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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석산(827m)은 경주시 건천읍(乾川里) 방내리(芳內里)와 내남면(內南面) 비지리(飛只里)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경주에서 가장 높고 단석산 일대는 경주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산세가 뛰어나고 경치가 좋아 등산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며 진달래군락지로 유명하여 인근 조래봉(657m)과 더불어 등산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리고 관광명소로 7세기 전반기의 불상 양식과 김유신을 비롯한 화랑들이 수도했다는 내용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 신선사 마애불상군이 있어 고신라 불교미술전공자와 미륵 신앙연구에 관심 있는 분들이 자주 찾는다. 단석산은 신라시대에 화랑들이 심신을 수련하였고 백제군이 지리산을 넘어 함양, 청도로 거쳐 경주로 들어오던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신라에서는 국방의 요충지였다.

 등산일정은 방내리 방내지 인근 천주암 주차장에 차를 주차 후 등산을 시작하여 목적지 단석산 등정 후 입암산 방향으로 하산하여 백석암을 거쳐 백석마을 도착하여 택시를 타서 다시 천주암으로 가는 일정이다. 5시간 30분 소요된다.

상세 등산코스는 방내리 천주암 기둥바위 전망바위 진달래 능선 전망바위, 전망대 안부 단석산 비지고개 입암산 백석암 화천리 백석마을이다.

천주암 입구. 입구 우측에 있는 소로가 단석산 등산로이다.

천주암을 출발하자마자 소위 깔딱 고개를 만나는데 계단을 따라 기둥바위를 지나 진달래 능선까지 두 차례나 맞이했다. 무척 힘든 코스다. 다행히 전망바위 또는 전망대로 불리는 넓은 바위를 만나 휴식과 더불어 바라본 풍광은 가히 절경이라 등산의 맛을 느끼게 한다. 간단한 간식을 먹은 후 출발하니 금방 도착할 것 같은 단석산 정상은 안부를 지나 드디어 정상에 도착하였다. 정상에는 인증 샷과 정상 파티를 즐기는 등산객들이 삼삼오오 보였다.

천주암을 출발하자마자 소위 깔딱 고개를 만나는데 계단을 따라 기둥바위를 지나 진달래 능선까지 두 차례나 맞이했다. 무척 힘든 코스다.
진달래 능선에서 만난 전망바위 또는 전망대로 불리는 넓은 바위에서 휴식과 더불어 바라본 풍광은 가히 절경이라 등산의 맛을 느끼게 한다.
백석마을 갈림길 안내판을 보고 정상이 가까이 있음을 알게된다.
단석산 정상석과 김유신이 칼로 자른 바위가 있다.

 

막걸리로 정상주 한잔과 점심을 해결 한 후 하산하기 위해 화천리 백석마을로 발길을 옮겼다. 입암산과 백석암 구간은 길이 가파르고 등산길인지 동물들이 지나는 길인지 구분이 안 되는 곳이 많았다. 백석암에 도착하니 그곳 보살님이 암자에 있는 동안 등산객을 보지 못했다고 놀라워했다. 봉지커피를 얻어 마신 후 백석마을 향해 출발했다. 다시 한 번 가파른 길이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가파른 길이 끝나는 곳에 누군가가 백석암에 오르는 분을 위해 지팡이를 만들어 공양을 하였다.

입암산과 백석암 구간은 길이 가파르고 등산길인지 동물들이 지나는 길인지 구분이 안 되는 곳이 많았다.
백석암에 도착하니 그곳 보살님이 암자에 있는 동안 등산객을 보지 못했다고 놀라워했다. 봉지커피를 얻어 마신 후 백석마을 향해 출발했다.
부처님오시는날을 준비하는 백석암
백석암에서 바라본 풍광
다시 한 번 가파른 길이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가파른 길이 끝나는 곳에 누군가가 백석암에 오르는 분을 위해 지팡이를 만들어 공양을 하였다.
산수유 열매
산수유 나무
반가운 평지 길 좌우에 산수유나무가 멋들어지게 있어 지나가는 객의 여독을 풀어주는 것 같았다. 산수유 나무꽃이 피면 이 길을 걷고 싶다.
백석마을 가까운 곳에는 산딸기가 즐비하였다.
뽕나무의 오디열매

반가운 평지 길 좌우에 산수유나무가 멋들어지게 있어 지나가는 객의 여독을 풀어주는 것 같았다. 백석마을은 산딸기 재배를 많이 하는 것 같고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마을이었다. 백석(白石)은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이 이곳을 지나가다 냇가에 꽃이 많다고 하여 꽃내라고 불렀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하며, 350년 전 밀양박씨가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뒷산에 흰 돌이 많다고 하여 백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백석마을 풍경

다행히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방내리 천주암을 향했다. 가는 도중 택시기사 분에게 이번 산행코스를 물어보니, 이곳 현지인들도 힘든 코스라 많이 이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무튼 단석산 산행은 소중한 추억이 돼버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단석산이 처음으로 나오는데, 월생산(月生山)이라고도 하며, 경주중심지의 서쪽 23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신라의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신검(神劍)을 얻어 월생산의 석굴 속에 숨어들어가 검술을 수련하려고 칼로 큰 돌들을 베어서 산더미 같이 쌓였는데, 그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아래에 절을 짓고 이름을 단석사(斷石寺)라고 하였다.” 는 일화도 수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진평왕 건복 28년 신미년(611)에 공의 나이 17세에 고구려·백제·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쳐들어온 적을 평정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홀로 중악(中嶽)의 석굴로 들어가 몸을 깨끗이 하고는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때 중악을 월생산 또는 단석산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단석산에 대한 이와 같은 설화는 이후의 경주지리지에 지속적으로 기록된다.

건천리(乾川里)는 마을 옆 건천강변이 배수가 잘되어 물이 고이지 아니하고 항상 건조되어 한발이 심했으므로 건천이라고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방내리(芳內里)는 단석산에 둘러싸인 품이 마치 방안에 있는 것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방내(房內)'라고 불렀다고 하고 단석산 속에서 꽃다운 화랑들이 수련을 하였다고 하여 '방내(芳內)'가 되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화천리(花川里)는 지형이 곶으로 되어 곶내, 고내, 고천이라 하였고 다른 이야기로는 골짜기에 꽃이 만발하여 꽃내라 부르다가 뒤에 화천(花川)으로 고쳐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내남면(內南面)은 옛날부터 경주부의 남쪽 안에 있다 하여 내남南面)이라 했고 비지리(飛只里)는 마을 앞에 학산이 있는데 이 산이 학이 날아가는 형상이라 해서 날비()자와 다만지()자를 따서 비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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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筬山)이며 산성산(山筬山) 정상부의 모습

기장군 기장읍 서부리에 있는 성산(筬山, 368m)은 정상부에 기장산성(機張山城)이 있어 산성산(山筬山)으로 많이 알려져 있고 안내도, 이정표, 정상석에도 산성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성산(筬山)의 이름은 기장의 풍수 형국과 관련 있다. 즉 기장(機張)이 베틀[織機]을 차려[] 놓은 형국이라 하여 붙은 이름으로 풍수상으로 옥녀 직금형(玉女織錦形)[옥녀가 비단을 짜는 모습]으로 성산(筬山)은 베틀 바디[]에 해당하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옥녀는 몸과 마음이 옥처럼 깨끗한 여인이고 절세의 미인인 동시에 풍요와 다산을 나타내는 표상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각지에 옥녀봉이라는 이름의 봉우리들이 적지 않은데 이들은 절세의 미인으로, 마을의 수호신으로, 남녀합궁의 뜻으로 등장한다. 옥녀는 본디 도교에 등장하는 인물로 옥황상제와도 관련이 깊다. 경남 거제의 옥녀봉에 관해 옥항상제의 옥녀가 내조암 약수터에서 내려와 사슴과 더불어 놀다가 목욕하였다는 전설이 전하는 것으로 미루어 옥녀는 선녀와 같은 존재로 보인다.

산성산 정상에서 보이는 달음산

산은 높지 않으나 해운대 장산과 기장 산성산 구간의 등산 코스는 등산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유명하며 소요시간은 약 4시간 30분 ~ 5시간 정도이다. 아늑한 능선과 더불어 반야, 반송, 안평을 바라다 볼 수 있고 철탑 임도를 따라 가는 길은 의외의 키 큰 장대한 참나무와 소나무를 만나는데 정다운 길동무로 손색이 없다.

산성 정상부는 평지로 넓고 대변 바다 풍광을 볼 수 있고 원두막과 벤치가 있어 등산객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북쪽 방향으로는 으로는 안평 저수지 가는 길이고 바로 하산을 하면 대라리 보명사로 내려온다. 대라리 에서 정상까지의 등산길은 경사가 심해서 쉬엄쉬엄 올라가는 것이 좋다. 또는 임도를 활용하는 것도 가파른 경사에 도움이 된다.

산성산 정상에서 바라 본 대변항

옛날 오래전부터 산성산(山筬山) 밑에 참샘(지하에서 솟는 자연수)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목마를 때 이 참샘 물을 마셨다 한다. 그리고 참샘 주변에는 무속인들의 기도처가 있었고 일반인도 용왕제를 올리기도 했다. 아쉽게도 1970년대 저수지공사로 매몰되어 버렸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 야철지(治鐵址)가 있어 철 제련소가 있었다고 한다.

산성산 정상에 설치 된 이정표

산성 정상부에는 기장산성(機張山城)으로 알려진 삼국시대에 축조 된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으로 기장군에서 조사된 성곽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축조된 산성이다. 현재 성벽 대부분이 허물어져 일부가 남아 있다. 이곳 산성은 왜구에 대한 해안 감시를 위하여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등산로에서 남문지(南門址)으로 알려진 곳에 무너진 성벽을 볼 수 있다. 또한 보명사 방향으로 하산하는 등산로도 성벽을 볼 수 있다. 원두막 옆에는 평면 원형의 집수지가 있는데 남해안지역에서는 최대 규모이다. 직경은 약 14m, 깊이 2~3m 정도로 만수(滿水) 시에는 물이 흘러넘치도록 동서 방향으로 고랑이 나 있다. 정수지에서 약 50m 아래 지점 바위틈에는 샘이 있다. 2012년 발굴조사에 따르면 정상부에는 건물지와 남문지가 확인되었다.

정상부 원두막 옆에는 평면 원형의 집수지가 있는데 남해안지역에서는 최대 규모이다 .직경은 약 14m, 깊이 2~3m정도로 만수 ( 滿水 )시에는 물이 흘러넘치도록 동서 방향으로 고랑이 나 있다

성벽은 북쪽이 가장 높고 서쪽과 동쪽으로 갈수록 낮아진다. 성의 규모는 둘레 약 775m, 성벽의 너비는 5m 내외로, 상부에 증축(增築)된 것으로 보이는 2m 너비의 성벽이 축조되어 있다. 성벽은 안쪽과 바깥쪽 모두를 석축으로 쌓은 협축식(夾築式)으로, 잔존 성벽의 높이는 외벽이 1~3m 정도이고 내벽은 양호한 곳이 약 2.5m 정도로 그 내부는 돌로 채워져 있다. 성벽은 거의 수직에 가까우며 증축(增築)된 성벽은 대체로 20×30㎝에서 40×65㎝의 화강암을 잔돌 끼워 쌓기로 축조하였다. 그러나 하부의 초축(初築) 성벽은 55×23 크기의 석재로 틈이 없이 쌓았으나 대부분 허물어진 상태이다.

 부속 시설로 성문은 개방 형식으로, 좌우 성벽을 안쪽으로 중첩되게 쌓아 외부에서 쉽게 안쪽을 볼 수 없게 하였는데 북서쪽과 동남쪽 계곡에서 각각 한 개씩, 남서쪽에서 한 개, 모두 3곳이 확인되었다. ()는 동벽과 북벽이 이어지는 성벽의 바깥에 증축된 것으로 동벽과 북벽이 만나는 굴곡 지점에 설치되었다. 남쪽 성벽과 동벽과 북벽이 만나는 외곽에 건호(乾濠)[물이 채워지지 않은 마른 해자]가 설치되었는데, 남쪽의 경우 성벽에서 5m 정도 거리를 두고 너비 10m의 완만한 U 자형으로 되어 있고, 북벽이 만나는 지점도 비슷한 규모이다.

산성산 정상에서 하산하는 길은 보명사 방향과 서부리 용소웰빙공원 방향이 있다. 보명사와 용소웰빙공원과의 도보 소요 시간은 20분 정도다. 하산함에 있어 여유가 있으면 용소월비공원으로 내려와서 공원을 살펴보는 것도 좋다.

산성산 안내에 따른 두 갈래길로 소로와 임도
용소웰빙공원 산책로에서 산성산 출발길
보명사 앞에서 산성산으로 가는 초입길
용소웰빙공원 부산포항고속도로 고가대교 아래에서 출발하는 곳
산성산 안내도
공원 내 산책로
공원 내 용소골저수지
용소골저수지 둑과 전망대
출렁다리에서 본 용소골저수지
상부의 고가도로는 부산포항고속도로
용소웰빙공원입구에서 바라 본 산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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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앞들에서 본 신리해수욕장
봉화앞들에서 본 봉화산

봉화산은 해발 117m로 서생면 나사리에 위치한 나지막한 산이다나사 해수욕장과 간절곶을 품고 있는 봉화산은 산악 자전거와 트레킹 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용곡산 하늘길이라고 부르는 이 코스는 용곡산, 용골산, 울산전파관리소 중심으로 출발점은 동서남북으로 다양하다. 주로 발리에서 출발하여 서생포 왜성, 진하해수욕장 또는 송정마을로 도착하는 코스이나 위양리 위곡마을 위곡2, 나사리 봉화산 해맞이로 , 화정리 술마마을 술마길, 용리 덕골재길, 등 원하는 루트를 선택할 수 있다.

용곡산하늘길 종합안내도

봉화산은 국도31선을 따라 간절곶 방향으로 서생면사무소를 지나 신리해수욕장 뒤편 안내표지판과 함께 카페 HI FLORA를 찾으면 입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봉화산 정상에는 조선전기에 축조 된 나사봉수대(羅士烽燧臺) 또는 서생 이길 봉수대(西生爾吉烽燧臺)라고 불리는 연변(沿邊) 봉수대가 있다. 이 봉수대는 제2로 봉수로에 속하는 간봉(間烽) 중의 하나로 간비오 봉수대(干飛烏烽燧臺) 시작으로 기장군 장안읍 아이 봉수대(阿爾烽燧臺), 북쪽으로는 온산읍 강양리 하산봉수대(下山烽燧臺)로 차례로 연결된다.

봉화산은 국도31선을 따라 간절곶 방향으로 서생면사무소를 지나 신리해수욕장 뒤편 안내표지판과 함께 카페 HI FLORA를 찾으면 입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봉화산 초입 길은 시멘트길이나 200m정도 지나면 비포장길을 만난다.
봉화산 정상에는 조선전기에 축조 된 나사봉수대(羅士烽燧臺) 또는 서생 이길 봉수대(西生爾吉烽燧臺)라고 불리는 연변(沿邊) 봉수대가 있다.

이곳의 봉수대는 불을 지피던 연대(煙臺)의 평면형태는 말각방형에 가까우며 하부둘레 30m, 높이는 250cm내외이다. 연대의 동쪽은 많이 허물어진 상태이나 남쪽이 비교적 양호하게 잘 남아있다. 연대 상부 중앙에는 원형의 연소실이 잘 남아 있는데 직경 220 ~ 230cm, 높이 60~70cm, 상부 폭 80cm 이다. 또한 남쪽과 북쪽에 걸쳐 상부 폭 90cm의 단면 U 자형 출입시설이 있으며, 연대 주위에는 남쪽을 제외한 3면에 방어용 ()시설이 있는데 폭 3.5m이다.

 

문헌에 나타난 것은 1425년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부터이며, 이후 각종 지지서(地誌書)에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 축조되었고, 1895(고종 32) 전국 봉수 제도가 철폐되면서 폐지되었다. 경상도지리지에 울산군 소속의 이길 봉화(尒吉烽火)는 북쪽의 하산 봉화(下山烽火)39340보의 거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봉수(烽燧)는 봉화(烽火) 또는 낭연(狼煙)이라고도 하는데, 조망이 유리한 높은 산에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는 군사통신제도이다. 역마(驛馬)나 인편(人便)보다 시간이 단축되어 지방의 변고나 국경지방의 병란 등을 중앙과 진보(鎭堡)에 신속히 전달하여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는 군사통신 네트워크로, 국가의 안보와 국민의 안위를 지키는 목적으로 설치, 운영되었다.

우리나라의 봉수제도는 삼국시대 초기부터 사용되었다. 三國遺事駕洛國記에 의하면, 가락국의 김수로왕이 허황후를 맞이하기 위해 봉화를 사용했다는 기록에서 봉수의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봉수제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들이 나타난다. 高麗圖經에는 인종 원년(1123) 송나라 사신들의 도착 사실을 흑산도에서 왕성까지 봉화를 순차적으로 밝혀 중앙에 보고한 기록이 있으며, 高麗史에도 봉수 관련 기록들이 확인된다. 의종 3(1149) 봉수의 거화수를 규정하고 봉수군에게 생활대책을 마련하고 감독책임자를 배치한 기록, 우왕 3(1377) 강화에서 봉화를 올려 왜의 침입을 알린 기록, 우왕 14(1388) 왜의 침입에 따라 밤마다 봉화가 여러 번 올랐다는 기록 등이 이에 해당한다.

조선시대에는 종래에 계승되어 온 고려의 봉수제를 근간으로 세종 대에 5거제를 비롯한 조직과 기능을 전국적으로 확립하였다. 세종 원년(1419) 봉화의 수를 5거제로 구분하였으며, 세종 5(1423)에 중앙의 경봉수로 최종 집결하는 5거제의 노선이 확립되었다. 또한 세종 28(1446)부터 29(1447)까지의 대대적인 개혁을 통해 봉수제 전반에 걸쳐 체제를 정비하여 봉수제를 확립하였다. 이는 經國大典의 봉수조에 실린 규정의 원형을 이루었다.

이길봉수대에서 본 나사리 바다

 

그러나 봉수는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안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전쟁이 발생하였을 때에는 정작 제구실을 하지 못하거나 잘못 전달되는 등의 폐해가 많았다. 이로 인해 선조 30(1597), 서발(서울-의주), 북발(서울-경원), 남발(서울-동래)3대로를 근간으로 한 파발제도를 실시하여 이를 보완하였다. 이후 봉수제는 근대적인 통신방식이 도입됨에 따라 고종 31(1894)을 끝으로 폐지되었다.

봉수제가 확립된 조선시대는 전국의 봉수를 두만강, 압록강, 경상도, 전라도의 국경지역을 기점으로 5로의 직봉을 설치하여 경봉수인 중앙의 목멱산에 집결되도록 하였다. 여기서 제1·3·4로는 여진족 등 북방민족의 침입을, 2·5로는 왜의 침입에 대한 해안 방어를 목적으로 구축되었다.

봉수는 설치 목적과 성격에 따라 경봉수(京烽燧내지봉수(內地烽燧연변봉수(沿邊烽燧) 등으로 구분된다. 경봉수는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봉수로서 서울의 목멱산봉수가 이에 해당한다. 연변봉수는 해륙변경의 제1선에 설치하여 위치상 적의 접근을 알리는 최초의 봉수대인데, 적의 공격 목표가 되기 쉬운 시설물이었기 때문에 유사시에 대처할 수 있는 화기와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내지봉수는 육지의 내륙에 설치되어 연변봉수와 경봉수를 연결하는 중간봉수의 역할을 하였다. 그 밖에 군사적 요충지에 자체적으로 설치하여 한시적으로 운영한 권설봉수(權設烽燧)가 있다.

봉수대는 크게 중심시설과 보조시설로 대별된다. 중심시설은 봉수의 주기능인 대응봉수 간의 후망을 통한 신호전달의 시설로서 연조, 연대, 방호벽 등이 있다. 보조시설은 봉수대 군영을 위해 축조된 생활 관련 시설로서 주거지, 창고 등이 있다.

봉화산 초입에 위치한 카페 HI FLORA의 랜드마크인 호접란
호접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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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대산 정상에서 본 죽성리 바닷가 전경

봉대산(228m)은 기장읍 죽성리 산 50번지에 있는 산으로 주변 청강리, 신천리, 대변리와 인접하고 있고 이곳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북쪽으로 흐르면서 덕발 저수지, 죽곡 저수지, 신천 저수지를 이루며 죽성천에 유입한다. 산은 크게 높지 않아 정상까지 1시간 이내에 도달 할 수 있으며 주로 청강리 우신네오빌 아파트와 신천리 선비촌 식당 방향에서 출발한다. 높이에 비해 정상에서의 풍광은 매우 뛰어나다. 정상부에는 연변(해안) 봉수대 중 에서 규모가 가장 크며, 초기 연변봉수의 원형을 추정할 수 있는 남산 봉수대(烽燧臺)가 있다. 또한 이곳은 고산 윤선도와 인연이 있다.

신천리 선비촌 식당 방향에서 출발하여 맞이한 초입 오솔길

고산 윤선도는 1616(광해군 8) 12월 전횡을 일삼던 예조판서 이이첨을 벌할 것과 유희분, 박승종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화가 되어 함경도 경원으로 귀양을 갔다. 그런데 국경지대의 귀양지는 중국인과 내통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1618(광해군 8)에 죄인들을 남쪽으로 옮겼는데 이때 윤선도도 기장으로 이배(移配)되었다.

기장은 한양에서 1,000리나 떨어진 변방에 위치하여 많은 선비들이 이곳 기장으로 유배생활을 했으며 조선시대 14번째 순위에 드는 유배지였다고산 윤선도는 이곳에서 7년간의 유배생활을 하면서 봉대산에서 자주 약초를 캐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여 마을사람들에게는 의원님이라 불렀다고 한다.

갈림길에서의 안내 표지판

한 번은 어린 하인이 산에 땔나무를 구하기 위해 갔다가 신선같이 보이는 한 노인이 암석 이에 앉아서 시 한수를 써 주며, 돌아가서 네 어른(윤선도)에게 드리라고 하였고 이 어린 하인은 이를 받았는데 잠깐사이에 그 노인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봉래산 한 골짜기 남쪽 땅에 떨어지니 그 절경 천하에 드문 곳임을 알게 되었네. 산은 비단 병풍을 두른 듯 북쪽으로 비스듬히 따랐고, 개울물은 옥대를 두른 듯 동쪽을 돌아 흐르네. 나무 틈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빛은 언덕을 비추고, 안개 속에 내리는 저녁 비는 들녘에 자욱하네. 성긴 숲을 마주 앉아 한 마디 말과 솔솔 부는 바람에 푸른 담쟁이 넝쿨이 흔들리네.

정상부를 향한 마지막 오솔길 구간

고려 및 조선시대의 연변(해안) 봉수, 남산(南山) 봉수대(烽燧臺)

산불감시초소 너머 보이는 동해 바다전경
멀리 보이는 기장 아난티코브와 힐튼호텔

남산 봉수대는 봉대산의 정상 능선부 동쪽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연대(煙臺)는 원형을 상실한 채 흔적만 남아 있다. 봉대산의 정상에 있는 까닭에 연대 자리를 평평하게 하여 지적 측량의 원점으로 삼고 있다. 연대 아래에는 헬기장이 있고, 연대와 헬기장 사이에는 산불 감시 초소가 설치되어 있다. 19951215일 부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다.

남산봉수대의 건립 시기는 고려 초기인 고려 성종 4(985)으로 추정되며, 특히 13세기 이후 왜구들이 자주 해안에 출몰하면서 연변 봉수의 기능이 중요해진 것으로 여겨졌다. 조선 시대에도 이미 1461(세조 7) 이전에 기장 남산봉수대가 존재하였으며, 이는 고려 시대에 있었던 봉수대가 계승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고종 31(1894) 갑오경장(甲午更張) 때에 폐지되었다.

형태로써 남나산봉수대는 담장이나 호가 확인되지 않고, 연대만 갖춘 표준 형식의 연안 봉수이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암반 위에 연대를 돌로 쌓았는데, 지름 2.4m, 둘레 9m이다. 그 중앙에 높이 1.5m, 너비 1.5m, 지름 30~40의 화로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연대 ( 煙臺 ) 는 원형을 상실한 채 흔적만 남아 있다 .  봉대산의 정상에 있는 까닭에 연대 자리를 평평하게 하여 지적 측량의 원점으로 삼고 있다
연대 아래에는 헬기장이 있고 ,  연대와 헬기장 사이에는 산불 감시 초소가 설치되어 있다 .
남산 봉수대 주변 모습

 봉수에는 경봉수(京烽燧), 내지봉수(內地烽燧), 연변봉수(沿邊烽燧)가 있는데, 기장 남산봉수대는 전형적인 연변 봉수이고 동래에서 영남 내륙·호서 내륙· 경기도를 거쳐 광주 천천령으로 연결되는 제2로 봉수로에 속하는 간봉(間烽) 중의 하나이다. 경상도에는 90여 개의 간봉(間烽)이 있는데, 남산 봉수대는 간선 봉화로 제8봉에 해당하며, 남쪽으로는 간비오산 봉수대, 북쪽으로는 기장군 장안읍 아이 봉수대, 울주군 서생면 이길 봉수대, 온산읍 하산봉수대로 차례로 연결된다. 남산봉수대는 연변 봉수 중에서 고려 시대부터 존재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연변 봉수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초기 연변봉수의 원형을 갖추고 있다.

흔히 봉수는 적이 나타나면 연기나 불을 피워 위급 상황을 알리는데, 간봉의 경우는 연기나 불을 피우는 연소실이 하나밖에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형태의 봉수를 특별히 봉대 혹은 연대라고 하며, 그 때문에 주로 연안 봉수가 위치한 산은 봉대산 혹은 연대산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간봉은 평소에는 연해에 아무 일도 없다는 뜻으로 저녁에 해가 지고 나면 불을 피워 차례대로 봉화를 올려 한양의 남산봉수대에 도달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수평선에 소속을 알 수 없는 배가 나타나면 가까운 수군진에 직접 달려가 알리며, 수군진의 초탐선이 나가서 수상한 배를 조사한다. 이처럼 5개의 연대를 갖춘 직봉(直烽)1개의 연대만 갖춘 간봉은 서로 그 역할이 달랐다.

고산 윤선도에게 시를 전한 신선의 인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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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서 본 송정해수욕장

송정 옛길은 장산 자락의 신곡산을 가로지르는 해운대와 송정을 잇는 1km 고갯길이다. 신곡산은 해발 230m로 장산자락의 야트막한 산으로 새롭게 정비한 옛길 초입에 진입하면 송정으로 가는 방향과 청사포로 가는 방향으로 나누어진다. 송정으로 가는 길은 능선을 넘으면 경사가 가파르고 흙길과 포장길이 교차로 이어지니 다소 아쉽고 청사포 가는 길은 흙길이고 울창한 나무와 더불어 산책하기가 매우 좋다.

송정터널과 부산환경공단 해운대 사업소 사이에 있는 송정옛길 입구

송정터널과 부산환경공단 해운대 사업소 사이에 있는 송정옛길 입구에는 메타스퀘어가 좌우로 장대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가지고 있어 가족단위, 연인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다. 특히 가을에는 풍경이 뛰어나서 웨딩촬영 등 사진애호가들이 좋아하는 곳이다. 최근 부산환경공단에서 공사 중 발생하는 먼지를 차단하기 한쪽 방향을 파란색 차단막이 설치되어 있어 아름다움이 감소되어 안타깝다.

신곡산은 오랫동안 군사지역으로 민간인 출입이 통제 되었던 이유로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고 등산로 내지 산책로 또한 잘 정비되어 있어 이용하기가 아주 좋다. 군데군데 옛 흔적도 느끼면서 삼림욕과 함께 호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폐탄약사를 보수하여 새롭게 단장된 쉼터

부산은 전쟁이 발생하면 마지막 후방지역이라서 여타 지역처럼 군사보호시설이 많다. 신곡산 또한 한국전쟁 이후 1952년에 총탄, 포탄, 로켓탄 등 탄약을 보관하는 육군군수사령부 산하 병기탄약사가 신곡산 일대에 지어졌고 전시와 훈련에 탄약을 보급하였다.

철거되고 흔적으로 남은 철조망

1952616일 탄약을 적재하던 노무자라가 탄약 야적장에 담뱃불을 던진 것이 원인이 되어 탄약고 폭발 사고가 발생하여 주민 5~6명이 폭사하고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당시 폭발 모습은 버섯 모양의 불꽃과 거대한 낙하산과 같은 불꽃, 수천만 개의 붉은 꽃송이가 일어났고 폭발 위력은 대단하여 사고 발생지 3km 떨어진 곳 까지 파편이 날아갔다.

철거 되어 쓸쓸한 모습의 군사시설
철거 된 중대 주둔지 막사 입구

병기탄약사는 해운대 신시가지 개발로 인하여 1998년 대전으로 옮기면서 폐쇄되었다. 초입에 위치한 송정옛길 기억쉼터는 이후 폐탄약사로 2008년 송정 일대 군부대 지역이 민간인에게 개방되었고 2020년 보수작업을 거치면서 지금은 쉼터의 모습으로 갖추었다.

송정 방향의 등산로

 

송정 방향으로 가는 길에 만난 쉼터
송정 방향으로 가는 길에서 본 전경
송정 방향으로 가는 포장 된 길
폐쇄 된 군 헬기장은 등산객의 쉼터로 사용하고 있다.

 

청사포 방향의 신작로
멀리 보이는 신곡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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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산은 철마면 연구리, 이곡리와 일광면 용천리에 위치한 해발 361m의 나지막한 산이다. 특히 이 산 자락 미동마을에는 대나무 숲으로 유명한 「아홉 산 숲」 이 있어 가족단위, 연인들, 유치원 및 초등학생 단체 등 방문하여 숲을 느끼고 생태체험을 하는 곳으로 인기가 많다. 또한 영화 <군도>, <협녀>를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아홉산 숲 입구. 입장료는 어른, 아이(5세부터) 동일하게 5,000원이고 숲 체험은 10,000원으로 다소 비싸다. 매주 월요일은 휴무이다.
남평 문씨 문의순 ( 文義洵 ) 이 ‘ 고사리를 보며 즐긴다 ’ 는 뜻으로 지은 관미헌 ( 觀薇軒 )

 

특히 이곳 아홉 산 숲대나무의 이름은 맹종죽(孟宗竹)으로 일본에서 들어 온 대나무로 높이는 보통 10~20m이며 직경은 20Cm 로 대나무 중 가장 굵다. 그리고 피톤치드 효과가 뛰어나 코로나19 따른 몸과 마음의 피로감을 해소에 도움이 될 것 같다.

또한 맹종죽은 효를 상징하는 대나무로써 눈물로 하늘을 감동시켜 죽순을 돋게 했다는 고사 성어 맹종설순 (孟宗雪筍)의 주인공이다.

중국 춘추삼국시대 효성이 지극한 맹종(孟宗)에게 오랜 동안 병상에 누워있는 어머니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한겨울 대나무 죽순이 먹고 싶다고 하여 눈이 쌓인 대밭으로 갔지만 대나무 순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에 대나무 순을 구하지 못한 맹종은 눈물을 흘렸고 그 때 하늘이 감동하여 눈물이 떨어진 그 곳에 눈이 녹아 대나무 죽순이 돋아났다. 그때 하늘이 내린 이 죽순을 끓여 마신 어머니는 병환이 말끔하게 나으셨다는 맹종설순 (孟宗雪筍)의 내용이다.

아홉 산 숲은 임진왜란 이후 남평 문씨(南平文氏)가 처음 정착한 후, 400년 동안 숲을 조림, 육림을 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었고 2004년 산림청에 ‘22세기를 위해 보존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지정되었다.

숲의 총 면적은 520,000(15만평)으로 맹종죽 편백, 삼나무, 은행, 리기다소나무, 상수리, 밤나무 등 인공림과 참나무, 산벛나무, 층층나무, 수령 100~300년 되는 금강송 등을 포함한 천연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남평 문씨 문의순(文義洵)고사리를 보며 즐긴다는 뜻으로 지은 관미헌(觀薇軒)입구에서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입장료는 어른, 아이(5세부터) 동일하게 5,000원이고 숲 체험은 10,000원으로 다소 비싸다. 매주 월요일은 휴무이다.

미동마을의 미동(薇洞)은 고사리 골을 의미하고 옛 이름은 고사리 밭, 즉 미전(薇田)이라 한다. 옛날 이 마을에서는 부뚜막에서도 고사리가 난다고 할 만큼 고사리가 많이 자생하였다고 한다. 철마에서는 매년 10월경 한우불고기 축제를 하는 만큼 유명하여 한우 불고기집이 많다. 그래서 마을 입구부터 한우 불고기집이 있다. 마을 앞쪽에는 철마천이 흐르며 북쪽에는 곰내재라는 고개가 있고 이를 관통하는 곰내 터널이 있어 정관읍에 쉽게 갈수 있다. 또한 고개 마루에는 절경을 자랑하는 홍연 폭포가 있다.

 

철마의 지명은 면에서 가장 높은 철마산(605m)에서 비롯되었는데 옛날 이곳에 홍수가 발생했는데 이때 동해에 사는 용마라는 용이 나타나 물을 빼주었고 물이 없어진 뒤 용마가 움직이지 못해 그만 철로 굳어버렸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어 지명 유래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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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와 기장군의 경계에 위치한 구곡산(九谷山, 해발 434m)은 해운대 좌동에 위치한 산으로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산으로, 일명 아홉산 이라고도 부른다. 일반적으로 장산을 등산하면 장산 억새밭과 더불어 구곡산이 등산코스에 포함되는 산이다.

산 정상은 나무에 에워싸여서 풍광과 조망을 볼 수가 없다. 특히 이 산을 해운대 지역에서 보면 골이 깊게 진 모습은 볼 수 없고, 장산 양운폭포 위 애국지사 강근호를 모신 모정원에서 바라보면 구곡산 봉우리가 거북의 머리모양으로 보인다.

구곡산 지명에 대한 유래는 기장군 철마면 안평마을에서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옛날 한 장수가 두 손으로 땅을 짚었는데 그 손가락 사이로 9개의 골이 생겨서 구곡산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해운대에는 부산, 울산, 양산을 방호하는 담당부대가 인근 산자락에 주둔하 고 있어 다양한 등산 코스를 추진함에 있어 제한을 받고 있다. 장산 정상을 비롯하여 구곡산 산행 초입 제한 또한 그러하다.

이에 해운대 좌동은 대부분 군사보호구역에 속해 있었으나 1993년 이후 신시가지가 조성되면서 해제되었다. 좌동(左洞)이라는 지명은 춘천천의 좌측마을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고 2003년 신시가지 조성이후 좌14동으로 분동되었다.

장산마을에서 본 구곡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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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근호(姜槿虎) 선생(아명 : 강난선, 이명 : 강화린, 강화인)1898113일 함경남도 정평군 신상면 조양리 277번지에서 부친 강형석(姜亨錫)과 모친 신해운(申海雲)의 차남으로 출생하여 1916년 만주로 망명, 1920년 초 신흥(新興)무관 학교를 졸업하고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사관연성소 구대장과 교관을 역임한 청산리 전투의 주역이다.

청산리전투라 하면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 장군과 개인회고록을 남긴 철기 이범석 연성대장을 제외하면 널리 알려진 전사(戰士)는 거의 없다. 청산리 전역에서 직접 총을 들고 조국독립을 위해 여러 전투에 참전했던 650여 명에 달하는   무장독립군의 활약상은 아직도 묻혀 있다.

여기 애국지사 강근호 선생도 그들 중의 한 명이었다. 강근호 애국지사의 조국 광복 투쟁은 지난 2002년 그의  전기(傳記) 만주벌의 이름 없는 전사들이 출간됨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독립 후 선생의 나이 52세 때인 1949년에 육군사관학교 제84차로 입교하여 육군소위로 임관되어 한국동란에 참전하는 등 군인으로서 임무를 다하고 1956년 육군중령으로 전역하였다.

부산으로 이주한 선생은 영도구 영선동에서 정착하여 살다가, 1960년 향년 63세로 세상을 떠났다생전에 부인 이정희 여사에게 내 자식들이 성장하면 청산리전투에서 산화한 독립군을 위해 작은 돌비석이라도 하나 세워주기 바란다.”는 말씀을 유언처럼 이야기 하였다.

처음에는 그의 유해(遺骸)를 제대로 눕힐 공간조차 없어 영도 봉래산에 가 매장한 것을, 1964년 장산 모정원으로 이장하였다. 그 후 26여 년 동안 아내가 세워준 비목(碑木) 곁에 잠들어 있다가, 지난 1990년 드디어 그에게 대한민국 건국 애국훈장이 추서되었고, 그 해 127일에 유해가 대전국립묘지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다시 이장되었다.

모정원은 강근호 애국지사의 아내 이정희 여사가 1964년 해운대 장산 개척단장으로 있을 때부터 생활 하던 곳으로 자식을 그리는 어머니의 애틋한 심정을 생각나게 하는 동산이란 뜻이며 강근호 애국지사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정희 여사는 20161021일 소천 할 때까지 여기서 만년을 보냈으며 대전국립묘지 현충원에 강근호 애국지사와  함께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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