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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산을 가지고 있는 광역시가 부산광역시이며 이것은 부산의 큰 복이다. 이들 중 장산은 해발 634m로 세 번째로 높은 산이며 부산시민이 사시사철 찾는 곳이다. 더불어 대천공원이 조성되어 산행은 물론이며 운동, 각종 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해발에 비해 수량이 풍부하여 춘천의 흐르는 물은 가뭄에도 마르는 날이 없어 여름철이면 아이들의 물놀이 터가 된다. 이에 옛 부터 장산 앞 지역은 비옥한 농경지를 이루었고 청사포 앞바다의 풍부한 해산물과 함께 풍요로운 땅이었다.

장산 450m 자락에는 20가구 100여명 주민이 녹차재배 등 농업과 등산객 상대로 하는 식당을 주업으로 살고 있는 장산마을이 있다이 마을은 19636.25전쟁 상이용사 10여명이 원호청으로부터 정착 대부금을 받아 설립한 장산개척단에서 시작된 마을이다.

당시 산정을 개간하여 무, 배추 등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며 살았으나 생활여건이 열악하여 개척단원들은 마을을 떠났다. 그 후 퇴역 장병 40여 세대 120여명이 부산시로부터 토지를 불하받아 무 재배를 하며 정착하였다.

그리고 미국 복지재단에서 기증한 홀스타인 젖소 덕분으로 낙농업을 통해 장산목장으로 마을이 번창하였으나 1985~ 1987년 우유파동과 해운대 신시가지 조성에 따른 젖소 사육 금지, 자녀교육 등으로 일부가 마을을 떠나 현재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장산을 좀 더 들여다보면 부산국가지질공원, 생태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청산리 대첩의 숨은 영웅 애국지사 강근호의 숨결이 모정원에 남아있다. 또한 민속 및 토속신앙이 전해지고 있는 천제단, 마고당 등 있어 장산을 찾는 이에게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동국여지승람(1418)과 동래부지(1740)에 의하면 부산의 전신인 동래의 옛날은 장산국(萇山國)이었으며 신라가 이를 취해 거칠산군(巨漆山郡)을 두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장산을 동래부지도에는 상산(上山)이라는 이름으로 장산이라고도 하고 봉래산이라고도 하였다.

규장각 소장의 동래부지도에는 장산의 위치에다 장산국기라 적혀있고 해동지도에는 상산에다 장산국기라 적혀 있다. 동래부읍지 역시 장산이라고 표기하고 기장의 운봉산에서 뻗어 내렸다고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동래현의하면 옛날에는 장산국(萇山國) 혹은 내산국(萊山國)이라고도 하였다. 신라가 점유하고 나서 거칠산군(巨漆山郡)두었는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현종이 울주(蔚州)속시켰고 현의 동쪽 15리에 상산(上山)이 있으며, 대마도를 바라보기에 가장 가깝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산을 중심해서 장산국, 또는 내산국이라는 부족국가가 형성돼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날씨가 맑으면 저 멀리 대마도가 보이는데 실제 거리는 50km이다.

삼한시대의 부산에는 변한(변한)12국 중 하나인 독로국(凟盧國)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 삼국지 위서 한전에는 독로국이 바다를 사이에 두고 왜와 접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독로국이 현재로서는 동래지역에 있었다는 주장이 우세하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가 동래지역의 거칠산국을 멸망시키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독로국과 거칠산국이 같은 것인지의 여부는 현재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최근 장산 정상 개인이 운영하는 농장에서 우물터를 발견했는데 지역 향토사학계에서는 옛날 장산국 우물터가 아닌지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 그 결과가 주목된다.

장산국의 오능은 사라지고

장산국은 신라와 가야의 경계지역에 위치하였는데, 이 장산국에 5개의 왕릉 이 존재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신라와 가야의 침략을 피하기 위하여 궁궐과 왕릉은 장산 안에 있었으며, 6·25전쟁 당시 미군이 탄약 창고를 설치하기 전 좌동 일대 어느 작은 절(약수암) 옆에 5개의 큰 무덤이 바로 그것이라 전해진다.

기원 후 5~6세기경에 신라(석탈해왕) 세력이 이곳에 진출하면서 장산국이 멸망하자, 장산국 사람들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고 산의 오능은 초라한 무덤으로 변해 점차 잊히게 되었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좌동 토박이 노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어릴 적 그 무덤을 보았는데 탄약 창고 공사를 하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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