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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도시 울산에는 옛 부터 군사적으로 전략요충지로써 조선시대의 성곽유적인 경상좌도수군절제사영성과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성(慶尙左道兵馬節度使營城)이 있다. 특히 왜와 거리상으로 가까운 지역으로, 고려 말·조선 초 이후 지속된 왜구의 침탈에 대비하여 해안 지방의 철저한 방어선이 필요했다. 이곳 개운포성지 남쪽으로는 외황강 하류를 접하고  서북에서 동남으로 흘러 동해로 들어간다. 이런 입지 조건이 일찍부터 수군이 주둔할 수 있게 했고 조선 수군만호진(水軍萬戶鎭)과 경상좌도 수군 절제사영(慶尙左道水軍節制使營)의 진·영성이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개운포성지 표지석과 우측에 보이는 환경처리시설 굴뚝

  문헌기록을 살펴보면 태종 7년의 최초 기록을 통해 보면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으나 수군과 관련된 기지가 이곳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1425)에 개운포에 만호진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세조(世祖) 5, 1459년에 좌수영이 개운포로 이전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개운포성은 용도와 목적, 규모의 변화를 여러 차례 겪으면서 몇 번의 증·개축과 보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최초 축조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의 영성(營城)으로 사용된 시기는 조선 전기 세종 5(1459)부터 선조 25(1592)까지 이며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자기들은 개운포성의 사용시기인 15세기 초17세기에 제작된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기록상의 성 운용시기와 부합된다.

개운포성지 남쪽 성벽

온산만 처용암 옆을 오가는 뱃길은 천 년 전 신라 헌강왕의 눈길이 머문 곳이고, 조선초기에는 지금으로 치면 해군사령부(개운포영성)의 군함이 정박하던 곳이다. 개운포 8경의 하나인 전함홍기(戰艦紅旗)로 도열한 군함의 붉은 깃발이 아름답고 하여 붙여졌다.

오늘날 개운포성터는 황량하고 쓸쓸하지 못해 마치 폐허처럼 변해 있다. 지난 강 건너편에 온산 국가산업단지가 들어섰고 마을 뒤에는 울산시 환경처리시설이 있어 뿜어대는 악취로 숨쉬기조차 곤란하다. 성안 주민들은 지금 두 세 가구만 남아 있고 외지로 떠났다. 부근의 하개마을과 염전은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된 석유화학단지 개발로 없어졌고, 선수마을을 비롯한 세죽, 성외 등의 마을도 1990년대 중반 이후 다운동으로 집단 이주하면서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되었다.

현재 개운포성을 돌아보면 성안 대밭과 남문 터 좌우 긴 석축만이 옛 성터임을 말해준다. 남문 터를 지나 들어가 북문 터까지 이어지는 S자형의 길은 본래 성안 길이 아니고 고압선 전신주 설치를 위해 한전 측이 넓힌 길이다. 예스런 멋은 없지만 이 길로 북문 터 가까이 언덕배기를 올라가면 성안마을의 옛 정취는 느껴볼 수 있다. 그러나 성벽 주변과 성 내부는 밭농사로 인해 경관과 성체 훼손이 심하다. 하루속히 시에서 매입하여 복원이 아니더라도 단정하게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 밖에서 외성을 따라 돌아보면 전체 윤곽을 짐작할 수 있다.

개운포성지 남쪽 성벽 주변

임진왜란 이후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이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으로 옮겨가고 그 장소에는 효종(1656) 때 전선소(戰船所)가 설치되었다. 당시 학성공원 아래 있던 전선창이 옮겨왔다. 전선창은 군선을 건조하는 시설을 뜻하고 일명 선소(船所)’라고 하였다. 성안 마을 웃각단 아래각단 등이 철거되기 전 선수마을이라고도 불리었다. ‘선수선소에서 전이된 발음이다. 군사 전략거점에서 지원병참시설로 그 기능을 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선창도 1895(고종 32) 수군 해산 때 문 닫게 되었다.

개운포성은 강변에 솟은 야산의 골짜기를 감싸며 구릉부를 따라 쌓은 포곡식(包谷式)으로 둘레는 1,270m 면적은 102,919정도이다. 2003년과 2005년 두 차례의 발굴 조사 결과 북문지, 동문지, 서문지, 4곳의 성벽, 남쪽과 북쪽에 해자가 확인되었다. 성벽은 돌로 쌓았으며 바깥 쪽에 해자[도랑]를 둘렀다. 돌로 쌓은 성벽은 일정한 간격으로 큰 돌덩이를 세워 구조적으로 안정되게 하였는데, 이러한 축조 방법은 울산 경상좌도병영성, 언양읍성 등 울산 지역의 성에서는 흔히 보이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어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남쪽 성벽과 해자

성벽 관련 주요 시설물로는 체성, 문지, 치성, 옹성, 수로 시설, 해자 등이 있고 건물지도 조사되었다. 발굴 조사 결과 성벽의 최대 너비는 4.0~4.7m, 잔존 최대 높이는 2.4m 정도다. 동문지의 경우 1회 중축한 것이 확인되었다. 만호진성이 수영성으로 바뀌면서 중축된 것으로 보인다. 성문지 주변에 기와편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상부에 누각이 있었을 것이다. 성벽 축조는 기초 부분을 판 다음 3~4단의 할석으로 기초를 쌓고 그 위에 기단석을 눕혀서 쌓았다. 기단석 끝에서 20정도 물려서 대석으로 세워쌓기를 하고 2단은 눕혀서 쌓았다. 내벽은 작은 할석으로 다지고 상부에는 흙을 여러 겹 쌓았다.

성벽 주변과 성 내부는 밭농사로 인해 경관과 성체 훼손이 심하다. 하루속히 시에서 매입하여 복원이 아니더라도 단정하게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개운포성의 문은 동···4개의 문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발굴조사가 진행되면서 출입을 위한 문은 동문과 북문으로 확인되었다. 동문은 성지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한다. 구조는 외측에 반원형의 옹성이 협축 방식으로 축조되어 있고 문지의 내측에는 확돌 2개가 입구부를 사이에 두고 대칭되게 확인되었다. 옹성은 남쪽 체성의 기단석에 잇대어 쌓은 형태이고 축조방법은 체성과 동일하다. 옹성의 면석은 체성의 면석에 비해 큰 편이다.

동문지 방향의 성벽
동문지 방향의 성벽 흔적

해자는 남쪽, 북쪽을 비롯하여 성벽 전체를 둘러싸고 설치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쪽(남문지)해자는 체성과의 이격 거리가 약 500이고 해자의 폭은 450, 최대깊이는 110내외이다. 북쪽(북문지) 해자는 자연 경사면을 이용하여 일정 깊이의 토사를 파내어 외성을 축조함으로 해자의 깊이를 극대화시키는 방식으로 축조되어있다. 체성에서 약 1015m 이상 떨어져 있으며 폭은 10m 정도이고 깊이는 600이상이다.

동문지에서 바라본 외황강과 공단모습

개운포성지(開雲浦城址)1997109일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었고 개운포(開雲浦)’라는 이름은 삼국유사(三國遺事)기이편의 처용랑 망해사조와 삼국사기(三國史記)헌강왕 5[879] 3월 기록에 보인다. 삼국유사에는 왕이 울주 고을 포구에 와서 쉬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서 길을 잃었는데, 일관이 말하기를 동해용의 조화이니 좋은 일을 하여 풀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왕이 절을 세워 주자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흩어져서 개운포라고 이름 지었다고 적고 있다.

동문지와 북문지 사이의 치성
북문지
북문지와 서남지 사이의 치성
추정 서문지에서 바라본 영서곶(營西串)
추정 서문지 가는 길
추정 서문지와 남체성 사이

개운포성지(開雲浦城址) 남쪽 강가에서 서쪽 끝으로 가면 영서곶(營西串) 또는 영시끝이 있다. 개운포영성(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성) 서쪽 곶으로 동해에서 외황강으로 침입하는 적선을 감시하거나 개운포영성을 방어하는 곳이다.

영서곶(營西串) 또는 영시끝
영서곶(營西串)에서 본 외황강과 개운포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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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하다보면 가끔 읍성을 만나는데 보통 바다와 가까운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주로 복원된 읍성을 마주보게 된다. 읍성은 해적, 즉 왜구로부터 고을을 방어 목적으로 축성한 것으로 행정기능과 군사기능을 겸하고 있다. 고려말에 처음 읍성을 축성했고 읍성 내부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거주하고 읍성 밖에는 지역주민이 거주했다. 읍성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조선총독부의 계획에 따라 해체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훼손되고 철거 된 자리에는 식민지 지배를 위한 시설부지로 활용되었고 군 및 읍사무소, 경찰서, 등기소 등이 건립됐다. 그리고 해방 후 도시화와 도로개설, 무관심 등으로 사라졌다. 현재 경주읍성, 언양읍성, 장기읍성, 낙안읍성, 고창읍성, 해미읍성, 홍주읍성 등이 남아 있다.
평산성(平山城)인 기장읍성의 위치는 토성(土城)인 기장읍 교리 일대와 석성(石城)인 동부리, 서부리, 대라리 일대이다. 현재 읍성의 형태를 볼 수 있는 곳이 동부리 기장초등학교 주변과 서부리 일대이다. 기장초등학교 주변은 공덕비군(功德碑群)과 더불어 나름 옛 멋이 남아 있고 서부리 일대는 복원되어 정비된 모습이다. 특히 기장읍성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죽성리 왜성을 축성하면서 필요한 돌을 기장읍성을 사용하면서 훼손되기 시작했다.
동부리 일대에는 동헌과 우물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기장초등학교를 지으면서 허물어 사라졌다. 교리 일대의 읍성(古邑城)은 고려 우왕(禑王:1374∼1388년)때 왜구의 침입으로 함락되어 관아가 모두 불에 전소되었다. 이후 다시 축조된 것이 동부리, 서부리, 대라리 일대의 읍성이다.

석성(石城)인 동부리 주변에는 동헌과 우물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기장초등학교를 지으면서 허물어 사라졌다.
기장초등학교 주변은 읍성과 더불어 공덕비군(功德碑群)이 있어 나름 옛 멋이 남아 있다.
기장군에 산재해 있는 공덕비 36기를 1972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이 곳에는 관찰사비 7기, 수군절도사비 1기, 어사비 1기, 현감비 14기, 군수비 5기, 아전비 2기, 객사건성비 1기, 교량건성비 1기, 교량개축 등 2기, 기타 3기 등 있다.
기장 죽성리 두호마을에서 발생한 조운선 양곡 절도의 원만한 해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기리기 위해 마을사람들이 이도재 생사단비가 여기에 있다. 생사단이란 고향 출신의 수령이 부임한 경우, 이의 탄생지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을 가리킨다.
비의 재질은 석재이고 비석 머리는 둥글고 받침돌은 없다. 비의 앞면에는 비의 제목 '수사 이공도재 생사단(繡史李公道宰生祀壇)' 이라 되어 있고, 내용은 '우리 고을에 왜 이리도 늦게 오셨나/ 그래도 하늘은 기필코 도우시네/ 수많은 폐단들을 모두 바로잡으시니/ 천추에 영원토록 기리오리다[來何暮兮 天必佑之 百弊咸正 千秌永祀]'라고 적혀 있다. 뒷면에는 '광서 계미년[1883] 봄에 세우다[光緖癸未春立]'라고 적혀 있고 건립자에 관한 기록은 없다. 비의 크기는 높이 92.5㎝, 너비 36㎝, 두께 13㎝이다.
비의 재질이 화강암이 아닌 철로 된 공덕비.
귀부를 가진 공덕비

일반적으로 읍성의 내부에는 객사(客舍)와 동헌(東軒), 외부에는 사직단(社稷壇), 문묘(文廟)와 같은 제사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읍성은 군사기능을 겸하고 있는데 평시에는 주민들은 성 밖에 거주하다가 유사시에 성 내로 들어와 방어를 한다.
왕 또는 국가를 상징하는 객사는 조선시대 관아건물로서 임금을 상징하는 闕牌(임금을 상징 하는 궐자를 새긴 위패)와 대궐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보관하고, 고을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망배를 드린 곳이며, 행정업무와 사신의 숙소로도 이용하였다. 객사구조는 일반적으로 궐패를 모시는 정청(正廳) 또는 주사(主舍)와 좌우 한 단계 낮은 건물인 동〮 서 익랑, 또는 익사(翼舍)로 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학교건물과 관청 건물로 사용되었다.
수령의 근무처인 동헌은 간혹 객사 정청과 같이 쓰이나 객사와 나란히 배치 되어있다. 주로 장방형의 평면에 마루방과 온돌방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 많다. 수령의 숙소이자 안채인 내아(內衙), 내사(內舍), 서헌(西軒)이 있다. 부속 건물로 지방출신 인물들의 자문기관인 향사당(鄕士堂), 향청(鄕廳), 군사업무를 보는 군관청, 도둑을 잡는 등 치안을 보는 토포청, 아전, 6방이 집무하는 작청, 등 있다.
읍성의 위치는 군사 방어목적과 백성생활을 위해 배산임수(背山臨水)형의 지형에 각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로가 발달한 곳에 자리 잡았다. 따라서 구릉지와 평탄지를 일부씩 포함하여 축조 된 평산성(平山城)이다.

서부리 일대 기장읍성은 복원되어 정비된 모습이다. 특히 기장읍성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죽성리 왜성을 축성하면서 필요한 돌을 기장읍성을 사용하면서 훼손되기 시작했다.

성벽은 고려시대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나 조선시대에는 주로 돌로 쌓은 석성이고 성을 쌓을 때 내부는 비탈이나 경사로 처리하고 외부 성벽만 쌓는 편축성(片築城)과 평지에서 내외·부 모두 쌓는 협축성(挾築城)이 있다. 특히 돌을 쌓아 올릴 때 밑쪽은 밑돌보다 윗돌을 약간 들여쌓는 퇴물림 쌓기와 반대인 내쌓기가 있다.
성벽 방어를 위해 성벽위에 낮은 담장을 올린 여장(女墻)도 갖추기도 하고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직사각형 또는 반원형의 구조물 치(稚), 치의 일종으로 성벽 모서리 부분에 설치한 각루(角樓), 성벽의 주변에 인공적으로 땅을 파서 고랑을 낸 해자(垓字) 등 있다.
성문은 성벽에 개구부를 내 출입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홍예문이 많다. 문비, 즉 문짝은 목재판문으로 제작하여 바깥쪽에는 철엽을 씌어 화공 등에 대비하였고 홍예문 위에는 목조로 누각으로 설치 한 문루를 지어 장수의 지휘소 기능과 적을 감시하는 기능을 겸하였다. 또한 성문 보호를 위해 성문을 밖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외부에 설치한 이중 성벽인 옹성과 성문에 좌우에 설치한 치(稚)인 적대가 있다.

기장읍성 주변 골목길에서 본 돌담

『문종실록(문종실록)』에 “기장현 읍성은 주위가 1,527척(척), 높이가 11척이고, 여장(녀장)의 높이는 2척이며, 적대가 6개소, 문 3개소인데 옹성이 있고, 여장이 383개이며, 성안에 우물이 1개소인데 판 깊이가 20척이고 물의 깊이는 1척이며, 성밖의 방천(방천)에서 성을 뚫고 물을 끌어들여 못을 만들어 저수하였는데 깊이는 1척이며, 해자(해자)는 아직 파지 않았습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을 통하여 읍성의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으나 적대가 6개이고, 옹성이 돌려진 성문이 3개소이며, 여장이 383개였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地理志)」에는 읍성을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50보(步)이며 성내에 못과 우물이 각각 하나씩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각종 읍지(邑誌)에는 읍성이 석축으로 둘레가 3,197척이고 성 높이가 12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교리 일대의 읍성(古邑城)은 고려 우왕(禑王:1374~1388년)때 왜구의 침입으로 함락되어 관아가 모두 불에 전소되었다. 이후 다시 축조된 것이 동부리, 서부리, 대라리 일대의 읍성이다.
교리근린공원 내 기장읍성은 부경문물연구원에서 2012년 지표 및 표본조사와 2014년 정밀조사를 한 결과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건물지를 확인하였고 청자류 등 유물이 출토되었다.

기장의 옛 이름은 갑화량곡(甲火良谷)이고 별호(別號)는 차성(車城)이다. 갑화량곡은 "큰 마을" 이라는 의미로 옛 지명에 갑(甲)은 “크다”의 뜻이고, 화(火)는 "불" "벌"로서 곧 마을이나 성을 뜻한다. 기장이라는 지명은 두 가지로 보고 있는데, 첫째는 옥녀직금설로 기장은 옥황상제의 옥녀가 이곳에 내려 와서 베틀(織機)을 차려서(張) 비단을 짜고 (織錦) 물레질(紡車)을 한 곳(城)이기 때문에 베틀 기(機)와 베풀 장(張)으로서 기장(機張)이라 하였고, 둘째로 대읍성설(大邑城說)은 “갑화량곡”과 같이 큰 마을이라는 의미다.
삼국시대 기장지역은 지증왕 6년(505) 거칠산국(居漆山國)의 갑화량곡(甲火良谷)에서 동래군의 갑화량곡현(甲火良谷縣)으로 개편되었고, 신문왕 때(685)에 9주 5소경의 군현제 개편시 삽양주에 편입되었다. 그리고『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장은 원래 갑화랑곡현(甲火良谷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16년(757) 12월 양주(良州)관내 동래군 기장현으로 고쳤다”고 한다.


속오군을 지휘, 통솔한 기장 장관청(機張 將官廳)
기장 장관청은 조선 후기 동남해변을 지키던 기장 지역의 속오군을 지휘·통솔하기 위해서 파견된 군·장관들이 사용하던 집무소이다. 당초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에 지붕은 팔작지붕이었으나 건립된 후 몇 차례의 개·보수를 거쳐 오다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변형이 이루어졌고, 특히 개인 주택으로 사용되면서 외관은 정면 8칸, 측면 2칸으로 크게 변형되었으며, 기와는 누수를 막기 위해 시멘트를 덮어서 지붕 윤곽만 겨우 드러난 상태였다.

건물 내부에 대한 조사 결과 대들보, 서까래, 도리, 기둥 등 주요한 구조부재 등이 원형대로 남아 있어 2013년~2014년에 걸쳐 전면 해체 보수를 실시하였고, 해체 보수 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문을 통해 1835년(헌종 5)에 건립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기장 장관청은 동래부의 장관청(부산광역시지정 유형문화재 제8호)과 함께 전국적으로도 남아 있는 사례가 드문 관아 건물이다. 조선 중기 이래의 간소한 굴도리식 건물로써 건축사적으로 크게 주목될 뿐 아니라 문화재적 가치도 뛰어나며, 조선 후기 부산 및 기장 지역 관아 건축의 양상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건축 유구(遺構)로 우리나라 동남해안의 전략 요충지였던 기장군의 역사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다.

2008년 12월 16일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7호로 지정·보존되어 오다가 건물의 중요성 및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5년 3월 18일 부산광역시지정 유형문화재 제153호로 승격되었다.

장관청에서 본 서부리일대 기장읍성
기장읍성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는 부산시 지정 근대건조물로써 지붕의 기와형태가 일본식 구조이다
기장역 주변 한국철도공사가 소유하는 건물로써 과거 관사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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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를 침입한 전쟁으로 육군 15만 8,700명, 수군 9,000명 총 병력 약 20만 명의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1597년 화의 (강화회의)결렬로 왜장 가토 기요사마(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 선봉으로 한 1만 4,500명 등 총 병력 14만 1.500명이 정월 15일 2차 침입이 정유년에 있었으므로 ‘정유재란’이라 한다.

1차 침입 때 제1번대(番隊) 4월 13일 부산 침입, 제2번대 4월 16일 등 제9번대 까지 9회로 나누어 침략을 개시하였고 이 때 제2번대 주장이 가토 기요마사로 병력 2만 2,800명이였다. 가토가 인솔한 제2번대는 나고야를 떠나 대마도에 도착한 후 제1번대 고니시의 부산 상륙에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고 19일 부산에 상륙하여 그 길로 경상 좌도를 택하여 장기·기장을 거쳐서 좌병영 울산을 함락하고, 경주·영천·신령·의흥·군위·비안을 거쳐 문경, 충주로 들어갔고 5월 3일에 한양에 당도하였다.

이후 함경도로 침입한 가토의 군은 선조 26년(1593년) 정월 조·명 연합군의 반격으로 평양에서 패퇴, 고니시 등이 한양으로 퇴각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 서둘러 한양으로 퇴진하였다. 거듭된 패퇴로 5월 중순경에 서생포 왜성에 주둔하였고 선조 29년(1596년) 5월말에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같은 해 9월 정유재란 때 선봉장이 되어 다시 서생포 왜성에 주둔하였다.

서생포 왜성은 서생면 서생리 711일원으로 가토 기요마사의 왜군이 선조 25년 7월부터 쌓기 시작하여 다음해 선조 26년(1593년)에 완성한 일본식 평산성(平山城)으로 조선 백성의 강제 노동과 희생에 의해 만들어진 왜군 침략의 산물이다. 당시 왜군은 임진왜란 때 동래, 구포, 진해, 가덕도, 거제도, 기장, 서생 등 동남해안에 왜성을 쌓았고 정유재란 때에는 남해, 고성, 순천, 사천, 마산, 울산 등으로 확대하였고 총 31개의 왜성을 쌓았다.

이 중 고니시가 축성한 진해 웅천왜성이 규모가 가장 크고 서생포 왜성은 성곽 형태가 가장 잘 남아 있다. 최초의 왜성이자 왜성 본부 역할을 하는 부산왜성,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축성한 기장 죽성리 왜성, 정유재란 때 가토가 축성한 울산 왜성(학성공원)과 봉화로 서로 연락했다고 하여 일명 봉화성이라고 한다.

서생포 왜성은 내부 면적 45,960평, 성 외곽부 길이 2.5km, 평면상의 직선거리가 동서 약 870m, 남북 약 370m인 석성이고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성(본성) 정상부(해발 133m)에는 우물터와 지휘부이자 가토 기요마사가 기거했던 천수각(天守閣)터와 천수대(天守臺)가 남아 있다.

천수각은 높이 5m, 넓이 18×17m 천수대 위에 세워지는 건물로 3층 규모로 추정하고 있다. 사명대사가 서생포 왜성에서 가토 기요마사와 회담한 내용을 기록한 “송운대사분충서난록(松雲大師奮忠序難錄)을 보면 천수각 규모를 알 수 있다.

『고층 누각에 큰 가옥도 지었다. 청정(淸正, 가토 기요마사)의 거처에 이르니 방 안 전체가 화려한 자리에 금칠한 병풍으로 둘러쳐졌다. - 중략 - 』

 

 

성벽 축조 방식은 외성인 경우는 돌로 외벽을 쌓고 내벽은 흙으로 채운 내탁식(內托式)이고 내성인 경우는 내·외벽 모두 돌로 쌓는 협축식 (夾築式)이다. 특히 내성은 계단식으로 석축을 쌓았는데, 산의 정상부에서 아래로 성벽을 세 겹(三之丸)으로 두르고 있고 각 구역이 독립적인 전투를 치를 수 있도록 되어있다. 또한 내성 출입구는 외부에서 직진 출입이 힘들도록 구성되어 있다. 성벽 높이는 6m이며 기울기가 지면에서 60도 내외다. 일본성의 특징 중 하나가 성벽의 기울기인데 이는 지진이 잦은 일본의 자연환경을 반영한 것이다.

 

외성(外城) 남문으로 실제 성벽 높이를 추정할수 있다.
외성(外城) 동문으로 이를 통과하여 회야강 선착장을 이용했음을 추정되며 선창장은 군수 물자 보급, 문서발송 등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외성(外城) 내 왜군의 막사 건물터로 주춧돌 없이 나무기둥을 땅속 깊이 박아 건물을 지었다.

 

내성(內城) 삼지환(三之丸)의 출입구
내성(內城) 이지환(二之丸)의 출입구
이지환(二之丸)에서 바라본 본성 일지환(一之丸)
내성(內城, 본성) 일지환(一之丸)의 출입구
일지환(一之丸)에서 바라 본 회야강과 동해바다

 

 

 

내성(內城, 본성)  정상부(해발 133m)의 중심 공간인 소곽(小郭) 출입구
소곽(小郭) 내 중심지역으로 우물터와 천수대( 天守臺 )와 천수각(天守閣)터가 남아있다.
왜성의 지휘부 건물이며 가토 기요마사가 기거했던 천수각(天守閣)터와 천수대 ( 天守臺 )
천수대 ( 天守臺 ), 천수각(天守閣)터 올라가는 계단
소곽(小郭) 내 뒷편 출입구로 비상 또는 함락시 탈출통로로 추정됨
떨어진 벚꽃은 마치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끌려온 조선 백성의 흘린 피눈물이 승화된것 같다.
성벽에 새겨진 어느 조선백성 포로의 이름. 참으로 슬프다.

 

임진왜란 때 축성 된 왜성은 포로로 잡힌 조선백성의 강제 노동과 희생에 의한 결과물이다.

 

임진왜란 이후 생긴 경상도 민요 후렴구에 “쾌지나 칭칭나네” 가 “쾌재라, 청정(淸正)이 도망간다.“에서 유래했을 정도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조선 백성에게는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였다.
서생포 왜성에는 가끔 일본관광객이 방문한다. 왜성을 보면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침략의 역사를 반성을 할까? 아니면 그들 선조들의 성곽기술 훌륭함을 감상과 한강이남 식민지 건설 못함을 아쉬워할까?

 

선조 32년(1599년) 명나라 장수 마귀장군이 승전기념으로 축하연을 위해 창건한 초가 4칸을 연회 마친 후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53명의 충신들을 배향하기 위해 기와 4칸 창표사(蒼表祠)를 중창하여 세웠다. 이후 후손들과 유림들이 매년 음력 1월 15일에 재를 올려왔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파괴되었으나 최근 울주군에서 2016년 11월 창표사를 중건하였다.

 

일제 강점기 때 파괴 된 것을 최근 울주군에서  중건한 창표사( 蒼表祠 )

 

서생포 왜성은 사명대사가 임재왜란 당시 4차례 걸쳐 외교활동을 했던 곳이다. 임진왜란 발발 1년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8도 중 4도 즉 한강 이남을 차지할 계획으로 동남해안에 총 18개의 왜성을 쌓았다. 그 일환으로 일본은 조선을 배제하고 명과 함께 강화회의를 진행하였다. 이때 일본 측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주도하였는데 경쟁 관계였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갑자기 뛰어들었다.

 서생포 왜성에 있던 가토는 강화 관련 공을 고니시가 차지 할 것을 우려했다. 이에 선조 27년(1594년) 2월에 포로로 잡혀있던 정연복에게 문서를 주어 경상좌병사 고언백에게 보내었다. 그 내용은 강화를 하자는 것이었는데 고언백은 즉시 도원수 권율과 의논하고 뒤에 명나라 장군 도독 유정에게 보이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로써 강화회의 당사자는 모두 바뀌었다. 선조 27년(1594년) 4월 12일 도원수 권율은 명나라 장수 유정의 요청에 따라 승병장(僧兵將)이었던 사명대사와 함께 화평(강화)을 청하였다.

첫날 회담에서 가토는 사명대사에게 첫째 조선의 8도 중 4도를 할양하고, 둘째 조선의 왕자 한 사람을 일본에 보내어 영주케 할 것, 셋째 조선의 대신 및 대관을 일본에 인질로 보낼 것, 넷째 종전과 같이 교린을 할 것, 다섯째 명나라 황녀를 일본에 후비로 삼을 것 등을 요구하여 결렬되었다. 2차 교섭은 7월 6일에 있었는데, 이때 종전의 강화조건에 다시 명나라 인질 1명 등 2개 조건을 추가 주장하여 또 다시 결렬되고 말았다. 그 후 두 차례에 걸쳐 강화회의가 있었으나 모두 결렬되고 말았다. 이는 일본의 의도를 파악한 사명대사가 강화를 결렬코자 했던 것이다.

1594년 7월 12일에서 16일 사이 가토 기요마사와 담판 지을 때 사명대사의 유명한 보물일화가 있다. 담판의 주요한 부분이 결렬되자 가토 기요마사가 사명당에게 “귀국에도 보물이 있소?”라고 물었다. 그러자 “우리나라에서는 귀하의 머리를 금 천근과 읍 만호를 주고 산다고 하오. 이러한 막중한 것이 어찌 보배가 되지 않겠소” 라고 호방하게 맞받아쳤다고 한다. 적진에 들어가서 적장 앞에서 '네 목을 따서 바치면 여럿 팔자 고친다'는 식의 말은 웬만한 강심장 아니면 힘들다. 사명대사의 대범함이 알 수 있다. 사명대사는 이밖에도 1604년 8월 일본으로 건너가 8개월 동안 머무르며 설법과 외교활동을 통해 억류돼 있던 조선이 3,000명을 구출해 귀국시켰다. 

사명대사(1544 ~1610)는 스승인 서산대사와 더불어 임진왜란 때 승병장(僧兵將)이였다. 사명대사의 법명은 유정(惟政)이고 사명당(四溟堂)은 스님을 높여 부르는 호이다. 이외에도 송운(松雲), 종봉(鍾峯), 등이 사용되고 있다. 중종 39년(1544) 지금의 밀양시 무안면 고사리에서 태어났으며 13세에 김천 황악산 직지사로 출가했다. 18세에 승려 과거시험 선과(禪科)에 응시, 합격하여 글 잘하는 승려로 통했다. 직지사의 주지를 지내고 봉은사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묘향산 보현사로 들어가 서산대사 휴정에게 3년간 수도하였다.

이후 팔공산, 청량산, 태백산을 두루 다니며 선 수행을 하다가 43세 되던 해 오대산에 머물렀다. 이때 정여립 역모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고 강릉의 옥에 갇힌 일이 있었다. 그러자 강릉의 유생들이 앞장서 그의 무고함을 항소하였으며, 이에 힘입어 석방되었다. 유생들이 승려를 위해 구출운동을 벌인 것은 유례없는 일이다. 이후 금강산 유점사에 들어가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염주대신 칼을 들었다. 선조 25년(1592), 49세 나이에 임란초기 승병장으로 평양 탈환참여 등 활약이 컸지만, 점차 전쟁보다 평화회담에 투입되었다. 임진왜란 종료 후 합천 해안사 홍제암에서 67세에 입적했고 나라에서는 그에게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는 시호를 내려 사명대사의 생애와 입적을 기렸다.

서생포 왜성에서 기억해야 할 왜장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친척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선봉장으로 많은 조선 백성을 학살, 온갖 만행을 저질렀고 당시 백성들에게 악명이 높았다. 임진왜란 이후 생긴 경상도 민요 후렴구에 “쾌지나 칭칭나네” 가 “쾌재라, 청정(淸正)이 도망간다.“에서 유래했을 정도이다. 가토는 조선에서 퇴각하면서 많은 조선 백성을 강제로 끌고 갔다.

현재 구마모토에 울산마찌라는 마을이 남아 있을 정도이니 당시 얼마나 많은 백성이 끌려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때 영주가 가토 기요마사이다. 그리고 조선 백성의 희생에 의해 축성 된 구마모토 성이 일본 3대 명성 중 하나이다. 임진왜란 때 축성 된 왜성은 포로로 잡힌 조선백성의 강제 노동과 희생에 의한 결과물이다. 당시 성곽 축성을 했던 조선 백성의 손재주에 왜장들은 감탄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일본인이 하면 축성 완료를 1년 소요되는 것을 조선 백성은 3 ~ 4개월에 완료시키는 것이다. 임진왜란 후 일본으로 많은 조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서 강제 노동에 동원되고 노예로도 매매됐다. 끌려간 조선인 포로 가운데, 도공(陶工)들의 도자기 제조기술은 일본 도자기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서생포 왜성에는 가끔 일본관광객이 방문한다. 왜성을 보면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침략의 역사를 반성을 할까? 아니면 그들 선조들의 성곽기술 훌륭함을 감상과 한강이남 식민지 건설 못함을 아쉬워할까?

 

멀리서 본 진하해수욕장

 

울산의 3대 수군 진성의 하나인 서생포 만호진성

『세종실록지리지』(울산)에는“서생포(西生浦)는 군 남쪽 44리 거리에 있다. 모두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있어 수어(守禦)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는 “만호(萬戶)가 지휘하며, 병선 20척에 군졸 767명이 성에 상주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초기에 수군만호영(水軍萬戶營)이 있었고, 임진왜란 후에는 서생포 수군동첨절제사영(水軍同僉節制使)으로 승격되어 수군동첨절제사(水軍同僉節制使)가 이곳에 머물렀다. 이후 인근 서생포 왜성으로 이동하여 한말까지 유지 되어 왔다. 성의 축성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염포진성이 성종 21년(1490년)5월에 쌓은 것으로 보아 이와 비슷한 시기로 추정된다.

 

서생포 만호 진성 안내표지판
서생포 만호 진성으로 가는 오솔길

 

진성(鎭城)은 외적의 침입이 잦은 국경 및 해안 같은 국방상 중요한 곳에 쌓은 성이고 만호(萬戶)는 원나라의 제도에서 유래한 것으로 무관직 벼슬이다. 본래 그가 통솔하여 다스리는 민호(民戶)의 수에 따라 만호·천호·백호 등으로 불리다가, 차차 민호의 수와 관계없이 진장(鎭將)의 품계와 직책 등으로 변하였다. 수군의 만호(萬戶)는 육군의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와 같이 종4품으로 만호의 임기는 진에 가족을 데려가지 않는 경우 900일이었다.

서생포 진성은 염포진성, 개운포 진성와 더불어 조선 전기 울산에 세워진 수군진성이다. 일반적으로 수군 진성은 해안가에 위치하고 성안에 우물이 있고 적에게 노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바다 쪽에서는 볼 수 없는 막힌 포구에 위치하며 인접지역과 연락이 편리한곳을 성터로 삼는다. 성곽은 산 구릉을 따라 곡선형으로 하고 성벽은 수직으로 쌓은 견고한 석축성이고 성곽의 반은 산 구릉 위에 걸친 반산성(半山城)이며, 성 주위에는 성지(城址)를 파고 망루대는 구릉 위에 세운다. 그리고 출입정문은 배 선착장과 연결되어 있다.

서생포 만호 진성은 북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와 합류하고 있는 회야강이 있어 수군이 활동하기 유리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성곽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구릉의 경사지를 이용하여 돌을 쌓았는데, 산허리에서부터 시작하여 회야강이 흐르는 북쪽평지를 연결하는 형태이다. 현재 북쪽성벽은 멸실되어 정확한 구조를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 수군진성의 특성상 병선을 정박시키는 선창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남아있는 성벽의 길이는 약 440m이며, 성벽너비는 4m, 잔존높이는 1~1.5m이다. 서쪽성벽에는 문지로 보이는 시설이 일부 남아 있으며, 그 외측에서 발굴조사를 통하여 해자가 확인되었다. 이 진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왜군에 의해 함락되어 파손되었다.

 

성벽 흔적이 엿보인다
남아 있는 성벽의 길이는 약  440m 이며 ,  성벽너비는  4m,  잔존높이는  1~1.5m 이다 .
서생포 만호 진성은 북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와 합류하고 있는 회야강이 있어 수군이 활동하기 유리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  현재 북쪽성벽은 멸실되어 정확한 구조를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 수군진성의 특성상 병선을 정박시키는 선창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서생(西生)의 지명 유래는 『삼국사기지리지』에 “동안군(東安郡)은 원래 생서량군(生西良郡)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라는 기록에서 처음 등장 한다. 서생(西生)에서 ‘서(西)’는 고음(古音)인 ‘새’에서, ‘생(生)’은 ‘내’가 되어 벌이나 들을 의미한다. 그래서 서생(西生)이나 생서량(生西良)·동안(東安)은 「밝아오는 동쪽 들」을 뜻하는 ‘새내’로 해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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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 25(15924)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일으킨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당시 16세기 일본에서는 다도가 유행하였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또한 차를 좋아하여 다회를 자주 열었다고 한다. 이에 임진왜란에 참전한 왜군의 장수들은 수많은 조선의 도공과 사기장, 칠기장 같은 장인을 일본으로 끌고 갔다. 또한 장인 외에도 수 없이 많은 젊은 남녀를 끌고 가서 전쟁 노예로 삼아 상업적 이익을 취했다. 왜란 7년 동안 일본은 조선에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큰 만행과 악행을 저질렀다.

일본에 끌려 간 다양한 장인의 수는 기록에 따라 다르며,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10~ 20만 명, 일본 쪽에서는 56만 명으로 보고 있으나, 장인 외의 사람들도 일본에 끌려가서 포르투갈 상인에게 노예로 팔렸다고 하니 전체 인원은 파악하기가 어렵다. 참으로 천인공노할 짓을 일본이 하였다.

왜란으로 일본으로 끌려간 참담한 현장 중 하나가 죽성리 왜성(또는 두모포 왜성)이다. 이 왜성에서 도공을 비롯한 많은 장인들이 왜선을 통해 일본에 끌려 간 것이다. 이곳에는 서답골, 또는 세답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왜란 당시 전국에서 끌려온 수많은 도공들이 왜선에 타기 전 억류생활 하면서 빨래를 했다고 하여 세탁골이라 불리었다.

두호마을 뒷산 산정에 위치한 죽성리 왜성

 

1593(선조 26) 봄 왜군은 전남 여수에서 울산에 이르는 우리나라 동남해안 일대에 30여개의 성을 쌓고 이 성들을 근거지로 삼아 장기전으로 조선을 굴복시키려 하였다. 이들 왜성은 대개 강이나 바다에 근접한 구릉을 택하고 수송, 연락관계 등을 고려하여 선박의 출입이 편리한 장소에 성을 축성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죽성리 산 52-1일대의 죽성리 왜성은 이들 왜성 중 하나로 왜군 장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인원 33000명 동원하여 축성한 것으로 인근 기장읍성과 두모포 진성 성벽 돌을 사용하였다. 이 왜성은 죽성포(두모포)만 서쪽의 서답골을 끼고 있는 두 개의 구릉을 중심으로 남쪽 높은 구릉(해발 64m)에 본성을 쌓고 북쪽 낮은 구릉(해발 45m)에 본성 방어를 위한 외성(지성)을 두른 형태다. 여기에 다시 본성과 외성의 서쪽 성벽 밖에 너비 7m 이상 구덩이(해자)를 길게 파 방어망을 강화했다.

죽성리 왜성 본성으로 올라가는 계단
죽성리 왜성 본성(해발 64m)
왜국으로 끌려간 도공들의 슬픔과 한이 맺힌 초목과 바위

성벽은 주로 화강암을 써서 70도 정도 경사지에 비스듬히 쌓았는데, 총 면적 2,600평에 둘레가 약 960m이고 성벽 높이는 약 4m이며 3단으로 축조했다. 외성 일부 구간에서는 수직으로 축조 된 성벽이 나타나는데 이는 기존의 두모포 진성과 연결시킨 것이다. 즉 기존 조선 수군 두모포 진성을 활용한 것이다. 죽성리 왜성은 청강천(죽성천)의 자연지형과 해자를 통해 북서쪽의 외곽 방어망을 강화하고 동쪽으로는 죽성만 포구를 감싸 안은 해안요새인 것이다. 이 성은 일본에서는 기장성이라고도 부르고, 왜란 중에는 울주군 서생포성(西生浦城)과 울산 학성(鶴城), 그리고 증산왜성(부산포성)을 연결하는 요충지 역할을 했다.

예나 지금이나 유유히 동해로 흐르는 청강천(죽성천)

 

죽성천(竹城川), 청강천(淸江川)은 양달산(286m) 동쪽 산록에 있는 연곡저수지 일대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강으로 청강이라는 이름은 냇물이 너무 맑아 붙인 이름이다. 청강천을 장강(長江)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물이 맑아 물밑에 있는 돌조차 이끼 하나 끼지 않고 하얗게 되어 있다고 하여 ‘백설청강(白石淸江)’이라고 하였다.
바닷가에서 본 청강천 동해구
왜란 당시 도공들이 왜국으로 끌려갔던 죽성포(두모포)

죽성 지명은 이곳에 있던 성곽과 이곳에 죽이 많이 자생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곳에는 신라토성, 두모포 진성의 석축성(石築城), 또 임진왜란 때의 석축성인 왜성(倭城)이 있었다. 경상도속찬지리지에 의하면, “두모포는 현에서 동쪽 5리에 있고 수군만호(萬戶)가 수비하고 있다.” 라는 기록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두모포영은 수군만호가 있고 중종 5(1510)에 설치하였다.” 라는 내용이 있다. 임진왜란 이후 기장현이 폐현되면서 두모포 만호영은 동래부 부산(釜山)으로 이전하였다. 죽성이 행정지명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이다.

죽성리 왜성 본성에서 본 두호마을 전경

현재 죽성리 왜성 입구는 철문에 의해 잠겨 있어 들어갈 수 없다. 땅 소유자인 신앙촌(천부교)에 대하여 기장군이 소송을 진행 중이다. 사유는 신앙촌이 문화재에 대하여 현상 변경을 하였기 때문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철문에 의해 닫혀진 죽성리 왜성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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