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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은 애리조나(Arizona) 주 북부에 있는 거대한 협곡으로 20억 년 전에 생성되었고 길이 447km, 너비 6~30km, 깊이 1,500m로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협곡으로 콜로라도 강이 동서로 가로 질러 흐르고 있다. 협곡의 벽에는 시생대 이후 20억년 동안의 많이 지층이 드러나 있어 지질학 교과서라고 부르고 있다. 콜로라도 소나무를 비롯하여 식물과 조류 300여종, 포유류 76종이 서식하고 있으며 1919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1979년에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네바다 주의 라스베이거스 매캐런 국제공항

애리조나 주는 미국 서부의 상징물인 사구아로 선인장을 많이 볼 수 있고 남쪽 절반은 소노란 사막(Sonoran Desert)로 덮여 있다. 스페인 탐험가 코로나도가 이곳을 누빈 후 유럽 이주민과 선교사들이 살기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많은 부족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1886년 미국이 영토 확장을 위해 인디언과 전쟁을 하였고 아파치 전사 제로니모가 항복을 함으로써 미국 지배하에 들어갔다.

도박과 유흥의 도시로 유명한 라스베이거스(Las Vegas)는 여행자에게 말에게 물과 음식을 먹일 수 있는 초원이라는 뜻이다.

보스턴에서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 여행의 출발은 보스턴의 로건 국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네바다 주의 라스베이거스 매캐런 국제공항에 도착하여 그곳 라스베이거스 룩소르 호텔에서 1박을 하였다. 룩소르 호텔은 금속과 유리로 이루어진 30층 짜리 피라미드형 호텔로 1993년에 개장하였다. 라스베이거스의 명물로 스핑크스와 오벨리스크가 정면에 자리 잡고 있으며 밤이면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광선을 쏘아 올린다.

비행기에서 본 라스베이가스

도박과 유흥의 도시로 유명한 라스베이거스(Las Vegas)는 옛날 북쪽에 작은 샘이 위치하고 있어 여행자들이 잠시 머물렀던 곳으로 거주지가 시작되었다. 라스베이거스(Las Vegas)는 여행자에게 말에게 물과 음식을 먹일 수 있는 초원이라는 뜻이다. 1905년 5월 15일에 철도회사 유니언 퍼시픽이 이 지역을 1200여개로 분할하여 매각하였는데 하루 만에 매각이 끝났다. 그래서 이 날이 라스베이거스의 창립일이 되었다.
도박 산업은 1942년 로스앤젤레스의 개발업자와 마피아 연합이 화려한 대규모의 카지노를 짓기 시작했다. 1946년에 벅시 시겔이 Flamingo를 개장하면서 정장차림의 관습이 정착되었다. 1960년대에 억만장자 하워드 휴즈가 수많은 카지노를 사들임으로써 조직 폭력배의 영향력이 사라지게 되었다. 카지노 출입은 18세 이상 가능하고 21세 이상이면 도박하거나 술을 마실 수 있다.

US-93 도로 위에서 본 네바바 주 풍광

다음날 차를 렌트하여 아침부터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을 향해 출발하였다. US-93 도로를 타고 가다가 I-40 도로로 바꾸어 달렸다. 중간에 후버 댐을 만나는데 높이가 756피트에 아르데크 양식의 우아한 곡선미를 갖추고 있다. 원래 이름은 볼더 댐(Boulder Dam)이고 대공황 타개책인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공사가 1931년에 착공하여 1935년에 완공되었는데 라스베이거스 등 대도시에 용수와 수력전기를 공급하고 있다. 마지막 도로 AZ-64 이용하여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의 사우스 림(South Rim)에 도착했는데 소요시간은 약 6시간이 걸렸다.

I-40 도로 위에서 본 풍광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에서 관광하기 좋은 달은 6월 ~ 9월이고 공원 내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자가용차를 이용할 수 있고 자연의 지형을 이용한 전망 포인트도 많다. 그리고 계곡 아래 콜로라도 강까지 내려가는 트레일 코스도 있다. 여름에는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경우가 있어 우비를 지참해야 한다. 고도차가 커서 온도 변화와 아침저녁으로 기온이 급격히 내려가기 때문에 여러 벌의 옷을 준비해야 한다.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 풍광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을 투어 하는 방법에는 셔틀버스와 승용차, 헬리콥터를 이용하는 것이 있다. 공원 안으로 차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어 드라이브하면서 돌아보는 것이 편하다. 또한 렌터카를 이용할 수 있다. 셔틀버스는 무료이고 4월 ~ 9월에만 운행하며 3개 노선이 있다.
야바파이 포인트(Yavapai Point)까지 가는 빌리지 루트, 웨스트 림의 끝 부분인 허미츠 레스트(Hermit′s Rest)까지 가는 허미츠 레스트(Hermit′s Rest) 루트 그리고 이스트 림의 야키 포인트(Yaki Point)까지 가는 야키 포인트·사우스 카이밥 루트가 있다. 또한 요금을 지불하는 관광버스 투어도 있다.
헬리콥터 투어는 허미츠 레스트(Hermit′s Rest) 서쪽부터 콜로라도 강 위를 횡단하는 소요시간 30분의 노스 캐니언 투어와 그랜드캐니언 협곡에서 동쪽의 사막까지 가는 소요시간 50분의 임피리얼 투어가 있다.

하이킹을 좋아하면 노새 상행도 생각해볼만하다. 1일 노새여행이 왕복 7시간 정도 걸린다. 유의 할 것은 체중 75kg 미만이고 키가 142cm이상 이어야 한다. 그리고 급류타기가 있는데 4월부터 10월 까지 운영하며 다양한 보트를 타고 콜로라도 강의 급류를 즐기는 것이다.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의 입구는 사우스 림(South Rim)과 노스 림(North Rim)이 있는데 사우스 림은 연중 개방하고 교통이 편리하며 많은 관광객이 모여 든다. 노스 림은 5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만 개방하는데 사우스 림에 비하면 조용하여 여행 스타일에 따라 선택하여 즐기는 곳이다. 노스 림과 사우스 림까지 직선거리는 6km이지만 자동차를 이용해서 350km를 돌아가야 되기 때문에 약 5~6시간 걸린다. 정기버스는 하루 1 회 운영한다.

사우스 림은 그랜드캐니언 빌리지(Grand Canyon Village)를 중심으로 이스트 림(East Rim)과 웨스트 림(West Rim) 나뉘는데 그랜드캐니언 빌리지 인근의 관광명소로는 1540년 스페인의 탐험대가 최초로 그랜드 캐니언을 발견하게 된 장소인 야바파이 포인트(Yavapai Point)가 있고 근처에는 야바파이 박물관이 있다. 그리고 그랜드 캐니언의 여러 전망 포인트 중 가장 경관이 뛰어나고 아름다운 마더 포인트(Mather Point)있고 일출 풍광도 최고다.

브라이트 엔젤 트레일(Bright Angel Point) 코스는 중앙에 흐르는 콜로라도 강까지 약 20km를 지그재그로 내려가는데  왕복시간이 10~12기간이 소요되어 하이킹으로 야영장에서 1박을 하여야 한다.

이스트 림은 동쪽으로 끝인 데저트 뷰(Desert View)까지 약 40km으로 이어지는 코스로 일 년 내내 차량 통행이 가능하여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다. 셔틀버스의 종점으로 바람과 물의 침식작용으로 형성된 기묘한 산들을 볼 수 있는 야키 포인트(Yaki Point)와 이스트 림에서 풍광이 가장 뛰어난 그랜드 뷰 포인트(Grand View Point)가 있다. 미국 대서부의 경관을 그렸던 화가 토머스 모란(Thomas Moran)의 이름을 붙인 모란 포인트(Moran Point)있다. 그리고 이스트 림의 끝부분인 데저트 뷰(Desert View)가 있는데 1932년 인디언의 유적을 재현한 전망탑(The Watch tower)이 있다.

그리고 사우스 림의 반대쪽에 있는 노스 림은 사우스 림보다 규모는 작고 교통이 불편하지만 조용하다. 해발 8천 피트가 넘으며 사우스 림에 비해 평균 980피트나 높아서 여름철이면 시원하고 겨울철에는 더 추우며 기후는 더 습하다. 전나무 숲이 노스 림이 더 울창하다. 관광명소에는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에서 가장 높은 임피리얼 포인트(Imperial Point)가 있는데 거대한 암벽들이 여명 속에서 드러나는 일출 모습이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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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다 주(州)는 미국 남동부에 위치하고 멕시코 만과 대서양 사이에 놓인 반도로 면적은 한반도 면적의 85%이다. 미국의 남쪽에 있어서 적도에 가까운 편이고 반도 끝에서 다시 플로리다 키스 (Florida Keys) 제도가 이어진다. 플로리다 북부에는 익히 알고 있는 스티븐 포스터 작사, 작곡의 스와니 강이 있는데 조지아 주(州) 남부의 오커퍼노키 습지대에서 흐른 강은 플로리다 주(州)의 북부를 지나 멕시코 만(灣)에 흘러든다. 온대기후지만 매우 무덥고 습하고, 남쪽 끝으로 내려가면 아예 열대기후이다.

월트 디즈니랜드의 랜드 마크인 신데렐라 성(Cinderella Castle)

1513년에 지금의 케네디 우주 센터 옆의 케이프 케너버럴(Cape Canaveral) 지역에 상륙한 스페인의 정복자이자 푸에르토리코의 전 지사인 후안 퐁세 데 레온이 스페인 부활절 꽃 축제인 파스쿠아 플로리다(Pascua Florida) 기념일에 상륙하였다 하여 이름을 라 파스쿠아 플로리다라고 붙였다. 당시 그곳 플로리다에는 아팔라치 인디언, 티뮤쿠안 인디언, 칼루쟈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신데렐라 성(Cinderella Castle)의 야경

1565년에 스페인 귀족 페드로 메넨데즈 데 아빌레스가 신대륙에서 가장 오랜 된 식민지 정착지인 세인트어거스턴(St Augustine)을 세웠다. 따라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가 세인트어거스턴(St Augustine)이고 유렵식 건축과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분위기가 남아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해군기지가 건설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실버 촌이 최초로 유행을 일으켰다. 케네디 우주 센터 등 우주산업이 풍요로움을 가져 주었고 1959년 쿠바 혁명으로 마이애미에는 피델 카스트로 정권에 반대하는 쿠바인이 영구 정착촌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1970년대 월트 디즈니랜드로 인해 관련 관광업 직종에 수백만 일자리가 창출됐다.
플로리다 반도에서 플로리다 키스 (Florida Keys) 제도 끝인 키웨스트(Key West)는 마이애미보다 오히려 쿠바 아바나가 가깝다. 이곳에 작가 헤밍웨이가 1931년부터 1940년까지 살았던 헤밍웨이 하우스가 있고 그의 피 묻은 군복 등 유물이 소장되어 있는 키웨스트 미술관과 박물관도 있다. 또한 헤밍웨이 데이 축제가 있어 헤밍웨이를 느끼게 하는 도시이다.

월트 디즈니 랜드의 리조트 전경

플로리다 중앙의 올랜드에 위치하고 있는 월트 디즈니 랜드는 1964년 월트 디즈니가 놀이공원 부지를 찾던 중 습지, 오렌지 농원 등 미개발지인 이곳을 놀이 공원으로 확정하여 공사를 시작하여 1971년에 개장하였다. 면적은 43만 평방 마일이다.
올랜드(Orland) 지명은 1830년대 미국과 세미놀 인디언과의 전쟁(세미놀 전쟁, 플로리다 전쟁으로 세 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전사한 미국 병사 올랜드 리브스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세미놀(Seminole) 인디언은 16세기 스페인이 플로리다 정복 후 원주민 인디언은 질병으로 급감하였고 18세기에 타 지역 조지아 주, 미시시피 주, 앨라배마 주, 등에서 이주해온 인디언이다. 이들은 문명화된 다섯 부족(체로키족, 치카소족, 촉토족, 크리크족, 세미놀족) 중 하나이다.

월트 디즈니랜드는 애니멀 킹덤, 디즈니 MGM 스튜디오, 매직 킹덤, 엡코트 센터 등 4개의 테마 파크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유를 갖고 충분히 즐기려면 최소 7일은 걸린다. 대충 파악하고 즐기려면 4~5일 정도 걸린다. 플로리다 올랜드 날씨는 여름이 고온다습하여 9월 ~ 12월에 오는 것이 야외 놀이 공원 즐기기에 좋다. 6월, 7월, 8월은 매우 덥고 습하며 국지성 소나기가 내려서 피하는 것이 좋다.
애니멀 킹덤(Animal Kingdom)은 1998년에 오픈한 월트 디즈니 월드의 네 번째 테마파크로 공룡시대의 지구부터 아프리카의 사바나, 동남아의 열대우림 등을 재현하고 있다. 애니멀 킹덤 중앙에는 생명의 나무(The tree of life)라는 거대한 나무가 있는데 14층 높이에 밑둥은 약 15m이고 나무에는 325종 이상의 동물모습이 새겨져 있다. 아프리카 구역에서 32명 정원의 사파리차를 타고 사자, 기린 등 아프리카 동물을 탐험하는 킬리만자로 사파리 투어가 있다.
라이온 킹을 모티브로 춤과, 노래 그리고 특별한 퍼포먼스로 가득한 라이온 킹 축제(Festival of the Lion King)가 있다.

애니멀 킹덤(Animal Kingdom) 입구에서 관광객을 맞이하는 Donald Duck
애니멀 킹덤의 중앙에 있는 생명의 나무로 14층 건물 높이에 밑둥 둘레가 약 15m이다.
나무에는 325종 이상의 동물모습이 새겨져 있다.
아프리카 구역의 입구
아프리카 구역에서 32명 정원의 사파리차를 타고 사자, 기린 등 아프리카 동물을 탐험하는 킬리만자로 사파리 투어
라이온 킹을 모티브로 춤과, 노래 그리고 특별한 퍼포먼스로 가득한 라이온 킹 축제(Festival of the Lion King)

디즈니 MGM 스튜디오(Disney-MGM Studios)는 디즈니 영화 관련 캐릭터의 출현과 촬영 현장 투어, 스턴트 쇼, 거친 놀이기구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특히 디즈니 MGM 스튜디오 투어(Disney-MGM Studios Backlot Tour)는 셔틀을 타고 의상, 소품 제작현장과 실제 촬영 현장을 둘러본다. 그리고 거리 세트를 직접 걸어 보고 Catastrophe Canyon에서는 자연재해의 특수효과를 체험할 수 있다.

디즈니&MGM 스튜디오 투어 (Disney-MGM Studios Backlot Tour) 는 셔틀을 타고 의상 , 소품 제작현장과 실제 촬영 현장을 둘러본다.
거리 세트를 직접 걸어 보고 Catastrophe Canyon에서는 자연재해의 특수효과를 체험할 수 있다.

매직 킹덤(Magic Kingdom)은 월트 디즈니랜드의 랜드 마크인 신데렐라 성(Cinderella Castle)이 있다. 다양한 놀이 기구와 디즈니 캐릭터가 펼치는 퍼레이드 등 있다. 매일 밤 10시에는 불꽃놀이가 펼쳐진다.

불꽃놀이 행사

엡코트 센터(Epcot Center)는 미래사회의 실험적인 모델(Experimental Prototype Community of Tomorrow)의 머리글자를 따서 이름 붙인 곳으로 미래의 세계(Future World)와 월드 쇼 케이스(World Showcase)로 구성되어 있다. 미래의 세계는 에너지, 바다, 대지의 축복 등을 테마로 인류의 과거와 미래를 조명한 미래의 세계는 각종 흥미진진한 파빌리온(Pavilion)들이 있다.
엡코트 센터의 상징물로 우주선 지구호(Spaceship Eearth)라는 거대한 은색 구체가 있는데 지름은 약 50m으로 삼각형 알루미늄 패널 1만 1,324장을 서로 붙여서 만든 것이다. 내부에는 석기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인류의 커뮤니케이션 역사가 만들어져 있다.

농업을 통해 환경 문제를 생각하는 대지(The Land) 퍼빌리언. 온실 안의 각종 식물들

미래의 세계(Future World)는 기업들의 후원을 받아 미래에 대한 예견과 과학기술을 돌아 볼 수 있는 곳이다. 월드 쇼 케이스(World Showcase)는 영화 상영과 크루즈 등의 흥미진진한 어트랙션 외에 특색이 풍부한 각국의 요리를 맛볼 수 있다.

야간에는 우주선 지구호 (Spaceship Eearth)에서 레이저 쇼를 연출하고 있다.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주변지역을 여행을 가는데 거기서 여행객들을 많이 접한다. 젊은 남녀들은 혼자인 경우가 많고 특히 노부부들이 자주 보인다. 전반적으로 여행이 생활화가 되어서 다정하게 유유자적 차를 마시고 책을 읽는 모습을 보니 무척 행복해 보인다.

올랜드(Orland)에 있는 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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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0년 9월 101명의 남녀 퓨리턴(Puritan, 청교도)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 플리머스 항에서 뉴욕 항을 향해 출발했다. 그들은 몇 마리의 동물, 여러 가지 생활도구, 씨앗, 음식 등을 싣고 약 2달에 걸친 항해 끝에 뉴욕이 아닌 보스턴 남쪽 지역인 케이프 코드(Cape Cod)에 도착했다. 그곳은 그들이 정착허가를 받지 않는 곳이라 12월에 다시 남쪽으로 항해하여 뉴욕 항에 도착하려 했으나 오랜 항해에 지쳐서 포기하고 인근 지역에 상륙했는데 보스턴에서 남쪽으로 40마일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1620년 12월 상륙하여 정착한 퓨리턴(Puritan)의 마을을 재현 한 플리머스 플랜테이션 (Plymouth Plantation) 입구

그리고 이곳에서 정착했고 출발한 영국의 항구 이름을 따서 플리머스(Plymouth)라고 명명하였다. 이들은 북아메리카 해안의 추운 겨울을 나면서 준비 부족으로 그해 절반가량만 살아남았다. 다행히도 주변 인디언 부족과 반세기 이상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였고 초기에 우연히 영어를 할 줄 아는 파투셋(Patuxet) 부족 출신의 스콴토(Squanto)라는 인디언의 도움도 받았었다. 나중에 이들을 순례시조, 필그림 파더스(Pilgrims Fathers)라고 불렀다.

현재 매사추세츠 주 플리머스에는 1620년 12월 상륙하여 정착한 당시 퓨리턴의 마을을 재현 한 플리머스 플랜테이션(Plymouth Plantation)이 있는데 17세기 주민의 모습으로 한 배우들이 퓨리턴의 생활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이곳에서 3마일 떨어진 곳에서 메이플라워호를 복제해서 만든 메이플라워호(Mayflower) Ⅱ가 있고 필그림이 맨 처음 밟은 자리라는 플리머스 록(Plymouth Rock)이 있다.

플리머스 바위는 도리아 양식의 사방이 뚫린 신전 건물 안에 들어있다. 신전 안으로 들어가면 움푹 파인 바닥 아래 놓여있다.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바위이고 표면에는 1620이란 숫자가 새겨져있다. 1620년 퓨리턴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에 상륙할 때 밟은 바위이다.

1620이란 숫자를 보면서 비록 21세기 세계 최강 미국이나 200년의 짧은 역사의 문화재를 보니 웃음이 나온다. 진정 퓨리턴이 이 플리머스 바위를 밟고 내렸는지.

16세기 초 서유럽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면죄부판매와 성직 매매 등으로 비판을 받았고 이에 대하여 종교 개혁을 주장하며 마틴 루터와 장 칼뱅이 주도한 종교개혁이 이루어졌다. 이때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생겨났다.
당시 영국 국왕 헨리 8세는 스페인 출신의 왕비인 캐서린과 이혼을 원했지만 카톨리 교회의 교황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을 이룩한다는 명분으로 영국 국왕이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는 영국 국교회(Anglican Church)를 설립하였다.

플리머스 플랜테이션(Plymouth Plantation) 가옥 내부

그러나 무늬만 종교 개혁 일뿐 기존 교회의 부패는 그대로 남아 있었고 이를 정화(Purify)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퓨리턴이다. 퓨리턴은 신학적으로 장 칼뱅의 추종자들이었다. 점차 영국에서 탄압을 받자 퓨리턴의 회중파와 분리파 중 분리파는 신대륙에서 자신들만의 신앙 공동체를 건설할 계획으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 플리머스 항을 떠났다. 이후 10년이 지나서 퓨리턴 중 회중파도 신대륙을 향해 영국을 떠났다.

플리머스 플랜테이션(Plymouth Plantation)에서 17세기 주민의 모습으로 한 배우들이 퓨리턴의 생활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메이플라워(Mayflower)는 5월의 꽃으로 의미인데 산사(山査)나무의 꽃이다.
산사나무 꽃은 5월에 피는데 흰색으로 배꽃과 유사하다. 산사나무는 서양에서는 호손(Hawthorn)부르는데 천둥이 칠 때 생겨난 나무라고 한다. 그래서 벼락을 막아 주는 나무라하여 가지를 옷에 꽂아 놓으면 벼락을 피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집안에 꽂으면 화를 면할 수 있다는 벽사신앙을 가지고 있다. 또한 목재로 쓰이고 밭에 설치하는 울타리용으로 쓰이기도 한다.

메이플라워호를 복제해서 만든 메이플라워호(Mayflower) Ⅱ
메이플라워호(Mayflower) Ⅱ 내부

퓨리턴이 영국 플리머스 항을 출발할 때 배이름을 메이플라워(Mayflower)라고 불렀던 이유는 항해 중 벼락을 막기 위해서였다.

 미국에 와서 먼저 느끼는 것이 보행자 중심의 교통문화이다. 특히  집에 아기가 있어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신호등 쪽으로 가고 있으면 지나가려던 차들이 미리 정지하여 기다리는 것을 보면 미국이 교통문화의 선진국이라는 것을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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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은 미국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도시지만 센트럴 파크로 유명하고 월가, 브로드웨이 등 경제, 예술 문화의 중심도시이다. 여행 전 뉴욕 역사를 살펴보자.

뉴욕에 최초로 백인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중반 세인트로렌스 강 유역에 살던 프랑스인 모피 사냥꾼과 무역상들이였다. 그러나  그 곳에는 이미 선사시대부터 살고 있었던 10만 명의 알곤킨족(Algonquian) 인디언과 이로쿼이족(Ir oquois) 인디언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새, , 늑대 등의 동물형상을 한 거대한 의식용 언덕을 축조하였기에 언덕 축조자(Mound Builders)라고 불렀다. 또한 남쪽에는 크리크족(Creek) 인디언과 체로키족(Cherokee) 인디언이 살았다. 그들은 옥수수, , 담배를 재배했고 주위 숲에서 동물을 사냥하면서 식량을 보충했다.

뉴욕 리버티 섬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세계를 비추는 자유)

1609년에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의 후원을 받고 있는 헨리 허드슨이 항해하여 맨해튼에 와서 네덜란드 땅임을 선포하였고 누구라도 밟고 싶어 할 아름다운 땅이라고 표현하였다. 허드슨 강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였다. 이후 네덜란드 이주민이 맨해튼과 허드슨 강 유역을 중심으로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는 이곳을 무역항이자 교역기지로 건설하였다. 1624년 네덜란드인들은 맨해튼을 뉴 암스테르담(New Amsterdam)이라고 불렀다.

1884년에 완공한 자유의 여신상 높이는 받침대를 포함해 92m이다. 머리에 씌어진 왕관의 7개 첨단은 당시 7개 강을 의미하고 자유가 널리 퍼져 나간다는 상징이다

뉴잉글랜드에서 영국 이주민들의 정착이 원활해지고 인구가 늘어나자 그들은 남쪽으로 점차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영국 국왕 찰스 2세는 이곳 뉴욕지역을 탐을 내기 시작하여 마침내 1964년 영국 해군을 출동시켜 네덜란드로부터 빼앗고 그의 동생 요크 공(Duke of York) 제임스에게 넘겨주었다. 이후 요크 공의 이름을 따서 뉴욕(New York)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18세 중반까지 네덜란드 특성을 간직하였다.

여신상 내부는 왕관까지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는데 왕관까지 가려면 354계단(2층)을 올라가야 한다.

요크 공 제임스는 나중에 영국 왕 제임스 2세가 되는데 그의 땅 중에서 허드슨 강과 델라웨어 강 사이의 땅을 친구 조지 카터릿 경(Sir George Carteret)과 존 버클리(John Berkeley)에게 주었는데 이 땅은 뉴욕에서 갈라져 나와 뉴저지(New Jersey) 식민지가 형성되었다. 그들은 영국 귀족 신분이라서 영주(領主) 식민지로 출발했다.

뉴욕 허드슨 강 기슭의 시골마을 뉴 버그(New Burgh)는 미국 독립전쟁 사령부가 있었는데 1789년 당시 수도 뉴욕에서 조지 워싱턴이 미국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1811년 바둑판 모양의 거리가 만들어 졌고 1825년 이리 호와 허드슨 강 상류를 연결한 이리운하가 개통되어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고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1842년에 상수도가 완성되어 위생상태가 향상되었고 1876년 뉴욕 북쪽 늪지대 843에이커를 매립하여 직사각형의 센트럴 파크를 조성하였다.

뉴욕시는 맨해튼(Manhattan), 브루클린(Brooklyn), 퀸스(Queens), 브롱크스(Bronx), 스태튼 아일랜드(Staten Island), 등 다섯 구(borough)로 구성되어 있다. 맨해튼과 스태튼 아일랜드는 섬이고 브루클린과 퀸스는 롱아일랜드에 위치하며 브롱크스만 유일하게 뉴욕 주 내륙에 있다.

맨해튼은 뉴욕의 심장부이자 명소들이 많이 있고 맨해튼 이름은 동산의 섬이라는 뜻의 인디언 말에서 왔다. 브루클린은 맨해튼 남쪽에 위치하고 있고 뉴요커들이 맨해튼 다음으로 살고 싶어 하고 관광화가 된 곳이다. 퀀스는 가장 넓고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곳으로 최근 한국 사람들이 급증한 곳이다. 브롱크스는 절반은 시내이고 절반은 교외지역으로 가장 큰 동물원, 식물원과 양키 스타디움이 있다. 뉴욕 만에 있는 스태튼 아일랜드는 인구가 적고 교외지역으로 조용하고 아름다운 부두와 뉴욕의 초창기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뉴저지와 뉴욕 맨해튼을 연결해주는 다리
뉴욕 맨해튼(Manhattan) 코리아타운 거리.
맨해튼 이름은 “동산의 섬”이라는 뜻의 인디언 말에서 나왔다.

뉴욕 관광을 하는 방법에는 버스 투어, 유람선 투어, 헬기 투어 등 있는데 버스 투어가 가장 인기가 많다. 버스 투어를 할 경우는 그레이 라인(Gray Line) 투어 상품을 사용하면 무난하고 관광 소요 시간은 8시간 30분이다. 유람선 투어는 맨해튼 섬을 일주하면서 자유의 여신상을 보는 것이 가장 보편화된 유람선 투어로 허드슨 강 42번가 피어 83에서 서클 라인 투어(Circle Line Tour)를 이용하거나 사우스 스트리트 시포트 피어 16에서 시포트 리버티 크루즈(Seaport Liberty Cruise)를 이용하면 된다. 리버티 섬에 도착하여 자유의 여신상 내부까지 구경하는 경우는 배터리 파크에서 유람선을 타면 된다.

뉴욕 맨해튼 거리
버스 투어 用 관광버스

뉴욕과 미국을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상은 리버티 섬에 있는데 1886년 미국독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기증하였는데 1875년 파리에서 만들기 시작하여 1884년에 완공하였고 1885년 군함으로 미국에 옮겨졌다.

1865년 프랑스 지식인 에두아르 라볼레가 미국에 공화국의 이상을 표현하기 위해 기념물을 세울 계획을 품었고 프랑스 조각가 프레드릭 오귀스트 바르톨다가 설계와 제작을 하였고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로 만들었다고 한다.

높이는 받침대를 포함해 92m이다. 머리에 씌어진 왕관의 7개 첨단은 당시 7개 강을 의미하고 자유가 널리 퍼져 나간다는 상징이다. 원래 명칭은 세계를 비추는 자유였다. 여신상 내부는 왕관까지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는데 왕관까지 가려면 354계단(22)을 올라가야 한다.

맨해튼 섬을 일주하면서 자유의 여신상을 보는 것이 가장 보편화된 유람선 투어다.

월가(Wall Street)의 이름은 17세기 초 네덜란드 이주민들이 인디언과 영국인들로부터 뉴 암스테르담을 보호하기 위해 나무 장벽(Wall) 세운데서 유래한 것이다.

월가(Wall Street)의 청동 황소

뉴욕증권거래소(New York Stock Exchange)는 마치 로마 성을 연상시키는데179224명의 중개인에 의해 최초로 설립되었고 현재 중개인의 수는 약 1,400명이다.

뉴욕증권거래소(New York Stock Exchange)

페더럴 홀(Federal Hall National Memorial)은 그리스풍의 건물로 뉴욕이 미국 최초의 수도가 된 이후 1789년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취임 선서를 한 곳이다. 이후 18세기 뉴욕 시청건물이었다.

페더럴 홀(Federal Hall National Memorial)에 있는 초대 미국 대통령 조지 워싱턴 동상

트리니티 교회(Trinity Church)1697년에 세워진 최초의 영국 성공회 교회로 화재로 소실 된 후 증축, 개축하여 1846년에 완공하였다.

영국 성공회의 트리니티 교회(Trinity Church)

프랑스 르네상스풍의 건물은 세 번째 뉴욕 시청사로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뉴욕 시청사

퇴역한 실제 항공모함 인트레피드(USS Intrepid)를 개조하여 만든 인트레피드 해양우주항공 박물관이 맨해튼 미드타운에 있다. 전투기, 헬기, 잠수함 등 전시되어 있는데 가족여행객에게는 인기가 매우 높다.

퇴역한 실제 항공모함 인트레피드(USS Intrepid)를 개조하여 만든 인트레피드 해양우주항공 박물관

브롱크스 동물원(Bronx Zoo)는 국제 야생 동물 보호공원으로 1899년에 건립되었고 영국 런던 동물원에 이어 세계 2번째로 큰 동물원이다.

브롱크스 동물원(Bronx Zoo)는 국제 야생 동물 보호공원으로 1899년에 건립되었다.
영국 런던 동물원에 이어 세계 2번째로 큰 동물원이다.

뉴욕 근교에 있는 롱아일랜드(Long Island)1640년에 유럽인들이 들어와 고래잡이와 어업을 하는 포구로 이용하였다. 흰 모래 사장과 녹음이 어우러진 풍경은 바다의 낙원이라고 불릴 정도로 평화롭고 아름다워서 19세기말과 20세기 초부터 뉴욕 부유층 사람들이 해안가나 절벽에 별장을 지었고 휴양지로 유명하다.

롱아일랜드(Long Island)의 존스비치(Jones Beach)
뉴욕 근교에 있는 롱아일랜드(Long Island)는 1640년에 유럽인들이 들어와 고래잡이와 어업을 하는 포구로 이용하였고 19세기말과 20세기 초부터 뉴욕 부유층 사람들의 휴양지로 유명하다.
존스비치(Jones Beach)는 대서양을 맞이하는 해변으로 모래밭 길이가 10km로 서핑, 해수욕, 낚시를 즐기기 위해 많이 사람들이 찾아온다.

존스비치(Jones Beach)는 대서양을 맞이하는 해변으로 모래밭 길이가 10km로 서핑, 해수욕, 낚시를 즐기기 위해 많이 사람들이 찾아온다.

동북부에서 승용차를 가지고 롱아일랜드로 여행 갈 경우에는 코넷티켓 주 뉴 런던에서 롱아일랜드 Orient Point로 도착하는 페리 호 배를 타면 승용차를 싣고 편안히 갈수 있다. 가다 보면 해안가에 잠수함을 만드는 군수사업체 General Dynamic을 볼 수 있다.

코넷티켓 주 뉴 런던
뉴 런던 해안가에 잠수함을 만드는 군수사업체 General Dynamic

미국 여행을 하다보면 미국인들은 독서가 생활화 된 것 같다. 대중교통의 대기실이나 비행기, 버스, 여객선, 그리고 기차 안에서 남녀노소 구분 없이 항상 책을 읽는다. 출근 중이나 여행 중에나 깨알 같은 글자를 틈틈이 읽고 책을 가까이 한다. 또한 시종일관 정숙하여 옆에서 가만히 있자니 내는 숨소리조차 미안할 지경이다. 정말로 독서에 대해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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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 Angeles(LA)는 기원전 6,000년전 가브리엘리노와 추마시라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살기 시작했는데 18세기 후반 후니페로 세라가 이끄는 스페인 선교 사절이 선교회를 설립하면서 이 지역에서 그들은 사라졌다. 1781년부터 최초의 정착민이 멕시코에서 44명이 왔다. 그리고 1818년 첫 미국인은 난파 당한 보스턴 출신 목수 조셉 채프먼이었고 1830년 중반부터 서부에 대한 관심이 많이 생겨서 미국인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LA 유니버설 스튜디오(LA Universal Studio) 거리 모습

멕시코-미국전쟁(1846~1848)에서 미국이 승리하여 185044일에 미국에 편입되었다. 영화산업은 1908년부터 뿌리내리기 시작했고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도시가 되었다. 이곳 LA 코리아타운은 미국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1960년대 이후 미국에 온 이민1세대가 주축이 되어 197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LA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로스앤젤리스 할리우드 북쪽에 있는데 영화 스튜디오 중 가장 크고 인기가 많다. 주변의 대표적인 스튜디오는 실제 촬영 현장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워너 브라더스 스튜디오(Warner Bros Studio), 투나잇 쇼 등 NBCTV 세트를 볼 수 있는 NBC 텔레비전 스튜디오(NBC Television Studio) 등 있다.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워터 월드 촬영장소를 스턴트 맨들이 영화 주연장면을 재연

이곳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유명 영화 세트, 특수 촬영장면, 스턴트 쇼 등 관람 할 수 있는 일종의 놀이공원이다. LA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세계 최대 영화 스튜디오로 약 170라는 광대한 부지에 설립되었고 스튜디오 투어, 스튜디오 센터, 엔터테인먼트 센터 등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엔터테인먼트센터는 영화를 모티브로 한 멋진 어트랙션과 다양한 쇼를 즐길 수 있다. 주요 코스에는 아놀드 슈워즈네거 주연의 터미네이트,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워터 월드, 백 투 더 퓨처, 애니멀 플래닛 라이브(Animal Planet Live), 미라, 블루스 브라더스(The Blues Brothers), 스파이더맨 록스(Spiderman Rocks), 블래스트 존(Blast Zone) 등 공연하고 있다.

스튜디오 센터는 영화의 특수효과를 자세하게 볼 수 있는 곳으로 영화 제작 과정에 대한 소개와 함께 직접 등장인물이 되어 영화를 똑같이 재현해보는 등 영화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E.T 어드벤처, 쥬라기 공원, 백 드래프트, 더 월드 오브 시네 매직 등 있다.

스튜디오 투어는 4량으로 편성된 트램을 타고 약 40분 동안 실제 영화와 TV 촬영이 이루어졌던 스튜디오 및 세트를 관람 할 수 있다. 트램 투어 도중에 내려 특수 촬영 현장을 견학하게 되는데 이 때 몇 사람을 뽑아 촬영세트에 등장시켜 준다.

스튜디오 투어

미국 여행을 하다 보면 디즈니랜드나 유니버셜 스튜디오 등 놀이공원에서 대가족이 모여 즐기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 비롯하여 손자, 손녀들이 서로서로 손잡고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여가생활을 온 가족이 모여 같이 즐기는 것을 알 수 있다. 좋은 풍광을 배경으로 우리 부부가 따로 독사진을 찍을 때면 우리한데 와서 부부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한다.

옛날 중, 고교시절 미국사회는 개인주의 사회이고 고교졸업하거나 대학생이 되면 집을 떠나는 핵 가족사회라는 것이라 배웠는데 잘못 이해있음을 깨달았다. 즉 대가족 중심의 여가문화가 일반화가 되어있음을 알았다.

이곳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스턴트 쇼를 마치면 아이들이 스턴트맨을 기다리다가 사인을 받는 모습을 보고 이런 문화가 한국에서도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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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의 이구아수 폭포, 아프리카의 빅토리아 폭포와 함께 세계 3대 폭포 중 하나인 나이아가라 폭포는 다른 폭포와 마찬가지로 미국과 캐나다 국경에 걸쳐져 있다. 오대호(五大湖) 중 슈피리어 호(Lake Superior), 미시간 호(Lake Michigan), 휴런 호, 이리 호(Lake Erie)를 지나서 흐르는 강이 나이아가라 폭포를 형성하였고 이 물이 온타리오 호(Lake Ontario)를 지나서 세인트 로렌스 강이 되어 최종 대서양으로 흘러간다.

나이아가라(Niagara) 폭포는 뉴욕 주 버팔로(Buffalo) 시의 미국 폭포와 캐나다 온타리오 주 나이아가라 폭포 시의 캐나다 폭포로 나누는데 고트 섬(미국) 경계로 사진의 왼쪽이 미국 폭포이고 오른쪽이 캐나다 폭포다.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

나이아가라(Niagara) 폭포는 뉴욕 주 버팔로(Buffalo) 시의 미국 폭포와 캐나다 온타리오 주 나이아가라 폭포 시의 캐나다 폭포로 나누는데 고트 섬(미국) 경계로 동쪽이 미국 폭포이고 서쪽이 캐나다 폭포다. 캐나다 폭포는 낙차 54m, 너비 675m이며 말발굽(Horse Shoe) 폭포라고 부른다. 고트 섬을 끼고 건너편에 있는 미국 폭포는 낙차 56m, 너비 320m으로 규모와 수량을 비교하면 캐나다 폭포가 크고 웅장하다. 폭포를 구경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배를 타고 폭포 가까이 폭포수를 느끼는 것과, 헬기를 타고 보는 헬기 투어 또는 전망대(Tower)에 가서 보는 것인데 주변에 99m, 236m 등 다양한 높이의 전당대가 있어 폭포 전체 조망을 즐기는 것에는 부족함이 없다.

단연 백미는 배를 타고 폭포를 보고, 느끼고, 즐기는 것이다. 안개 아가씨 호(Maid of the Mist)에 승선하면 배는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 최대한 폭포에 가까이 접근하는데 폭포수에서 떨어지는 물보라를 체험하게 되는데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된다. 그리고 승선하면 반드시 파란 레인 코트를 입어야 한다. 안개 아가씨 호(Maid of the Mist)는 1846년 최초로 운영한 이래 계속 운행 중이다.

안개 아가씨 호(Maid of the Mist) 선착장과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
레인보 다리와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
왼쪽부터 레인보 다리와 프로스펙트 전망 타워(86m)
안개 아가씨 호(Maid of the Mist)에서 본 미국 나아아가라 폭포
왼쪽부터 레인보 다리와 프로스펙트 전망 타워(86m) 그리고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
캐나다 나이아가라(말발굽 : Horse Shoe) 폭포에 진입하는 안개 아가씨 호(Maid of the Mist)

그리고 퀸 빅토리아 공원에서 매일 해가 진 뒤 빨강, 노랑, 초록, 파랑 등 형형색색의 조명을 비추는데 그 모습이 너무 황홀하고 아름답다. 또한 말발굽(Horse Shoe) 폭포 전경을 감상하기에도 제격이다.

캐나다 나이아가라(말발굽 : Horse Shoe) 폭포 상류

옛날 이곳에는 북미 세네카 인디언들이 살았었고 프랑스 선교사 루이 헤네핀이 1978년에 나이아가라 폭포를 발견했다. 발견 당시 그는 “세계에서 이에 견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감회를 묘사하였다.

숙소인 Radisson Hotel에서 바라 본 전경;캐나다 나이아가라(말발굽 : Horse Shoe) 폭포 상류

나아가가라 폭포에는 슬픈 전설이 하나 서려있다. 먼 옛날, 이곳에 살던 어느 북미 원주민 부족은 1년에 한 번씩 폭포의 신에게 제물을 바쳐야 했는데, 부족의 추장은 제비뽑기로 자신의 하나뿐인 딸이 선택되었다. 공정성과 추장으로서의 위엄을 위해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추장은 이를 받아들였다. 마침내 딸이 제물로 바쳐지던 날, 그녀는 꽃으로 장식된 작은 조각배를 타고 폭포를 향해 떠밀렸다. 그녀의 슬픈 절규가 물소리에 묻혀버리려던 찰나, 멀리서 그녀의 아버지인 추장이 배를 타고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두 부녀는 손을 맞잡은 채, 함께 폭포 아래로 사라졌다.

캐나나 퀘벡에서 출발하여 몬트리올 - 킹스턴 - 토론토- 나이아가라 폭포로 이어지는 여행경로에 만난 모습
레인보 다리를 건너면 만나는 캐나다 - 미국 국경 검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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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복사지(崇福寺址)는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 산23-1에 위치하고 있으며 최치원이 비문을 쓴 쌍거북비석받침과 동, 서 삼층석탑이 있다. 이 절은 신라 37대 선덕왕 이전에 원성왕의 어머니 외삼촌이며 왕비 숙정황후(肅貞王后)의 외할아버지인 파진찬(波珍飡) 김원량(金元良)이 창건한 곡사(鵠寺, 고니절) 인데, 원래 곡사(鵠寺) 터는 여기서 2-3Km 가량 떨어진 38대 원성왕릉(괘릉)자리였다. 원성왕이 죽자 풍수상(風水上) 길지(吉地)이던 터를 희사하여 장지가 되었고 곡사를 옮겨 다시 세운 절이 현재의 대숭복사지이다. 곡사는 사원에 고니모양의 바위가 있어 붙인 명칭이다.

현재 조성된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는 2013년 복원하였는데 쌍귀부 비석받침은 국립 경주 박물관에 보관 중인 비석받침을 복제하였고 이수도 고증을 통하여 복원하였다. 비문의 쌍계사의 진감선사대공탑비(雙溪寺眞鑑禪師大空塔碑)의 글씨를 집자하여 비문에 비신에 새겼다.

그러나 그 후 70여 년간 절은 큰 형세를 이루지 못하다가, 48대 경문왕(861~874 재위)의 꿈에 원성왕을 뵙고 이 절을 원성왕의 명복을 비는 원찰(願刹)로 삼고 크게 확장하였고 49대 헌강왕 885(헌강왕 11)때 절 이름을 대숭복사(大崇福寺)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출토된 기와 가운데 이 절이 국사(國寺)였으며 조선시대까지 존속하였음을 알리는 ´국사대웅´(國寺大雄)´개와대웅´(蓋瓦大雄) 등의 명문(銘文)이 적혀 있는 평기와가 발견되어 조선시대까지 절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추정하고 이다.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의 쌍귀부 비석받침은 금당 터에서 동남쪽 10여M 위치에 세워져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절의 역사는 1930년 대 부터 1978년 국립경주박물관의 현지 지표조사에 이르기까지 파괴된 최치원의 숭복사비의 비편이 모두 13개가 수습되었고 이를 통해 99자가 해독되어 밝히게 되었다. 최치원의 대숭복사비는 진성여왕 10(896)에 만들어졌다. 이전에는 위치가 외동면 말방리인 탓으로 '말방리 사지(末方里寺址)'라고 불리었다. 말방 지명은 옛날 마방(馬房)이 있었으므로 마방-말방이라 불렀다.

대숭복사지는 금당 앞에 탑이  2개 있는  1금당 쌍탑식의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배치의 사찰이다.

이 절은 평지의 지형, 탑의 배치 형식 등이 불국사와 매우 유사하여 두 절의 건립연대가 큰 차이가 없음으로 추측하고 있다. 금당 앞에 탑이 2개 있는 1금당 쌍탑식의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배치를 따르고 있으며, 대지를 3단의 석축으로 구분하여 맨 윗 단에 탑()이 자리 잡고 있다. 금당은 정면 5, 측면 3칸이며 금당의 기단은 2중 기단이며 금당 중심에서 북으로 148척 떨어진 위치에서 동, 서로 긴 기단석이 발견되었는데 강당지로 추정하고 있다.

금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기단은 2중 기단으로 조성되어 있다.
금당지에 모아 놓은 각종 석조 부재들

, 서 삼층석탑은 경문왕(861-875)때인 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서 탑 두 기가 모두 불완전한 형태의 탑으로 복원되었고 이런 이유로 탑의 예술성은 높이 평가되나 문화재로의 가치가 반감되어 보물로 지정받지 못했다. , 서 석탑 모두 같은 규모와 양식에 조성된 지대석 위에 2중 기단의 삼층석탑이다. 상층 기단 면에 12구씩 팔부중상(八部衆像), 팔부신장상(八部神將像)을 조각하였고 1층 몸돌 각 면에는 문모양(門扉양식)을 새겼다. 지붕돌의 처마받침은 4단으로 통일신라후기의 양식을 갖추고 있다.

대숭복사지(大崇福寺址)와 동, 서 삼층석탑(三層石塔)

서 삼층 석탑은 2중 기단 하층 기단은 대부분 파손되었고 상층 기단, 1층 몸돌과 지붕돌, 그리고 2층 지붕돌만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지붕돌 추녀에는 풍탁을 단 흔적이 남아있다. 동 삼층 석탑은 서 삼층 석탑 비해 다소나마 석탑을 형태를 갖추고 있다. 2중 기단 하층 기단은 약간 파손되었고 상층 기단, 1층 몸돌과 지붕돌, 그리고 2층 지붕돌, 3층 몸돌과 지붕돌만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대숭복사지 서 삼층석탑
서 삼층 석탑은 2중 기단 中 하층 기단은 대부분 파손되었고 상층 기단, 1층 몸돌과 지붕돌, 그리고 2층 지붕돌만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지붕돌 추녀에는 풍탁을 단 흔적이 남아있다.

팔부중(八部衆) 또는 팔부신장(八部神將) 고대인도 신로 석가모니에게 교화된 뒤 불법을 수호하는 선신이 되었으며 모두 8()의 신으로 무장을 하고 손에는 다양한 지물들을 들고 있다. 사천왕의 직속부하 여덟 분을 일컫는 팔부중(八部衆)과 부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든 여러 중생을 의미하는 여래팔부중(如來八部衆)으로 구분된다석탑에 조성 된 배경은 첫째가 밀교(密敎)의 영향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은 국난에 처했을 때 국가의 수호, 전쟁의 승리 등으로 발전되었고, 개인에게는 벽사(辟邪)의 기능을 팔부중이 하였기 때문이다. 둘째는 화엄경(華嚴經)과 법화경(法華經)의 영향으로 화엄신중신앙(華嚴神衆信仰)의 한 형태로 화엄 불국토 세계와 정토 세계의 구현을 여래팔부중 이미지로 구체화하였기 때문이다.

동 삼층 석탑은 서 삼층 석탑 비해 다소나마 석탑을 형태를 갖추고 있다. 2중 기단 中 하층 기단은 약간 파손되었고 상층 기단, 1층 몸돌과 지붕돌, 그리고 2층 지붕돌, 3층 몸돌과 지붕돌만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특히 팔부중상(八部衆像)은 불법(佛法)을 옹호하고 불경(佛經)을 수지독송(受持讀誦)하는 사람들을 외호하는 신들로 석탑 석면(石面)에 나타난 위치는 방위에 관계없이 긴나라(緊那羅 : 사람 머리에 새의 몸, 혹은 말머리에 사람 몸의 모습마후라가(摩睺羅伽 : 관위에 뱀을 갖춘 모습), 아수라(阿修羅 : 얼굴은 三面이고, 팔은 여덟이고 손에는 칼 등 각종 持物을 갖춘 모습건달바(乾闥婆 : 음악의 신으로 獅子冠을 쓴 모습), 야차(夜叉 : 사자, 코끼리, 호랑이, 사슴, , , 나귀, 낙타, , 등의 모습(: 얼굴과 몸은 人形이나 뱀의 꼬리, 그리고, 머리 위에 龍形의 모습), (: 대체로 花冠을 지닌 天人像의 모습가루나(迦樓羅 : 人形에 새의 머리 모습) 등 각기 한 쌍씩 배열되어 있다. 상의 자세는 좌상(坐像)입상(立像)으로 구분되어 있고, 좌상의 경우는 운문(雲文) 혹은 연화문(蓮花文) 대좌(臺座)를 갖추었으며, 입상은 모두 암좌(岩座)를 구비하였다.

현재까지 조사된 신라 시대 석탑 팔부중상은 총 19기이다. 그리고 팔부중상의 최초 사례는 남산 창림사지(昌林寺址) 삼층석탑(원성왕 7, 791)이고 가장 우수한 조각의 팔부중상은 석굴암에 있는 팔부중상이다. 석탑에 나타난 문양 가운데 인왕상과 사방불, 십이지상에 이어 가장 늦게 나타난 양식이 팔부중상이다.
일반적으로 신장상(神將像)은 수미산 위에 사는 모든 신들을 통틀어 말하며, 무력으로 적을 항복시키며, 불법(佛法)을 옹호하고 불경(佛經)을 수지 독송(受持讀誦)하는 사람들을 외호하는 신들이다. 신장의 종류는 천부상무인상용왕상 등 3종류이며 천부상에는 제석천범천과 사천왕상 등 있고 무인상에는 금강역사(인왕상), 팔부신장(팔부중상), 십이신장(십이지신상등 있으며 용왕상에는 팔부용왕이 있다.

 우리나라 석탑에 있어서 신장상이 처음으로 등장한 곳은 선덕여왕 3(634)에 건립된 분황사 모전석탑의 금강역사상이다. 통일신라 7세기 후반 감은사지 삼층석탑, 고선사지 삼층석탑에서 門扉양식이, 이후 여러 신인상이 등장하였다.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는 헌강왕 886(헌강왕 12) 때 최치원(崔致遠)에게 비문을 짓도록 명령하였다. 최치원(崔致遠)은 헌강왕(憲康王)과 정강왕이 연이어 승하하는 바람에 비문을 짓지 못하다가  진성여왕 896(진성여왕 10)에 완성하였다. 비의 모습이나 탁본도 전혀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서산대사의 제자인 해안(海眼)이 최치원(崔致遠)의 문집에서 4개의 비문을 뽑아 사산비명(四山碑銘)이라고 불렀는데, 숭복사비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비문은 바로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필사본에 근거한 것이다. 숭복사비문에는 경문왕과 그의 자녀들인 헌강왕, 정강왕, 진성왕으로 이어지는 2() 4()의 공덕을 기리는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는 금당 터에서 동남쪽 10M 위치에 세워져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쌍귀부는 지금 국립 경주 박물관 정문 전면에 놓여있다. 쌍귀부 형태를 한 귀부는 가장 이른 애장왕 1(802)에 조성된 것으로 무장사지의 쌍귀부와 이부가 있고 그 다음이 숭복사지의 것이며 포항시 신광면의 법광사지 쌍귀부와 경주 남산 창림사지 쌍귀부는 동일한 형태이나 조성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현재 조성된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2013년 복원하였는데 쌍귀부는 국립 경주 박물관에 보관 중인 것을 복제하였고 이수도 고증을 통하여 복원하였다. 비문의 쌍계사의 진감선사대공탑비(雙溪寺眞鑑禪師大空塔碑)의 글씨를 집자하여 비문에 비신에 새겼다.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은 지리산 쌍계사의 진감선사대공탑비(雙溪寺眞鑑禪師大空塔碑), 만수산 성주사의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白月光塔碑), 초월산의 숭복사지비(崇福寺址碑), 희양산 봉암사의 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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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38대 원성왕릉(785~798)은 토함산 서쪽 자락인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17번지에 있다. 원형봉토분으로 높이 7.5m, 봉분직경 22.2m로 봉분아래에는 봉토를 보호하기 위한 면석(돌판)과 탱석(버팀돌)을 각각 연결하여 호석을 마련하였으며 탱석 12개에는 무복(武服)의 십이지신상을 부조하였다. 호석과 가장자리의 석 난간 사이의 바닥에는 박석을 깔아 회랑을 조성하였다. 봉분의 동남쪽에는 상석을 설치하였고 봉분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80m 떨어진 위치로부터 동서로 약25m 사이를 두고 북쪽으로부터 돌사자(석사자상) 두 쌍, 관검석인상(冠劍石人像) 1쌍, 호인상(胡人像) 1쌍, 화표석(華表石) 1쌍을 차례로 마주보도록 배치하였다.

신라38대 원성왕릉(785~798)은 토함산 서쪽 자락인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17번지에 있다.
능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80m 떨어진 위치로부터 동서로 약25m 사이를 두고 북쪽으로부터 돌사자(석사자상) 두 쌍, 관검석인상(冠劍石人像) 1쌍, 호인상(胡人像) 1쌍, 화표석(華表石) 1쌍을 차례로 마주보도록 배치하였다.
호석과 가장자리의 석 난간 사이의 바닥에는 박석을 깔아 회랑을 조성하였다

이들 중 호인상과 화표석은 원성왕릉에 처음 세운 것으로 특이한 몽둥이를 들고 있는 호인상은 당 능묘에 매납했든 것으로 서역인 또는 불교의 신장상 모습을 하고 있다. 죽은 자와 산자의 경계 표시로 죽은 자의 부활을 염원하고 후손들의 번창을 상징하는 화표석은 인도 아쇼카석주 형식을 중국 남조의 황제릉에서 받아들인 후 당에 이르러 새로운 형태로 완성된 것을 신라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동쪽방향 석조물
서쪽방향 석조물
화표석(華表石)은 죽은 자와 산자의 경계 표시로 죽은 자의 부활을 염원하고 후손들의 번창을 상징한다.
화표석은 인도 아쇼카석주 형식을 중국 남조의 황제릉에서 받아들인 후 당에 이르러 새로운 형태로 완성된 것을 신라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특이한 몽둥이를 들고 있는 호인상(胡人像)은 당 능묘에 매납했던 것으로 서역인의 모습 또는 불교의 신장상 모습을 하고 있다.

관복 위에 갑옷을 걸친 관검석인상은 두 손으로 긴 칼을 세워 쥐고 있으나 관복으로 덮여 있어 칼자루가 보이지 않지만 두 발 사이에서 긴 칼끝을 확인할 수 있다. 갑옷은 뒷모습에서 볼 수 있다. 돌사자는 불교조각의 영향으로 좌상을 하고 있으며 동서남북 방향을 주시하고 능을 수호하고 있다. 반면 성덕대왕릉은 북쪽방향을 수호하는 돌사자는 없다.

관복 위에 갑옷을 걸친 관검석인상(冠劍石人像)은 두 손으로 긴 칼을 세워 쥐고 있으나 관복으로 덮여 있어 칼자루가 보이지 않지만 두 발 사이에서 긴 칼끝을 확인할 수 있다.
갑옷은 뒷모습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동쪽방향 돌사자(석사자상)
서쪽방향 돌사자(석사자상)
4마리의 돌사자는 제각자 동서남북 방향을 주시하면서 능을 수호하고 있다.

상석은 탁자형상석으로 두꺼운 큰 판석 5매를 이용하여 탁자형으로 만든 것이다. 상석 옆면의 앞뒤, 좌우는 4매의 판석을 조립하였고 앞뒤 면에는 안상(眼象) 2개를, 좌우 면에는 안상 1개를 각각 모각하였다. 안상의 형상은 첨정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되게 각각 3개의 호형을 연속적으로 모각하였다. 상석 윗면은 1매의 판석을 조립하였다.

상석은 탁자형상석으로 두꺼운 큰 판석 5매를 이용하여 탁자형으로 만든 것이다. 상석 옆면의 앞뒤, 좌우는 4매의 판석을 조립하였고 상석 윗면은 1매의 판석을 조립하였다.
앞뒤 면에는 안상(眼象) 2개를, 좌우 면에는 안상 1개를 각각 모각하였다. 안상의 형상은 첨정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되게 각각 3개의 호형을 연속적으로 모각하였다.

능역 내 석물배치는 당의 능묘제도를 처음으로 받아들인 무열왕릉의 능비 이후 신라인의 뛰어난 조각수법과 창의적인 발상으로 예술적 경지로 완성된 것으로 현존 신라 왕릉 중 가장 화려하고 완벽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십이지신상과 호인상을 호석과 능전에 배치한 것은 신라인의 창조적인 발상이다. 그리고 십이지신상은 왕릉에서의 십이지신상 첫 출현은 33대 성덕왕능이고 여기 원성왕릉의 십이지신상은 무복차림으로 정북은 자()로 시계 반대방향과 정남 오()의 시계방향으로 대칭으로 배치하였고 신라시대에서 가장 우수하고 뛰어난 조각수법이다.

화염문검을 들고 있는 午(말)상
월(도끼)를 들고 있는 未(양)상

 

외날창을 들고 있는 寅(호랑이)상

십이지신(十二支神)은 점성술이 발달한 서아시아의 십이궁(十二宮)印度를 거쳐 中國에 전래된 것으로 ()나라 중기 때 方位時間에 대응시키고 (), (), (), (), (), (), (), (), (), (), (), () 12동물과도 대응시켰다. 후한(後漢) 때 오행상극설 (五行相剋說)에 따라 십이지신을 설명하고 사람의 생년월일(生年月日)을 동물명으로 대신하여 일컬었다. 그리고 나라 때 묘지명판(墓地銘板)의 사면(四面)에 조각하거나 무덤에 넣는 도제용(陶製俑)에도 사용 되었는데 손에 홀()을 들고 문관(文官) 복장(服裝)을 한 인신에 머리만 십이지의 동물로 나타냈다.

불교에서 십이지신(十二支神)은 땅을 지키는 일을 하는 열두 신장으로 약사경(藥師經)을 외우는 불교인을 지키는 신장(神將)으로 12야차대장, 12시왕이라고도 하였다. 약사불의 12대원에 대응하여 약사불을 수호하고 약사의 대원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신장이며 십이신장이 약사여래와 함께 등장하게 된 것은 약사경(藥師經)에 따른 것인데, 석가모니가 약사여래의 본원공덕을 설명할 때 12야차대장이 크게 감명 받아 12대원을 행할 것을 서원하였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밀본법사(密本法師)약사경을 읽어서 병을 고쳤다는 기록과 김유신(金庾信) 장군도 약사경을 호지(護持)하는 사람과 교분을 가졌다는 기록이 있다. 십이지 신앙 즉 약사신앙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는 밀교의 영향으로 호국적 성격을 지녔으나, 삼국통일 이후에는 단순한 방위신으로써 그 신격(神格)이 변모되었다.

능의 뒤쪽에는 물이 나오고 있어 축대를 쌓고 물길을 만들어져 있다 .

원성왕릉(元聖王陵)으로 확정되기 전에는 걸 괘()자에 괘릉(掛陵)이라고 불렸고 옛날 이 자리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관을 수면 위에 걸어 장례하였다고 전해 내려왔다. 그래서 능의 뒤쪽에는 물이 나오고 있어 축대를 쌓고 물길을 만들어져 있다. 동경잡기에는 괘릉은 어느 왕의 능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수중에 장사지내고 돌 위에 널을 걸고 흙을 덮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조선후기(17세기말~18세기)부터 1973년 까지 사천왕사터에서 문무대왕비문 발견과 능지탑과의 거리 등 이유로 경주 김씨 문중에서 문무대왕릉이라 주장하였다.

배경에는 조선후기 족보의 간행과 이에 따른 조상숭배 대상의 확대가 됨에 따라 각 문중에서 선조의 행적 재평가(追崇旌閭伸寃追贈), 유적(遺蹟)의 현창(유허비와 신도비 건립, 누정재실정사영당의 건립), 서원(書院) 및 사우(祠宇) 건립, 문중권위의 홍보(선조의 문집간행) 등 앞 다투어 행하였기 때문이다.

원성왕릉 확정 전 신라문무왕릉 표석을 받치고 있던 받침석

1973년에 감은사터와 이견대 등 발굴조사와 경주시 외동읍 말방 숭복사터에서 최치원의 대숭복사 13파편의 비문 발견으로 괘릉의 피장자는 원성왕릉으로 확인되었다. 비문 내용에 따르면 괘릉자리는 신라 귀족(파진찬) 김원랑의 별장터로 곡사라는 절이 있었으며 원성왕이 죽자 터를 희사하여 장지가 되었고 곡사라는 절은 현재의 말방 숭복사터로 옮기고 연못을 메워 왕릉을 마련했는데 현실에 물이 차서 관을 바닥에 놓지 못하고 벽에 걸어 괘릉이라 불렀다. 곡사는 48대 경문왕 때 원성왕의 원찰로 지정하고 49대 헌강왕 때 절 이름을 대숭복사로 바꾸었다.

김경신은 왕이 되기 전 물과의 관계가 깊다. 첫째가 꿈에 그가 천관사 우물에 들어가는 것이고 둘째는 왕이 되기 위해 북천(알천)에 제사를 지낸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 원성왕이 재위 14년만에 죽으니 유해를 봉덕사 남쪽에서 화장하였다.” 고 되어있고 삼국유사에는 “ 왕의 능()은 토함산(吐含山) 서쪽 동곡사(洞鵠寺; 지금의 崇德寺)에 있는데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문이 있다.”고 되어있다.

38대 원성왕은 내물왕의 12세손으로 성은 김(), 이름은 경신(敬信, 敬愼, 敬則)으로 왕위에 오르기 전인 36대 혜공왕 16(서기780) 2월에 훗날 37대 선덕왕(宣德王)이 되는 김양상과 함께 김지정의 난을 진압하였다. 성덕대왕신종의 주조에 김양상과 김경신이 소임을 맡아 종명(鐘銘)에 이름이 기재되어 있어 두 사람은 긴밀한 관계로 추정된다.

당시 조정은 상대등 양상파와 이찬 지정파로 나누어져 세력을 다투었고 혜공왕은 지정 편을 들었다. 이때 이찬 김지정이 친위혁명 성격의 난을 일으켰고 김양상과 김경신이 난을 진압하면서 혜공왕과 왕비를 살해하였고 김양상을 선덕왕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대한 공로로 김경신은 상대등이 되었다. 선덕왕이 후사가 없이 병으로 죽자 김경신은 태종 무열왕 셋째아들인 김문왕(金文王)5세손인 이찬(伊飡) 김주원(金周元)과의 왕위다툼에서 승리하여 왕이 되었다. 김주원은 777(혜공왕 13) 이찬(伊湌)으로 시중(侍中)에 임명되었으며, 혜공왕(惠恭王)이 살해되고 선덕왕(宣德王)이 즉위한 780년에 퇴임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주원은 당대의 실력자로서 여러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이 왕위다툼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찬 김주원(金周元)이 처음에 수석 재상으로 있을 때에 김경신은 각간의 지위로 그의 차석 자리에 있었다. 김경신은 꿈에 머리에 썼던 두건을 벗고 흰 갓을 쓰고 손에 12현금(絃琴)을 잡고 천관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꿈을 깨어 사람을 시켜서 점을 쳤더니 점쟁이가 말하기를, 두건을 벗는 것은 관직에서 쫓겨날 조짐이요, 12현금을 잡은 것은 칼을 쓸 조짐이요, 우물에 들어간 것은 옥에 들어갈 조짐이외다.라고 하였다. 김경신은 이 말을 듣고 매우 걱정하여 문을 잠그고 출입을 하지 않았다. 이때에 아찬 여삼(餘三)이 와서 배알하겠다고 연락하였으나 김경신은 병으로 나가지 못하겠다고 사양하였다. 두 번째 연락하여 말하기를, 꼭 한 번만 뵙기를 바라나이다.󰡑고 하여 이를 승낙하였다.

아찬이 말하기를, 공께서 지금 걱정하는 일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김경신은 이에 꿈을 점친 사연을 죄다 이야기하였더니 아찬이 일어나서 절을 하고 말하기를, 이 꿈은 아주 길한 꿈이외다. 공께서 왕위에 올라가도 저를 버리시지 않으신다면 공을 위하여 해몽을 하겠습니다.고 하였다. 김경신은 곧 좌우를 물리치고서 해몽을 청하니 그가 말하기를, 󰡐두건을 벗는 것은 자기 윗자리에 사람이 없다는 뜻이요, 흰 갓을 썼다는 것은 면류관을 쓸 조짐이요, 12현금을 들었다는 것은 12대 손자에게 왕위를 전한다는 조짐이요,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대궐에 들어갈 조짐이외다. 고 하였다. 이에 김경신이 내 윗자리에는 주원(周元)이 있는데 어떻게 윗자리를 차지할 것인가?하니 아찬이 말하기를, 청컨대 비밀히 북천(北川)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될 것입니다. 라고 하여 그대로 하였다.

얼마 안 가서 선덕왕이 죽자 나라 사람들이 주원을 받들어 왕으로 삼으려고 그를 대궐로 맞아들이려 하였던 바 그의 집이 개천 북쪽에 있었는데 졸지에 냇물이 불어 건널 수가 없었다. 김경신이 먼저 대궐로 들어가 즉위하니 주원의 도당들도 모두 와서 여기에 붙어 새로 등극한 임금에게 배하(拜賀)하였다.

김경신이 왕이 된 배경의 꿈 해몽을 한 세력은 김유신계와 가야계인 것으로 추정된다. 김경신은 왕이 된 후 시조대왕(미추왕), 태종대왕(무열왕), 문무대왕, 조부 흥평대왕, 부 명덕대왕 등 5묘를 정하였고 무열왕계 왕조를 대신하여 원성왕계 왕조가 성립된 것 이며 신라 하대의 왕들은 원성왕의 후손이다. 최치원이 지은 숭복사 비문에 원성왕을 열조(烈祖)라고 호칭하고 있는데 이에 상응하게 그의 능은 다른 왕릉에 비해 화려하다. 무열왕계는 36대 혜공왕으로 끝났다.

즉위년(서기785)에 원성왕은 총관(摠管)을 도독(都督)으로 바꾸었으며, 즉위4(서기788)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설치하였다. 이는 유교경전에 능통한 사람을 3품으로 나누어 실력에 따라 관리로 등용한 것으로, 당시 신라사회에 있어서 무보다 문이 더 중시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한다.

 

786년에는 대사(大舍) 무오(武烏)가 병법 15권과 화령도(花鈴圖) 2권을 바쳤고, 왕 자신도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를 지었는데, 그것은 인생 궁원(窮遠)의 변화에 대한 이치를 담은 것이라 하나 전하지 않는다. 즉위7(서기791)에 제공(悌恭)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하였다. 제공은 785년에 시중(侍中)이 된 인물로 그가 일으킨 반란의 성격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785년에 승관(僧官)을 두어 정법전(政法典)이라 하고, 795년에는 봉은사(奉恩寺, 혹은 報恩寺)를 창건하였으며 망덕루(望德樓)를 세웠다. 처음에는 화엄종(華嚴宗)승려인 묘정(妙正)을 편애하여 내전(內殿)에 맞아들여 떠나지 못하게 하였으나 후에는 왕의 신임을 잃은 듯하다. 즉위14(서기798) 12월에 죽으니, 유명(遺命)에 따라 봉덕사(奉德寺)남쪽 토함악(吐含岳) 서쪽 동굴에 화장하였고, 능을 추복(追福)하기 위한 숭복사(崇福寺)가 세워졌다.

한편 김경신과의 왕위 계승전에서 패배한 김주원은 강원도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로 퇴거(退去)하였다. 원성왕은 786(원성왕 2)에 김주원을 명주 군왕(溟州郡王)으로 책봉하고, 명주·익령(翼嶺, 지금의 양양삼척(三陟근을어(斤乙於, 지금의 평해울진(蔚珍) 등을 식읍으로 주었고 강릉김씨(江陵金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명주도독(溟州都督)은 대대로 김주원의 후손에 의해 세습되었는데, 이들은 신라 말까지 반독립적인 지방 호족 세력으로 남았다. 후삼국 시대 명주 지방의 대표적인 호족이었던 김순식(金順式, 뒤에 王順式]이 그의 후손이다. 이들은 굴산사(掘山寺)의 사굴산파(闍掘山派)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김순식 가문은 고려에 귀의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강력한 호족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 2 원성대왕(元聖大王)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찬(伊飡) 김주원(金周元)이 맨 처음에 상재(上宰)가 되고 왕은 각간(角干)으로서 상재의 다음 자리에 있었는데, 꿈이 복두(幞頭)를 벗고 흰 갓을 쓰고 열두 줄 가야금을 들고 천궁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꿈에서 깨어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했더니 복두(幞頭)를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요, 가야금을 든 것은 칼을 쓸 징조요,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징조입니다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몹시 근심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
이때 아찬(阿飡) 여삼(餘三; 어떤 책에는 여산餘山이라 함)이 와서 뵙기를 청했으나 왕은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았다. 아찬이 다시 청하여 한 번 뵙기를 원하므로 왕이 이를 허락하니 아찬이 물었다. “공께서 꺼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왕이 꿈을 점쳤던 일을 자세히 말하니 아찬이 일어나서 절하고 말한다. “이는 좋은 꿈입니다. 공이 만일 왕위에 올라서도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공을 위해서 꿈을 풀어 보겠습니다.” 왕이 이에 좌우 사람들을 물리고 아찬에게 해몽(解夢)하기를 청하니 아찬은 말한다.

복두를 벗은 것은 위에 앉는 이가 없다는 것이요,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요, 열두 줄 가야금을 든 것은 12대손(代孫)이 왕위를 이어받을 징조요,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에 들어갈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이 말한다. “위에 주원(周元)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상위(上位)에 있을 수가 있단 말이오?” 아찬이 비밀히 북천신(北川神)에게 제사지내면 좋을 것입니다하니 이에 따랐다.
얼마 안 되어 선덕왕(宣德王)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은 김주원(金周元)을 왕으로 삼아 장차 궁으로 맞아들이려 했다. 그의 집이 북천(北川) 북쪽에 있었는데 갑자기 냇물이 불어서 건널 수가 없었다. 이에 왕이 먼저 궁에 들어가 왕위에 오르자 대신(大臣)들이 모두 와서 따라 새 임금에게 축하를 드리니 이가 원성대왕(元聖大王)이다.

왕의 이름은 경신(敬信)이요 성()은 김씨(金氏)이니 대개 길몽(吉夢)이 맞은 것이었다. 주원은 명주(溟洲)에 물러가 살았다. 경신이 왕위에 올랐으나 이 때 여산(餘山)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의 자손들을 불러 벼슬을 주었다. 왕에게는 손자가 다섯 있었으니, 혜충태자(惠忠太子)헌평태자(憲平太子)예영잡간(禮英匝干)대룡부인(大龍夫人)소룡부인(小龍夫人) 등이다.
대왕(大王)은 실로 인생의 곤궁하고 영화로운 이치를 알았으므로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 노래는 없어져서 자세치 못하다)를 지을 수가 있었다. 왕의 아버지 대각간(大角干) 효양(孝讓)이 조종(祖宗)의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왕에게 전했다. 왕은 이것을 얻게 되었으므로 하늘의 은혜를 두텁게 입고 그 덕이 멀리까지 빛났던 것이다.

정원(貞元) 2년 병인(丙寅; 786) 1011일에 일본왕 문경(文慶; <일본제기日本帝紀>를 보면 제55대 왕 문덕文德이라고 했는데 아마 이인 듯하다. 그 밖에 문경文慶은 없다. 어떤 책에는 이 왕의 태자太子라고 했다)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다가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물리고 금() 50냥을 사자(使者)에게 주어 보내서 피리를 달라고 청하므로 왕이 사자에게 일렀다. “나는 들으니 상대(上代) 진평왕(眞平王) 때에 그 피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듬해 77일에 다시 사자를 보내어 금 1,000냥을 가지고 와서 청하며 말하기를 내가 그 신비로운 물건을 보기만 하고 그대로 돌려보내겠습니다하였다. 왕은 먼저와 같은 대답으로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은() 3,000냥을 그 사자에게 주고, 보내 온 금은 돌려주고 받지 않았다. 8월에 사자가 돌아가자 그 피리를 내황전(內黃殿)에 간수해 두었다.

왕이 즉위한 지 11년 을해(乙亥; 795)에 당()나라 사자가 서울에 와서 한 달을 머물러 있다가 돌아갔는데, 하루 뒤에 두 여자가 내정(內廷)에 나와서 아뢴다. “저희들은 동지(東池)청지(靑池; 청지靑池는 곧 동천사東泉寺의 샘이다. 절에 있는 기록을 보면 이 샘은 동해東海의 용이 왕래하면서 불법佛法을 듣던 곳이요 절은 진평왕眞平王이 지은 것으로서 오백五百 성중聖衆과 오층탑五層塔과 전민田民까지 함께 헌납했다고 했다)에 있는 두 용()의 아내입니다. 그런데 당나라 사자가 하서국(河西國)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 남편인 두 용()과 분황사(芬皇寺) 우물에 있는 용까지 모두 세 용의 모습을 바꾸어 작은 고기로 변하게 해서 통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그 두 사람에게 명령하여 우리 남편들인 나라를 지키는 용을 여기에 머무르게 해 주십시오.” 왕은 하양관(河陽館)까지 쫓아가서 친히 연회를 열고 하서국 사람들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어찌해서 우리나라의 세 용을 잡아 여기까지 왔느냐. 만일 사실대로 고하지 않으면 반드시 사형(死刑)에 처할 것이다.” 그제야 하서국 사람들이 고기 세 마리를 내어 바치므로 세 곳에 놓아 주자, 각각 물속에서 한 길이나 뛰고 기뻐하면서 가 버렸다. 이에 당나라 사람들은 왕의 명철(明哲)함에 감복했다.

분황사 우물

어느 날 왕이 황룡사(皇龍寺)의 중 지해(智海)를 대궐 안으로 청하여 화엄경(華嚴經)50일 동안 외게 했다. 사미(沙彌) 묘정(妙正)이 매양 김광정(金光井; 대현법사大賢法師가 이 이름을 지었다) 가에서 바리때를 씻는데 자라 한 마리가 우물 속에서 떴다가는 다시 가라앉곤 하므로 사미는 늘 먹다 남은 밥을 자라에게 주면서 희롱했다. 법석(法席)이 끝나려 할 무렵 사미 묘정은 자라에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은덕을 베푼 지가 오랜데 너는 무엇으로 갚으려느냐?” 그런 지 며칠 후에 자라는 조그만 구슬 한 개를 입에서 토하더니 묘정에게 주려는 것같이 하므로 묘정은 그 구슬을 얻어 허리띠 끝에 달았다. 그 후로부터 대왕(大王)은 묘정을 보면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 내전(內殿)에 맞아들여 좌우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

이 때 잡간(匝干) 한 사람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도 묘정을 사랑해서 같이 가기를 청하자 왕은 이를 허락했다. 이들이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니 당나라의 황제(皇帝)도 역시 묘정을 보자 매우 사랑하게 되고 승상(丞相)과 좌우 신하들도 모두 그를 존경하고 신뢰했다. 관상 보는 사람 하나가 황제에게 아뢰었다. “사미를 살펴보니 하나도 길()한 상()이 없는데 남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으니 틀림없이 이상한 물건을 가졌을 것입니다.” 황제가 사람을 시켜서 몸을 뒤져 보니 허리띠 끝에 조그만 구슬이 매달려 있다.

황제는 말한다. “나에게 여의주(如意珠) 네 개가 있던 것을 지난 해에 한 개를 잃었는데 이제 이 구슬을 보니 내가 잃은 그 구슬이다.” 황제가 묘정에게 그 구슬을 가진 연유를 물으니 묘정은 그 사실을 자세히 말했다. 황제가 생각하니 구슬을 잃었던 날짜가 묘정이 구슬을 얻은 날과 똑같다. 황제가 그 구슬을 빼앗아 두고 묘정을 돌려보냈더니 그 뒤로는 아무도 묘정을 사랑하지도 않고 신뢰하지도 않았다.

왕의 능()은 토함산(吐含山) 서쪽 동곡사(洞鵠寺; 지금의 崇德寺)에 있는데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문이 있다. 왕은 또 보은사(報恩寺)와 망덕루(望德樓)를 세웠고, 조부(祖父) 훈입잡간(訓入匝干)을 추봉(追封)하여 흥평대왕(興平大王)이라 하고, 증조(曾祖) 의관잡간(議官匝干)을 신영대왕(神英大王)이라 하고, 고조(高祖) 법선대아간(法宣大阿干)을 현성대왕(玄聖大王)이라 했다. 현성대왕의 아버지는 곧 마질차잡간(摩叱次匝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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