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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대산 정상에서 본 죽성리 바닷가 전경

봉대산(228m)은 기장읍 죽성리 산 50번지에 있는 산으로 주변 청강리, 신천리, 대변리와 인접하고 있고 이곳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북쪽으로 흐르면서 덕발 저수지, 죽곡 저수지, 신천 저수지를 이루며 죽성천에 유입한다. 산은 크게 높지 않아 정상까지 1시간 이내에 도달 할 수 있으며 주로 청강리 우신네오빌 아파트와 신천리 선비촌 식당 방향에서 출발한다. 높이에 비해 정상에서의 풍광은 매우 뛰어나다. 정상부에는 연변(해안) 봉수대 중 에서 규모가 가장 크며, 초기 연변봉수의 원형을 추정할 수 있는 남산 봉수대(烽燧臺)가 있다. 또한 이곳은 고산 윤선도와 인연이 있다.

신천리 선비촌 식당 방향에서 출발하여 맞이한 초입 오솔길

고산 윤선도는 1616(광해군 8) 12월 전횡을 일삼던 예조판서 이이첨을 벌할 것과 유희분, 박승종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화가 되어 함경도 경원으로 귀양을 갔다. 그런데 국경지대의 귀양지는 중국인과 내통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1618(광해군 8)에 죄인들을 남쪽으로 옮겼는데 이때 윤선도도 기장으로 이배(移配)되었다.

기장은 한양에서 1,000리나 떨어진 변방에 위치하여 많은 선비들이 이곳 기장으로 유배생활을 했으며 조선시대 14번째 순위에 드는 유배지였다고산 윤선도는 이곳에서 7년간의 유배생활을 하면서 봉대산에서 자주 약초를 캐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여 마을사람들에게는 의원님이라 불렀다고 한다.

갈림길에서의 안내 표지판

한 번은 어린 하인이 산에 땔나무를 구하기 위해 갔다가 신선같이 보이는 한 노인이 암석 이에 앉아서 시 한수를 써 주며, 돌아가서 네 어른(윤선도)에게 드리라고 하였고 이 어린 하인은 이를 받았는데 잠깐사이에 그 노인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봉래산 한 골짜기 남쪽 땅에 떨어지니 그 절경 천하에 드문 곳임을 알게 되었네. 산은 비단 병풍을 두른 듯 북쪽으로 비스듬히 따랐고, 개울물은 옥대를 두른 듯 동쪽을 돌아 흐르네. 나무 틈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빛은 언덕을 비추고, 안개 속에 내리는 저녁 비는 들녘에 자욱하네. 성긴 숲을 마주 앉아 한 마디 말과 솔솔 부는 바람에 푸른 담쟁이 넝쿨이 흔들리네.

정상부를 향한 마지막 오솔길 구간

고려 및 조선시대의 연변(해안) 봉수, 남산(南山) 봉수대(烽燧臺)

산불감시초소 너머 보이는 동해 바다전경
멀리 보이는 기장 아난티코브와 힐튼호텔

남산 봉수대는 봉대산의 정상 능선부 동쪽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연대(煙臺)는 원형을 상실한 채 흔적만 남아 있다. 봉대산의 정상에 있는 까닭에 연대 자리를 평평하게 하여 지적 측량의 원점으로 삼고 있다. 연대 아래에는 헬기장이 있고, 연대와 헬기장 사이에는 산불 감시 초소가 설치되어 있다. 19951215일 부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다.

남산봉수대의 건립 시기는 고려 초기인 고려 성종 4(985)으로 추정되며, 특히 13세기 이후 왜구들이 자주 해안에 출몰하면서 연변 봉수의 기능이 중요해진 것으로 여겨졌다. 조선 시대에도 이미 1461(세조 7) 이전에 기장 남산봉수대가 존재하였으며, 이는 고려 시대에 있었던 봉수대가 계승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고종 31(1894) 갑오경장(甲午更張) 때에 폐지되었다.

형태로써 남나산봉수대는 담장이나 호가 확인되지 않고, 연대만 갖춘 표준 형식의 연안 봉수이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암반 위에 연대를 돌로 쌓았는데, 지름 2.4m, 둘레 9m이다. 그 중앙에 높이 1.5m, 너비 1.5m, 지름 30~40의 화로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연대 ( 煙臺 ) 는 원형을 상실한 채 흔적만 남아 있다 .  봉대산의 정상에 있는 까닭에 연대 자리를 평평하게 하여 지적 측량의 원점으로 삼고 있다
연대 아래에는 헬기장이 있고 ,  연대와 헬기장 사이에는 산불 감시 초소가 설치되어 있다 .
남산 봉수대 주변 모습

 봉수에는 경봉수(京烽燧), 내지봉수(內地烽燧), 연변봉수(沿邊烽燧)가 있는데, 기장 남산봉수대는 전형적인 연변 봉수이고 동래에서 영남 내륙·호서 내륙· 경기도를 거쳐 광주 천천령으로 연결되는 제2로 봉수로에 속하는 간봉(間烽) 중의 하나이다. 경상도에는 90여 개의 간봉(間烽)이 있는데, 남산 봉수대는 간선 봉화로 제8봉에 해당하며, 남쪽으로는 간비오산 봉수대, 북쪽으로는 기장군 장안읍 아이 봉수대, 울주군 서생면 이길 봉수대, 온산읍 하산봉수대로 차례로 연결된다. 남산봉수대는 연변 봉수 중에서 고려 시대부터 존재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연변 봉수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초기 연변봉수의 원형을 갖추고 있다.

흔히 봉수는 적이 나타나면 연기나 불을 피워 위급 상황을 알리는데, 간봉의 경우는 연기나 불을 피우는 연소실이 하나밖에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형태의 봉수를 특별히 봉대 혹은 연대라고 하며, 그 때문에 주로 연안 봉수가 위치한 산은 봉대산 혹은 연대산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간봉은 평소에는 연해에 아무 일도 없다는 뜻으로 저녁에 해가 지고 나면 불을 피워 차례대로 봉화를 올려 한양의 남산봉수대에 도달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수평선에 소속을 알 수 없는 배가 나타나면 가까운 수군진에 직접 달려가 알리며, 수군진의 초탐선이 나가서 수상한 배를 조사한다. 이처럼 5개의 연대를 갖춘 직봉(直烽)1개의 연대만 갖춘 간봉은 서로 그 역할이 달랐다.

고산 윤선도에게 시를 전한 신선의 인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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