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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산은 철마면 연구리, 이곡리와 일광면 용천리에 위치한 해발 361m의 나지막한 산이다. 특히 이 산 자락 미동마을에는 대나무 숲으로 유명한 「아홉 산 숲」 이 있어 가족단위, 연인들, 유치원 및 초등학생 단체 등 방문하여 숲을 느끼고 생태체험을 하는 곳으로 인기가 많다. 또한 영화 <군도>, <협녀>를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아홉산 숲 입구. 입장료는 어른, 아이(5세부터) 동일하게 5,000원이고 숲 체험은 10,000원으로 다소 비싸다. 매주 월요일은 휴무이다.
남평 문씨 문의순 ( 文義洵 ) 이 ‘ 고사리를 보며 즐긴다 ’ 는 뜻으로 지은 관미헌 ( 觀薇軒 )

 

특히 이곳 아홉 산 숲대나무의 이름은 맹종죽(孟宗竹)으로 일본에서 들어 온 대나무로 높이는 보통 10~20m이며 직경은 20Cm 로 대나무 중 가장 굵다. 그리고 피톤치드 효과가 뛰어나 코로나19 따른 몸과 마음의 피로감을 해소에 도움이 될 것 같다.

또한 맹종죽은 효를 상징하는 대나무로써 눈물로 하늘을 감동시켜 죽순을 돋게 했다는 고사 성어 맹종설순 (孟宗雪筍)의 주인공이다.

중국 춘추삼국시대 효성이 지극한 맹종(孟宗)에게 오랜 동안 병상에 누워있는 어머니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한겨울 대나무 죽순이 먹고 싶다고 하여 눈이 쌓인 대밭으로 갔지만 대나무 순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에 대나무 순을 구하지 못한 맹종은 눈물을 흘렸고 그 때 하늘이 감동하여 눈물이 떨어진 그 곳에 눈이 녹아 대나무 죽순이 돋아났다. 그때 하늘이 내린 이 죽순을 끓여 마신 어머니는 병환이 말끔하게 나으셨다는 맹종설순 (孟宗雪筍)의 내용이다.

아홉 산 숲은 임진왜란 이후 남평 문씨(南平文氏)가 처음 정착한 후, 400년 동안 숲을 조림, 육림을 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었고 2004년 산림청에 ‘22세기를 위해 보존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지정되었다.

숲의 총 면적은 520,000(15만평)으로 맹종죽 편백, 삼나무, 은행, 리기다소나무, 상수리, 밤나무 등 인공림과 참나무, 산벛나무, 층층나무, 수령 100~300년 되는 금강송 등을 포함한 천연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남평 문씨 문의순(文義洵)고사리를 보며 즐긴다는 뜻으로 지은 관미헌(觀薇軒)입구에서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입장료는 어른, 아이(5세부터) 동일하게 5,000원이고 숲 체험은 10,000원으로 다소 비싸다. 매주 월요일은 휴무이다.

미동마을의 미동(薇洞)은 고사리 골을 의미하고 옛 이름은 고사리 밭, 즉 미전(薇田)이라 한다. 옛날 이 마을에서는 부뚜막에서도 고사리가 난다고 할 만큼 고사리가 많이 자생하였다고 한다. 철마에서는 매년 10월경 한우불고기 축제를 하는 만큼 유명하여 한우 불고기집이 많다. 그래서 마을 입구부터 한우 불고기집이 있다. 마을 앞쪽에는 철마천이 흐르며 북쪽에는 곰내재라는 고개가 있고 이를 관통하는 곰내 터널이 있어 정관읍에 쉽게 갈수 있다. 또한 고개 마루에는 절경을 자랑하는 홍연 폭포가 있다.

 

철마의 지명은 면에서 가장 높은 철마산(605m)에서 비롯되었는데 옛날 이곳에 홍수가 발생했는데 이때 동해에 사는 용마라는 용이 나타나 물을 빼주었고 물이 없어진 뒤 용마가 움직이지 못해 그만 철로 굳어버렸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어 지명 유래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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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와 기장군의 경계에 위치한 구곡산(九谷山, 해발 434m)은 해운대 좌동에 위치한 산으로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산으로, 일명 아홉산 이라고도 부른다. 일반적으로 장산을 등산하면 장산 억새밭과 더불어 구곡산이 등산코스에 포함되는 산이다.

산 정상은 나무에 에워싸여서 풍광과 조망을 볼 수가 없다. 특히 이 산을 해운대 지역에서 보면 골이 깊게 진 모습은 볼 수 없고, 장산 양운폭포 위 애국지사 강근호를 모신 모정원에서 바라보면 구곡산 봉우리가 거북의 머리모양으로 보인다.

구곡산 지명에 대한 유래는 기장군 철마면 안평마을에서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옛날 한 장수가 두 손으로 땅을 짚었는데 그 손가락 사이로 9개의 골이 생겨서 구곡산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해운대에는 부산, 울산, 양산을 방호하는 담당부대가 인근 산자락에 주둔하 고 있어 다양한 등산 코스를 추진함에 있어 제한을 받고 있다. 장산 정상을 비롯하여 구곡산 산행 초입 제한 또한 그러하다.

이에 해운대 좌동은 대부분 군사보호구역에 속해 있었으나 1993년 이후 신시가지가 조성되면서 해제되었다. 좌동(左洞)이라는 지명은 춘천천의 좌측마을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고 2003년 신시가지 조성이후 좌14동으로 분동되었다.

장산마을에서 본 구곡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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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근호(姜槿虎) 선생(아명 : 강난선, 이명 : 강화린, 강화인)1898113일 함경남도 정평군 신상면 조양리 277번지에서 부친 강형석(姜亨錫)과 모친 신해운(申海雲)의 차남으로 출생하여 1916년 만주로 망명, 1920년 초 신흥(新興)무관 학교를 졸업하고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사관연성소 구대장과 교관을 역임한 청산리 전투의 주역이다.

청산리전투라 하면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 장군과 개인회고록을 남긴 철기 이범석 연성대장을 제외하면 널리 알려진 전사(戰士)는 거의 없다. 청산리 전역에서 직접 총을 들고 조국독립을 위해 여러 전투에 참전했던 650여 명에 달하는   무장독립군의 활약상은 아직도 묻혀 있다.

여기 애국지사 강근호 선생도 그들 중의 한 명이었다. 강근호 애국지사의 조국 광복 투쟁은 지난 2002년 그의  전기(傳記) 만주벌의 이름 없는 전사들이 출간됨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독립 후 선생의 나이 52세 때인 1949년에 육군사관학교 제84차로 입교하여 육군소위로 임관되어 한국동란에 참전하는 등 군인으로서 임무를 다하고 1956년 육군중령으로 전역하였다.

부산으로 이주한 선생은 영도구 영선동에서 정착하여 살다가, 1960년 향년 63세로 세상을 떠났다생전에 부인 이정희 여사에게 내 자식들이 성장하면 청산리전투에서 산화한 독립군을 위해 작은 돌비석이라도 하나 세워주기 바란다.”는 말씀을 유언처럼 이야기 하였다.

처음에는 그의 유해(遺骸)를 제대로 눕힐 공간조차 없어 영도 봉래산에 가 매장한 것을, 1964년 장산 모정원으로 이장하였다. 그 후 26여 년 동안 아내가 세워준 비목(碑木) 곁에 잠들어 있다가, 지난 1990년 드디어 그에게 대한민국 건국 애국훈장이 추서되었고, 그 해 127일에 유해가 대전국립묘지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다시 이장되었다.

모정원은 강근호 애국지사의 아내 이정희 여사가 1964년 해운대 장산 개척단장으로 있을 때부터 생활 하던 곳으로 자식을 그리는 어머니의 애틋한 심정을 생각나게 하는 동산이란 뜻이며 강근호 애국지사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정희 여사는 20161021일 소천 할 때까지 여기서 만년을 보냈으며 대전국립묘지 현충원에 강근호 애국지사와  함께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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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의 민간신앙

산따라 이야기따라/부산광역시 2019. 7. 21. 12:32 Posted by 추야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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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농어촌에는 각 마을별로 1년에 한번 또는 두 번 정도의 마을제사를 지내고 있다. 해운대 장산에도 마을에서 제를 올리는 곳이 제석당, 마고당, 천제단 등 세 곳이 있다. 마을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은 주민 중에서 제사 한 달 전에 생기 복덕이 있는 자를 선정하고 한 달 전부터 금기생활을 한다. 제물은 삼색과일, 조리하지 않은 생선, 술 등을 올리고 마을의 안녕을 천지신명께 기원한다.

좌동 제석당

옛날 좌동 마을이 형성되면서부터 연초에 주민의 질병예방과 풍농을 기원하며 제석신께 제를 올리는 제당이며 당초 마을 뒷산 중턱에 있던 것을 신시가지 조성으로 1992년 이곳으로 이전하였고 지금도 옛날 민속을 그대로 이어서 매년 정초에 제를 올리고 있다.

상산마고당(上山麻姑堂, 부산광역시 지정 민속자료 제6호)

동래부 동하면 고문서인 산신당중건모연문(山神堂重建募椽文)에 의하면 1741년 이래 동하면민이 마고할머니를 모신 제당을 세워 기우제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정월(13), 유월(63)에 제를 올리며 질병예방과 풍농·어를 기원하였고 이후 300년 가까이 좌동일대 여섯 마을에서 윤번제로 제를 올리고 1924년에 한차례 중건하였다.

현재는 상산마고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오른쪽 옆에는 자연석을 쌓아 조성한 산신단이 있고, 바로 아래에 석간수 (옹달샘)가 마르지 않고 솟아나서 신단에 바치는 정화수로 쓰고 있으며, 그 옆에 제기와 제물을 보관하는 부속건물이   있다.

마고(麻姑)는 지리산 산신이고 원래 천신(天神)이었으며 천신은 하늘에서 강림한 신이다. 바람··구름 등과 같은 자연현상을 전부 통제하는 초인적인 능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수명까지 관장하였고 천신을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로 여겼다. 그 천자가 사는 곳이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산의 봉우리였다. 한국의 역사가 시작되는 단군도 하늘의 아들이었고, 그 단군이 죽은 뒤 아사달의 산신이 되어 태백산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됐다고 전한다.

마고는 마고산신(할미)으로 변형되었고 마고할미 전승은 해남·강진·옹진 등 주로 해안 도서지방에서 현재까지 내려오는 지역전설이며 제주도의 선망대(설문대) 할망도 이에 속한다. 내용을 살펴보면 마고할미의 키나 덩치가 커서 깊은 바다가 무릎이나 속곳에 닿았고, 흙을 모아 산과 섬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한 마고는 무속신 중에서 최고의 신으로 분류되고 태초의 음()의 세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상징된다. 하늘과 태양이 양()의 세계라면, 음은 마고라는 것이며 여성신이고 마고(麻姑)의 한자 뜻은 늙은 시어머니이다.

<삼국사기> 권32 제사지에 의하면 지리산은 통일신라시대 때 오악(북악 : 태백산, 동악 : 토함산, 서악 : 계룡산, 남악 : 지리산, 중악 : 부악) 중 남악이었고 국가 제사의 대상이며 제사를 통해 국가의 평안과 발전, 풍년 등을 도모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지리산 천왕봉에서 제사 지내는 산신은 성모, 천왕, 성모천왕, 마고 등이다.

지리산산신제는 현재 전남 구례군, 경남 산청군에서 지내고 구례는 군의 문화원에서 산청은 덕산 두류산악회에서 지내고 있다. 구례는 지리산 남악제(南岳祭)라 하여 일제 강점기에 사라진 것을 군에서 재현해서 전국의 유림대표가 참여하는 유교식 산신제로 매년 420일 곡우 전후해서 열린다. 이에 산청은 민간단체 두류산악회에서 1973년부터 매년 추석 이후 10월 초 좋은 날을 택해 천왕봉 아래 성모사(聖母祠)가 있었던 자리에서 천왕제를 올리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성모제(聖母祭)라 하여 매년 봄 성모석상이 있는 천왕사 맞은편에서 제를 지내고 있어 결국 2회를 지내고 있는 것이다.

유교에서 신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상제(上帝) 혹은 천()으로 표현된 인격신을 가리킨다. 둘째는 주자(朱子)를 비롯한 성리학적인 의미에서의 신이다. 특히 주자는 이()를 매우 중요시했던 만큼 성리(性理)와 귀신·정신·혼백을 뚜렷이 구별해 전자를 오로지 라 한다면 후자를 라고 했다. 귀신·정신·혼백은 기이므로 유()를 따라 감응할 수 있으나 이는 감응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기의 뿌리가 되고, 이는 쉬지 않고 순환하는 천지조화의 회로와 같은 것이어서 날마다 무한히 생기는 기의 원천이 되므로 기가 단멸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주자는 신이라는 말을 따로 사용하지 않고 그 신에 해당하는 최고의 초월적 원리로 내세우고 있다.

천제단(天祭壇, 부산광역시 지정 민속자료 제6호)

동래부 동하면 고문서인 산신당중건모연문(山神堂重建募椽文)에 의하면 천제단은 마고당에 제를 올리기 전에 천신과 산신께 먼저 제를 올렸고 가뭄이 심할 때는 동래부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역병이 창궐할 때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해 천신에게 매년 정월 대보름날 천제를 지냈다.

기우제는 이전에는 원래 없었는데 재송동 뒷산 입석(立石)에서 기우제를 지냄으로써 비가 내리는 영험을 얻은 뒤로부터 동래부에서도 가뭄이 들면 똑같이 시행했다.

천제단은 가운데 큰 너럭바위가 있고 위에 3개의 입석이 놓여 있는데 각각 천신과 지신, 산신을 의미하고 그 아래에    바위 제단이 있다. 그리고 바위 네 모서리로부터 외곽으로 사방 10m 이내로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신선이 마시던 장산약수

해운대 장산에서 샘솟는 물은 물맛과 수질이 좋다는 소문이 나있으며 물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그래서 장산은 물()산이라 한다. 그 예로 산 정상 레이더 공군부대 주둔지에서 지하수를 파서 병사들이 식수로 사용하고 있고, 2동 삼환    아파트 자리에는 과거 세계적 양대 음료수 제조회사 중 하나 인 코카콜라(우성식품), 반여1(구 삼호실업) 지금의    골프연습장 자리에는 나머지 하나인 펩시콜라 회사가 있었다.

또한 장산 기슭에는 물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유래되어 있다. 좌동 물망 골, 약수샘, 마고당 옹달샘, 천제단 옹달샘, 반송 본동 찬샘 등이 있으며 사찰 명도 옥천사, 금수사, 폭포사, 약수암, 장천사, 성불사 약수터, 고씨당 약수 등이 유명하며 춘천, 송정천, 반송 수무지천, 반여 신선천이 있다. 이와 같이 샘의 발원지는 모두 장산 정상에서 이어지는 능선 옹달샘에서 용출된다.

한 지관에 의하면 장산은 백두산 천지물과 연결되어 있고 화산의 화기(火氣)가 충만한 산이라 폭포사 사찰 앞쪽으로    온천수맥이 흐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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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진산(鎭山) 장산은 태백산 끝에서 정기를 이어받은 달음산(기장군 일광면)에서 장산-금련산-황령산-봉래산(영도)으로 이루어진 금련산맥에서 가장 높으며 지명 유래는 거칠다라는 의미와 거친 복숭아(돌복숭아)가 생산되는 나무가 많은 산이라는 의미가 있다.

또한 장산은 부산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중생대 백악기말 대략 62백만~74백만년 에 화산폭발로    만들어진 산이고 칼데라는 풍화와 침식에 의해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다. 현재 산의 정상에는 일부 평탄한 곳이 있어  반딧불이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칼데라를 둘러싼 암맥은 산성 마그마에 의해 형성 된 화성암으로 구과상유문암, 유문암과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화산암복합체이다. 특히 구과상유문암은 화산활동으로 인해 만들어진 꽃무늬를 가진 암석으로 일명 장산 꽃돌이며 청송에서도 구과상유문암인 꽃돌이 유명하다.

그리고 하천이 흘러내리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이는 화강암 암괴류와 큰 암괴들이 완만한 산사면에 집단을 이루어 보이는 화강암 암괴원도 장산 풍광을 이루는 요소 중 하나이다.

2006년 초 태종대 신선바위 주변에서 공룡발자국 화석 155개 발견되어 연도 측정 결과 7천만년~65백만년 것으로 공룡종류는 오리부리공룡으로 추정하고 있어 부산에도 화산활동과 더불어 경남 고성과 같이 중생대 백악기에 공룡이  살았다.

해운대는 3만년 구석기 시대부터 청사포, 좌동, 중동 일대 사람이 살았고 8천년 신석기 시대에는 동삼동, 영선동, 암남동, 다대동, 금곡동, 강동동, 녹산동 등에 사람이 살았으며 이후 청동기, 삼한시대 거쳐 현재까지 이르렀다.

한반도 지형의 근간은 신생대 제3기 마이오세 이래의 경동성 요곡융기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요곡운동이란 융기, 침강에 의해 지각이 휘어지게 되는 지각운동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태백산맥이 지반융기의 중심축이 되어 태백산맥으로부터 영서 및 경기지방으로 가면서 지면경사가 완만하게 낮아지고 영동지방으로는 급격하게 경사가 큰 지형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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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산을 가지고 있는 광역시가 부산광역시이며 이것은 부산의 큰 복이다. 이들 중 장산은 해발 634m로 세 번째로 높은 산이며 부산시민이 사시사철 찾는 곳이다. 더불어 대천공원이 조성되어 산행은 물론이며 운동, 각종 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해발에 비해 수량이 풍부하여 춘천의 흐르는 물은 가뭄에도 마르는 날이 없어 여름철이면 아이들의 물놀이 터가 된다. 이에 옛 부터 장산 앞 지역은 비옥한 농경지를 이루었고 청사포 앞바다의 풍부한 해산물과 함께 풍요로운 땅이었다.

장산 450m 자락에는 20가구 100여명 주민이 녹차재배 등 농업과 등산객 상대로 하는 식당을 주업으로 살고 있는 장산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19636.25전쟁 상이용사 10여명이 원호청으로부터 정착 대부금을 받아 설립한 장산개척단에서 시작된 마을이다.

당시 산정을 개간하여 무, 배추 등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며 살았으나 생활여건이 열악하여 개척단원들은 마을을 떠났다. 그 후 퇴역 장병 40여 세대 120여명이 부산시로부터 토지를 불하받아 무 재배를 하며 정착하였다. 그리고 미국 복지재단에서 기증한 홀스타인 젖소 덕분으로 낙농업을 통해 장산목장으로 마을이 번창하였으나 1985~ 1987년 우유파동과 해운대 신시가지 조성에 따른 젖소 사육 금지, 자녀교육 등으로 일부가 마을을 떠나 현재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장산을 좀 더 들여다보면 부산국가지질공원, 생태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청산리 대첩의 숨은 영웅 애국지사 강근호의 숨결이 모정원에 남아있다. 또한 민속 및 토속신앙이 전해지고 있는 천제단, 마고당 등 있어 장산을 찾는 이에게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동국여지승람(1418)과 동래부지(1740)에 의하면 부산의 전신인 동래의 옛날은 장산국(萇山國)이었으며 신라가 를 취해 거칠산군(巨漆山郡)을 두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장산을 동래부지도에는 상산(上山)이라는 이름으로 장산이라고도 하고 봉래산이라고도 하였으며 규장각 소장의 동래부지도에는 장산의 위치에다 장산국기라 적혀있고 해동지도에는 상산에다 장산국기라 적혀 있다. 동래부읍지 역시 장산이라고 표기하고 기장의 운봉산에서 뻗어 내렸다고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동래현의하면 옛날에는 장산국(萇山國) 혹은 내산국(萊山國)이라고도 하였다. 신라가 점유하고 나서 거칠산군(巨漆山郡)두었는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고려 현종이 울주(蔚州)속시켰고 현의 동쪽 15리에 상산(上山)이 있으며, 대마도를 바라보기에 가장 가깝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산을 중심해서 장산국, 또는 내산국이라는 부족국가가 형성돼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삼한시대의 부산에는 변한 12국 중 하나인 독로국(凟盧國)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 삼국지 위서 한전에는 독로국이 바다를 사이에 두고 왜와 접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독로국이 현재로서는 동래지역에 있었다는 주장이 우세하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가 동래지역의 거칠산국을 멸망시키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독로국과 거칠산국이  같은 것인지의 여부는 현재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최근 장산 정상 개인이 운영하는 농장에서 우물터를 발견했는데 지역 향토사학계에서는 옛날 장산국 우물터가 아닌지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 그 결과가 주목된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대마도가 보인다. 특히 겨울에는 자주 볼 수 있다.
대마도는 예전 부터 해적들의 본거지로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피해을 주었다.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명당

장산과 해운대 신도시를 풍수지리로 보면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다. 봉황의 오른쪽 날개는 장산-간비오봉이고  왼쪽날개는 구곡봉-부흥봉-와우봉으로 案山인 중동의 梧山공원이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둥지이다. 즉 봉황이 오산공원에서 알을 품고 있는 모습으로 영웅 또는 임금이 태어나거나 대대손손 번창하는 터다.

봉황은 상상의 새로서 상서로움을 상징하는데 五色의 깃털을 지니고 五音을 내며 오동나무에 둥지를 틀고 대나무 열매를 먹고사는 새라 하여 고결한 성품을 가진 인물 또는 임금을 의미 한다. 또는 알을 품고 있는 둥지, 터는 자손이 번창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옛날부터 해당 지역의 마을사람들은 봉황이 떠나지 않도록 오동나무와 대나무를      지키고 보호했다.

풍수에서 기본적으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땅을 명당이라고 한다. 산을 등지면서 병풍을 둘러친 것처럼 아늑하고, 물을 앞에 끼면 사람에게 좋은 것은 물론이고 들판의 곡식도 잘 자라기 때문이다. 이것을 세부적으로 산의 위치별로 기능별 보면 左靑龍, 右白虎, 南朱雀, 北玄武로 마을 뒤에 있는 산이 거북이로 主山이라 하고 좌우 병풍 역할을 하는 것이 용이고 호랑이다. 그리고 마을 앞에 있는 산이 새로 朝山이라 하며 주산과 조산 사이에 안산이 있다.

주산과 조산은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 관계이고 좌우는 이들을 보호하며 주산과 안산은 주인과 나그네 관계이다. 안산은 나지막한 산인데 여기서는 오산공원이 그 기능을 한다. 해운대의 임수는 춘천이고 배산은 장산이나 조산이 없어 다소 부족한 명당이라 무척 아쉽다.

최근 해운대에도 택지개발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데 오산공원 만큼은 개발에 훼손되지 않도록 보호하고 가꾸어야     해운대가 대한민국의 랜드마크로 계속 남아 있을 것 같다.

지엽적으로 살펴보면 달맞이고개는 臥牛山, 누운 소 형국으로 손이 부자가 되는 터이다. 소는 예로부터 모든 생산 활동의 원동력으로 소가 없으면 농사를 짓지 못하는 것으로 알았다. 부여시대에는 하늘의 뜻을 알리는 靈物이라 하여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 발굽으로 점을 쳤으며 하늘에 바치는 제물로도 썼다. 또 소는 신성한 존재로 여겨 쇠코뚜레를 문에 걸어두면 잡귀가 달아난다고 믿었다. 장산정상에서 달맞이고개를 바라다보면 고층 아파트에 의해 마치 소 등에 창이 꽂힌 것처럼 소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장산국의 오능은 사라지고

장산국은 신라와 가야의 경계지역에 위치하였는데, 이 장산국에 5개의 왕릉 이 존재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신라와 가야의 침략을 피하기 위하여 궁궐과 왕릉은 장산 안에 있었으며, 6·25전쟁 당시 미군이 탄약 창고를 설치하기 전 좌동 일대 어느 작은 절(약수암) 옆에 5개의 큰 무덤이 바로 그것이라 전해진다.

기원 후 5~6세기경에 신라(석탈해왕) 세력이 이곳에 진출하면서 장산국이 멸망하자, 장산국 사람들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고 산의 오능은 초라한 무덤으로 변해 점차 잊히게 되었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좌동 토박이 노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어릴 적 그 무덤을 보았는데 탄약 창고 공사를 하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6.25 전쟁의 아픈 흔적은 남아있고

장산 정상은 6.25전쟁이후 민간인 출입이 통제돼왔다. 이유는 정상에 군, 경찰 등 9개 기관의 무선기지국이 설치되어 있고 군이 주둔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이도 해운대구에서 장산구립공원을 추진 중, 정상부지 중 폐쇄된 미군주둔지를 국방부와 협의 후 ‘21. 1월부터 장산 정상을 개방한다고 한다.

장산 8부 능선에는 과거 지뢰매설 지역이 있어 2003년 인근 공군부대에서 지뢰제거를 실시하였으나 유실 또는 제거하지 못한 지뢰가 남아 있어 출입금지 지역으로 남아있다. 장산 산행을 하는 이에게는 큰 지장을 주지 않으나 남북 분단으로 인한 상처가 부산 근교 산에도 있어 이곳을 지나갈 때 마음이 씁쓸하다.

헬기장 주변 철거 된 군 시설물
장산의 봄, 양운폭포
장산의 가을, 계곡 초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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