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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강읍(安康邑) 육통리(六通里) 회화나무(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14283)는 수령이 약 400년으로 높이 19.1m, 둘레 6.2m로 줄기의 많은 부분이 상해서 나무 모습이 좋지 못하다. 오랜 세월동안 마을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속에 살아 왔으며, 음력 정월 보름날에 이 나무 앞에 모여서 새해의 풍작과 마을의 평화를 기원하는 동제를 지낸다.

육통(六通)의 유래는 옛날 대표적인 6개 자연부락(능골, 원당, 존당, 못밑, 학지, 거리마을)을 통칭하여 육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활엽수인 회화나무는 생명력이 강하고, 가지와 잎이 무성하여 그늘 밑에서 쉬어 가는 마을의 정자나무로도 쓰였고 향교나 사찰 등에 심었다. 활엽수 중 공해에 가장 강한 나무로 가로수나 공원수로도 이용된다.

나뭇가지의 자유로운 뻗음이 학자의 기개를 상징한다 하여 학자수(學者樹)’라고도 하며, 영어 이름도 이와 같은 뜻인 스콜라 트리(scholar tree)’이다.

옛 선비들은 이사를 가면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는 선비가 사는 곳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마을 입구에 이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모양이 둥글고 온화하여 높은 관리의 무덤이나 선비의 집에 즐겨 심었다.

이 회화나무에는 오래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600년 전인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 때 이 마을에 살던 젊은이가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쟁터로 나가면서 이 나무를 심어놓고 부모님께 자식처럼 키워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 후 젊은이는 장렬하게 전사하였고 부모는 아들의 뜻대로 이 나무를 자식같이 여기며 가꾸어 오늘의 모습에 이르렀다고 한다.

안강읍(安康邑)은 경주시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읍이다. 남쪽으로는 현곡면, 동쪽으로는 강동면과 천북면, 북쪽으로는 포항시의 기계면, 서쪽으로는 영천시의 고경면과 접해 있다. 원래 안강은 무인 하천 지역이었으나 칠평천(七坪川) 유수의 변천으로 민가가 형성되었고 759신라 경덕왕 때 주민의 평안함을 염원하는 뜻에서 '안강(安康)'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칠평(七坪)이라는 지명은 옛날 큰 홍수가 나서 안강 전역이 물에 잠겼을 때, 이곳의 일곱평 정도의 땅이 물에 잠기지 않았는데 그 물에 잠기지 않은 땅모양이 칠()자 모양이었다고 하여 그 넓이와 모양을 따서 칠평이라 부르게 되었다.

칠평천(七坪川)은 안강읍 두류리에서 발원하여 안강읍을 관통하고 형산강에 합류되는 하천이다. 동남북의 산지로부터 흘러내린 많은 지류들이 안강읍 지역에 넓은 들을 만들어 옛날 안강현(安康縣)의 중심지가 들어설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삼국사기에 원래 비화현(比火縣)이었는데, 759(신라 경덕왕 16)에 안강현(安康縣)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기록이 있다. 비화현에서의 ()’는 신라지역에서()’을 의미하는을 한자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다. 102(신라 파사니사금 23) 음즙벌국(音汁伐國)을 취하여 음즙화현(音汁火縣)을 만들었는데 후에 안강현에 합해졌다는 기록도 나온다. 음즙화현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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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현리 적석총(銀峴里 積石塚, 울산 울주군 웅촌면 은현리 산 207-5번지)은 돌무지무덤(積石塚)으로 은현리 서리마을의 남쪽 야산에 있다. 이곳은 정족산(해발 748m)에서 동북쪽으로 발달한 보골봉의 끝자락에 해당하는데, 적석총이 있는 지점은 경사가 10˚ 이내로 완만한 곳에 축조되어 있다.

적석총(積石塚)은 시신을 묻기 위해 구덩이를 파거나 땅 위에 시신을 놓은 다음 돌을 쌓아서 만든 무덤을 말한다. ()발굴된 무덤의 출토 유물로 미루어 볼 때, 피장자가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어 묘라고 부르기는 곤란한 무덤을 말한다.

은현리 적석총(銀峴里 積石塚)은 사람머리 크기의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무덤으로 붕괴로 말미암아 확실한 구조는 알 수 없다. 남아있는 적석총의 규모는 전체길이 약 20m내외, 높이 6m 정도로 추정된다. 적석총의 석재는 대부분이 자연석으로 큰 것은 65×60×20, 중간 것은 55×40×23, 작은 것은 23×14×7정도로 다양하며, 무덤의 전체모습은 원형이다.

적석총의 최하단 기단부의 형태, 함몰되어 있는 적석의 상태 및 높이 등으로 미루어보면 원래는 위쪽으로 오를수록 좁은 형태를 이루는 피라미드형으로 추정된다.

원래 기단부에는 계단으로 쌓은 흔적이 남아 있으나 현재는 확인하기 어렵다.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인근 저수지 축조 시 적석총의 돌을 사용했다 한다. 적석총에서 약 3m정도 떨어진 주변에는 돌담을 쌓아 묘역을 구분하고 있어 마을 사람들은 마고할미가 쌓은 당이라 하여 해당울, 성산이라 부르고 있다.

적석총에서 약 3m정도 떨어진 주변에는 돌담을 쌓아 묘역을 구분하고 있어 마을 사람들은 마고할미가 쌓은 당이라 하여 해당울, 성산이라 부르고 있다.

적석총(積石塚)은 우리나라에서는 삼한시대 초기에 확인되는데, 이때의 적석총은 대부분 한반도 중부와 북부 지방에 분포한다. 삼국시대가 되면 고구려에서 적석총을 많이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강돌을 사용하여 무질서하게 쌓아 올렸지만, 점차 다듬은 돌을 계단처럼 쌓아 올려 웅장하게 만들었다. 백제에서도 적석총을 만들었는데, 백제의 적석총은 첫 수도였던 한강 유역에서만 확인된다.

웅촌면(熊村面)에 있는 은현리 적석총(銀峴里 積石塚)은 검단리 유적지, 대대리 유적지와 더불어 삼한시대의 우시산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울산지역의 최초 국가인 우시산국이 이 지역으로 은현리 적석총(銀峴里 積石塚)의 존재는 강력한 지배층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우시산국은 신라 탈해이사금 때 멸망하기 전까지 반 독립성을 유지한 소국이였다.

은현리 적석총(銀峴里 積石塚)의 피장자는 과연 누구일까?

은현리 적석총은 아직 발굴 조사가 진행되지 않아 구체적인 구조와 연대 등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여러 가지 추론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고구려인의 무덤으로 우신산국의 지배층이 고구려계통이라는 것이다. 고구려인이 남하하여 이곳에 정착한 것으로 보는 견해다.

또 하나의 추론은 우시산국은 소국 형태의 가야국으로 경남 산청군에 있는 전 구형왕릉(가락국 제10대 구형왕의 돌무덤)과 비슷한 구조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탑으로 보는 견해인데 안동 석탑리 방단형 적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43)과 비슷한 구조라는 것이다.

은현리(銀峴里)는 은하(銀下)의 은()과 덕현(德峴)의 현()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은하(銀下)’의 순우리말은 은알, 음달의 아화(雅化)로 빚어진 말이다.

은현리(銀峴里)는 웅촌면의 서쪽에 위치하여 북쪽은 삼동면 출강리, 작동리와 지경을 이룬다. 동쪽은 대복리와 검단리, 남쪽은 고연리와 접한다. 정족산에서 동쪽으로 뻗은 능선이 보골산에서 골짜기를 만들고, 은현리의 뒤산 능선을 따라 한 맥이 남진한 것이 운암산이다.

은현리의 들판은 매우 넓고 저수지가 많아 비옥하다. 서남쪽에는 무제치늪이 있으며 수반저수지, 담뒤저수지, 상보저수지, 덕산저수지 등의 저수지가 있고 곡천천이 여러 갈래로 흐르고 있다.

웅촌면(熊村面)은 진산(鎭山)인 운암산(雲岩山)의 모양이 곰과 닮아서 웅촌이라 이름하였다고 이해하여 왔다. 그러나 곰을 신성시하는 원시 신앙을 가졌던 예맥족(濊貊族)의 주처에는 곰의 터라 하여 ()’ 자가 붙는데, 이로 미루어 웅촌은 고마족이 세운 우시산국(于尸山國)의 왕읍(王邑)이 있었던 곳이라 이름 한 지명으로 보인다.

은현리 서리마을의 은현리적석총 안내표지판
안내표지판을 따라 가는 길에 만난 공사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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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6대 지마왕릉(祇磨王陵, 경주시 배동 산30번지)은 서남산 포석정 남쪽 200m 지점에 있다. 능은 계단식 지형을 이용하여 조성하였고 원형봉토분으로 직경 12.7m, 높이 3.3m이다. 남쪽아래에는 배동 석조여래삼존불상이 있다. 지마왕릉(祇磨王陵)의 위치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기록에는 없다. 

신라 6대 지마왕릉(祇磨王陵)은 서남산 포석정 남쪽 200m 지점에 있고 계단식 지형을 이용하여 조성하였으며 원형봉토분으로 직경 12.7m, 높이 3.3m이다.

지마이사금(祇磨尼師今)성은 박씨(朴氏)이며 지미(祇味) 또는 지마(祇磨)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이고, 어머니는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인 사성부인(史省夫人)이며, 비는 갈문왕 마제(摩帝)의 딸 애례부인 김씨(愛禮夫人 金氏)이다.

서기 112년에 즉위하였고 치적은 가야와 왜와 말갈의 침입을 격퇴한 것이다. 기록을 보면 즉위 4(115)5(116)에는 친히 병력을 이끌고 황산하(黃山河: 낙동강 하류)를 건너 가야를 공격하였다. 즉위 14(125) 말갈군이 대령책(大嶺柵:대관령)으로 쳐들어 왔으나 물리쳤다. 재위 23년에 아들이 없이 죽었다.

지마왕릉(祇磨王陵)의 묘제 양식은 6세기 중엽부터 통일신라 때의 횡혈식석실고분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지마왕릉(祇磨王陵)은 조선 영조 6(1730)에 박씨 일족이 주장하였고 능 앞의 표석은 박씨 문중에서 고종 8(1871)에 세웠다박씨 일족이 주장하여 제()를 지내는 신라 박씨 왕릉은 ,지마왕릉, 일성왕릉, 아달라왕릉, 신덕왕릉, 경명왕릉, 경애왕릉 등 모두 6기이다.

혼유석 형태의 상석은 1955년 박응수씨가 설치하였다. 묘제 양식은 6세기 중엽부터 통일신라 때의 횡혈식석실고분으로 추정하고 있다.

혼유석 형태의 상석은 1955년 박응수씨가 설치하였고 표석은 박씨 문중에서 고종 8년(1871년)에 세웠다.

능 앞에 있는 상석(床石)의 변천 및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상석(床石)은 제수(祭需)를 진설하는 곳이자 능의 정면을 가리키는 역할을 하는데 신라 왕릉에서 상석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무열왕릉이고 흥덕왕릉 이후에는 설치되지 않았다.

상석의 형태는 여러 개의 장대석을 조립한 초기의 상석(무열왕릉, 신문왕릉)과 두꺼운 큰 판석 6매를 이용한 탁자형 상석(성덕왕릉, 원성왕릉, 경덕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으로 구분된다. 특히 탁자형 상석에는 전면 또는 후면에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의 왕릉에서는 정자각(丁字閣)이 등장하여 이곳에서 제수(祭需)를 진설하였고, 능의 앞의 상석은 혼유석(魂遊石)이라 하여 영혼이 거처하는 공간으로 의미와 명칭이 바뀌어졌다. 따라서 신라 왕릉에 설치된 혼유석 형태의 상석은 조선후기 또는 일제 강점기 때 김씨 일족과 박씨 일족, 석씨 일족이 설치한 것이다.

신라 6대 지마이사금(祇磨尼師今, 재위 112~134, 2110개월)

「󰡒어느 날 파사이사금이 태자 지마를 데리고 유찬의 연못으로 사냥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한지부에 들렀다. 이때 이찬 허루가 왕 일행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모두들 취했을 무렵 허루의 아내가 한 처자를 데리고 나와 춤을 추었다. 그러자 마제의 아내도 자신의 딸을 불렀는데 태자의 마음에 들었다.

이것을 본 허루가 질투를 하자 파사왕이 허루에게 이 곳 땅 이름이 대포(큰 부엌)인데, 공이 이곳에서 훌륭한 음식과 좋은 술을 차려 잔치를 베풀어 즐겁게 하니, 직위를 주다(酒多:술이 많음)라고 하여 이찬 위에 두어야 마땅하겠다.”라고 벼슬을 내려 무마하고, 마제의 딸을 태자의 배필로 삼았다. 주다는 뒤에 각간이라고 불렀다.

지마이사금(祇磨尼師今)의 주요 일대기를 보면, 즉위 22, 왕이 직접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창영을 이찬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맡겼다. 옥권을 파진찬으로, 신권을 일길찬으로, 순선을 급찬으로 임명하였다.

3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예방해왔고 여름 4월에 홍수가 났다. 죄수들를 심사하여 사형수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다.

42, 가야가 남쪽 변경을 약탈하였고 7, 왕이 가야를 직접 공격하였다.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黃山河: 낙동강 하류)를 지나는데 가야인들이 숲 속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기다렸다. 왕은 이를 모르고 곧바로 전진하였는데, 복병이 나와 왕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왕은 군사를 지휘하여 맹렬히 싸워 포위를 뚫고 퇴각하였다.

58, 장수를 보내 가야를 공격하게 하고, 왕은 정병 1만을 거느려 뒤를 이었다. 가야는 성을 닫고 굳게 수비하였다. 그 때 마침 비가 오래 내렸으므로 왕은 되돌아 왔다.

10년 정월, 익종을 이찬으로 임명하고, 흔련을 파진찬으로 임명하고, 임권을 아찬으로 임명하였다. 2, 대증산성을 쌓았고 4,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11년 서울 사람들이 왜병이 크게 몰려온다는 헛소문을 듣고 앞 다투어 산골짜기로 피난하였다. 왕은 이찬 익종 등으로 하여금 그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돌아가도록 하였다. 123, 왜국과 강화하였다.

14년 정월, 말갈이 북쪽 변경을 크게 공격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했다. 가을 7월에 그들은 다시 대령 책을 습격하고 이하를 넘어왔다. 왕은 백제에 글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고, 백제는 다섯 명의 장군을 보내 돕게 하였다. 적은 이 소식을 듣고 물러갔다.

8, 이찬 창영이 사망하자, 파진찬 옥권을 이찬으로 임명하여 정사에 참여시켰다. 212, 궁궐 남문이 불탔다. 238, 왕이 별세하였으나 아들이 없었다.

배동 석조여래삼존불상에서 지마왕릉 방향으로 오솔길을 따라 출발하여 만나는 태진지라는 작은 연못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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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산사(甘山寺)는 경주시 내동면(內東面) 신계리(薪溪里)에는 사찰로 신라 성덕왕(聖德王) 18(719)에 중아찬(重阿湌) 김지성(金志誠 또는 金志全, 652720)이 자신의 장전(莊田)을 희사(喜捨)하여 성덕왕과 이찬 김개원(金愷元, 645720년 경)의 복을 빌고 그의 가족 안녕과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仁章, 630년 경 678년 경) 일길찬(一吉, 7위 관등)과 어머니 관초리 (官肖里, 632698년 경)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이다.

김지성(金志誠)6두품 출신으로 집사부 시랑을 역임한 인물이며 67세에 성덕왕 17(718년) 무오년에 벼슬을 버리고 장전(莊田)인 감산장(甘山莊)에 있다가 그 다음 해인 성덕왕 18(719) 기미년에 왕의 특명으로 다시 기용되어 나갈 때, 감산장(甘山莊) 자리에 절을 세우고 석조미륵보살입상과 석조아미타불입상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이 불사를 끝낸 다음 해인 성덕왕 19(720) 경신 422일에 69세로 사망하였다.

김지성(金志誠)의 부모는 아버지 인장(印章) 일길찬은 나이 47세에 돌아가서 화장 후 동해 흔지(欣支, 지금 영일의 옛 이름) 해변에 산골하였고 어머니인 관초리 부인은 나이 66세에 돌아가서 화장 후 또한 동해 흔지 해변에 산골하였다.”
그의 일가는 아우인 김양성(金良誠) 소사(小舍, 13위 관등)와 누님인 고파리(古巴里)와 전처(前妻)인 고로리(古老里), 후처인 아호리(阿好里), 서형(庶兄)인 김급한(金及漢), 일길찬 김총경(金聰敬) 대사(大舍, 12위 관등), 누이동생인 수혜매리(首兮買里)이다.

이찬 김개원(金愷元)을 거명하고 있는 것은 김개원과 특별한 친족 관계거나 어떤 혈맹(血盟)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김개원은 당시 정치실력자로 태종 무열왕 김춘추(604661)와 문명부인과사이에 태어 난 61녀의 막내아들로  효소왕(, 687702) 4(695년)에 수상인 상대등에 올랐고 효조왕이 16세에 후사 없이 돌아가자 13세의 효소왕의 동생 성덕왕을 보위에 올려놓은 태종 무열왕계의 수장이다.
김개원의 누나들은 김흠운(金運, 631655)의 처 요석공주(瑤石, 631년 경?)와 김유신(金庾信, 595673)의 처 지소부인(智炤, 640712년 이후)으로 각 가문의 혈손을 결속시켜 통일 신라왕국을 안정으로 이끌어간 인물이다. 그는 김흠운의 막내딸을 신문왕의 계비로 맞아들여 효소왕과 성덕왕 형제를 낳게 하였고 김유신 혈손 중에서 왕비를 맞아들이기 위해 성덕왕 3(704년) 5월에 김원태(金元泰)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현재 감산사의 모습은 1300년 전의 감산사가 아니다. 석조 아미타여래입상과 석조 미륵보살입상이 발견 된 당시인 1915년에 감산사는 옛 절터의 대부분이 전답지이고 삼층석탑과 작은 불당2채만 있었다. 이후 지속적인 불사가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조계종 사찰로 비구니 스님이 운영하고 있으며 조경이 아담하고 깨끗하다. 템플 스테이도 운영하고 있다.
국보인 석조 아미타여래입상과 석조 미륵보살입상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어 볼 수가 없고 삼층석탑과 석조 비로자나불좌상(石造 毘盧舍那佛坐像)만 볼수 있다.

대적광전. 석조 비로자나불좌상(石造 毘盧舍那佛坐像)은 석조불상으로 대적광전(大寂光殿)에 봉안되어 있다.

석조 비로자나불좌상(石造 毘盧舍那佛坐像)
석조 비로자나불좌상(石造 毘盧舍那佛坐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은 석조불상으로 대적광전(大寂光殿)에 봉안되어 있는데 머리 부분과 앞면의 훼손이 심하고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도 없어진 것을 보수하였다. 머리에는 나발과 육계를 낮게 표현하였다.
양손은 파손되었던 것을 지권인(智拳印)으로 보수하였다. 그 외 신체부위는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데, 어깨가 각이 지고 양쪽 다리는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양 무릎이 두텁고 넓어서 전체적으로 당당하고 안정된 모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원래의 모습은 알 수 없으나 감산사 창건과 연관지어 8세기 초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우리나라 비로자나불상 중에서는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짐작된다.
이 석불(石佛)의 뒷면 왼쪽과 앞면 중앙하부의 띠 매듭과 뚜렷한 옷 주름(衣紋)은 경주 남산 용장사터 삼륜대좌불,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과 더불어 통일신라시대 석조 불상의 옷 주름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감산사지 삼층석탑 (甘山寺址 三層石塔, 문화재자료 95)

대적광전에서 삼층석탑으로 가는 다리

감산사지 삼층석탑 (甘山寺址三層石塔)은 대적광전 뒤편에 있으며 무너져 있던 것을 1965년에 세웠으며 현재 높이는 약 3.3m이다. 현재 2층과 3층 몸돌은 없고 1층 지붕돌위에 2층과 3층 지붕돌이 올려 진 삼층석탑이다.
기단은 2층으로 하였는데, 1층 기단은 4개의 돌로 구성되었고 각 면에는 모서리 기둥과 안 기둥을 각각 새겼다. 2층 기단의 각 면에도 모서리기둥과 안기둥을 각각 새겼으며 갑석부연과 괴임 2단으로 구성하였다. 1층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1개의 돌로 하였고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에는 4단의 받침을 조각하였고 윗면은 낙수면으로 되어 있다. 현재 2층과 3층 몸돌은 없어지고 지붕돌만 남아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을 잘 보여 주며, 지붕돌의 추녀가 직선이고 전각(轉角)이 들려 있어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다.

감산사(甘山寺) 석조 아미타여래입상(石造 阿彌陀如來立像, 국보 82)와 석조 미륵보살입상(石造 彌勒菩薩立像, 국보 81)
두 불상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1916년 일본인 학자 도변창(渡邊彰)과 말송웅언(末松熊彦)이 경주지방 고적을 조사할 때 내동면(內東面) 신계리(薪溪里) 감산사 터 논바닥에 엎어져 있던 것을 발견하여 경복궁으로 옮겼다. 그 해 3월 조선총독부에서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를 열었을 때 총독부 안의 특설 미술관에 전시되었다.

석조 아미타여래입상(국보 82호)
석조 미륵보살입상(국보 81호)
감산사터에서 나온 석재들

이 특설 미술관은 경복궁 전각 일부를 헐어내고 지은 것인데 이때 경복궁을 일반에 공개했다. 조선물산공진회가 끝난 12월에는 특설 미술관을 조선총독부 박물관이란 이름으로 고쳐 일반에 공개함으로써 이 두 불상은 조선총독부 박물관 수장품이 되고 말았다.

일제는 이를 통해 경복궁 탈취를 기정사실화하고 다음 해인 19167월에는 근정문과 광화문을 헐어내고 근정전 앞에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 시작하였다. 조선 민중의 시선을 교묘하게 따돌려 반발 기회를 주지 않고 경복궁을 빼앗은 것이다.
처음부터 일본 제국주의의 의도는 조선 민심에 깊이 뿌리내린 풍수설을 이용하여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을 왕실로부터 탈취함으로써 일본의 통치를 기정사실화하자는 것이 그 첫째 목적이었다. 그리고 물산장려로 민생을 돌보는 것처럼 대내외에 선전하는 것이 그 둘째 목적이었다.

두 불상의 광배 뒷면을 보면 불상을 만든 경위를 자세하게 적은 조상기(造像記; 불보살상을 만든 연유를 밝힌 글)에 따르면, 미륵보살상의 조성 연대는 719(성덕왕 18), 아미타상은 720(성덕왕 19)으로 밝혀져 있다. 그리고 8세기 통일신라의 불교사상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두 불상이 만든 연대를 알 수 있어 통일신라 불상 양식의 변천과정을 연구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조상기에는 당시의 장법(葬法), 개인의 사원 건립과 불상 조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 금석학과 신라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감산사(甘山寺)관련 삼국유사 제2권 탑상(塔像) 4 남월산(南月山, 또는 감산사甘山寺라고도 한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절은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0리 가량 되는 곳에 있다. 금당주미륵존상화광(金堂主彌勒尊像火光) 후기(後記)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개원(開元) 7년 을미(乙未; 719) 215일에 중아찬(重阿飡) 전망성(全忘誠)이 그의 죽은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과 죽은 어머니 관초리(觀肖里) 부인을 위해서 공손하게 감산사(甘山寺)와 석미륵(石彌勒) 하나를 만들고, 겸하여 개원(愷元) 이찬(伊飡)과 아우 간성(懇誠) 소사(小舍)현도사(玄度師), 누이 고파리(古巴里), 전처(前妻) 고로리(古老里), 후처(後妻) 아호리(阿好里), 또 서형(庶兄) 급막(及漠) 일길찬(一吉湌), 일당(一幢) 살찬(薩湌), 총민(聰敏) 대사(大舍)와 누이동생 수힐매(首肹買) 등을 위하여 이러한 착한 일을 했다. 어머니 관초리 부인이 고인(故人)이 되자 동해유우 변산야(東海攸友 邊散也)라 했다.”

극락전
산신각

미타불화광(彌陀佛火光) 후기(後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중아찬(重阿飡) 김지전(金侍全)은 일찍이 상의(尙衣)로서 임금을 모시고 또 집사시랑(執事侍郞)으로 있다가 67세에 벼슬을 도로 바치고 집에서 한가로이 지냈다. 이때 국주(國主) 대왕(大王)과 이찬(伊飡) 개원(愷元), 죽은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 죽은 어머니, 죽은 동생, 소사(小舍) 양성(梁誠), 사문(沙門) 현도(玄度), 죽은 아내 고로리(古老里), 죽은 누이동생 고파리(古巴里),
또 아내 아호리(阿好里) 등을 위해서 감산(甘山)의 장전(莊田)을 내놓아 절을 세웠다. 또 석미타(石彌陀) 하나를 만들어 죽은 아버지 인장 일길간을 위하여 모셨는데, 그가 고인이 되자 동해유우 변산야(東海攸友 邊散也)라 했다.”(제계帝系를 상고해 보면, 김개원金愷元은 태종太宗 김춘추金春秋의 여섯째 아들 개원각간愷元角干이며, 문희文熙가 낳은 이다. 성지전誠志全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의 아들이다. 동해유우東海攸友는 필시 법민왕法敏王을 동해東海에 장사지낸 것을 말한 것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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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동천동 산 17번지 소금강산 남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능은 높이 4.4m, 지름 15.7m로 신라 4대 탈해왕릉(脫解王陵)으로 전해지고 있다능 앞의 상석은 조선 왕릉 혼유석 형태로 최근에 설치되었다능의 동남쪽에 있는 숭신전(崇信殿)은 조선 철종 때 반월성에 설치되어 있는 것을 1980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탈해왕릉(脫解王陵)19741230일에 도굴을 당했는데 봉분 동북쪽 중간지점에서 너비 85m, 깊이 4.4m로 도굴갱을 만들어서 도굴을 하였다. 이때 묘제가 6세기 이후에 조영된 횡혈식석실분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탈해왕릉(脫解王陵)의 묘제는 신라초기 목관묘 형태이다.

현재 동천동(東川洞)에 있는 능이 탈해왕릉으로 정해진 것은 20세기 초 석씨 일족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장지로 기록 된 성북양정구(城北壤井丘)와 조선시대 지리지 관련 기록을 근거로 정하였다. 석씨 일족은 성북(城北)을 근거로 동천동(東川洞)에 있는 능을 탈해왕릉으로 정하였다.

오늘날 경주지역에는 양정구(壤井丘)라는 지명은 없다. 구전으로 성동동 전랑지(城東洞 殿廊址) 주위를 양정구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인왕동의 선덕여자 중, 고등학교 남쪽 사거리에서 성동동 전랑지에 이르는 대로 이름이 양정로(壤井路)이다.

탈해왕 시기에는 월성이 축조되지 않았으므로 성북(城北)을 금성 북쪽으로 고려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와 동경잡기에는 금성 위치를 경주부 동쪽 4리에 있는 성동동 전랑지와 남고루 일대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석씨 일족은 황오동의 남고루와 성동동 전랑지 북쪽의 가까운 지역이 양정구(壤井丘)로 판단되나 주변에 왕릉이라고 추정되는 고분이 없어 부득이 소금강산 남쪽의 이름 없는 고분을 석탈해왕릉으로 정하였다.

신라시대 왕 중 석씨 왕은 모두 8명으로 시조인 탈해왕을 제외하고는 장지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조선후기 17세기말~18세기 족보 간행과 이에 따른 조상숭배 대상의 확대가 될 당시 석씨 일족은 경주지역 사회에서 세력이 미약하고 그들만의 족보가 미처 완성되지 못하여 현재 경주 일대 왕릉 중 석씨 왕릉은 이곳 석탈해왕이 유일하다.

경주시 양남면 상계(上溪)리에 서왕(西王)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원래 씨 왕릉이 있어 석왕리(昔王里)이나 마을이름에 그 왕명을 칭하는 것은 곤란하다하여 서왕리로 변하였다고 한다. 예전부터 이 마을 북쪽에 석씨 임금의 능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탈해(脫解) 이사금(尼師今)은 나이가 62세에 왕위에 올랐다. 성은 석씨(昔氏). 토해(吐解)라고도 불렀는데 해를 토해낸다는 뜻으로 훗날 토함산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탈해의 아버지는 다파나국(多婆那國)의 왕, 용성국(龍城國)의 함달파왕(含達婆王), 혹은 완하국(琓夏國)의 함달왕(含達王) 등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어머니는 여국왕(女國王)의 딸 또는 적녀국왕(積女國王)의 딸이라고 하는 등 다국적 혈통을 지닌 인물이 탈해이다. 왕비는 남해차차웅의 딸 아효(阿孝阿尼, 또는 남해차차웅의 누이동생 阿老)부인이다.

즉위 248월에 별세하였고 성의 북쪽 양정 언덕(城北壤井丘)에 장사지냈다.

석탈해의 장지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삼국유사 왕력과 기이편내용이 서로 다르다. 삼국유사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재위(在位) 23년 만인 건초(建初) 4년 기묘(己卯; 29)에 죽어서 소천구(疏川丘) 속에 장사지냈다. 그런데 뒤에 신()이 명령하기를, “조심해서 내 뼈를 묻으라고 했다. 그 두골(頭骨)의 둘레는 석 자 두 치, 신골(身骨)의 길이는 아홉 자 일곱 치나 된다. []는 서로 엉기어 하나가 된 듯도 하고 뼈마디는 연결되어 있었다. 이것은 이른바 천하에 짝이 없는 역사(力士)의 골격(骨格)이었다.

이것을 부수고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 안에 모셔 두었다. 그랬더니 신()이 또 말하기를, “내 뼈를 동악(東岳)에 안치해 두어라했다. 그래서 거기에 봉안케 했던 것이었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탈해脫解가 죽은 뒤 27문호왕文虎王 때 조로調露 2년 경진庚辰(680) 315일 신유辛酉 밤 태종太宗의 꿈에, 몹시 사나운 모습을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였다. “내가 탈해脫解이다. 내 뼈를 소천구疏川丘에서 파내다가 소상塑像을 만들어 토함산吐含山에 안치하도록 하라.” 은 그 말을 좇았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지금까지 제사를 끊이지 않고 지내니 이를 동악신東岳神이라고 한다).

삼국유사 내용을 정리하면, 소천구(疏川丘)에 묻힌 석탈해의 뼈를 꺼내어 이것을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 안에 모셔 두었다가 문무왕 때 토함산 정상으로 옮겨 사당을 짓고 동악신(東岳神)으로 제사를 지냈다기록에 따르면 고려시대 까지 석탈해 사당에 국가에서 지속적으로 제사를 지냈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폐사되어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없다.

신라 4탈해(脫解) 이사금(尼師今, 재위 57~80)

석탈해는 키가 9척에 이르고 성품이 너그럽고 지혜로웠고 학문과 지리에 두루 통달하게 되었다. 당시 이름난 신하인 호공(瓠公)의 집터(뒤에 月城이 됨.)가 좋음을 보고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에 묻어놓고는 자기의 집이라 우기니 관가에서는 주장하는 근거를 요구하였다. 이에 자신의 조상이 본래 대장장이였으니 땅을 파서 조사하자고 하여, 과연 숫돌과 숯이 나오자 탈해가 승소(勝訴)하여 그 집을 차지하였다.

이 같은 내용의 설화에서, 첫째 탈해 집단이 경주 동해변에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은 그가 죽은 뒤 동악신(東岳神)으로 봉사(奉祠)되었음에서도 확인된다. 둘째는 석씨부족이 어로를 주요생활수단으로 하였지만, 이미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적어도 철을 다루는 능력이 왕위계승에까지 연결되는 강점의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탈해는 서기 8(남해 차차웅 5)에 유리왕의 사위가 되고, 서기 10년에는 대보(大輔)란 벼슬에 올랐으며, 유리이사금의 즉위시에 이미 왕위계승의 물망에 올랐지만, 유리이사금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먼저 왕이 된 다음 유리이사금이 죽자 탈해가 왕위에 올랐다.

탈해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해차차웅의 사위이니 결국 박씨 집단(朴氏集團)의 일원이라는 동속개념(同屬槪念)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 철을 이용한 군사력 및 거기에 따르는 실질적인 정치실력파의 등장으로 박씨족과 석씨족이 연맹하였으며, 이것은 왕실세력의 폭을 넓혔다고 본다.

즉위 2년 정월, 호공(瓠公을 대보(大輔)로 임명하였고 2월에는 직접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33월 왕이 토함산에 올라가니, 우산 모양의 검은 구름이 왕의 머리 위에 피어났다가 한참 후에 흩어졌다. 5월에는 왜국과 친교를 맺고 사신을 교환하였고 6월에는 천선 성좌에 혜성이 나타났다.

58월 마한 장수 맹소가 복암성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710월 백제왕이 국토를 개척하여, 낭자곡성까지 넓히고 사신을 보내 왕을 만나기를 요청했으나, 왕은 가지 않았다.

88월 백제가 군사를 보내 와산성을 공격하였다고 10월에는 백제가 다시 구양성을 공격하자 왕은 기병 2천 명을 보내 그들을 공격하여 물리쳤다. 12월에는 지진이 있었고 눈이 내리지 않았다.

10년 백제가 와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2백 명을 그 곳에 남겨 거주시키며 수비하게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우리가 이 땅을 다시 빼앗았다.

11년 정월 박씨의 귀척으로 하여금 국내의 주와 군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 그 직위를 각각 주주와 군주라고 불렀다. 2월에는 순정을 이벌찬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맡겼다.

14년 백제가 침범하였고 17년 왜인이 목출도를 침범하였다. 왕이 각간 우오를 보내 방어토록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고 우오가 전사하였다188월 백제가 변경을 약탈하므로 군사를 보내 이를 방어하였다.

19년 큰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10월에는 백제가 서쪽 변경의 와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209월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하여 와산성을 다시 찾았다. 백제에서 와서 살고 있던 2백여 명을 모두 죽였다.

218월 아찬 길문이 가야 군사를 상대로 황산진 입구에서 싸워 1천여 명을 죽였다. 길문을 파진찬으로 임명하여 그 전공에 해당하는 상을 주었다232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가 다시 북쪽에 나타나더니 20일 만에 사라졌다.

244월 서울에 큰 바람이 불어 금성 동문이 저절로 무너졌고 8월에 왕이 별세하였다. 성의 북쪽 양정 언덕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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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나 사정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화합하지 못하는 상태를 갈등(葛藤)이라고 하는데 갈등은 칡과 등나무이다. 칡은 줄기를 왼쪽으로,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감고 올라가기 때문에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혀 해결의 실마리가 찾는 것이 어렵다라는 의미가 된다.
현곡면 오류리에 있는 등나무(현곡면 오류리 527번지)는 1962년 12월 7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등나무는 4그루인데, 두 그루씩 모여서 자라고 있다. 가슴높이의 줄기지름이 각각 20·40·40·50cm이며 팽나무를 감고 올라가고 있다. 높이 17m이로 동서쪽으로 20m, 남북쪽으로 50m 정도 퍼져있다.

어떤 일이나 사정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화합하지 못하는 상태를 갈등(葛藤)이라고 하는데 갈등은 칡과 등나무이다.
칡은 줄기를 왼쪽으로,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감고 올라가기 때문에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혀 해결의 실마리가 찾는 것이 어렵다”라는 의미가 된다.

()은 콩과에 속하는 덩굴성 식물로 5월에 연보라색의 꽃이 핀다봄을 알리는 꽃향기로 아카시아나무 꽃향기와 더불어 등나무 꽃 향기는 은은하고 깔끔한 향기가 난다. 또한 여름에는 나그네에게 그늘을 제공하는 여름나무이다.
()이라는 한자는 위로 감고 올라가는 모양을 본떠서 만든 상형문자이다학술적으로 이 나무의 본래 이름은 참등이라고 하는데 흔히 등이라고 하여 산등이나 애기등 같은 등류를 통칭한다.

등(藤)은 콩과에 속하는 덩굴성 식물로 5월에 연보라색의 꽃이 핀다.
등(藤)이라는 한자는 위로 감고 올라가는 모양을 본떠서 만든 상형문자이다.

신라 시대 때, 이곳을 용림(龍林)이라 하여 왕이 수렵을 즐기던 곳이었다여기의 등나무를 용등(龍藤)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등나무 줄기의 꼬임과 그 위엄을 용에 견주어 붙인 명칭이다. 이 등나무 옆에 깊은 샘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고 옆에 실개천이 흐르고 있다.

여기에 슬픈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때 어느 농가에 열아홉 살, 열일곱 살이 된 예쁜 두 딸이 있었는데 둘다 남모르게 이웃집 청년을 사모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청년이 싸움터로 출정하게 되어 떠나게 되고 그 모습을 몰래 보며 눈물을 짓다 두 자매는 같이 그 청년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정한 자매가 서로 양보하기로 결심하고 있을 때 그 청년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로 얼싸안고 울다가 함께 못에 몸을 던졌다.

자매가 그 청년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로 얼싸안고 울다가 함께 못에 몸을 던졌던 연못가에는 등나무 두 그루가 자라기 시작하였다.

그 뒤로 연못가에는 등나무 두 그루가 자라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죽은 줄만 알았던 청년이 훌륭한 화랑이 되어 돌아오게 되었고, 이 화랑은 세상을 등진 자매의 애달픈 사연을 듣고서 자신도 연못에 몸을 던졌다. 화랑이 죽은 연못가 자리에서 팽나무가 자라 나왔고 이로부터 등 두 그루는 팽나무를 힘차게 감고 올라가 자라 5월이 되면 탐스러운 꽃송이로 그윽한 향기를 퍼뜨리고 있다. 이에 두 그루 등나무는 팽나무를 감고 자라며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을 달래고 있다고 한다.

화랑이 죽은 연못가 자리에서 팽나무가 자라 나왔고 이로부터 등 두 그루는 팽나무를 힘차게 감고 올라가 자라 5월이 되면 탐스러운 꽃송이로 그윽한 향기를 퍼뜨리고 있다.
두 그루 등나무는 팽나무를 감고 자라며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을 달래고 있다고 한다.

이 애틋한 전설에서 유래되었는지 신혼부부의 금침(베게)에 등꽃을 따서 말린 것을 넣어주면 정이 한층 깊어진다는 말도 전하여지고 있으며, 또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할 때 등나무의 잎을 달여 마시면 정이 다시 살아난다는 속신도 있다.

신혼부부의 금침(베게)에 등꽃을 따서 말린 것을 넣어주면 정이 한층 깊어진다는 말도 전하여지고 있다.

현곡면(見谷面)은 경주시의 서북쪽에 있는 면으로 남쪽으로 경주시내, 동쪽으로 천북면, 북쪽으로 안강읍, 서쪽으로 건천읍과 영천시 고경면에 접해 있다. 서쪽에서 발원하는 소현천을 중심으로 작은 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소현천은 동쪽의 형산강에 합류된다.
‘현실’이라는 순우리말 이름을 한자의 소리와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 ‘현곡(見谷)’이라는 설이 있다. 오류리(五柳里) 이름은 마을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었다 해서 유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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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건천읍 금척리 207-2 평지 일대(129,643)에 위치하고 있는 금척리(金尺里) 고분군(古墳群)은 경주에서 건천읍으로 올라가는 국도 4호선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고분이 나뉘어져 있다. 일제강점기 때 조사에서 모두 52기의 봉토분이 확인되었으나 현재는 32기 정도만 확인되고 있다. 이 고분군은 1963121일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고 경주 시내 중심부의 고분군을 제외하면 경주 주변 외곽에서는 대형봉토분들이 가장 많이 밀집해 있는 고분군이다.

금척리(金尺里) 고분군(古墳群)은 경주에서 건천읍으로 올라가는 국도 4호선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고분이 나뉘어져 있다.
건천읍에서 경주 방향으로 가는 국도 4호선

이곳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하늘에서 받은 금으로 만든 자(金尺)를 숨기기 위해서 40여 개의 가짜무덤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지금도 이 무덤들 속에 묻혀 있을 것이라 전해지고 마을 이름 또한 금척리라고 명명되었다.

또 다른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신라에 금자를 왕에게 바친 사람이 있었다. 죽은 사람이라도 이 금자로 한번 재면 다시 살아나고 무슨 병이라도 금자로 한번 쓰다듬으면 그 자리에서 낫는다는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왕은 이 금자를 국보로 여겨 매우 깊숙한 곳에 두었다.

국도 4호선을 사이에 동쪽에 있는 고분군에서 본 서쪽 고분군

이런 소문이 당나라에 전해지자 당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내 금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왕은 국보에 해당하는 금자를 달라고 하는 무뢰한 사신에게 순순히 금자를 내줄 수가 없었다. 곧 신하에게 명하여 토분을 만들고 그 속에 금자를 파묻었으며 주변에 다른 토분을 만들어 어느 곳에 금자를 묻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나라 사신은 그 많은 토분을 헤치고 금자를 찾아낼 기력이 없었던 듯 물러나고 말았다. 왕의 지략으로 금자를 당나라에게 빼앗기지 않았으나 이후 어느 토분에 금자가 묻혔는지는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고 한다.

국도 4호선을 사이에 서쪽에 있는 고분군
서쪽에 있는 고분군이 동쪽 고분군보다 규모가 큰 고분이 많다.

현재 남아 있는 봉토분들은 대부분 원형분으로 보이나 몇 기의 표형분(瓢形墳)도 확인된다. 또 많은 고분의 봉토 윗부분에서 함몰된 형상을 찾을 수 있어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봉토는 직경 25m 이상의 크기를 가진 것들도 있어 신라의 지방 고총들과 유사한 크기를 가졌다

금척리 고분군은 일제강점기 때 4번국도 건설공사 중 고분의 존재를 확인한 바 있다. 발굴조사는 1952, 1976, 19813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1952년 발굴조사는 도로확장공사로 파괴된 고분(1·2·3) 2기에 대한 발굴조사를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에서 32일부터 8일까지 실시하였다.

맨 오른쪽은  표형분(瓢形墳 )

무덤 내부는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파고 덧널()을 설치한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였다. 조사결과 출토유물에는 1호분에서 금제세환이식·곡옥·호박제 구슬·토기 및 철기편이, 2호분에서는 많은 토기편과 소량의 철기편이 수습되었다. 따라서 1호분은 고분의 주곽부, 2호분은 부곽 가능성이 크다.

1976년 발굴조사는 318일 토사 채취 중 토기편이 발견됨에 따라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적석목곽묘의 고분 4기와 우물 1기가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고배·대부장경호 등 모두 토기이다.

1981년 발굴조사는 상수도시설 공사 중 노출된 고분들에 대한 발굴조사를 경주사적관리사무소와 국립경주박물관 합동으로 423일부터 531일까지실시하였다. 수혈식석곽묘 3, 옹관묘 2, 토광묘 2기 등 모두 15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다. 토광묘는 적석목곽묘보다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다.

출토된 유물로는 금제귀고리(金製耳飾), 곡옥장식목걸이(曲玉附頸飾), 은제허리띠(銀製) 등이 있는데,신라 지방 고총들에서 출토되는 양상과 유사하다. 출토된 유물들로 보아 고분군이 조성된 중심 연대는 5세기6세기중반으로 추정된다.

여기 건천읍에 있는 모량리(牟梁里)의 모량(牟梁)이라는 옛 지명이 남아 있어, 금척리 고분군을 신라의 6부 가운데 하나인 모량부(牟梁部) 귀족들의 무덤들로 보고 있다.

국도 4호선을 사이에 동쪽에 있는 고분군

모량부(牟梁部)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으로 촌장(村長)은 구(; 라고도 씀) 예마(禮馬)이다. 처음에 이산(伊山; 개비산皆比山이라고도 함)에 내려왔으니 이가 점량부(漸梁(혹은 涿)),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모량부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24대 진흥왕의 왕비인 지소부인(知召夫人) 또는 식도부인 박씨(息道夫人 朴氏)의 출신지로 고분을 평지에 대규모로 조성하여 그 존재감을 강조하였고, 부장유물에 있어서 시내 고분과 크게 차이가 없어 신라의 중앙정계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던 세력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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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릉(五陵)은 경주시 탑동 67-1번지에 있는 다섯 기의 왕릉으로 1대 혁거세왕(赫居世王, 기원전 57~ 서기 4), 알영왕비,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의 능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느 능이 누구의 능인지 명시되지 않고 있다.

신라시조 혁거세왕(赫居世王)은 성이 박씨이며, 전한 효선제 오봉(五鳳) 원년(元年) 갑자(甲子; 57) 4월 병진(정월 15]에 왕위에 올랐다. 왕호는 거서간(居西干, 또는 거슬감[居瑟邯]) 이다. 이 때 나이는 열 세 살이었으며 나라 이름은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었다. 사라(斯羅)사로(斯盧)라고도 했다. 남산(南山)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昌林寺)에 궁실(宮室)을 세웠다.

일설(一說)에는 탈해왕(脫解王) 때 김알지(金閼智)를 얻는데 닭이 숲속에서 울었다 해서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이라 했다고도 한다. 후세에 와서 드디어 신라(新羅)라는 국호로 정했던 것이다.

박혁거세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삼국유사에서 전해지고 있다. 박혁거세가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이 되던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갔는데, 7일후에 몸뚱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그리고 왕후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하직하였다고 한다. 나라 사람들이 이들을 합장하여 장사지내려하자 큰 뱀이 나타나 방해를 하므로 머리와 사지를 제각기 장사 지내 오릉(五陵)을 만들고 능의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 하였다.

오릉은 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와 삼국유사(三國遺事)기이편에 의거하면, 통일신라 중대 이후부터 사릉(蛇陵사릉원(蛇陵園)이라는 능호(陵號)와 함께 혁거세왕과 알영부인의 능 또는 혁거세왕·남해왕·유리왕·파사왕의 능으로 알려지기 되었다.

능원 에는 조선 세종 11(1429)에 왕명에 따라 건립 된 숭덕전(崇德殿)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선조 33(1600)에 다시 지었고 숙종 20(1694)에 수리하였다. 경종 3(1723)숭덕전이라는 편액을 걸었고, 영조 11(1735)에 건물을 수리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영조 때 수리한 모양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제사는 처음에는 국가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에 와서 박씨 문중에서 주관하여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숭덕전(崇德殿) 일대
알영부인이 탄생하였다는 우물로 전해지고 있는 알영정(閼英井)
알영정(閼英井) 상부는 담암사(曇巖寺)에서 사용 된 장대석으로 우물을 덮고 있다.

영조 35(1759)에 세운 신도비가 숭성각(崇聖閣)에 있는데, 비석에는 혁거세왕과 숭덕전의 내력이 새겨져 있다. 알영부인이 탄생하였다는 우물로 전해지고 있는 알영정(閼英井)이 있는데 담암사(曇巖寺)에서 사용 된 장대석으로 우물을 덮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세워진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비(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碑)가 있다. 그리고 담암사(曇巖寺) 당간지주(幢竿支柱)의 기둥을 사용하여 세운 홍전문(紅箭門)이 있다.

숭성각(崇聖閣)
숭성각(崇聖閣) 입구
숭성각(崇聖閣)  안에는 영조 35년(1759)에 세운 숭덕비(崇德碑)가 있다.
숭덕비(崇德碑)에는 혁거세왕과 숭덕전의 내력이 새겨져 있다.
담암사(曇巖寺) 당간지주(幢竿支柱)의 기둥을 사용하여 세운 홍전문(紅箭門)

담암사(曇巖寺)는 전불시대의 칠처가람지 중 하나로 절터는 현재 숭덕전 일대로 보고 있다. 당간지주(幢竿支柱)7세기로 추정된다. 담암사(曇巖寺)에 대한 기록은 문무왕 9(679)에 사천왕사 다음에 기록되어 있는데 칠처가람지 중 가장 늦게 기록되어 있다.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비(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碑) 가는 입구

오릉의 외형은 원형봉토분으로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능부터 제1호분으로 시작하여 마지막 제5호분까지 부르고 있다. 1호분은 높이 8.7m, 직경 41.4,m5기 중 가장 크다. 2호분은 표주박형태로 높이는 각각 5.1m, 4.5m 직경은 장변 36.5m, 단변 20m이다. 3호분은 제1호분의 동쪽에 있으며 높이 5.1m, 직경 26.1m 이고 제4호분은 제3호분의 북쪽에 있으며 높이 2.5m, 직경18.2m이다. 5호분은 제3호분의 동북쪽에 있으며 높이 2.1m, 직경 17.5m이다.

표주박형태의 제2호분은 2기의 원형분이 합쳐져서 하나의 표형분이 된 부부합장묘로 추정되고 오릉 구역에 있는 능의 수는 실제로 6기로 능에 묻힌 피장자도 6명이다. 신라에서 5세기 이전에 존재하는 원형봉토분이 아직 확인된 것은 없다. 혁거세왕릉으로 추정되는 제1호분만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고 나머지는 작은 능이다. 나머지 능의 왕 재위기간이 1세기와 2세기 초로 당시 묘제 양식은 목관묘(木棺墓)로 고려하면 오릉과는 관련이 없다.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비(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碑)가 있는 건물(閣)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세워진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비(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碑)

신라의 묘제 양식은 기원 전후한 시기부터 살펴보면 기원전 1세기부터 1세기 때는 목관묘이고 2세기부터 4세기 중엽은 목곽묘이다. 이들 묘의 형태는 평면 장방형이거나 타원형으로 높이는 1.5m 내외로 소형분이다. 그래서 세월이 흐르면 목관이나 목곽은 부식 및 침하되어 지표상에서 발견하기가 어렵다. 간혹 도로개설이나 건물신축과정에서 발견되고 있다.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 때는 적석목곽분이고 6세기 중엽이후 부터는 횡혈식석실분이 축조되었다.

오릉의 묘제 대한 고고학적 결론을 보면 능의 축조 시기는 6세기 전반으로 귀족의 묘로 규모가 가장 큰 1호분 적석목곽분을 중심으로 신분적으로 차별성을 가진 혈연집단, 또는 배장묘로 보고 있다.

오릉을 만나기 위해 지나가는 숭의문
오릉 앞 제자 지내는 제각

그럼 문헌 기록을 통해 오릉의 실체를 들여다보자.

삼국유사에 박혁거세의 능을 오릉으로 기록한 것은 신라 불교공인에 따라 구전으로 전승 된 설화로 변재천녀(辨才天女)의 시신을 각각 매장하여 오릉을 조성한 불교설화를 박혁거세의 사변설화(蛇變說話)로 변형하여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오릉의 다섯 능을 박혁거세왕, 남해왕, 유리왕, 파사왕을 의도적으로 설정하여 기록하였다. 왕비인 알영부인의 능은 언급 없이 묵시적으로 오릉에 포함시켰다. 이후 17세기 박씨 문중에서 대외적으로 오릉에 알영부인을 포함시켰다.

실제 박혁거세의 능을 포함한 신라 초기 왕들의 능은 어디에 있을까?

박씨 일족의 세력권인 남산 서부 구릉지 또 남산 서북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박혁거세는 왕위에 오르기 전 13년을 현재 창림사지에 거주하였고 즉위 21년 때 축조한 궁궐, 도성 역할을 했던 금성 위치는 현재 경주고 일대 또는 월성 서쪽 끝을 추정하고 있다. 이후 5대 파사왕 즉위 22년 때 금성에서 현재 반월성인 월성으로 궁궐을 옮겼다.

신라시조 혁거세왕(赫居世王)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즉위 8(기원전 50)에는 왜인들의 침임이 있었으나 왕이 덕이 있음을 알고 물러갔다고 되어있고 즉위 17(기원전 41)에는 왕과 왕비가 전국을 돌며 민정을 살피면서 농업과 양잠을 독려했다 즉위 19년 봄 정월에는 변한이 항복해 왔고 즉위 21년에는 도성을 지었는데 이를 금성이라 불렀다고 한다. , 금성은 신라 최초의 도성인 셈이다.

즉위 30, 낙랑이 쳐들어왔다가 노적가리가 밖에 쌓여있는 것을 보고 도적질 하지 않는 의로운 나라라 하여 물러갔다고 되었다즉위 38년, 봄 2월에 호공을 보내 마한을 예방하였다. 호공이란 사람은 그 집안과 성씨가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본래 왜인이었는데, 처음에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 왔기 때문에 호공(匏公)이라고 불렀다.

즉위 39, 마한 왕이 별세하였고 곧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즉위 53, 동옥저의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쳤다.

즉위 61, 3, 별세하였고 사릉에 장사지냈다.

신라 2대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재위 서기 4~24)

남해거서간(南解居西干)을 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한다남해(南解) 차차웅(次次雄)은 박혁거세(朴赫居世)와 알영부인(閼英夫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대문(金大問)은 말하기를, “차차웅(次次雄)이란 무당을 이르는 방언(方言)이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고 공경한다. 그래서 드디어 존장(尊長)되는 이를 자충(慈充)이라 한다고 했다. 오직 남해왕(南解王)만을 차차웅(次次雄)이라고 불렀다.

왕비는 운제부인(蕓帝夫人) 또는 아루부인(阿婁夫人)이다. 지금 영일현(迎日縣) 서쪽에 운제산(雲梯山) 성모(聖母)가 있는데 가뭄 때 여기에 기도를 드리면 감응感應이 있다)이다. 삼국사기에 남해 차차웅은 키가 크고 성품이 심화하였으며 지략이 뛰어났다고 되었다. 즉위년에 낙랑국(樂浪國)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침범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다.

즉위 5년에는 석탈해를 사위로 삼고 즉위 11년에는 왜인이 침략하였고 낙랑이 금성을 공격하였다. 전한(前漢) 평제(平帝) 원시(元始) 4년 갑자(甲子; 4)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지 21년 만인 지황(地皇) 4년 갑신(甲申; 24)에 죽었다. 이 왕이 삼황(三皇)의 첫째라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사금(尼師金)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잇금[齒理]을 이르는 말이다라고 했다. 처음에 남해왕(南解王)이 죽자 그 아들 노례(弩禮)가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이에 탈해(脫解)가 말하기를, “나는 들으니 성스럽고 지혜 있는 사람은 이가 많다고 한다하고 떡을 입으로 물어 시험해 보았다.

고전(古典)에는 이와 같이 전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임금을 마립간(麻立干)이라고도 했다. 이것을 김대문(金大問)은 해석하기를, “마립간(麻立干)이란 서열을 뜻하는 방언(方言)이다. 서열(序列)은 위()를 따라 정하기 때문에 임금의 서열은 주()가 되고 신하의 서열은 아래에 위치한다. 그래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했다.

사론(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왕(新羅王)으로서 거서간(居西干)과 차차웅(次次雄)이란 이름을 쓴 이가 각기 하나요, 이사금(尼師金)이라고 한 이가 열여섯이며, 마립간(麻立干)이라 한 이가 넷이다. 신라 말기의 명유(名儒) 최치원(崔致遠)<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을 지을 적에는 모두 모왕(某王)이라고만 하고 거서간(居西干) 등이라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혹시 그 말이 야비해서 부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인가. 그러나 지금 신라의 일을 기록하는 데 방언(方言)을 모두 그대로 두는 것도 또한 마땅한 일일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추봉(追封)된 이들을 갈문왕(葛文王)이라고 불렀는데, 이 일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남해왕(南解王) 때에 낙랑국(樂浪國)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침범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다. 또 천봉(天鳳) 5년 무인(戊寅; 18)에 고구려(高句麗)의 속국인 일곱 나라가 와서 항복했다.

신라 제3대 유리이사금(儒理尼師金, 재위 서기 24~57)

남해 차차웅의 태자이며 노례이질금(弩禮尼叱今)으로 삼국유사에서는 기록되었다. ()의 이름은 알 수 없고, 일지갈문왕(日知葛文王)의 딸 박씨, 혹은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 혹은 사요왕(辭要王)의 딸이라는 세 가지 설이 있으며, 일지갈문왕의 딸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한다.

이사금이라는 왕호는 이질금(尼叱今), 치질금(齒叱今)이라고도 쓰는데, 󰡐잇금(齒理,또는 나이의 순서)󰡑을 의미하는 신라 방언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사금시대 왕의 성격은 부족연맹장(部族聯盟長)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즉위 5(서기 28)에 민신을 살피다가 얼어 죽어가는 노파를 보고 최극빈층을 돌보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다음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나라의 태평을 기원하였고, 차사(嗟辭)와 사뇌격(詞腦格)이 있었다. 또 보습과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와 수레를 만들었다.

즉위 9(32)6(六部)의 이름을 고치고 이들에게 이(), (), (), (), (), ()의 성()을 주었으며, 17관등(官等)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이때 6부를 정한 기념으로 6부의 여자들을 두 편으로 갈라 길쌈을 짜게 하여 815일에 그 많고 적음을 보아 승부를 결정짓는 가배(嘉俳)놀이를 시켰는데, 이때 부른 노래가 회소곡(會蘇曲)이었다. 가배놀이는 우리 고유의 공동노동양식인 두레나 품앗이로 변천하였고 이것이 후일 여성 집단인 원화(源花), 남성 집단인 화랑(花郞)이 되었다.

즉위 14(서기 37)에는 고구려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하였고 그 낙랑의 피난민 5천여명이 귀순해왔다고 한다. 이 낙랑은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이야기가 나오는 그 낙랑이다.

즉위 18(서기 42)에 이서국(伊西國)을 쳐서 멸망시켰다. 이 해에 고구려(高句麗) 군사가 침범해 왔다. 유리 이사금은 재위 34년 되던 해에 두 아들을 제치고 재능이 뛰어나다는 이유를 들어 매형인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잇게 하고 죽어, 사릉(蛇陵)에 묻혔다.

신라 5대 파사이사금(婆裟尼師金 재위 서기 80~112)

삼국사기에서는 파사왕의 출생에 대해 두 가지 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첫째, 유리이사금의 둘째아들로 태자 일성(逸聖)보다 인품이 뛰어나 즉위하였다고도 하고, 둘째, 유리이사금의 아우인 내로(奈老)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파사이사금의 어머니는 사요왕(辭要王)의 딸이고 왕비는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인 사성부인(史省夫人, 혹은 史肖夫人)이다.

파사이사금이 유리이사금의 직계라면 탈해이사금 이후 왕위를 계승한 것이 문제가 없으나, 그가 내로(奈老)의 아들일 경우 월성(月城)에 기반을 둔 석씨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즉위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파사이사금은 즉위 2(서기 81) 2월에 몸소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3월에 주군(州郡)을 두루 돌며 위무하고, 창고를 열어 어려운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의 정상을 살펴 두 가지 사형죄[二罪]가 아닌 사람은 모두 풀어 주었다고 되어 있다.

한편, 내우외환에 대비하기 위해 즉위 3(서기 82) 봄 정월에 영()을 내려 말하였다. 지금 창고는 텅 비었고 병기는 무디어져 있다. 만약 수재(水災)나 한재(旱災)가 있거나 변방에 변고가 있으면 무엇으로써 그것을 막겠는가? 마땅히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게 하고 병기를 벼리어서 뜻밖의 일에 대비하라고 하였다 한다.

이 시기에 신라는 백제와 가야 그리고 왜인들에게도 시달림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도 나타나 있다. 즉위 8(서기 87) 가을 7월에 영()을 내려 말하였다. 나는 덕이 없으면서도 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백제와 이웃하여 있고 남쪽은 가야와 연접해 있다. 나의 덕은 능히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고 위엄은 이웃 나라를 두렵게 하기에 부족하니 마땅히 성루(城壘)를 수리하여 침입에 대비하라.

이 달에 가소성(加召城)과 마두성(馬頭城)의 두 성을 쌓았다. 이 두 성은 신라가 금성을 벗어나 세운 최초의 국경방위시설이었다. 즉위 22(서기 101)에 월성을 쌓아 궁실을 옮겼다. 즉위 33(서기 112)에 죽자 사릉원(蛇陵園) 안에 장사 지냈다고 되어 있다.

오릉 내 조성 된 연못

일부 학계에서는 오릉, 사릉을 쿠데타 즉 반란의 결과로 보고 있다. 반란으로 박혁거세를 비롯하여 왕비, 장남 등 직계가족이 처참히 살해되었고 7일이 지나서 시신을 찾을 수 있었으나 시신 훼손이 심하여 식별할 수 가 없었다. 이에 다섯 기의 능을 축조하여 시신을 각각 안치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오릉에서 바라본 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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