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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강읍(安康邑) 육통리(六通里) 회화나무(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14283)는 수령이 약 400년으로 높이 19.1m, 둘레 6.2m로 줄기의 많은 부분이 상해서 나무 모습이 좋지 못하다. 오랜 세월동안 마을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속에 살아 왔으며, 음력 정월 보름날에 이 나무 앞에 모여서 새해의 풍작과 마을의 평화를 기원하는 동제를 지낸다.

육통(六通)의 유래는 옛날 대표적인 6개 자연부락(능골, 원당, 존당, 못밑, 학지, 거리마을)을 통칭하여 육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활엽수인 회화나무는 생명력이 강하고, 가지와 잎이 무성하여 그늘 밑에서 쉬어 가는 마을의 정자나무로도 쓰였고 향교나 사찰 등에 심었다. 활엽수 중 공해에 가장 강한 나무로 가로수나 공원수로도 이용된다.

나뭇가지의 자유로운 뻗음이 학자의 기개를 상징한다 하여 학자수(學者樹)’라고도 하며, 영어 이름도 이와 같은 뜻인 스콜라 트리(scholar tree)’이다.

옛 선비들은 이사를 가면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는 선비가 사는 곳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마을 입구에 이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모양이 둥글고 온화하여 높은 관리의 무덤이나 선비의 집에 즐겨 심었다.

이 회화나무에는 오래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600년 전인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 때 이 마을에 살던 젊은이가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쟁터로 나가면서 이 나무를 심어놓고 부모님께 자식처럼 키워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 후 젊은이는 장렬하게 전사하였고 부모는 아들의 뜻대로 이 나무를 자식같이 여기며 가꾸어 오늘의 모습에 이르렀다고 한다.

안강읍(安康邑)은 경주시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읍이다. 남쪽으로는 현곡면, 동쪽으로는 강동면과 천북면, 북쪽으로는 포항시의 기계면, 서쪽으로는 영천시의 고경면과 접해 있다. 원래 안강은 무인 하천 지역이었으나 칠평천(七坪川) 유수의 변천으로 민가가 형성되었고 759신라 경덕왕 때 주민의 평안함을 염원하는 뜻에서 '안강(安康)'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칠평(七坪)이라는 지명은 옛날 큰 홍수가 나서 안강 전역이 물에 잠겼을 때, 이곳의 일곱평 정도의 땅이 물에 잠기지 않았는데 그 물에 잠기지 않은 땅모양이 칠()자 모양이었다고 하여 그 넓이와 모양을 따서 칠평이라 부르게 되었다.

칠평천(七坪川)은 안강읍 두류리에서 발원하여 안강읍을 관통하고 형산강에 합류되는 하천이다. 동남북의 산지로부터 흘러내린 많은 지류들이 안강읍 지역에 넓은 들을 만들어 옛날 안강현(安康縣)의 중심지가 들어설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삼국사기에 원래 비화현(比火縣)이었는데, 759(신라 경덕왕 16)에 안강현(安康縣)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기록이 있다. 비화현에서의 ()’는 신라지역에서()’을 의미하는을 한자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다. 102(신라 파사니사금 23) 음즙벌국(音汁伐國)을 취하여 음즙화현(音汁火縣)을 만들었는데 후에 안강현에 합해졌다는 기록도 나온다. 음즙화현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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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나 사정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화합하지 못하는 상태를 갈등(葛藤)이라고 하는데 갈등은 칡과 등나무이다. 칡은 줄기를 왼쪽으로,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감고 올라가기 때문에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혀 해결의 실마리가 찾는 것이 어렵다라는 의미가 된다.
현곡면 오류리에 있는 등나무(현곡면 오류리 527번지)는 1962년 12월 7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등나무는 4그루인데, 두 그루씩 모여서 자라고 있다. 가슴높이의 줄기지름이 각각 20·40·40·50cm이며 팽나무를 감고 올라가고 있다. 높이 17m이로 동서쪽으로 20m, 남북쪽으로 50m 정도 퍼져있다.

어떤 일이나 사정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화합하지 못하는 상태를 갈등(葛藤)이라고 하는데 갈등은 칡과 등나무이다.
칡은 줄기를 왼쪽으로,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감고 올라가기 때문에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혀 해결의 실마리가 찾는 것이 어렵다”라는 의미가 된다.

()은 콩과에 속하는 덩굴성 식물로 5월에 연보라색의 꽃이 핀다봄을 알리는 꽃향기로 아카시아나무 꽃향기와 더불어 등나무 꽃 향기는 은은하고 깔끔한 향기가 난다. 또한 여름에는 나그네에게 그늘을 제공하는 여름나무이다.
()이라는 한자는 위로 감고 올라가는 모양을 본떠서 만든 상형문자이다학술적으로 이 나무의 본래 이름은 참등이라고 하는데 흔히 등이라고 하여 산등이나 애기등 같은 등류를 통칭한다.

등(藤)은 콩과에 속하는 덩굴성 식물로 5월에 연보라색의 꽃이 핀다.
등(藤)이라는 한자는 위로 감고 올라가는 모양을 본떠서 만든 상형문자이다.

신라 시대 때, 이곳을 용림(龍林)이라 하여 왕이 수렵을 즐기던 곳이었다여기의 등나무를 용등(龍藤)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등나무 줄기의 꼬임과 그 위엄을 용에 견주어 붙인 명칭이다. 이 등나무 옆에 깊은 샘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고 옆에 실개천이 흐르고 있다.

여기에 슬픈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때 어느 농가에 열아홉 살, 열일곱 살이 된 예쁜 두 딸이 있었는데 둘다 남모르게 이웃집 청년을 사모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청년이 싸움터로 출정하게 되어 떠나게 되고 그 모습을 몰래 보며 눈물을 짓다 두 자매는 같이 그 청년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정한 자매가 서로 양보하기로 결심하고 있을 때 그 청년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로 얼싸안고 울다가 함께 못에 몸을 던졌다.

자매가 그 청년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로 얼싸안고 울다가 함께 못에 몸을 던졌던 연못가에는 등나무 두 그루가 자라기 시작하였다.

그 뒤로 연못가에는 등나무 두 그루가 자라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죽은 줄만 알았던 청년이 훌륭한 화랑이 되어 돌아오게 되었고, 이 화랑은 세상을 등진 자매의 애달픈 사연을 듣고서 자신도 연못에 몸을 던졌다. 화랑이 죽은 연못가 자리에서 팽나무가 자라 나왔고 이로부터 등 두 그루는 팽나무를 힘차게 감고 올라가 자라 5월이 되면 탐스러운 꽃송이로 그윽한 향기를 퍼뜨리고 있다. 이에 두 그루 등나무는 팽나무를 감고 자라며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을 달래고 있다고 한다.

화랑이 죽은 연못가 자리에서 팽나무가 자라 나왔고 이로부터 등 두 그루는 팽나무를 힘차게 감고 올라가 자라 5월이 되면 탐스러운 꽃송이로 그윽한 향기를 퍼뜨리고 있다.
두 그루 등나무는 팽나무를 감고 자라며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을 달래고 있다고 한다.

이 애틋한 전설에서 유래되었는지 신혼부부의 금침(베게)에 등꽃을 따서 말린 것을 넣어주면 정이 한층 깊어진다는 말도 전하여지고 있으며, 또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할 때 등나무의 잎을 달여 마시면 정이 다시 살아난다는 속신도 있다.

신혼부부의 금침(베게)에 등꽃을 따서 말린 것을 넣어주면 정이 한층 깊어진다는 말도 전하여지고 있다.

현곡면(見谷面)은 경주시의 서북쪽에 있는 면으로 남쪽으로 경주시내, 동쪽으로 천북면, 북쪽으로 안강읍, 서쪽으로 건천읍과 영천시 고경면에 접해 있다. 서쪽에서 발원하는 소현천을 중심으로 작은 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소현천은 동쪽의 형산강에 합류된다.
‘현실’이라는 순우리말 이름을 한자의 소리와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 ‘현곡(見谷)’이라는 설이 있다. 오류리(五柳里) 이름은 마을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었다 해서 유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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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석산(827m)은 경주시 건천읍(乾川里) 방내리(芳內里)와 내남면(內南面) 비지리(飛只里)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경주에서 가장 높고 단석산 일대는 경주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산세가 뛰어나고 경치가 좋아 등산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며 진달래군락지로 유명하여 인근 조래봉(657m)과 더불어 등산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리고 관광명소로 7세기 전반기의 불상 양식과 김유신을 비롯한 화랑들이 수도했다는 내용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 신선사 마애불상군이 있어 고신라 불교미술전공자와 미륵 신앙연구에 관심 있는 분들이 자주 찾는다. 단석산은 신라시대에 화랑들이 심신을 수련하였고 백제군이 지리산을 넘어 함양, 청도로 거쳐 경주로 들어오던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신라에서는 국방의 요충지였다.

 등산일정은 방내리 방내지 인근 천주암 주차장에 차를 주차 후 등산을 시작하여 목적지 단석산 등정 후 입암산 방향으로 하산하여 백석암을 거쳐 백석마을 도착하여 택시를 타서 다시 천주암으로 가는 일정이다. 5시간 30분 소요된다.

상세 등산코스는 방내리 천주암 기둥바위 전망바위 진달래 능선 전망바위, 전망대 안부 단석산 비지고개 입암산 백석암 화천리 백석마을이다.

천주암 입구. 입구 우측에 있는 소로가 단석산 등산로이다.

천주암을 출발하자마자 소위 깔딱 고개를 만나는데 계단을 따라 기둥바위를 지나 진달래 능선까지 두 차례나 맞이했다. 무척 힘든 코스다. 다행히 전망바위 또는 전망대로 불리는 넓은 바위를 만나 휴식과 더불어 바라본 풍광은 가히 절경이라 등산의 맛을 느끼게 한다. 간단한 간식을 먹은 후 출발하니 금방 도착할 것 같은 단석산 정상은 안부를 지나 드디어 정상에 도착하였다. 정상에는 인증 샷과 정상 파티를 즐기는 등산객들이 삼삼오오 보였다.

천주암을 출발하자마자 소위 깔딱 고개를 만나는데 계단을 따라 기둥바위를 지나 진달래 능선까지 두 차례나 맞이했다. 무척 힘든 코스다.
진달래 능선에서 만난 전망바위 또는 전망대로 불리는 넓은 바위에서 휴식과 더불어 바라본 풍광은 가히 절경이라 등산의 맛을 느끼게 한다.
백석마을 갈림길 안내판을 보고 정상이 가까이 있음을 알게된다.
단석산 정상석과 김유신이 칼로 자른 바위가 있다.

 

막걸리로 정상주 한잔과 점심을 해결 한 후 하산하기 위해 화천리 백석마을로 발길을 옮겼다. 입암산과 백석암 구간은 길이 가파르고 등산길인지 동물들이 지나는 길인지 구분이 안 되는 곳이 많았다. 백석암에 도착하니 그곳 보살님이 암자에 있는 동안 등산객을 보지 못했다고 놀라워했다. 봉지커피를 얻어 마신 후 백석마을 향해 출발했다. 다시 한 번 가파른 길이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가파른 길이 끝나는 곳에 누군가가 백석암에 오르는 분을 위해 지팡이를 만들어 공양을 하였다.

입암산과 백석암 구간은 길이 가파르고 등산길인지 동물들이 지나는 길인지 구분이 안 되는 곳이 많았다.
백석암에 도착하니 그곳 보살님이 암자에 있는 동안 등산객을 보지 못했다고 놀라워했다. 봉지커피를 얻어 마신 후 백석마을 향해 출발했다.
부처님오시는날을 준비하는 백석암
백석암에서 바라본 풍광
다시 한 번 가파른 길이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가파른 길이 끝나는 곳에 누군가가 백석암에 오르는 분을 위해 지팡이를 만들어 공양을 하였다.
산수유 열매
산수유 나무
반가운 평지 길 좌우에 산수유나무가 멋들어지게 있어 지나가는 객의 여독을 풀어주는 것 같았다. 산수유 나무꽃이 피면 이 길을 걷고 싶다.
백석마을 가까운 곳에는 산딸기가 즐비하였다.
뽕나무의 오디열매

반가운 평지 길 좌우에 산수유나무가 멋들어지게 있어 지나가는 객의 여독을 풀어주는 것 같았다. 백석마을은 산딸기 재배를 많이 하는 것 같고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마을이었다. 백석(白石)은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이 이곳을 지나가다 냇가에 꽃이 많다고 하여 꽃내라고 불렀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하며, 350년 전 밀양박씨가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뒷산에 흰 돌이 많다고 하여 백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백석마을 풍경

다행히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방내리 천주암을 향했다. 가는 도중 택시기사 분에게 이번 산행코스를 물어보니, 이곳 현지인들도 힘든 코스라 많이 이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무튼 단석산 산행은 소중한 추억이 돼버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단석산이 처음으로 나오는데, 월생산(月生山)이라고도 하며, 경주중심지의 서쪽 23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신라의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신검(神劍)을 얻어 월생산의 석굴 속에 숨어들어가 검술을 수련하려고 칼로 큰 돌들을 베어서 산더미 같이 쌓였는데, 그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아래에 절을 짓고 이름을 단석사(斷石寺)라고 하였다.” 는 일화도 수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진평왕 건복 28년 신미년(611)에 공의 나이 17세에 고구려·백제·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쳐들어온 적을 평정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홀로 중악(中嶽)의 석굴로 들어가 몸을 깨끗이 하고는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때 중악을 월생산 또는 단석산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단석산에 대한 이와 같은 설화는 이후의 경주지리지에 지속적으로 기록된다.

건천리(乾川里)는 마을 옆 건천강변이 배수가 잘되어 물이 고이지 아니하고 항상 건조되어 한발이 심했으므로 건천이라고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방내리(芳內里)는 단석산에 둘러싸인 품이 마치 방안에 있는 것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방내(房內)'라고 불렀다고 하고 단석산 속에서 꽃다운 화랑들이 수련을 하였다고 하여 '방내(芳內)'가 되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화천리(花川里)는 지형이 곶으로 되어 곶내, 고내, 고천이라 하였고 다른 이야기로는 골짜기에 꽃이 만발하여 꽃내라 부르다가 뒤에 화천(花川)으로 고쳐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내남면(內南面)은 옛날부터 경주부의 남쪽 안에 있다 하여 내남南面)이라 했고 비지리(飛只里)는 마을 앞에 학산이 있는데 이 산이 학이 날아가는 형상이라 해서 날비()자와 다만지()자를 따서 비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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