.

수령 400~500년 된 팽나무 한 그루가 있어 사찰의 긴 역사를 증명하듯 노거수의 장엄함이 보인다.

대웅전에 있는 청동금고의 새겨진 명문을 살펴보면 일제 강점기 때인 1927년에 대대적인 불사가 있었고 당시 주지스님은 법명은 재선이고 호는 벽허였다. 그때 서생면 진하에 살고 있는 근대 울산 최고의 갑부 이규현이 청동금고를 비롯하여 칠성도, 독성도, 산신도 조성에도 시주를 하였다.

1970년대 이규현의 아들 이근수(李根守)가 그의 고택 만석정의 행랑채를 헐어 대웅전을 짓는데 대들보 등 에 도움을 주었다. 2대를 거쳐 인성암 불사에 큰 보탬을 주었던 父子이다.

문화재로는 유형문화재 17신중도(神衆圖)’와 문화재자료 18석조보살좌상(石造菩薩坐像)’이 있었으나 도난을 우려해 범어사 성보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특히 석조보살좌상은 경주 불석으로 알려진 흰색의 석재로 제작되었다.

 암자에서 나와 길을 따라 가면 무일당(無一堂) 선용대선사(善用大禪師)의 부도와 비를 만날 수 있다. 무일당 선용대선사는 192539일 평안남도 용강군 대산면 해산리167번지에서 부친 김곽도와 모친 곽희운 사이에서 9대독자로 출생하여 신의주와 만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에서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무일당(無一堂) 선용대선사(善用大禪師)의 부도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

6.25전쟁 때 켈로부대원으로 안강전투와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여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고 국가유공자가 되었으나 참혹한 전투를 통한 인생무상을 절감하여 1960년경 금정산 범어사에서 하동산대종사 문하로 출가 득도하였다. 이후 보제루 보수, 종각 보수, 진입로 공사 등 범어사의 발전과 가람 수호를 위해 헌신한 공을 인정받아 1968년 종정 표창을 받기도 했다. 1988년에 인성암 주지로 부임한 이후 청풍가풍과 무소유적인 삶으로 정진하였고 형편이 딱한 학생들의 소식을 접하고는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세납 83세 법랍 47세에 원적하였다. 현대의학 발전을 위해 법구를 생전유언에 따라 동국대학교 의과대학병원에 기증하였고 유골은 대전국립현충사에 안장되었다.

무일당(無一堂) 선용대선사(善用大禪師)의 부도와 비
인성암 가는 길에 만나는 서생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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