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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를 침입한 전쟁으로 육군 15만 8,700명, 수군 9,000명 총 병력 약 20만 명의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1597년 화의 (강화회의)결렬로 왜장 가토 기요사마(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 선봉으로 한 1만 4,500명 등 총 병력 14만 1.500명이 정월 15일 2차 침입이 정유년에 있었으므로 ‘정유재란’이라 한다.

1차 침입 때 제1번대(番隊) 4월 13일 부산 침입, 제2번대 4월 16일 등 제9번대 까지 9회로 나누어 침략을 개시하였고 이 때 제2번대 주장이 가토 기요마사로 병력 2만 2,800명이였다. 가토가 인솔한 제2번대는 나고야를 떠나 대마도에 도착한 후 제1번대 고니시의 부산 상륙에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고 19일 부산에 상륙하여 그 길로 경상 좌도를 택하여 장기·기장을 거쳐서 좌병영 울산을 함락하고, 경주·영천·신령·의흥·군위·비안을 거쳐 문경, 충주로 들어갔고 5월 3일에 한양에 당도하였다.

이후 함경도로 침입한 가토의 군은 선조 26년(1593년) 정월 조·명 연합군의 반격으로 평양에서 패퇴, 고니시 등이 한양으로 퇴각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 서둘러 한양으로 퇴진하였다. 거듭된 패퇴로 5월 중순경에 서생포 왜성에 주둔하였고 선조 29년(1596년) 5월말에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같은 해 9월 정유재란 때 선봉장이 되어 다시 서생포 왜성에 주둔하였다.

서생포 왜성은 서생면 서생리 711일원으로 가토 기요마사의 왜군이 선조 25년 7월부터 쌓기 시작하여 다음해 선조 26년(1593년)에 완성한 일본식 평산성(平山城)으로 조선 백성의 강제 노동과 희생에 의해 만들어진 왜군 침략의 산물이다. 당시 왜군은 임진왜란 때 동래, 구포, 진해, 가덕도, 거제도, 기장, 서생 등 동남해안에 왜성을 쌓았고 정유재란 때에는 남해, 고성, 순천, 사천, 마산, 울산 등으로 확대하였고 총 31개의 왜성을 쌓았다.

이 중 고니시가 축성한 진해 웅천왜성이 규모가 가장 크고 서생포 왜성은 성곽 형태가 가장 잘 남아 있다. 최초의 왜성이자 왜성 본부 역할을 하는 부산왜성,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축성한 기장 죽성리 왜성, 정유재란 때 가토가 축성한 울산 왜성(학성공원)과 봉화로 서로 연락했다고 하여 일명 봉화성이라고 한다.

서생포 왜성은 내부 면적 45,960평, 성 외곽부 길이 2.5km, 평면상의 직선거리가 동서 약 870m, 남북 약 370m인 석성이고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성(본성) 정상부(해발 133m)에는 우물터와 지휘부이자 가토 기요마사가 기거했던 천수각(天守閣)터와 천수대(天守臺)가 남아 있다.

천수각은 높이 5m, 넓이 18×17m 천수대 위에 세워지는 건물로 3층 규모로 추정하고 있다. 사명대사가 서생포 왜성에서 가토 기요마사와 회담한 내용을 기록한 “송운대사분충서난록(松雲大師奮忠序難錄)을 보면 천수각 규모를 알 수 있다.

『고층 누각에 큰 가옥도 지었다. 청정(淸正, 가토 기요마사)의 거처에 이르니 방 안 전체가 화려한 자리에 금칠한 병풍으로 둘러쳐졌다. - 중략 - 』

 

 

성벽 축조 방식은 외성인 경우는 돌로 외벽을 쌓고 내벽은 흙으로 채운 내탁식(內托式)이고 내성인 경우는 내·외벽 모두 돌로 쌓는 협축식 (夾築式)이다. 특히 내성은 계단식으로 석축을 쌓았는데, 산의 정상부에서 아래로 성벽을 세 겹(三之丸)으로 두르고 있고 각 구역이 독립적인 전투를 치를 수 있도록 되어있다. 또한 내성 출입구는 외부에서 직진 출입이 힘들도록 구성되어 있다. 성벽 높이는 6m이며 기울기가 지면에서 60도 내외다. 일본성의 특징 중 하나가 성벽의 기울기인데 이는 지진이 잦은 일본의 자연환경을 반영한 것이다.

 

외성(外城) 남문으로 실제 성벽 높이를 추정할수 있다.
외성(外城) 동문으로 이를 통과하여 회야강 선착장을 이용했음을 추정되며 선창장은 군수 물자 보급, 문서발송 등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외성(外城) 내 왜군의 막사 건물터로 주춧돌 없이 나무기둥을 땅속 깊이 박아 건물을 지었다.

 

내성(內城) 삼지환(三之丸)의 출입구
내성(內城) 이지환(二之丸)의 출입구
이지환(二之丸)에서 바라본 본성 일지환(一之丸)
내성(內城, 본성) 일지환(一之丸)의 출입구
일지환(一之丸)에서 바라 본 회야강과 동해바다

 

 

 

내성(內城, 본성)  정상부(해발 133m)의 중심 공간인 소곽(小郭) 출입구
소곽(小郭) 내 중심지역으로 우물터와 천수대( 天守臺 )와 천수각(天守閣)터가 남아있다.
왜성의 지휘부 건물이며 가토 기요마사가 기거했던 천수각(天守閣)터와 천수대 ( 天守臺 )
천수대 ( 天守臺 ), 천수각(天守閣)터 올라가는 계단
소곽(小郭) 내 뒷편 출입구로 비상 또는 함락시 탈출통로로 추정됨
떨어진 벚꽃은 마치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끌려온 조선 백성의 흘린 피눈물이 승화된것 같다.
성벽에 새겨진 어느 조선백성 포로의 이름. 참으로 슬프다.

 

임진왜란 때 축성 된 왜성은 포로로 잡힌 조선백성의 강제 노동과 희생에 의한 결과물이다.

 

임진왜란 이후 생긴 경상도 민요 후렴구에 “쾌지나 칭칭나네” 가 “쾌재라, 청정(淸正)이 도망간다.“에서 유래했을 정도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조선 백성에게는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였다.
서생포 왜성에는 가끔 일본관광객이 방문한다. 왜성을 보면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침략의 역사를 반성을 할까? 아니면 그들 선조들의 성곽기술 훌륭함을 감상과 한강이남 식민지 건설 못함을 아쉬워할까?

 

선조 32년(1599년) 명나라 장수 마귀장군이 승전기념으로 축하연을 위해 창건한 초가 4칸을 연회 마친 후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53명의 충신들을 배향하기 위해 기와 4칸 창표사(蒼表祠)를 중창하여 세웠다. 이후 후손들과 유림들이 매년 음력 1월 15일에 재를 올려왔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파괴되었으나 최근 울주군에서 2016년 11월 창표사를 중건하였다.

 

일제 강점기 때 파괴 된 것을 최근 울주군에서  중건한 창표사( 蒼表祠 )

 

서생포 왜성은 사명대사가 임재왜란 당시 4차례 걸쳐 외교활동을 했던 곳이다. 임진왜란 발발 1년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8도 중 4도 즉 한강 이남을 차지할 계획으로 동남해안에 총 18개의 왜성을 쌓았다. 그 일환으로 일본은 조선을 배제하고 명과 함께 강화회의를 진행하였다. 이때 일본 측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주도하였는데 경쟁 관계였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갑자기 뛰어들었다.

 서생포 왜성에 있던 가토는 강화 관련 공을 고니시가 차지 할 것을 우려했다. 이에 선조 27년(1594년) 2월에 포로로 잡혀있던 정연복에게 문서를 주어 경상좌병사 고언백에게 보내었다. 그 내용은 강화를 하자는 것이었는데 고언백은 즉시 도원수 권율과 의논하고 뒤에 명나라 장군 도독 유정에게 보이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로써 강화회의 당사자는 모두 바뀌었다. 선조 27년(1594년) 4월 12일 도원수 권율은 명나라 장수 유정의 요청에 따라 승병장(僧兵將)이었던 사명대사와 함께 화평(강화)을 청하였다.

첫날 회담에서 가토는 사명대사에게 첫째 조선의 8도 중 4도를 할양하고, 둘째 조선의 왕자 한 사람을 일본에 보내어 영주케 할 것, 셋째 조선의 대신 및 대관을 일본에 인질로 보낼 것, 넷째 종전과 같이 교린을 할 것, 다섯째 명나라 황녀를 일본에 후비로 삼을 것 등을 요구하여 결렬되었다. 2차 교섭은 7월 6일에 있었는데, 이때 종전의 강화조건에 다시 명나라 인질 1명 등 2개 조건을 추가 주장하여 또 다시 결렬되고 말았다. 그 후 두 차례에 걸쳐 강화회의가 있었으나 모두 결렬되고 말았다. 이는 일본의 의도를 파악한 사명대사가 강화를 결렬코자 했던 것이다.

1594년 7월 12일에서 16일 사이 가토 기요마사와 담판 지을 때 사명대사의 유명한 보물일화가 있다. 담판의 주요한 부분이 결렬되자 가토 기요마사가 사명당에게 “귀국에도 보물이 있소?”라고 물었다. 그러자 “우리나라에서는 귀하의 머리를 금 천근과 읍 만호를 주고 산다고 하오. 이러한 막중한 것이 어찌 보배가 되지 않겠소” 라고 호방하게 맞받아쳤다고 한다. 적진에 들어가서 적장 앞에서 '네 목을 따서 바치면 여럿 팔자 고친다'는 식의 말은 웬만한 강심장 아니면 힘들다. 사명대사의 대범함이 알 수 있다. 사명대사는 이밖에도 1604년 8월 일본으로 건너가 8개월 동안 머무르며 설법과 외교활동을 통해 억류돼 있던 조선이 3,000명을 구출해 귀국시켰다. 

사명대사(1544 ~1610)는 스승인 서산대사와 더불어 임진왜란 때 승병장(僧兵將)이였다. 사명대사의 법명은 유정(惟政)이고 사명당(四溟堂)은 스님을 높여 부르는 호이다. 이외에도 송운(松雲), 종봉(鍾峯), 등이 사용되고 있다. 중종 39년(1544) 지금의 밀양시 무안면 고사리에서 태어났으며 13세에 김천 황악산 직지사로 출가했다. 18세에 승려 과거시험 선과(禪科)에 응시, 합격하여 글 잘하는 승려로 통했다. 직지사의 주지를 지내고 봉은사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묘향산 보현사로 들어가 서산대사 휴정에게 3년간 수도하였다.

이후 팔공산, 청량산, 태백산을 두루 다니며 선 수행을 하다가 43세 되던 해 오대산에 머물렀다. 이때 정여립 역모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고 강릉의 옥에 갇힌 일이 있었다. 그러자 강릉의 유생들이 앞장서 그의 무고함을 항소하였으며, 이에 힘입어 석방되었다. 유생들이 승려를 위해 구출운동을 벌인 것은 유례없는 일이다. 이후 금강산 유점사에 들어가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염주대신 칼을 들었다. 선조 25년(1592), 49세 나이에 임란초기 승병장으로 평양 탈환참여 등 활약이 컸지만, 점차 전쟁보다 평화회담에 투입되었다. 임진왜란 종료 후 합천 해안사 홍제암에서 67세에 입적했고 나라에서는 그에게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는 시호를 내려 사명대사의 생애와 입적을 기렸다.

서생포 왜성에서 기억해야 할 왜장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친척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선봉장으로 많은 조선 백성을 학살, 온갖 만행을 저질렀고 당시 백성들에게 악명이 높았다. 임진왜란 이후 생긴 경상도 민요 후렴구에 “쾌지나 칭칭나네” 가 “쾌재라, 청정(淸正)이 도망간다.“에서 유래했을 정도이다. 가토는 조선에서 퇴각하면서 많은 조선 백성을 강제로 끌고 갔다.

현재 구마모토에 울산마찌라는 마을이 남아 있을 정도이니 당시 얼마나 많은 백성이 끌려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때 영주가 가토 기요마사이다. 그리고 조선 백성의 희생에 의해 축성 된 구마모토 성이 일본 3대 명성 중 하나이다. 임진왜란 때 축성 된 왜성은 포로로 잡힌 조선백성의 강제 노동과 희생에 의한 결과물이다. 당시 성곽 축성을 했던 조선 백성의 손재주에 왜장들은 감탄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일본인이 하면 축성 완료를 1년 소요되는 것을 조선 백성은 3 ~ 4개월에 완료시키는 것이다. 임진왜란 후 일본으로 많은 조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서 강제 노동에 동원되고 노예로도 매매됐다. 끌려간 조선인 포로 가운데, 도공(陶工)들의 도자기 제조기술은 일본 도자기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서생포 왜성에는 가끔 일본관광객이 방문한다. 왜성을 보면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침략의 역사를 반성을 할까? 아니면 그들 선조들의 성곽기술 훌륭함을 감상과 한강이남 식민지 건설 못함을 아쉬워할까?

 

멀리서 본 진하해수욕장

 

울산의 3대 수군 진성의 하나인 서생포 만호진성

『세종실록지리지』(울산)에는“서생포(西生浦)는 군 남쪽 44리 거리에 있다. 모두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있어 수어(守禦)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는 “만호(萬戶)가 지휘하며, 병선 20척에 군졸 767명이 성에 상주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초기에 수군만호영(水軍萬戶營)이 있었고, 임진왜란 후에는 서생포 수군동첨절제사영(水軍同僉節制使)으로 승격되어 수군동첨절제사(水軍同僉節制使)가 이곳에 머물렀다. 이후 인근 서생포 왜성으로 이동하여 한말까지 유지 되어 왔다. 성의 축성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염포진성이 성종 21년(1490년)5월에 쌓은 것으로 보아 이와 비슷한 시기로 추정된다.

 

서생포 만호 진성 안내표지판
서생포 만호 진성으로 가는 오솔길

 

진성(鎭城)은 외적의 침입이 잦은 국경 및 해안 같은 국방상 중요한 곳에 쌓은 성이고 만호(萬戶)는 원나라의 제도에서 유래한 것으로 무관직 벼슬이다. 본래 그가 통솔하여 다스리는 민호(民戶)의 수에 따라 만호·천호·백호 등으로 불리다가, 차차 민호의 수와 관계없이 진장(鎭將)의 품계와 직책 등으로 변하였다. 수군의 만호(萬戶)는 육군의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와 같이 종4품으로 만호의 임기는 진에 가족을 데려가지 않는 경우 900일이었다.

서생포 진성은 염포진성, 개운포 진성와 더불어 조선 전기 울산에 세워진 수군진성이다. 일반적으로 수군 진성은 해안가에 위치하고 성안에 우물이 있고 적에게 노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바다 쪽에서는 볼 수 없는 막힌 포구에 위치하며 인접지역과 연락이 편리한곳을 성터로 삼는다. 성곽은 산 구릉을 따라 곡선형으로 하고 성벽은 수직으로 쌓은 견고한 석축성이고 성곽의 반은 산 구릉 위에 걸친 반산성(半山城)이며, 성 주위에는 성지(城址)를 파고 망루대는 구릉 위에 세운다. 그리고 출입정문은 배 선착장과 연결되어 있다.

서생포 만호 진성은 북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와 합류하고 있는 회야강이 있어 수군이 활동하기 유리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성곽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구릉의 경사지를 이용하여 돌을 쌓았는데, 산허리에서부터 시작하여 회야강이 흐르는 북쪽평지를 연결하는 형태이다. 현재 북쪽성벽은 멸실되어 정확한 구조를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 수군진성의 특성상 병선을 정박시키는 선창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남아있는 성벽의 길이는 약 440m이며, 성벽너비는 4m, 잔존높이는 1~1.5m이다. 서쪽성벽에는 문지로 보이는 시설이 일부 남아 있으며, 그 외측에서 발굴조사를 통하여 해자가 확인되었다. 이 진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왜군에 의해 함락되어 파손되었다.

 

성벽 흔적이 엿보인다
남아 있는 성벽의 길이는 약  440m 이며 ,  성벽너비는  4m,  잔존높이는  1~1.5m 이다 .
서생포 만호 진성은 북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와 합류하고 있는 회야강이 있어 수군이 활동하기 유리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  현재 북쪽성벽은 멸실되어 정확한 구조를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 수군진성의 특성상 병선을 정박시키는 선창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서생(西生)의 지명 유래는 『삼국사기지리지』에 “동안군(東安郡)은 원래 생서량군(生西良郡)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라는 기록에서 처음 등장 한다. 서생(西生)에서 ‘서(西)’는 고음(古音)인 ‘새’에서, ‘생(生)’은 ‘내’가 되어 벌이나 들을 의미한다. 그래서 서생(西生)이나 생서량(生西良)·동안(東安)은 「밝아오는 동쪽 들」을 뜻하는 ‘새내’로 해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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