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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도시 울산에는 옛 부터 군사적으로 전략요충지로써 조선시대의 성곽유적인 경상좌도수군절제사영성과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성(慶尙左道兵馬節度使營城)이 있다. 특히 왜와 거리상으로 가까운 지역으로, 고려 말·조선 초 이후 지속된 왜구의 침탈에 대비하여 해안 지방의 철저한 방어선이 필요했다. 이곳 개운포성지 남쪽으로는 외황강 하류를 접하고  서북에서 동남으로 흘러 동해로 들어간다. 이런 입지 조건이 일찍부터 수군이 주둔할 수 있게 했고 조선 수군만호진(水軍萬戶鎭)과 경상좌도 수군 절제사영(慶尙左道水軍節制使營)의 진·영성이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개운포성지 표지석과 우측에 보이는 환경처리시설 굴뚝

  문헌기록을 살펴보면 태종 7년의 최초 기록을 통해 보면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으나 수군과 관련된 기지가 이곳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1425)에 개운포에 만호진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세조(世祖) 5, 1459년에 좌수영이 개운포로 이전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개운포성은 용도와 목적, 규모의 변화를 여러 차례 겪으면서 몇 번의 증·개축과 보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최초 축조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의 영성(營城)으로 사용된 시기는 조선 전기 세종 5(1459)부터 선조 25(1592)까지 이며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자기들은 개운포성의 사용시기인 15세기 초17세기에 제작된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기록상의 성 운용시기와 부합된다.

개운포성지 남쪽 성벽

온산만 처용암 옆을 오가는 뱃길은 천 년 전 신라 헌강왕의 눈길이 머문 곳이고, 조선초기에는 지금으로 치면 해군사령부(개운포영성)의 군함이 정박하던 곳이다. 개운포 8경의 하나인 전함홍기(戰艦紅旗)로 도열한 군함의 붉은 깃발이 아름답고 하여 붙여졌다.

오늘날 개운포성터는 황량하고 쓸쓸하지 못해 마치 폐허처럼 변해 있다. 지난 강 건너편에 온산 국가산업단지가 들어섰고 마을 뒤에는 울산시 환경처리시설이 있어 뿜어대는 악취로 숨쉬기조차 곤란하다. 성안 주민들은 지금 두 세 가구만 남아 있고 외지로 떠났다. 부근의 하개마을과 염전은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된 석유화학단지 개발로 없어졌고, 선수마을을 비롯한 세죽, 성외 등의 마을도 1990년대 중반 이후 다운동으로 집단 이주하면서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되었다.

현재 개운포성을 돌아보면 성안 대밭과 남문 터 좌우 긴 석축만이 옛 성터임을 말해준다. 남문 터를 지나 들어가 북문 터까지 이어지는 S자형의 길은 본래 성안 길이 아니고 고압선 전신주 설치를 위해 한전 측이 넓힌 길이다. 예스런 멋은 없지만 이 길로 북문 터 가까이 언덕배기를 올라가면 성안마을의 옛 정취는 느껴볼 수 있다. 그러나 성벽 주변과 성 내부는 밭농사로 인해 경관과 성체 훼손이 심하다. 하루속히 시에서 매입하여 복원이 아니더라도 단정하게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 밖에서 외성을 따라 돌아보면 전체 윤곽을 짐작할 수 있다.

개운포성지 남쪽 성벽 주변

임진왜란 이후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이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으로 옮겨가고 그 장소에는 효종(1656) 때 전선소(戰船所)가 설치되었다. 당시 학성공원 아래 있던 전선창이 옮겨왔다. 전선창은 군선을 건조하는 시설을 뜻하고 일명 선소(船所)’라고 하였다. 성안 마을 웃각단 아래각단 등이 철거되기 전 선수마을이라고도 불리었다. ‘선수선소에서 전이된 발음이다. 군사 전략거점에서 지원병참시설로 그 기능을 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선창도 1895(고종 32) 수군 해산 때 문 닫게 되었다.

개운포성은 강변에 솟은 야산의 골짜기를 감싸며 구릉부를 따라 쌓은 포곡식(包谷式)으로 둘레는 1,270m 면적은 102,919정도이다. 2003년과 2005년 두 차례의 발굴 조사 결과 북문지, 동문지, 서문지, 4곳의 성벽, 남쪽과 북쪽에 해자가 확인되었다. 성벽은 돌로 쌓았으며 바깥 쪽에 해자[도랑]를 둘렀다. 돌로 쌓은 성벽은 일정한 간격으로 큰 돌덩이를 세워 구조적으로 안정되게 하였는데, 이러한 축조 방법은 울산 경상좌도병영성, 언양읍성 등 울산 지역의 성에서는 흔히 보이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어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남쪽 성벽과 해자

성벽 관련 주요 시설물로는 체성, 문지, 치성, 옹성, 수로 시설, 해자 등이 있고 건물지도 조사되었다. 발굴 조사 결과 성벽의 최대 너비는 4.0~4.7m, 잔존 최대 높이는 2.4m 정도다. 동문지의 경우 1회 중축한 것이 확인되었다. 만호진성이 수영성으로 바뀌면서 중축된 것으로 보인다. 성문지 주변에 기와편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상부에 누각이 있었을 것이다. 성벽 축조는 기초 부분을 판 다음 3~4단의 할석으로 기초를 쌓고 그 위에 기단석을 눕혀서 쌓았다. 기단석 끝에서 20정도 물려서 대석으로 세워쌓기를 하고 2단은 눕혀서 쌓았다. 내벽은 작은 할석으로 다지고 상부에는 흙을 여러 겹 쌓았다.

성벽 주변과 성 내부는 밭농사로 인해 경관과 성체 훼손이 심하다. 하루속히 시에서 매입하여 복원이 아니더라도 단정하게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개운포성의 문은 동···4개의 문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발굴조사가 진행되면서 출입을 위한 문은 동문과 북문으로 확인되었다. 동문은 성지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한다. 구조는 외측에 반원형의 옹성이 협축 방식으로 축조되어 있고 문지의 내측에는 확돌 2개가 입구부를 사이에 두고 대칭되게 확인되었다. 옹성은 남쪽 체성의 기단석에 잇대어 쌓은 형태이고 축조방법은 체성과 동일하다. 옹성의 면석은 체성의 면석에 비해 큰 편이다.

동문지 방향의 성벽
동문지 방향의 성벽 흔적

해자는 남쪽, 북쪽을 비롯하여 성벽 전체를 둘러싸고 설치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쪽(남문지)해자는 체성과의 이격 거리가 약 500이고 해자의 폭은 450, 최대깊이는 110내외이다. 북쪽(북문지) 해자는 자연 경사면을 이용하여 일정 깊이의 토사를 파내어 외성을 축조함으로 해자의 깊이를 극대화시키는 방식으로 축조되어있다. 체성에서 약 1015m 이상 떨어져 있으며 폭은 10m 정도이고 깊이는 600이상이다.

동문지에서 바라본 외황강과 공단모습

개운포성지(開雲浦城址)1997109일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었고 개운포(開雲浦)’라는 이름은 삼국유사(三國遺事)기이편의 처용랑 망해사조와 삼국사기(三國史記)헌강왕 5[879] 3월 기록에 보인다. 삼국유사에는 왕이 울주 고을 포구에 와서 쉬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서 길을 잃었는데, 일관이 말하기를 동해용의 조화이니 좋은 일을 하여 풀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왕이 절을 세워 주자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흩어져서 개운포라고 이름 지었다고 적고 있다.

동문지와 북문지 사이의 치성
북문지
북문지와 서남지 사이의 치성
추정 서문지에서 바라본 영서곶(營西串)
추정 서문지 가는 길
추정 서문지와 남체성 사이

개운포성지(開雲浦城址) 남쪽 강가에서 서쪽 끝으로 가면 영서곶(營西串) 또는 영시끝이 있다. 개운포영성(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성) 서쪽 곶으로 동해에서 외황강으로 침입하는 적선을 감시하거나 개운포영성을 방어하는 곳이다.

영서곶(營西串) 또는 영시끝
영서곶(營西串)에서 본 외황강과 개운포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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