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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동남산의 오산골과 국사골 사이에는  탑말”  또는 탑촌(塔村)” 이라고 불리는 마을에 형식을 달리하는 삼층석탑이 동·서에 나란히 서 있다. 동 삼층석탑은 모전석탑의 양식을 취하고 있고 서 삼층석탑은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새겨져 있는 전형적인 삼층석탑이다. 탑의 조성 시기는 9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옛날부터 오산골 어귀 일대를 피리(避里) 또는 피촌(避村)으로 불렀는데 일제 강점기 때부터 행정구역 이름이 남산리로 되는 까닭에 이들 탑을 남산리(남산동) 쌍탑으로 부르게 되었다. 또한 절터이름도 남산사터로 알려져 있다.

이곳 동, 서 삼층석탑 동쪽에 연못이 하나 있는데 마을사람들은 양기못이라고 부른다. 옛 기록에는 양피못((讓避堤)이라고 적혀있다. 이에 삼국유사 피은(避隱) 염불사(念佛師)에 의거하여 절터 이름은 양피사지로 추정된다. 그리고  삼국유사사금갑에 나오는 서출지가 이곳 양피못인데 일제 강점기 때 이요당이 있는 연못이 서출지로 바뀌어졌다.

왼쪽이 모전석탑의 양식을 취하고 동 삼층석탑이고 오른쪽은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새겨져 있는 서 삼층석탑

삼국유사 4권 피은(避隱) 8 염불사(念佛師)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남산(南山) 동쪽 산기슭에 피리촌(避里村)이 있고, 그 마을에 절이 있는데 피리사(避里寺)라 했다. 그 절에 이상한 중이 있었는데 성명은 말하지 않았다. 항상 아미타불을 외어 그 소리가 성() 안에까지 들려서 360() 17만호(萬戶)에서 그 소리를 듣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소리는 높고 낮음이 없이 낭랑하기 한결같았다. 이로써 그를 이상히 여겨 공경치 않는 이가 없었고, 모두 그를 염불사(念佛師)라 불렀다. 그가 죽은 뒤에 소상(塑像)을 만들어 민장사(敏藏寺) 안에 모시고 그가 본래 살던 피리사(避里寺)를 염불사(念佛寺)로 이름을 고쳤다. 이 절 옆에 또 절이 있는데 이름을 양피사(讓避寺)라 했으니 마을 이름을 따서 얻은 이름이다.

피리촌(避里村)세상을 피하여 숨어 사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양피(讓避)’와 같은 뜻이다. 또한 삼국유사 제1권 기이(紀異) 사금갑(射琴匣)에 나오는 피촌(避村)’도 모두 같은 마을을 가리킨다.

민장사(敏藏寺)는 삼구유사 제3권 탑상(塔像) 敏藏寺에 등장하는 사찰로 그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745년 이전에 창건된 사찰로 관음신앙과 관련된 곳으로 판단된다. 상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금리(盃金里)의 가난한 여자 보개(寶開)에게 장춘(長春)이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다. 바다의 장삿꾼을 따라다녔는데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가 민장사(敏藏寺 - 이 절은 민장각간(敏藏角干)이 집을 내놓아 절로 삼은 것이다.) 관음보살 앞에 나아가 7일 동안 정성을 다하여 기도드렸더니 장춘이 갑자기 돌아왔다.

그 까닭을 물으니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서 회오리 바람을 만나 배가 부서져 동료들은 모두 죽음을 면하지 못했습니다만, 저는 널판 쪽을 타고 오()나라 해변에 가서 닿았습니다. 오나라 사람들이 저를 데려다가 글에서 농사일을 짓게 했습니다. 고향에서 온 듯한 이상한 스님이 은근이 위로하고 저를 데리고 동행하는데, 앞에 깊은 개천이 있어서 스님은 저를 겨드랑이에 끼고 뛰었습니다. 정신이 희미한 가운데 우리 말소리와 우는 소리가 들리므로 살펴보니 벌써 여기 와 있었습니다. 초저녁 때(佯時) 오나라를 떠났는데 여기에 이른 것은 겨우 술시 초(戌初))였습니다.고 하였다.

곧 천보(天寶) 4년 을유(乙酉 : 745) 48일이었다. 경덕왕(景德王)이 이 소식을 듣고 절에 밭을 주고 또 재물과 폐백을 바쳤다.

삼국유사의 두 기록을 살펴볼 때, 염불사의 창건연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염불 스님의 입적 이후, 그 초상을 민장사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염불사와 민장사는 동 시기에 존재했으며, 천보 4년에 민장사 관음보살의 기적과 관련된 기록으로도 염불사의 창건연대는 745년 이전으로 추정되므로, 최소한 8세기 초 ~ 중엽 경에 염불사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민장사의 경우 민장각간이 자택을 희사하여 사찰로 바뀐 점을 고려한다면 염불사는 8세기 초에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현재 염불사지로 추정되는 곳은 오산골 어귀 일대로 양피사지로부터 남쪽으로 약 600m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은 경주시 남산동 1130번지 일원(면적 : 2,175)에 해당되며 2003년과 20082차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의 21금당의 가람배치가 확인되었다. ·서 삼층석탑은 일찍이 무너졌지만 부재가 양호하게 남아 있어서 발굴조사 후 2007613일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2009116일에 동, 서 석탑 복원작업을 완료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염불에 대하여 알려진 내용은 없으나 삼국유사 5권 피은(避隱) 포천산(布川山) 5비구(五比丘) 경덕왕대(景德王代)를 보면 정토신앙(淨土信仰)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따라서 염불은 관음신앙과 정토신앙이 관련된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동, 서 석탑사이에 있는 석등연화하대석과 기타 석재들

모전석탑의 양식을 취하고 있는 동 삼층석탑

동 삼층석탑은 이형탑(異型塔) 범주로 분류될 수 있는데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아 올린 모전석탑의 양식을 취하고 있는 탑이다. 노반(露盤)까지 남아 있어 그 원형(原型)을 확인할 수 있다.

탑의 토대가 되는 기단부의 바닥돌인 지대석(地臺石)을 넓게 2중으로 깔려있고, 지대석일부는 지하에 묻히고 지상에는 15가량 노출되었다. 그 위에 기단부(基壇部)는 잘 다듬은 돌 여덟 개를 한 단처럼 짜 맞추어 상하 각 네 개 씩 배치하였다. 기단부와 탑신부의 몸돌사이에는 3단의 괴임석을 다듬었다.

탑신부(塔身部)는 몸돌(탑신석)과 지붕돌(옥개석)이 각각 돌 하나로 세 개를 사용하여 3층을 만들었다. 1층 지붕돌은 5단의 옥개받침을 두었고, 낙수면은 7단의 계단형으로 되어있다. 지붕돌의 처마선 모퉁이부분은 앙곡(仰曲)을 표현하지 않고 일직선의 수평을 두었다. 각 모퉁이에는 풍탁(風鐸)을 매어 달기 위한 구멍이 상하로 뚫려 있다. 2층 지붕돌은 5단의 옥개받침, 낙수면은 6, 3층 지붕돌은 4단의옥개받침, 낙수면은 4단을 두어 체감율을 크게 하였다.

상륜부(相輪部)의 노반석 윗면은 2단의 역계단 모양으로 다듬었고, 노반석 중앙에는 찰주를 세우기 위한 구멍이 관통되어 있는데 3층 지붕돌까지 뚫려 있다. 찰주구멍은 노반 중간을 지나면서 점차 병목같이 좁아져 있다. 지붕돌 낙수면에 나타난 계단형 모형은 전탑(塼塔)에서 그 유사성(類似性)을 찾아 볼 수 있는데 경주지역에서 유사한 석탑은 서악동(西岳洞) 3층 석탑이 있다. 단지 서악동 3층 석탑의 경우 1층 탑신에는 문비형(門扉形)으로 새겨 마련하고 문비입구 좌우에 인왕상(仁王像)1()씩 배치한 점만 차이가 있다.

팔부신중(八部神衆)을 새긴 서 삼층석탑

서 삼층석탑은 2층 기단의 면에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새겨져 있고 상륜부(相輪部)는 노반석(露盤石)만 남아 있는 전형적인 삼층석탑이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 신장(神將)이라 하면 수미산 위에 사는 모든 신들을 통틀어 말하며, 불법(佛法)을 옹호하고 불경(佛經)을 수지 독송(受持讀誦)하는 사람들을 외호하는 신으로 종류로는 금강역사(인왕상), 팔부신장(팔부중상), 십이신장(십이지신상) 등이 있다. 우리나라 신장신앙의 기원은 삼국 초기 불교가 전래될 때 함께 시작되었다고 추측되고 현존하는 예를 볼 때는 삼국 통일을 전후한 시기부터 유물에서 나타나고 있다. 팔부신중과 십이지신상이 탑에 조각으로 나타난 것은 8세기 이후다.

팔부신중(八部神衆)은 법을 수호하는 8종의 신으로서 석가모니 10대 제자와 함께 부처의 설법을 호위하는 역할을 하는데 무장을 한 모습이 많고 손에 들고 있는 지물들도 갖가지다. 원래는 고대인도 신들로 악마나 구신에 해당하지만, 석가에게 교화된 뒤 불법을 수호하는 선신으로 재구성되었다종류는 천, , 야차, 아수라, 건달바, 긴나라, 가루라, 마후라가 등 이다.

왼쪽부터 팔부신중(八部神衆) 중 아수라와 건달바
왼쪽부터 팔부신중(八部神衆) 중 천과 가루라

기단부(基壇部)는 지대석과 2층 기단으로 되어있다.  1층 기단은 2단 괴임이 있는 갑석이 2개로 조립되었는데, 지대석과 면석은 한 돌로 조성되어 있다. 모퉁이에 우주(隅柱), 가운데에 탱주 2가 모각되어 있다. 2층 기단은 모퉁이에는 우주(隅柱), 중앙 탱주사이의 면석에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2단 괴임이 있는 갑석과 갑석부연이 탑신석을 받치고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1개로 구성되어 있고 몸돌(탑신석)과 지붕돌(옥개석)이 각각 돌 하나로 세 개를 사용하여 3층을 만들었다. 몸돌의 각 면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고 지붕돌의 옥개받침은 각 층마다 5()으로 되어있다. 낙수면은 경사가 완만하고, 추녀는 수평을 이루다 전각에 이르러 경쾌한 반전을 보이고 있다.

지붕돌 처마면 밑 양쪽 모서리에는 풍탁을 매어달 수 있도록 구멍이 있다상륜부(相輪部)의 노반석은 1로 만들었으며 외형상 동탑의 것과 거의 비슷하다기단부 면석에 팔부신중을 새긴 삼층석탑은 경주지역에서 창림사지 3층 석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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