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경주 동남산 불곡(佛谷, 부처골)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 보물 제198)은 자연바위를 파서 감실을 만든 후 조성한 불상으로 흔히 감실부처 또는 할매부처라고 부른다. 이 감실부처의 조성연대는 7세기(1300~1400년 전)로 감실불(龕室佛)의 원조이자 석굴사원의 시초이고 선덕여왕 재위기간(632 ~ 647)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남천로를 따라 도지동 탑골 마애불상군을 지나면 만나는 이정표

부처골(佛谷)은 남산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고 하는 감실여래좌상으로 인해 계곡명이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는 원래 3곳의 절터가 있었다고 하나 감실여래좌상이 있는 절터를 제외한 나머지 2곳은 흔적이 거의 없다.

부처골 감실부처님 만나러 가는 길

감실 부처는 자연바위를 파서 조성한 불상으로 그 감실 좌, 우와 앞뒤로 큰 바위인 화강암군(花崗巖群)이 계속 연결되어 있다. 주위에 흩어져 있는 기와편과 바위의 가구(架構)흔적으로 불상 앞과 뒤의 2곳에 약간의 공간에 당시 목조전실(木造前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감실부처의 본 절터는 이곳의 약 30m 아래 오른편 길목 어귀에 있다. 지형을 이용해 쌓은 자형 축대로 2()으로 확인되었고 밑 축대의 높이는 1.2m, 위 축대 높이 2m, 길이는 12m이다.

감실부처의 본 절터로 감실부처의 약 30m 아래 오른편 길목 어귀에 있다. 지형을 이용해 쌓은 ㄱ자형 축대로 2단(段)으로 확인되었고 밑 축대의 높이는 1.2m, 위 축대 높이 2m, 길이는 12m이다.

불상이 조성(造成)된 바위는 자연암반 중 제일 두툼한 바위를 이용하여 높이 2.3m, 너비 3.5m, 깊이 0.9m의 굴을 파서 감실(龕室)을 마련하고 내부에 불상을 조성했다. 조각 수법으로는 불상 얼굴은 높은 부조(浮彫)로 하고 신체와 대좌는 낮은 부조로 1.5m 높이로 조성하였다. 앞으로 다소곳이 숙여진 신체는 그 표정이 조용한 주변과 어우러져 명상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주위에 흩어져 있는 기와편과 바위의 가구(架構)흔적으로 불상 앞과 뒤의 2곳에 약간의 공간에 당시 목조전실(木造前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불두에서 머리에 두건을 귀까지 덮고 쓴 것으로 보면 보살이 되고 소발(素髮)의 머리로 귀를 덮어 어깨 위로 흐르는 것으로 보면 여래의 모습이다. 둥근 얼굴에 내려감은 눈, 얌전한 입술에 깊이 판 입가 등으로 부드럽고 우아하고 내면적인 미소이나 한편으로 엄숙함과 깊은 명상에 잠긴 듯한 정적인 분위기도 연출되고 있다.

신라시대 불교가 초기에 전파 될 때 대부분 불상은 천진난만하고 친근감 있는 평민의 모습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보는 이에 따라 해석이 다양하다신라화랑의 미소년 모습, 한국 여인, 자애로운 어머니, 할머니 모습 등으로 보여 지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없으며 각이 진 어깨는 넓게 결가부좌한 무릎과 함께 안정된 구도를 이루고 있다. 법의는 통견(通肩)이며 앞가슴은 사각형으로 표현되었고, 무릎을 덮은 옷 주름은 상현좌(裳懸座)를 이루고 있다. 두 손은 모아서 소매 속에 넣고 배 앞에 대고 있어 수인 형태는 파악되지 않으나 선정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릎은 낮고 수평적이며 오른발이 유난히 크다. 법의와 대좌 및 주위에 붉은 색 흔적이 있어 조성 당시 채색했을 가능성도 있다.

감실불상은 정남(正南)에서 30。서쪽으로 향해 앉아 있어 동짓날 아침 해가 솟아오르면 붉은 햇빛이 부처님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고 있다.

감실부처가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일 때가 동짓날 오전 중에 보는 것이 가장 잘 보이는데 특히 오전 10~ 11시경 햇빛이 부처님 얼굴에 비칠 때의 모습은 자비로운 표정의 동안을 볼 수가 있다.

1986여름 어느 날 용왕(龍王)이 찾아온 길(용왕(龍王)이라는 책을 쓰는 장곡천(長谷川)라는 일본인이 감실불상(龕室佛像)을 찾아 왔다이유는 감실불상이 바라보는 방향이 동짓날 해 뜨는 방향인지 확인하기 위함이였다. 옛날부터 일본 사람들은 설날보다 동짓날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고 한다.

왜냐하면 낮이 자꾸 짧아져가다가 동짓날부터 낮이 조금씩 길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짓날 해 뜨는 방향으로 서 있는 신사(神社)와 절이 많다고 한다. 확인 해 본 결과 감실불상은 정남(正南)에서 30서쪽으로 향해 앉아 있어 동짓날 아침 해가 솟아오르면 붉은 햇빛이 부처님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고 있다. 그는 장항리사지(獐項里寺止) 대좌(臺座)와 골굴암 불상이 동짓날 해 뜨는 방향으로 앉아 있다고 한다. 또한 문무대왕암(文武王陵)도 동짓날 해 뜨는 방향에 문무대왕을 모신 것일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마애여래좌상의 조성에 정치적 배경을 살펴보면 신라 성골왕실에서는 왕즉불 사상을 지배자의 권위를 신성화하는데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특히 덕만공주의 성골 여왕 왕위계승에 대한 염려와 반발을 차단위한 방편으로 진평왕 말년에 마치 하늘이 덕만공주를 장래의 왕으로 인정했음을 나타내는 신기한 표적처럼 제시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당시 신라에서는 석가모니 이전에 출현했다는 소위 과거칠불의 가람 터가 신라 땅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래서 보통의 남성 부처님상과는 다르게 자연스럽게 살아 있는 듯한 한국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있다. 고고한 기품을 갖추고도 인자함과 넉넉함이 보이는 30~40대 초반 여인의 모습인 것이다.

감실 부처는 자연바위를 파서 조성한 불상으로 그 감실 좌, 우와 앞뒤로 큰 바위인 화강암군(花崗巖群)이 계속 연결되어 있다.

감실부처는 삼화령 미륵삼존불, 윤을곡 삼존불과 함께 고신라를 대표하는 화랑형 애기미륵으로 부른다. 또한 동짓날 해 뜨는 방향 위치와 고부조의 조각 , 채색여부, 부처와 보살 여부 등 다양한 수수께끼와 신비로움을 현재 남겨 놓고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