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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산을 가지고 있는 광역시가 부산광역시이며 이것은 부산의 큰 복이다. 이들 중 장산은 해발 634m로 세 번째로 높은 산이며 부산시민이 사시사철 찾는 곳이다. 더불어 대천공원이 조성되어 산행은 물론이며 운동, 각종 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해발에 비해 수량이 풍부하여 춘천의 흐르는 물은 가뭄에도 마르는 날이 없어 여름철이면 아이들의 물놀이 터가 된다. 이에 옛 부터 장산 앞 지역은 비옥한 농경지를 이루었고 청사포 앞바다의 풍부한 해산물과 함께 풍요로운 땅이었다.

장산 450m 자락에는 20가구 100여명 주민이 녹차재배 등 농업과 등산객 상대로 하는 식당을 주업으로 살고 있는 장산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19636.25전쟁 상이용사 10여명이 원호청으로부터 정착 대부금을 받아 설립한 장산개척단에서 시작된 마을이다.

당시 산정을 개간하여 무, 배추 등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며 살았으나 생활여건이 열악하여 개척단원들은 마을을 떠났다. 그 후 퇴역 장병 40여 세대 120여명이 부산시로부터 토지를 불하받아 무 재배를 하며 정착하였다. 그리고 미국 복지재단에서 기증한 홀스타인 젖소 덕분으로 낙농업을 통해 장산목장으로 마을이 번창하였으나 1985~ 1987년 우유파동과 해운대 신시가지 조성에 따른 젖소 사육 금지, 자녀교육 등으로 일부가 마을을 떠나 현재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장산을 좀 더 들여다보면 부산국가지질공원, 생태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청산리 대첩의 숨은 영웅 애국지사 강근호의 숨결이 모정원에 남아있다. 또한 민속 및 토속신앙이 전해지고 있는 천제단, 마고당 등 있어 장산을 찾는 이에게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동국여지승람(1418)과 동래부지(1740)에 의하면 부산의 전신인 동래의 옛날은 장산국(萇山國)이었으며 신라가 를 취해 거칠산군(巨漆山郡)을 두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장산을 동래부지도에는 상산(上山)이라는 이름으로 장산이라고도 하고 봉래산이라고도 하였으며 규장각 소장의 동래부지도에는 장산의 위치에다 장산국기라 적혀있고 해동지도에는 상산에다 장산국기라 적혀 있다. 동래부읍지 역시 장산이라고 표기하고 기장의 운봉산에서 뻗어 내렸다고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동래현의하면 옛날에는 장산국(萇山國) 혹은 내산국(萊山國)이라고도 하였다. 신라가 점유하고 나서 거칠산군(巨漆山郡)두었는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고려 현종이 울주(蔚州)속시켰고 현의 동쪽 15리에 상산(上山)이 있으며, 대마도를 바라보기에 가장 가깝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산을 중심해서 장산국, 또는 내산국이라는 부족국가가 형성돼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삼한시대의 부산에는 변한 12국 중 하나인 독로국(凟盧國)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 삼국지 위서 한전에는 독로국이 바다를 사이에 두고 왜와 접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독로국이 현재로서는 동래지역에 있었다는 주장이 우세하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가 동래지역의 거칠산국을 멸망시키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독로국과 거칠산국이  같은 것인지의 여부는 현재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최근 장산 정상 개인이 운영하는 농장에서 우물터를 발견했는데 지역 향토사학계에서는 옛날 장산국 우물터가 아닌지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 그 결과가 주목된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대마도가 보인다. 특히 겨울에는 자주 볼 수 있다.
대마도는 예전 부터 해적들의 본거지로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피해을 주었다.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명당

장산과 해운대 신도시를 풍수지리로 보면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다. 봉황의 오른쪽 날개는 장산-간비오봉이고  왼쪽날개는 구곡봉-부흥봉-와우봉으로 案山인 중동의 梧山공원이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둥지이다. 즉 봉황이 오산공원에서 알을 품고 있는 모습으로 영웅 또는 임금이 태어나거나 대대손손 번창하는 터다.

봉황은 상상의 새로서 상서로움을 상징하는데 五色의 깃털을 지니고 五音을 내며 오동나무에 둥지를 틀고 대나무 열매를 먹고사는 새라 하여 고결한 성품을 가진 인물 또는 임금을 의미 한다. 또는 알을 품고 있는 둥지, 터는 자손이 번창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옛날부터 해당 지역의 마을사람들은 봉황이 떠나지 않도록 오동나무와 대나무를      지키고 보호했다.

풍수에서 기본적으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땅을 명당이라고 한다. 산을 등지면서 병풍을 둘러친 것처럼 아늑하고, 물을 앞에 끼면 사람에게 좋은 것은 물론이고 들판의 곡식도 잘 자라기 때문이다. 이것을 세부적으로 산의 위치별로 기능별 보면 左靑龍, 右白虎, 南朱雀, 北玄武로 마을 뒤에 있는 산이 거북이로 主山이라 하고 좌우 병풍 역할을 하는 것이 용이고 호랑이다. 그리고 마을 앞에 있는 산이 새로 朝山이라 하며 주산과 조산 사이에 안산이 있다.

주산과 조산은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 관계이고 좌우는 이들을 보호하며 주산과 안산은 주인과 나그네 관계이다. 안산은 나지막한 산인데 여기서는 오산공원이 그 기능을 한다. 해운대의 임수는 춘천이고 배산은 장산이나 조산이 없어 다소 부족한 명당이라 무척 아쉽다.

최근 해운대에도 택지개발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데 오산공원 만큼은 개발에 훼손되지 않도록 보호하고 가꾸어야     해운대가 대한민국의 랜드마크로 계속 남아 있을 것 같다.

지엽적으로 살펴보면 달맞이고개는 臥牛山, 누운 소 형국으로 손이 부자가 되는 터이다. 소는 예로부터 모든 생산 활동의 원동력으로 소가 없으면 농사를 짓지 못하는 것으로 알았다. 부여시대에는 하늘의 뜻을 알리는 靈物이라 하여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 발굽으로 점을 쳤으며 하늘에 바치는 제물로도 썼다. 또 소는 신성한 존재로 여겨 쇠코뚜레를 문에 걸어두면 잡귀가 달아난다고 믿었다. 장산정상에서 달맞이고개를 바라다보면 고층 아파트에 의해 마치 소 등에 창이 꽂힌 것처럼 소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장산국의 오능은 사라지고

장산국은 신라와 가야의 경계지역에 위치하였는데, 이 장산국에 5개의 왕릉 이 존재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신라와 가야의 침략을 피하기 위하여 궁궐과 왕릉은 장산 안에 있었으며, 6·25전쟁 당시 미군이 탄약 창고를 설치하기 전 좌동 일대 어느 작은 절(약수암) 옆에 5개의 큰 무덤이 바로 그것이라 전해진다.

기원 후 5~6세기경에 신라(석탈해왕) 세력이 이곳에 진출하면서 장산국이 멸망하자, 장산국 사람들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고 산의 오능은 초라한 무덤으로 변해 점차 잊히게 되었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좌동 토박이 노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어릴 적 그 무덤을 보았는데 탄약 창고 공사를 하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6.25 전쟁의 아픈 흔적은 남아있고

장산 정상은 6.25전쟁이후 민간인 출입이 통제돼왔다. 이유는 정상에 군, 경찰 등 9개 기관의 무선기지국이 설치되어 있고 군이 주둔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이도 해운대구에서 장산구립공원을 추진 중, 정상부지 중 폐쇄된 미군주둔지를 국방부와 협의 후 ‘21. 1월부터 장산 정상을 개방한다고 한다.

장산 8부 능선에는 과거 지뢰매설 지역이 있어 2003년 인근 공군부대에서 지뢰제거를 실시하였으나 유실 또는 제거하지 못한 지뢰가 남아 있어 출입금지 지역으로 남아있다. 장산 산행을 하는 이에게는 큰 지장을 주지 않으나 남북 분단으로 인한 상처가 부산 근교 산에도 있어 이곳을 지나갈 때 마음이 씁쓸하다.

헬기장 주변 철거 된 군 시설물
장산의 봄, 양운폭포
장산의 가을, 계곡 초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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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카페 트렌드는 규모와 SNS 발달로 뷰를 중시하고 있는 것 같다.  송정에서 부터 서생면 간절곳

해안선을 따라 가면 느낄수  있다. 아울러 커피의 맛과 향도 카페를 찾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예전에는 지인과 , 연인들이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인데 책을 읽고 학습하는 장소로

변화하고 있다.

몇일 전 서생면 신리에 위치한 Cafe AN 에 들어가니 그림과 조형물 및 베어브릭을 전시하고 있어 커피 맛과

더불어 전시 작품을 통해 힐링을 하였다. 카페를 찾고 이용하는 입장에서는 다양한 카페 문화를

접하면서 소소한 즐거움을 가지게 되어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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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동쪽 관문격인 달맞이고개는 일제강점기 때는 경마장으로, 1960년대까지 미군 골프장으로 사용되었다. 1970년부터 개발이 시작되어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하였고 1980년대부터 고급빌라가 바다를 바라보는 방향에 많이 지어졌다. 이후 카페, 음식점, 공방 등 다양한 문화시설이 들어섰다.

달맞이 고개에 위치한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원작가 김성종의 추리 문학관

특히 달맞이길(미포↔송정, 8km)은 15번 이상 굽어진다하여 15곡도(曲道)라고 부르며 가로수로써 벚나무가 가꾸어져 있어 드라이브 코스로 애용되고 있다. 그리고 해월정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2013년 동해와 남해의 경계로 정해져 있어 바다를 감상하는데 묘미를 제공하고 있다. 겨울날씨 좋은 아침 해월정에서는 대마도를 볼 수가 있다. 또한 문탠 로드(Moontan Road)라 하여 월출을 감상하기 위한 왕복 2km의 달빛 산책길도 조성되어 있다.

청사포 다릿골 전망대에서 바라본 송정

일제 강점기 때 자원수탈 목적으로 만들어진 동해남부선(부산↔포항구간 : 147.8km)이 근래 80년의 역사를 마치고 철거 되었다. 부산↔해운대 구간은 1934년에 연결되었는데 없어진 철길을 생각하니 예전 기차에서 바라본 달맞이 앞 바다가 그리워진다. 舊 철길의 우동↔송정구간에는 새로운 관광산업으로 걷기 코스(미포↔송정구간)와 해변열차(미포↔송정구간), 스카이 캡슐(미포↔청사포구간)이 운영하고 있다.

舊 철길의 걷기 코스(미포↔송정구간)에서 본 해운대 야경
달리는 해운대 해변열차(미포↔송정구간)

예전부터 달맞이고개는 해운팔경 중 하나인 우산낙조(牛山落潮)풍광을 보는 것으로 달맞이고개를 멀리서 바라보면 형상이 소가 누워있는 것 같다하여 옛 부터 우산 또는 와우산(臥牛山)이라 부른다. 이곳 우산에서 서쪽으로 해가 지는 모습을 말하는데 일몰 때 해운대 해수욕장과 오륙도를 품고 있는 바다를 바라다보면 아름다운 풍광에 압도당한다고 한다. 도시화 이전 석양이 찾아들면 바닷가 들판은 서산을 넘는 햇빛에 의해 홍조로 물들고, 이 광경을 와우산 위에서 바라보면 노을이 된 경치가 장관을 이루어 한 폭의 그림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시대가 흘러 요즈음은 해운대 야경이 이를 대신하고 있는데 옛 모습이 보고 싶다. 그리고 소의 꼬리 부분에 해당되는 곳이 미포(尾浦)이다.

끊어진 소의 등에는 인재는 사라지고

송정 구덕포에서 해안선을 따라 가면 조그만 포구가 있는 마을이 있어 이름이 청사포(靑沙浦)이다. 와우산(臥牛山)에서 소의 등(잘랭이)부분으로 일제강점기에 개설 된 동해 남부선 철도가 이 청사포 마을을 관통한다. 마을사람들은 이후 이 마을에서는 인재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옛날 이곳 마을에는 남달리 금슬이 좋은 정씨 부부가 고기잡이를 하며 살아 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고기잡이 나간 정씨가 돌아오지를 않자 기다리다 지친 정씨 부인이 소나무 두 그루를 심고 그 나무에 의지하여 바다를 바라보며 수년을 기다려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던 어느 하루, 바닷물을 가르고 푸른 구렁이(용왕)가 정씨 부인 앞에 나타나 물길을 인도하여 남편과 상면(相面)하게 되었으나 남편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나간 사람이 되었다. 이러한 전설(傳說)에서 청사포(靑沙浦)의 원래 지명(地名)은 청사포(靑蛇浦)로 모래 (沙字)가 아닌 뱀 (蛇字)였다고 전한다.

처녀를 사랑하는 송아지는 사람으로 환생되고

예로부터 달맞이로 유명하여 지어진 달맞이 고개에는 정월 대보름날 달집태우기, 연날리기 등 우리 고유의 민속놀이를 하고 있는데 이곳을 찾는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달은 보름을 단위로 초승달에서 반달로, 다시 만월로 옮겨가는 과정이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달이 끊임없이 생성-소멸-재생을 반복하기 때문에 소생과 생명력의 상징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달의 신비로움 때문에 소원을 빌고 달의 상태를 보고 풍년과 흉년을 미리 점()을 쳐보았다고 한다.

해운대 대보름달 관련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옛날 양반집 도령이 사냥을 좋아하여 매일 사냥을 나갔다. 어느 날 도령은 와우산 계곡에서 나물을 캐던 미모의 처녀를 만나게 되었다. 도령이 처녀에게 무슨 짐승을 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으니 처녀는 못 보았다고 대답하여 도령은 아쉬운 듯 지나갔다. 한참 후 어디서인지 송아지 한 마리가 나타나 처녀 앞에서 음매 음매 울며 갈 줄 모르더니, 날이 저물어 처녀가 집으로 귀가하자 송아지도 처녀의 집까지 따라왔다. 그 날 송아지는 처녀의 보호를 받으며 하루를 보냈고, 다음 날 처녀는 송아지를 데리고 어제 갔던 계곡으로 나물을 캐러 갔으나 이제까지 따라오던 송아지는 간 곳이 없고 어제 만났던 도령이 나타나 처녀와 인사를 나눈 후 헤어지면서 정월 대보름날 달이 떠오르면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다. 그 후 도령과 처녀는 정월 대보름달이 떠오를 때 다시 만나 달을 보고, 서로가 부부가 될 수 있도록 소원을 빌어 그 소원을 이루었으니, 그 때부터 정월 대보름날에는 선남선녀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와우산이 보이는 카페 작은창큰풍경에서 예쁜 풍경을 감상하다.

 

카페 입구

 

와우산과 청사포

 

청사포에서 맞이하는 신년 해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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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관광을 대표하는 랜드 마크 중에는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이 있다. 해운대 해수욕장의 海雲臺지명은 신라 최치원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동백섬에서 시작하는데 예전에는 독립된 섬이었으나 오랜 세월 퇴적작용으로 현재는 해운대 백사장과 연결되어 육지화 되었다. 사시사철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는 동백섬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섬으로 표시되어 있고 옛날에는 동백섬이 거북이가 많이 서식하여 거북섬이라고도 불려졌다.

본래 동백섬은 장산의 산등성이인 간비오산의 말단에서 떨어져 나간 바위섬이었으나, 지금으로부터 약 5,000년전 후빙기의 해수면 상승과 함께 춘천천의 토사공급으로 모래톱이 형성되면서 육지의 일부가 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동백섬은 2005APEC 정상회의를 개최하였고 동백꽃이 된 어부의 아내, 인어공주 황옥 등 다양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하면 해운대는 동래현의 동쪽 18리에 있고 산의 절벽이 바다 속에 빠져 있어, 그 형상이 누에의 머리와 같으며 그 위에는 온통 동백나무와 두충나무 그리고 소나무, 전나무 따위로 덮여 있어 싱싱하고 푸르기가 사철 한결 같고 이른 봄철이면 동백꽃잎이 땅에 쌓여 노는 사람들의 발굽에 채고 밟히는 것이 3, 4()나 되며, 남쪽으로는 대마도가 아주 가깝게 바라보이며 신라 때 최치원이 일찍이 대()를 쌓고 놀았다 하는데, 유적이 아직도 남아있고 전하는 말에는 최치원이 자()를 해운(海雲)이라고 하였다 한다.

동백섬 최치원 관련 유적은 돌에 海雲臺라고 새긴 것으로 동백섬 남단에 자리한 해운대 석각(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45, 1999. 3. 9. 지정)이 있다. 신라 말기의 대유학자 고운 최치원의 친필이라 추정되지만, 그에 대한 정확한 문헌이나 기록은 없다. 다만 최치원은 서기 894년 진성여왕에게 시무 10조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 때부터 정계를 떠나 전국을 유람하였다고 한다. 기록에는 서기 89911월 신라 최치원이 면직되어 가야산 해인사로 은둔하였다.”라고 남겨져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해운대 석각은 최치원 이 가야산 입산 전에 석각한 것이라 볼 수 있으며, 서기 8942월부터 89911월 사이의 시기로 추정된다. 최치원이 석각한 지 천백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사람들은 해운대를 천년고을이라 부른다.

 

동백꽃 사연, 꽃으로 환생한 어부의 아내

옛날 동백섬 마을 사람들은 섬이 다리미 같이 생겼다 해서 다리미산으로 불렀고 간혹 운촌 마을에서는 앞섬이라고도 불리어졌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바다에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갑자기 거센 파도가 일어나, 다른 어부들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지만 한 어부만이 돌아오지 못했다. 어부의 아내는 다리미산 꼭대기에 올라 날마다 바다를 보며 남편을 기다리며 울다 지쳐 쓰러져 죽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불쌍한 아내의 무덤을 다리미산 꼭대기에 만들어 주었고, 몇 년 후 아내의 무덤가에 동백나무가 솟아 나와 동백꽃 한 송이가 붉디붉은 꽃을 피웠다. 이 사연을 가수 이미자의 노래 가사에는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 라고 표현하였다. 그 후 이곳에는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게 되어 동백꽃 섬이라 불리어졌고 세월이 흐르면서 동백섬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동백섬 달빛아래 인어공주 황옥의 고향 그리움이 느껴지고

동백섬에는 덴마크 인어공주와 같은 인어공주 동상이 있으며 월트 디즈니사인어공주 이야기와 버금가는 나란다나라 황옥 공주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서려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옛날 구남(龜南, 해운대 이전) 고장에는 무궁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건국 전 이곳에는 나라를 다스릴 왕이 없었지만, 하늘이 특별히 보내준 금 상자 속에서 황금알을 깨고 나온 어린아이가 십여 일만에 성인으로 자라나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나라의 이름을 무궁이라고 칭한 왕은 하늘의 은혜로 임금이 되었다고 하여 은혜 왕이라 불렸다. 날이 갈수록 나라는 번창하였으나 왕에게는 마땅한 왕비가 없어, 모든 신하들이 왕비가 될 여인을 찾았으며 왕에게는 결혼할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은혜왕은 신하들의 간곡한 청을 굳이 사양하며 하늘이 보내줄 왕비만을 기다렸다.

왼손에 황옥을 쥐고 있는 인어모습의 황옥공주

한편 바다 건너 멀리(지금의 마도 혹은 인도로 추측) ‘나란다라는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는 본래 바다 속에 있는 수정국이라는 나라와 형제 같은 나라였고, 그 나라 사람들의 몸 끝에는 물고기 지느러미가 있어 옷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이 나란다국의 왕과 왕비가 첫 여자아기를 낳으매 선례에 따라 공주의 이름을 부모의 나라인 수정국에 가서 지어 와야 했다. 왕은 특사로 거북(별주부)을 보냈는데, 이 거북이 바로 그 옛날 용왕의 병을 낫게 하려고 토끼를 잡아갔다가 다시 놓치는 수정국에서 쫓겨난 거북이었다. 거북은 수정국의 늙은 왕비에게 황옥이라는 공주의 이름을 얻었으며, 아직도 이 거북은 살아남아 황옥공주를 그리며 동백섬을 맴돈다는 전설이 해운에 전해진다.

모진 비바람에도 바다를 바라보는 황옥공주

한편, 황옥공주가 어느덧 선녀처럼 아름답게 자라나자 나란다국의 임금과 왕비는 공주의 신랑감을 찾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 나타난 신령이 바다 건너 무궁국의 은혜 왕에게 시집을 보내라 말하고 마침내 무궁국의 은혜 왕과 나란다국의 인어공주 황옥이 짝을 맺으니, 황옥왕비가 머문 궁궐이 지금의 동백섬이다. 수정국의 왕비인 외할머니가 일러준 말에 따라, 황옥왕비는 무궁국의 땅인 동백섬에 도착하자 겹겹이 입은 옷 중에서 제일 깊은 속치마를 벗어 산신령 에게 바쳤다. 물들어가는 저녁노을에 반짝이던 속치마가 바람에 나부끼며 높푸른 하늘로 멀리 날아가니 황옥왕비는 갑자기 발이 갖추어진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자 황옥왕비는 외할머니의 나라인 수정국을 매우 그리워하였다. 옆에서 이를 항상 안타까워하던 거북은 외할머니가 선물했던 황옥을 꺼내 달을 비추어 보라고 일렀다. 왕비가 그 말로 황옥을 달에 비추자, 어느새 눈앞에는 꿈속에서도 잊지 못하던 수정국과 나란다국의 아름다운 달밤이 펼쳐져 있었고 황옥왕비 역시 옛날 모습으로 바뀌어 바다 속을 마음으로 헤엄칠 수가 있었다. 이것을 가끔 목격한 사람들에 의해 동백섬 앞바다에는 인어가 있다는 이야기가 오늘날까지도 전해져 오고 있다.

해운대해수욕장 모래축제 작품 중 심슨가족(?)

거북이의 보은이 실현 된 해운대 해수욕장

우리나라 1호 해수욕장은 1913년에 개장한 부산의 송도해수욕장이다. 최초의 해수욕장인 만큼 여름철이면 서울을 비롯한 타 지역에서 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지금의 해운대 해수욕장 모습 이였다. 이에 반해 해운대는 조용한 어촌 마을이었다. 일본인에 의한 온천개발에 의해 해운대가 알려지기 시작으로 1920년 초반을 지나서 해수욕장으로써 명성이 알려졌다. 1934715일 동해남부선 개통(부산 해운대)으로 인해 해운대 해수욕장이 송도 해수욕장 명성을 압도했다. 그러나 6.25 전쟁과 이에 따른 피난민 등 많은 인구 유입으로 도심권 중심의 송도해수욕장이 다시 각광을 받았지만 해운대 해수욕장은 미군 수륙양륙선의 원활한 상륙을 위해 주변 해송이 베어졌고 철조망을 처져서 민간인 출입도 금지 시켰다.

1960년대초 해운대해수욕장

1960년에 이르러서 민간인에게 해수욕장이 개방되었고 마침내 1963년에 국가에서 국내외 관광객 유치 목적으로 대규모 개발을 시행하였으며 동백공원도 이때 조성하였다. 이런 와중에 1964526일 새벽 무게 95kg, 200년 묵은 거북이가 파도에 밀려 해운대해수욕장에서 발견되었다. 예로부터 거북이는 영험한 동물로 여겨졌기 때문에 528일에 신속하게 거북이를 어선에 실어 바다로 돌려보냈다. 이후 호사가들은 거북이의 보은으로 인해 지금의 대한민국 대표 해수욕장 명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1960년대초 한여름날의 해운대해수욕장 피서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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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추야우중의 블로그입니다.

카테고리 없음 2019. 2. 23. 13:57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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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피기 위해 피고, 새는 날기 위해 난다.
존재 자체의 아름다움을 마음 가득 느껴진다면
인생은 진실로 아름다운 것이다.

 

 

하늘을 이불로, 땅을 자리로,  산을 베개로 삼고
 
달을 촛불로, 구름을 병풍으로, 바다를 술통 삼아
 
크게 취하여,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니
 
도리어 긴 소맷자락이 곤륜산에 걸릴까 걱정되노라
 
[진묵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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