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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복사지(崇福寺址)는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 산23-1에 위치하고 있으며 최치원이 비문을 쓴 쌍거북비석받침과 동, 서 삼층석탑이 있다. 이 절은 신라 37대 선덕왕 이전에 원성왕의 어머니 외삼촌이며 왕비 숙정황후(肅貞王后)의 외할아버지인 파진찬(波珍飡) 김원량(金元良)이 창건한 곡사(鵠寺, 고니절) 인데, 원래 곡사(鵠寺) 터는 여기서 2-3Km 가량 떨어진 38대 원성왕릉(괘릉)자리였다. 원성왕이 죽자 풍수상(風水上) 길지(吉地)이던 터를 희사하여 장지가 되었고 곡사를 옮겨 다시 세운 절이 현재의 대숭복사지이다. 곡사는 사원에 고니모양의 바위가 있어 붙인 명칭이다.

현재 조성된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는 2013년 복원하였는데 쌍귀부 비석받침은 국립 경주 박물관에 보관 중인 비석받침을 복제하였고 이수도 고증을 통하여 복원하였다. 비문의 쌍계사의 진감선사대공탑비(雙溪寺眞鑑禪師大空塔碑)의 글씨를 집자하여 비문에 비신에 새겼다.

그러나 그 후 70여 년간 절은 큰 형세를 이루지 못하다가, 48대 경문왕(861~874 재위)의 꿈에 원성왕을 뵙고 이 절을 원성왕의 명복을 비는 원찰(願刹)로 삼고 크게 확장하였고 49대 헌강왕 885(헌강왕 11)때 절 이름을 대숭복사(大崇福寺)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출토된 기와 가운데 이 절이 국사(國寺)였으며 조선시대까지 존속하였음을 알리는 ´국사대웅´(國寺大雄)´개와대웅´(蓋瓦大雄) 등의 명문(銘文)이 적혀 있는 평기와가 발견되어 조선시대까지 절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추정하고 이다.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의 쌍귀부 비석받침은 금당 터에서 동남쪽 10여M 위치에 세워져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절의 역사는 1930년 대 부터 1978년 국립경주박물관의 현지 지표조사에 이르기까지 파괴된 최치원의 숭복사비의 비편이 모두 13개가 수습되었고 이를 통해 99자가 해독되어 밝히게 되었다. 최치원의 대숭복사비는 진성여왕 10(896)에 만들어졌다. 이전에는 위치가 외동면 말방리인 탓으로 '말방리 사지(末方里寺址)'라고 불리었다. 말방 지명은 옛날 마방(馬房)이 있었으므로 마방-말방이라 불렀다.

대숭복사지는 금당 앞에 탑이  2개 있는  1금당 쌍탑식의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배치의 사찰이다.

이 절은 평지의 지형, 탑의 배치 형식 등이 불국사와 매우 유사하여 두 절의 건립연대가 큰 차이가 없음으로 추측하고 있다. 금당 앞에 탑이 2개 있는 1금당 쌍탑식의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배치를 따르고 있으며, 대지를 3단의 석축으로 구분하여 맨 윗 단에 탑()이 자리 잡고 있다. 금당은 정면 5, 측면 3칸이며 금당의 기단은 2중 기단이며 금당 중심에서 북으로 148척 떨어진 위치에서 동, 서로 긴 기단석이 발견되었는데 강당지로 추정하고 있다.

금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기단은 2중 기단으로 조성되어 있다.
금당지에 모아 놓은 각종 석조 부재들

, 서 삼층석탑은 경문왕(861-875)때인 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서 탑 두 기가 모두 불완전한 형태의 탑으로 복원되었고 이런 이유로 탑의 예술성은 높이 평가되나 문화재로의 가치가 반감되어 보물로 지정받지 못했다. , 서 석탑 모두 같은 규모와 양식에 조성된 지대석 위에 2중 기단의 삼층석탑이다. 상층 기단 면에 12구씩 팔부중상(八部衆像), 팔부신장상(八部神將像)을 조각하였고 1층 몸돌 각 면에는 문모양(門扉양식)을 새겼다. 지붕돌의 처마받침은 4단으로 통일신라후기의 양식을 갖추고 있다.

대숭복사지(大崇福寺址)와 동, 서 삼층석탑(三層石塔)

서 삼층 석탑은 2중 기단 하층 기단은 대부분 파손되었고 상층 기단, 1층 몸돌과 지붕돌, 그리고 2층 지붕돌만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지붕돌 추녀에는 풍탁을 단 흔적이 남아있다. 동 삼층 석탑은 서 삼층 석탑 비해 다소나마 석탑을 형태를 갖추고 있다. 2중 기단 하층 기단은 약간 파손되었고 상층 기단, 1층 몸돌과 지붕돌, 그리고 2층 지붕돌, 3층 몸돌과 지붕돌만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대숭복사지 서 삼층석탑
서 삼층 석탑은 2중 기단 中 하층 기단은 대부분 파손되었고 상층 기단, 1층 몸돌과 지붕돌, 그리고 2층 지붕돌만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지붕돌 추녀에는 풍탁을 단 흔적이 남아있다.

팔부중(八部衆) 또는 팔부신장(八部神將) 고대인도 신로 석가모니에게 교화된 뒤 불법을 수호하는 선신이 되었으며 모두 8()의 신으로 무장을 하고 손에는 다양한 지물들을 들고 있다. 사천왕의 직속부하 여덟 분을 일컫는 팔부중(八部衆)과 부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든 여러 중생을 의미하는 여래팔부중(如來八部衆)으로 구분된다석탑에 조성 된 배경은 첫째가 밀교(密敎)의 영향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은 국난에 처했을 때 국가의 수호, 전쟁의 승리 등으로 발전되었고, 개인에게는 벽사(辟邪)의 기능을 팔부중이 하였기 때문이다. 둘째는 화엄경(華嚴經)과 법화경(法華經)의 영향으로 화엄신중신앙(華嚴神衆信仰)의 한 형태로 화엄 불국토 세계와 정토 세계의 구현을 여래팔부중 이미지로 구체화하였기 때문이다.

동 삼층 석탑은 서 삼층 석탑 비해 다소나마 석탑을 형태를 갖추고 있다. 2중 기단 中 하층 기단은 약간 파손되었고 상층 기단, 1층 몸돌과 지붕돌, 그리고 2층 지붕돌, 3층 몸돌과 지붕돌만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특히 팔부중상(八部衆像)은 불법(佛法)을 옹호하고 불경(佛經)을 수지독송(受持讀誦)하는 사람들을 외호하는 신들로 석탑 석면(石面)에 나타난 위치는 방위에 관계없이 긴나라(緊那羅 : 사람 머리에 새의 몸, 혹은 말머리에 사람 몸의 모습마후라가(摩睺羅伽 : 관위에 뱀을 갖춘 모습), 아수라(阿修羅 : 얼굴은 三面이고, 팔은 여덟이고 손에는 칼 등 각종 持物을 갖춘 모습건달바(乾闥婆 : 음악의 신으로 獅子冠을 쓴 모습), 야차(夜叉 : 사자, 코끼리, 호랑이, 사슴, , , 나귀, 낙타, , 등의 모습(: 얼굴과 몸은 人形이나 뱀의 꼬리, 그리고, 머리 위에 龍形의 모습), (: 대체로 花冠을 지닌 天人像의 모습가루나(迦樓羅 : 人形에 새의 머리 모습) 등 각기 한 쌍씩 배열되어 있다. 상의 자세는 좌상(坐像)입상(立像)으로 구분되어 있고, 좌상의 경우는 운문(雲文) 혹은 연화문(蓮花文) 대좌(臺座)를 갖추었으며, 입상은 모두 암좌(岩座)를 구비하였다.

현재까지 조사된 신라 시대 석탑 팔부중상은 총 19기이다. 그리고 팔부중상의 최초 사례는 남산 창림사지(昌林寺址) 삼층석탑(원성왕 7, 791)이고 가장 우수한 조각의 팔부중상은 석굴암에 있는 팔부중상이다. 석탑에 나타난 문양 가운데 인왕상과 사방불, 십이지상에 이어 가장 늦게 나타난 양식이 팔부중상이다.
일반적으로 신장상(神將像)은 수미산 위에 사는 모든 신들을 통틀어 말하며, 무력으로 적을 항복시키며, 불법(佛法)을 옹호하고 불경(佛經)을 수지 독송(受持讀誦)하는 사람들을 외호하는 신들이다. 신장의 종류는 천부상무인상용왕상 등 3종류이며 천부상에는 제석천범천과 사천왕상 등 있고 무인상에는 금강역사(인왕상), 팔부신장(팔부중상), 십이신장(십이지신상등 있으며 용왕상에는 팔부용왕이 있다.

 우리나라 석탑에 있어서 신장상이 처음으로 등장한 곳은 선덕여왕 3(634)에 건립된 분황사 모전석탑의 금강역사상이다. 통일신라 7세기 후반 감은사지 삼층석탑, 고선사지 삼층석탑에서 門扉양식이, 이후 여러 신인상이 등장하였다.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는 헌강왕 886(헌강왕 12) 때 최치원(崔致遠)에게 비문을 짓도록 명령하였다. 최치원(崔致遠)은 헌강왕(憲康王)과 정강왕이 연이어 승하하는 바람에 비문을 짓지 못하다가  진성여왕 896(진성여왕 10)에 완성하였다. 비의 모습이나 탁본도 전혀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서산대사의 제자인 해안(海眼)이 최치원(崔致遠)의 문집에서 4개의 비문을 뽑아 사산비명(四山碑銘)이라고 불렀는데, 숭복사비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비문은 바로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필사본에 근거한 것이다. 숭복사비문에는 경문왕과 그의 자녀들인 헌강왕, 정강왕, 진성왕으로 이어지는 2() 4()의 공덕을 기리는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는 금당 터에서 동남쪽 10M 위치에 세워져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쌍귀부는 지금 국립 경주 박물관 정문 전면에 놓여있다. 쌍귀부 형태를 한 귀부는 가장 이른 애장왕 1(802)에 조성된 것으로 무장사지의 쌍귀부와 이부가 있고 그 다음이 숭복사지의 것이며 포항시 신광면의 법광사지 쌍귀부와 경주 남산 창림사지 쌍귀부는 동일한 형태이나 조성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현재 조성된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2013년 복원하였는데 쌍귀부는 국립 경주 박물관에 보관 중인 것을 복제하였고 이수도 고증을 통하여 복원하였다. 비문의 쌍계사의 진감선사대공탑비(雙溪寺眞鑑禪師大空塔碑)의 글씨를 집자하여 비문에 비신에 새겼다.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은 지리산 쌍계사의 진감선사대공탑비(雙溪寺眞鑑禪師大空塔碑), 만수산 성주사의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白月光塔碑), 초월산의 숭복사지비(崇福寺址碑), 희양산 봉암사의 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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