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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음산 편백나무 숲길은 달음산 4부 능선 지점에 조성한 숲길이다. 숲길을 상세히 보면 달음산 기슭과 월음산 기슭 각 2곳에 조성되어 연결되어 있는데 특히 월음산 기슭에 조성된 편백나무가 크고 장대하여 운치가 있다. 월음산 등산로를 따라 심어져 있어 산행의 묘미를 더해준다. 숲길 산책은 옥정사에서 출발하는 것과 광산마을 초입에서 월음산 방향으로 출발하는 것이 있다. 순수 숲길산책의 소요 시간은 1시간 정도이다.

달음산 옥정사 입구

옥정사 방향에서 출발하는 것은 경사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형국이다. 옥정사에서 20~30분정도 올라가면 편백나무 숲길과 달음산 정상가는 길로 갈라지는데 왼쪽으로 빠지는 길로 가면 편백나무 숲길에 해당된다. 편백나무는 옥정사 방향에는 나무가 적고 월음산 기슭에는 많이 조성되어 있다.

옥정사 방향의 편백나무 숲길 초입 안내글자

 

옥정사에서 20~30분정도 올라가면 편백나무 숲길과 달음산 정상가는 길로 갈라지는데 왼쪽으로 빠지는 길로 가면 편백나무 숲길에 해당된다.

달음산(해발588m) 정관면과 일광면 원리와의 경계를 이루는 기장군의 명산이자 기장 8경 가운데 제1경이다. 달음산에는 예로부터 산삼이 있었다고 전해오는데 달음산 골짜기의 얼음이 녹을 무렵이면 천년 묵은 산삼이 사람으로 화()해서 상주(喪主)의 복장을 하고 이 산에서 내려와 좌천장터로 나들이 한다고 한다.

숲길에서 만나 밤나무 한 그루
멀리 보이는 동해바다

달음산은 만장년 산지로 산정은 주상절리로 형성된 두 개의 봉우리인 취봉과 옥녀봉이 있다. 북쪽 산록에서 좌광천, 남쪽에서는 일광천이 발원한다. 옛날에는 달이 뜨는 산이라는 뜻인 월음산(月陰山)이라고도 하였다. 기장현읍지에서는 취봉산(鷲峰山)이라고 적고 있는데 옛 기장 사람들은 추봉산 또는 축봉산이라고 불렀다. 주봉(主峰)의 이름은 취봉(鷲峰) 또는 수리봉이라고 하고, 그 동북쪽에 있는 봉우리를 옥녀봉(玉女峰) 또는 구슬아기봉이라고 한다. 취봉 일대에서 발원한 하천을 취정천(鷲井川), 옥녀봉에서 발원한 계곡을 옥정천(玉井川)이라고도 한다.

기도원 가는 길과 만난다.
월음산 기슭의 편백나무 숲길 안내글자

달음산 수리봉(취봉 鷲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일광면 원리 상리마을에서 달음산 기슭을 올라가면 해먹이라는 낙타 등처럼 생긴 능선이 있고, 그 능선 중턱에 골짜기가 있고, 그곳에 장사바우라는 큰 바위가 있다. 장사바위에서 올라가는 곳에 찬물샘이 있고, 그 옆에 집터가 있다. 이곳을 이고(李古) 집터라 하고 있다. 신라 석탈해왕 때 이곳에 이고(李古)라는 늙은 부부가 집을 짓고 살면서 장사바우 앞에서 이들을 점지하여 달라고 기원하였다. 달음산의 신령님이 감응하여 쉰 살이 넘은 외로운 늙은 부부에게 옥동자가 탄생하였다.

늙은 부부는 금지옥엽처럼 키우면서 바우라고 불렀다. 바우는 일곱 살이 되자 큰 바위를 번쩍 들고 내던지기도 하고 엄지손가락으로 빙빙 돌리기도 하였다. 바우장사의 소문이 퍼지게 되자 신라에서는 자객을 시켜 암살하려고 하였다. 그 당시 이곳은 신라를 괴롭히던 거칠산국이라는 작은 나라였기 때문이다. 위협을 느낀 바우는 부모 앞에 엎드려 신라국의 첩자가 소자를 죽이려 하니 소자는 성년이 될 때까지 피신을 하겠다고 눈물을 리며 하직인사를 올렸다.

광산마을로 가는 길로 가운데 길로 간다.

그리고 나서 장사바위에 올라서 왼쪽무릎을 꿇고 오른손가락을 짚고 힘껏 뛰어오르자 양 겨드랑이 밑에 비늘나래가 3자나 펴지면서 독수리처럼 날아 달음산 수리봉(鷲峰)에 앉았다. 수리봉의 날카로운 바위를 평탄하게 다지고 이곳에서 며칠간 머물다가 천마를 타고 북쪽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도 장사바위에는 이 바우소년 장사가 왼쪽무릎을 꿇었던 자리와 오른손을 짚었던 흔적이 바위에 뚜렷하게 새겨져 있고, 집터와 샘터가 남아 있다.

광산마을 신앙석으로 추정 됨
월음산 및 달음산 편백나무 숲길 가는 초입

그때부터 이 바위를 장사바우라고 하고 애기장사를 바우장사라고 불렀고 집터를 이고 집터라 하고 있다. 그리고 달음산의 수리봉(취봉 鷲峰)은 그 위가 묘하게도 넓이가 20평정도 평탄하고 잔디가 덮여져 있는데, 이 바우소년 장사가 독수리처럼 날라 올라가서 머문 곳이라 하여 수리봉이라 하고, 한문으로 취봉산(鷲峰山)이라 표기하고 이를 속언으로는 추봉산이라 한다.

광산마을 마을길
일제강점기 때 광산개발에 만든것으로 추정되는 종

달음산 등산로 초입에 위치하고 있는 옥정사는 조선시대 헌종 원년(1835)에 창건된 옛 절터가 방치되어 있는 것을 찾아 1907년 박긍해 스님이 창건하였다. 이 곳 절에서는 현재 절터가 옛날 원효대사가 관세음보살로부터 표주박으로 마셨던 옥샘(玉泉)의 자리라고 한다. 그리고 근대에 제작한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신중도(神衆圖), 칠성도(七星圖) 등 불화 3점이 지방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또한 배를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포대화상(布袋和尙)이 경내에서 가장 먼저 맞이한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의하면 포대화상은 명주(明州) 봉화현(奉化縣) 출신으로 당나라 말기부터 활동했던 인물이다. 이름은 계차(契此)이며, 항상 커다란 포대자루를 들고 다녔기 때문에 포대화상이라는 별명으로 많이 불렸다. 그 외에 구유, 치미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옥정사 입구

원효대사와 옥천(玉泉)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달음산(鷲峰山) 서쪽에 있는 취정사(鷲井寺)에 머물고 계시던 원효대사가 서라벌로 가려고 옥녀봉(玉女峯)을 넘어 동쪽 산기슭에 이르러 동해에서 떠오르는 찬란한 서광을 바라보시다가 문득 갈증을 느꼈다. 그때 마침 옥녀(玉女)같은 처녀가 옹달샘에서 샘물을 물동이에 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대사가 물을 청하자 처녀는 표주박 가득히 샘물을 떠올렸다. 대사는 그 샘물을 마시자 온몸이 시원해지면서 무거운 몸이 홍모처럼 가벼워졌다. 대사는 세 번이나 받아 마시고는 처녀에게 나무관세음보살로 고마운 인사를 하였다. 그러자 그 처녀는 몸이 굳어지면서 돌로 변하면서 관세음보살상이 되었다.

옥정사 지장전
배를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포대화상(布袋和尙)
절에서 조성한 옥천(玉泉)
구유

대사는 그 처녀가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었음을 알고 오체투지의 예를 올렸다그런 뒤 대사는 이곳이 관음도량임을 알고 초막을 짓고 잠시 머물면서 동해 용왕에게 이 옥샘(玉泉)을 지켜 주기를 당부하고 서라벌로 떠났다. 그 후 이곳은 동해용왕이 지켜 주는 옥샘이 있고, 관세음보살 돌부처님이 있는 곳에 마을 사람들이 암자를 짓고 옥천사(玉泉寺)라 하였다고 한다.

대웅전
대웅전 합각에 새겨진 삼보륜 앞의 무인조각상이 특이하다.
대웅전 추녀
대웅전 치미

조선왕조 때 승유억불 정책 때문에 취정사(鷲井寺)도 퇴락되고 옥천사(玉泉寺)도 퇴락되자 절터들에 있던 큰 절에 돌부처를 모셨는데 그 큰절도 퇴락되자 그 돌부처는 다시 이곳에 은적하였다. 그래서 다시 이곳에 암자를 짓고 옥정사(玉井寺)라 하였다고 한다달음산은 물이 없는 산이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취봉산(鷲峰山)에 취정(鷲井)이 있고 옥녀봉산(玉女峯山)에 옥정(玉井)이 있어 유명하다.

칠성각
칠성각에서 본 경내
소림각
소림각 치미

기장 지역에는 달과 관련된 지명유래가 많다. 월음산(月陰山), 월전(月田), 월호(月湖), 월내(月內) 등이 있는데 옛날 장안면 월내천(장안사에서 발원) 옆에 200평가량의 연못이 풀숲에 덮인 채 있었다. 밤이 되어 동천에 뜬 달이 연못에 비치면,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연못에서 달이 솟아오르는 느낌을 갖게 하여 연못 안에 달이 뜨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월호(月湖)라고 하다가 고종 3(1866)에 월내(月內)라고 하였다.

범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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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군은 부산광역시 북동부에 위치한 군으로 태백산맥의 지맥인 대운산맥이 북동~남서방향으로 뻗어내려 형성된 산지가 주를 이루고 있다. 북쪽으로 장안읍(長安邑) 불광산(佛光山), 삼각산(三角山)이 있어 울산광역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서쪽으로 정관면(鼎冠面), 철마면(鐵馬面)에 백운산(白雲山), 망월산(望月山), 철마산(鐵馬山) 등 있어 양산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남쪽으로 감단산, 곽걸산이 있어 해운대구와 접하고, 동쪽으로는 봉대산(峰臺山), 연화봉(連花峰)이 있어 바다에 접하고 있다.

능선에서 바라다 본 연화봉
연화봉 정상주위는 약간의 평지를 이루고 있다.

동쪽 해안의 기장읍 대변리, 일광면 이천리, 장안읍 월내리 등에는 소규모의 만이 형성되어 있고 효암천(孝巖川), 장안천(長安川), 좌광천(佐光川), 죽성천(竹城川), 일광천(日光川) 등 산지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고 있다.

연화봉 정상주변

기장읍 동쪽 해안가 연화리(蓮花里)의 마을 뒷산에 연화봉(蓮花峯, 154m)이 위치하고 있다. 연화리와 석산리의 경계를 이루는 봉우리로 모습이 연꽃처럼 생겼다 하여 연화봉(蓮花峯)으로 불리우지고 있다. 옛날 기장고을의 형국을 말할 때 옥녀가 비단을 짜고 있는 옥녀직금(玉女織錦)형이라고 하고, 이러한 형국에서 연화봉은 연꽃무늬의 비단 폭에 해당되는 산봉우리다.

건설부 당시 정상 표지석

일반적으로 풍수지리에서 명당 형국 중 연꽃모양이 있는데 물에 뜬 연꽃 형(蓮花浮水形), 물에 이른 연꽃 형(蓮花到水形) 등 있다. 풍요와 다산의 터 이자 연꽃의 청정함과 순수함처럼 고귀한 인격을 갖춘 인물이 태어나는 터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곳이 물에 뜬 연꽃 형(蓮花浮水形)인 안동 하회마을이다.

기장 청강주공아파트에서 출발하는 소로

연화봉 북쪽에 남산 봉수대가 있는 봉대산이 있어 등산객에게는 봉대산 마무리 코스로 많이 애용하고 있다. 봉대산을 거친 후 기장 청강주공아파트에서 출발하여 능선을 따라 가면 연화터널 상부를 지나면 연화봉을 맞이할 수 있다. 계속 남쪽으로 가면 아난티힐튼으로 가는 사거리 앞으로 나온다. 그리고 연화터널 상부에서 바닷가 방향인 동쪽으로 소로로 가면 연화리 마을이 나오고 서쪽으로 난 소로로 가면 청강리가 나오는데 연화터널 입구가 보인다.

청강주공아파트에서 출발한 소로
연화터널 상부 연화봉 목전의 갈림길. 바닷가 방향인 왼쪽(동쪽)으로 가면 연화리 마을이 나오고 오른쪽(서쪽)으로 난 소로로 가면 청강리가 나온다.
연화리 방향 소로
죽도가 보이는 연화리
연화리에서 출발하는 소로
청강리 방향 등산길
청강리 연화터널 입구 주변에서 출발하는 길

현재 기장 연화봉은 형상이 많이 훼손 되었으리라 본다. , 서에 골프장이 생겼고 남쪽에는 롯데월드가 지어졌으며 추가 공사도 진행 중이다. 또한 연화터널 생겨서 교통 체증에 도움을 주고 있다. 개발도 중요하고 교통의 편리함도 좋지만 연화봉 훼손이 최소화가 되길 바람이다.

연화봉 남쪽 능선 소로
연화봉 남쪽 끝단 길
연화봉 능선 남쪽 출구길
대게만찬 및 일등가 오리불고기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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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함월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기림사는 유서 깊은 사찰이자 지금까지 법통이 이어지고 있는 천년 고찰이다. 달을 머금고 있는 산인 함월산에 자리 잡고 있는 기림사는 선덕여왕 12(643)에 천축국(天竺國;인도)에서 온 승려 광유가 임정사(林井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고 이후 원효대사가 중창(重創)을 하면서 인도 2대 정사인 기원정사(祇園精舍)의 기(), 죽림정사(竹林精舍)의 림()자를 합쳐 기림사(祇林寺)라고 개명(改名)하였다.

2000년대 기림사

삼국유사 기이 편 만파식적(萬波息笛)조에 따르면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동해바다 이견대(利見臺)에서 동해용으로부터 대나무와 옥대를 얻고 감은사에서 하루 밤을 지낸 후 돌아오는 길에 기림사 서쪽냇가(용연폭포)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라는 내용이 있어 최소 신문왕(682때 기림사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림사는 광복 전만 하더라도 이 일대에서 가장 큰 절로 불국사 등 60여개 말사를 거느린 큰 사찰이었으나 불국사가 복원되어 대대적으로 개발됨에 따라 사세가 역전하여 지금은 불국사의 말사로 되었다

함월산 기림사 일주문

옛날부터 기림사 경내·외에는 다섯 가지 맛을 가진 샘물이 있어 오정수(五井水) 또는 오종수(五種水)라 하여 다섯 곳에 샘이 있었고 물맛이 좋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는 맛볼 수 있는 샘이 없다. 오종수(五種水) 종류와 내용을 살펴보면 명안수(明眼水)라 하여 눈이 밝아진다는 물, 오탁수(烏啄水)라 하여 기림사 동편 큰 바위 아래의 물로 맛이 좋아 까마귀도 쪼아 먹었다는 물, 장군수(將軍水)라 하여 마시면 기개가 커지고 신체가 웅장해져 장군을 낸다는 물, 감로수(甘露水)라 하여 하늘에서 내리는 단 이슬과 같은 물, 마지막으로 화정수(和靜水)라 하여 마실수록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물이 있었다.

일주문 초입

이렇게 물맛이 좋은 이유는 기림사가 위치한 양북면 일대가 규조토가 많이 생산되는데 이 규조토가 물의 정수 역할하기 때문이라고 지질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오탁수(烏啄水)라 하여 기림사 동편 큰 바위 아래의 물로 맛이 좋아 까마귀도 쪼아 먹었다는 물로 위치는 알수가 없다.

기림사 오른쪽에 흐르는 천은 호암천(虎岩川)으로 양북면 호암리의 성황현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안동리에서 대종천에 합류하는 하천이다. 신문왕이 문무대왕릉에 가기 위해서는 서라벌에서 이곳 기림사까지는 수레를 타고 왔고 호암천(虎岩川)에서 배를 띄어 감은사까지는 대종천 뱃길을 이용하여 갔었다. 호암(虎岩)은 순우리말 이름인 범 바위에 대해 한자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다.

기림사 오른쪽에 흐르는 호암천(虎岩川)
신문왕이 문무대왕릉에 가기 위해서는 서라벌에서 이곳 기림사까지는 수레를 타고 왔고 호암천(虎岩川)에서 배를 띄어 감은사까지는 대종천 뱃길을 이용하여 갔었다.

풍수가에 의하면 기림사 터는 영구음수형(靈龜飮水形), 즉 거북이가 물을 마시는 형국의 명당자리이기 때문에 몽고침입, 임진왜란 등 전란으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환경덕분에 기림사에는 보물이 4점이나 있다. 건칠보살좌상(보물 제415), 대적광전(大寂光殿, 보물 제833), 소조비로자나 삼존불(보물 제958), 비로자나불 복장전적(腹藏典籍, 보물 제959) 등 있다. 특히 흙, 종이, , 나무 등 재료에 따라 다양한 불상이 있어 볼거리가 풍성하다.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깨죽나무

천왕문 왼쪽 석축아래 오종수(五種水) 중 물을 먹거나 눈을 씻으면 눈이 맑아진다는 명안수(明眼水)가 있다. 1990년대까지 물이 고여 있었으나 지금은 물이 말라버렸다. 소나무 뿌리 때문에 눈이 맑아진다는 견해도 있다.

천왕문
천왕문 왼쪽 석축아래의 명안수(明眼水)

천왕문 좌우에는 불법승을 해치는 나쁜 무리인 마구()를 제압하고 있는 사천왕이 조성되어 있는데 마구() 복장을 살펴보면 일본 전통 속옷인 훈도시를 입고 있어 왜구임을 알 수 있다. 그 만큼 당시 왜구는 해악한 무리이고 주민들을 많이 괴롭혔다. 마구()는 사찰마다 형태와 착용복장이 다른데 일반적으로 추풍령이북은 몽고와 만주족으로 묘사되어 있다.

사천왕(四天王)고대 인도신화시대부터 사방을 지키는 호세신(護世神)으로 귀족 혹은 귀인의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나 중국으로 건너오면서 는 동안에 차츰 험상궂은 무사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불교에 흡수되면서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須彌山) 아래 동서남북의 4를 지배 하면서, 佛法을 수호하며 중생들을 바른 길로 이끄는 호법신 역할을 하고 있다. 위로는 제석천(帝釋天)을 받들고 밑으로는 팔부중(八部衆)을 거느리고 있다.

경전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10권에는 국가가 위태로울 때 사천왕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되어 있어 가장 대표적인 호국경전이다사찰에서는 천왕문 좌우에 배치되어 있고 탑의 사방 동. . . 북을 수호하는 신장으로도 조성 되었다. 또한 외호신장이라고도 하여 불국정토의 외막 을 맡아보는 역할을 하며 동방은 지국천, 서방 광목천, 남방 증장천, 북방 다문천이다.

천왕문 좌우에는 불법승을 해치는 나쁜 무리인 마구(니)를 제압하고 있는 사천왕이 조성되어 있는데 마구(니) 복장을 살펴보면 일본 전통 속옷인 훈도시를 입고 있어 왜구임을 알 수 있다.

북방 다문천(多聞天)은 부처의 도량을 잘 지키며 부처의 설법을 가장 많이 듣고 암흑계의 사물을 관리하는 신장으로 왼손에는 탑 또는 비파를 들고 있고 피부색은 의 흑색이다. 서방 광목천(廣目天)죄인에게 심한 벌을 내려 고통을 느끼게 하며 죄인으로 하여금 반성하게 하고 道心을 일으키게 하는 신장으로 오른손에는 푸른 용, 왼손에는 붉은 여의주를 들고 피부색은 의 백색이다.

남방 증장천(增長天)은 자신의 위엄과 덕으로서 만물을 소생하게 하고 덕을 베푸는 신장으로 비파를 타고 있고 피부색은 의 적색이다. 동방은 지국천(持國天)은 착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벌을 내리며 인간을 보살피고 인간들의 국토를 지키는 신장이다. 왼손에는 칼, 오른손에는 보주를 들고 왼손은 허리를 잡고 있거나 손바닥에 보석을 올려놓고 있으며 피부색은 의 청색이다.

기림사의 특징 중 하나가 진남루(鎭南樓)다. 맞배지붕에 앞면 7칸, 옆면 2칸의 긴 건물로 임진왜란 때 승병의 지휘본부로 사용된 누각인데 지금은 누각의 형태가 아니고 18세기 중반에 중창(重創), 변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남(鎭南)은 남쪽을 진압한다는 뜻인데 남쪽은 왜구를 의미한다. 기림사 유물에 전적, 나팔, 목패 등이 있어 호국 사찰임을 이해할 수 있다.

천왕문을 지나 보이는 진남루
맞배지붕 익공양식의 앞면 7칸, 옆면 2칸 진남루(鎭南樓)
현재 진남루 일부를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다.
겹처마 익공양식의 진남루
진남루와 응진전

대적광전과 진남루 사이에 안산암(安山岩)으로 만들어진 높이 3m의 아담한 삼층 석탑이 있다. 통일신라말기 석탑으로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앙화까지 남아 있다. 기단부는 2층 기단으로 각 층은 한 개의 통돌로 2층 기단은 2개의 우주와 1개의 탱주를 새겨서 조성하였다. 탑신부는 한 개의 통돌로 3층을 조성하였고 각 탑신석은 2개의 우주를 새겼고 옥개받침은 4단을 만들었다.

응진전과 삼층석탑

기림사 3층 석탑은 일반 석탑과 다르게 기단부와 탑신부에 이끼가 많이 있는데 이유는 옛날 오종수(五種水) 중 장군수(將軍水)가 있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장군수를 메워버리게 된 이야기는 2가지가 전해진다. 하나는 자리에 석탑이 조선시대에 이 곳 물을 먹고 난 사람이 이곳에서 역적모의를 하다가 발각된 뒤에 나라에서 샘을 메워버렸다는 이야기가 하나고 또 다른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때 이 물을 먹고 장수가 되어 독립투사가 나올 것이란 생각에 일제가 우물을 메웠다는 이야기다. 고요한 밤에 탑에 귀를 대고 있으면 탑 아래 우물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응진전은 맞배지붕의 정면5칸의 다포양식의 조선후기 건축물이다. 500명의 나한을 모신 전각으로 나한상을 자세히 보면 돌로 만든 석불인 것으로 알 수 있다. 소위 불석(佛石)으로 하여 함월산에 있는 돌로 사암 계통의 부드러운 재질로서 조각이 쉽고 석재를 두부 자르듯이 결에 따라 자를 수 있어 옛 부터 불상 조각에 많이 사용해 왔던 돌이라고 한다.

함월산 불석(佛石)으로 만든 나한상
응진전의 다포

약사전 앞에는 1기의 목탑터가 있다. 가운데 심초석(11×11×11cm)이 있고 정면, 측면 각 3칸의 터가 온전히 남아 있다. 목탑이 언제 소실되었는지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목탑이 단탑인 경우와 쌍탑인 경우에 따라 가람의 주 출입방향을 판단 할 수 있다. 목탑이 단탑이면 응진전 중심으로 동쪽에서 올라오는 경우이고 쌍탑이면 현재 사용하고 있는 방향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쌍탑이 있는 사찰이 많아서 기림사가 쌍탑일 가능성도 한번 정도 생각해볼 일이다.

목탑터
가운데 심초석이 있고 정면, 측면 각 3칸의 터가 온전히 남아 있다.
기림사의 목탑터가 단탑이면 응진전 중심으로 동쪽에서 올라오는 경우이다

약사전은 맞배지붕의 정면 3칸, 옆면 1칸의 다포양식의 건축물로 1600년대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효종 5(1654)에 중창되었고 숙종 4년 중수했다. 주불은 약사여래불(약사유리광여래)로 질병의 고통에서 구해주는 부처로써 7세기 중엽부터 시작하여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때 유행했던 부처이다. 보통 손에 약그릇 또는 보주를 들고 있으나 기림사 약사여래불에게는 없다. 좌우 협시보살은 일광, 월광보살로 이마나 보관에 해, 달 또는 손에 해, 달을 들고 있다

맞배지붕 다포양식의 정면 3칸, 옆면 1칸 약사전
주불은 약사여래불(약사유리광여래)이고 좌우 협시보살은 일광보살과 월광보살

대적광전(大寂光殿)보물 제833호로 맞배지붕의 겹처마에 정면 5칸, 옆면 3칸의 다포양식의 건축물이다. 창건이후 6차례 다시 지어졌다. 이중 5번째는 1629년(인조7)에 지어졌고 마지막으로 1786년 경주 부윤 김광묵에 의해 지어져서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단청은 색깔이 바래어 지나긴 긴 세월을 알려주고 다포공포의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조각예술은 정갈함과 함께 고풍스러운 멋을 풍긴다. 또한 법당 출입문의 살문이 솟을 꽃살문인데 간결하고 아름답다.

보물 제 833 호로 맞배지붕 겹처마에 정면 5 칸 , 옆면 3 칸 다포양식의 대적광전(大寂光殿)
법당 출입문의 살문이 솟을 꽃살문인데 간결하고 아름답다.

내부는 4개의 고주(高柱) 외에 따로 2개의 측면 고주를 세워 넓은 공간을 구축하였으며, 화려하고 장엄하다. 그리고 빗천장과 우물 천장이 설치되어 있다.

대적광전의 다포

대적광전에는 중앙의 비로자나불, 왼쪽은 아미타불, 오른쪽은 석가모니불인 삼존불 즉 비로자나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규조토)으로 만든 소조불로 보물 제958호다. 규조토는 그 성질이 물을 머금으면 흙 반죽이 되나 마르면 돌처럼 딱딱 해지는데 이 성질을 이용하여 불상을 만들었다. 만든 시기는 임진왜란 직후이다.

중앙의 비로자나불, 왼쪽은 아미타불, 오른쪽은 석가모니불

상체는 장대하나 하체는 빈약하게 느껴지며, 네모난 얼굴에는 강인한 표정이 엿보인다. 대적광전에 삼존불이 조성되면 일반적으로 중앙의 비로자나불, 왼쪽 노사노불, 오른쪽 석가모니불이 일반적인 구도다. 특이하게 기림사 대적광전에는 노사노불 대신에 아미타불이 조성되어 있다.
비로자나불의 복장에서 불경(, 목판본과 사경)이 발견되었는데 비로자나불 복장전적(腹藏典籍)이라고 부른다. 보물 제959호로 제작 시기는 고려 11세기부터 조선 17세기로 고려시대 목판본(木版本), 사경(寫經)과 조선시대 목판본(木板本)이다. 전적(典籍)이 발견된 것은 1986. 9. 6 새벽 문화재 절도범들이 대적광전에 침입하여 비로자나불의 뒷부분을 파괴하여 복장유물을 꺼내어 도주하는 것을 잡아서 유물을 되찾았다.

왼쪽의 탱화는 기림사 삼불회도로 김림사의 창건설화를 표현하고 있다.
내부는 4 개의 고주(高柱) 외에 따로 2 개의 측면 고주를 세워 넓은 공간을 구축하였으며 화려하고 장엄하다 ; 그리고 빗천장과 우물 천장이 설치되어 있다 .

관음전에는 은행나무로 만든 11면 관세음보살이 있는데 1986년 우리나라가 아시안게임을 유치한 기념으로 열린 불교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은 것이다.
11면 관세음보살은 밀교의 관점에서 본 관세음보살상으로 제도하는 중생들의 형태에 따라 11가지의 얼굴모습을 나타낸다. 좌면(3)은 분노 상으로 악한 중생을 꾸지람하여 악으로부터 구하려는 상이고 우면(3)은 백아 상으로 착한중생에게 더욱 정진을 권하는 상이며 정면(3)은 자비 상으로 선한 중생에게 자비로운 마음으로 칭찬하는 상이다. 그리고 뒷면(1)은 대폭소상으로 착한중생, 악한중생 모두를 포섭하는 아량을 베푸는 상이고 맨 위(1)는 아미타여래이다.

관음전
관음전에는 은행나무로 만든 11면 관세음보살이 있는데 밀교의 관점에서 본 관세음보살상이다.

삼천불전에는 과거, 현재, 미래의 각 천불씩 조성되어 있는데 주불 석가모니는 한지로 1990년대에 제작되었다. 삼성각에는 독성신인 나반존자가 모셔져 있는데 석가모니처럼 스승 없이 홀로 도를 이룬 분으로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분으로 육당 최남선은 단군으로 보고 있다. 불교계에서는 나반존자를 십육나한을 대표하는 빈두로존자로 파악하고 있으며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이 입멸한 후 이 세상에 머물며 다음 세상의 미륵불이 나실 때까지 중생을 구제하라는 부촉을 받았다고 한다.

삼천불전
과거, 현재, 미래의 각 천불씩 조성되어 있는데 한지로 1990년대에 제작되었다.
독성신인 나반존자가 모셔져 있는 삼성각

기림사 명부전은 우리나라에서 영험이 높기로 유명한 곳이어서 이곳에서 조상제사를 모시는 이가 많다.

명부전
화정당
절에서 조성하여 만든 화정당 앞의 화정수(和靜水)
범종루
사물인 운판, 목어, 범종, 법고(북)
목어

기림사 성보박물관 입구에는 불두와 광배가 심하게 훼손된 불령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석조여래좌상은 원래 불령고개 길가에 방치되어 있는 것을 이곳으로 옮겨 왔다. 방형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오른 손은 무릎위에 놓고 왼손은 배 앞에 놓은 것으로 법의는 통견식이고 양 어깨를 걸쳐 내려와 두 무릎을 덮었으며 가슴에는 군의의 매듭이 보인다. 방형대좌의 하대는 복련, 중대는 안상 그리고 상대는 앙화를 조각하였다. 제작 시기는 통일신라말기로 추정하고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불령 석조여래좌상

기림사 성보박물관에는 보물 제415호인 건칠보살좌상으로 높이 91cm인 관세음보살반가상이 있다. 대좌의 글귀에 연산군 7(1501)으로 되어 있어 제작연대로 추정하고 있다. 건칠불이란 진흙으로 속을 만들어 삼베나 종이를 감고 그 위에 진흙가루를 발라 묻힌 다음 속을 빼어 버리고 옻칠을 입힌 속이 빈 소상이다.

보물 제415호인 건칠보살좌상

머리에는 당초문을 새긴 보관을 썼고 얼굴은 남성적이며 냉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목에는 화려한 장식의 목걸이를 하고 있어 눈에 띈다. 왼발은 대좌 위에 얹고 오른발은 대좌 밑으로 내렸으며, 오른손은 무릎 위에 얹고 왼손을 약간 뒤로하여 대좌를 짚고 앉아 있는 모습이 편안하고 자연스럽다자세는 경주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과 비슷하다.
이 밖에 석조치미, 불석으로 만든 석조여래좌상, 명부전에 봉안되는 사자로써 죽은 사람의 죄를 적은 기록을 지옥세계에 전달하는 직부사자와 죽은 사람의 집에 가서 죽은 사람을 살피거나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 감재사자 등 있다.

용마루 양쪽 끝에 설치하는 석조치미로 사찰의 규모 추측할 수 있다.
불석으로 만든 석조여래좌상
직부사자도
감재사자도

성보박물관 맞은편에 매월당(梅月堂) 영당(影堂)이 있는데 김시습(金時習) 영정이 모셔져 있다. 본래의 영당은 현종11년(1670) 경주부사 민주면이 남산 용장사 경내에 오산사를 지었으나 고종5년(1868)에 훼철되었다. 고종 15년(1878) 경주유림이 경주부윤 민창식에게 청원하여 함월산 기림사 경내에 다시 지었고 1998년 경주시에서 중건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이르렀다.

김시습(金時習, 1435 ~ 1493)은 본관은 강릉,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 법호는 설잠(雪岑)이며 조선 초기 문인으로 생육신 중 한사람이다.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난 그는 유, 불 정신을 아우르는 사상과 뛰어난 문장력으로 수많은 시와 저서를 남겼다. 생후 8개월에 글 뜻을 알았고 3세에 능히 글을 지을 정도로 천재적인 재질을 타고 났다. 5세에는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후일 중용하리란 약속과 함께 비단을 하사받기도 했다. 그의 이름인 시습은 논어의 학이편(學而篇) 중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매월당 ( 梅月堂 )&amp;nbsp; 영당 ( 影堂 )

과거준비로 삼각산 중흥사에서 수학하던 21세 때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대권을 잡은 소식을 듣자 보던 책을 모두 불사르고 그 길로 삭발하고 중이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났다. 그는 관서, 관동, 삼남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는데 <매월당시사유록(梅月堂時四遊錄)에 그때의 시편이 수록되어 있다. 31세 되던 세조 11년 봄에 경주 남산 금오산 용장사에서 37세 까지 성리학과 불교에 대하여 연구하는 한편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지었다.

김시습 ( 金時習 )&amp;nbsp; 영정

37세에 서울 성동에서 농사를 직접 짓고 환속하는 한편 결혼도 했다. 벼슬길로 나아갈 의도를 갖기도 했으나 현실의 모순에 불만을 품고 다시 관동지방으로 은둔, 방랑을 하다가 충청도 홍산 무량사에서 59세의 일기로 병사하여 일생을 마쳤다.
삼국유사 2권 기이(紀異) 2편 만파식적(萬波息笛)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1대 신문대왕(神文大王)의 이름은 정명(政明), 성은 김씨(金氏)이다. 개요(開耀) 원년(元年) 신사(辛巳; 681) 77일에 즉위했다. 아버지 문무대왕(文武大王)을 위하여 동해(東海) 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절 안에 있는 기록에는 이렇게 말했다. 문무왕(文武王)이 왜병(倭兵)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처음 창건(創建)했는데 끝내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왕위(王位)에 올라 개요(開耀) 2(682)에 공사를 끝냈다. 금당(金堂) 뜰아래에 동쪽을 향해서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으니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개 유언(遺言)으로 유골(遺骨)을 간직해 둔 곳은 대왕암(大王岩)이고, 절 이름은 감은사(感恩寺)이다. 뒤에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했다.

이듬해 임오(壬午) 5월 초하루에 해관(海官) 파진찬(波珍飡) 박숙청(朴夙淸)이 아뢰었다. “동해 속에 있는 작은 산 하나가 물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는데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합니다.” 왕이 이상히 여겨 일관(日官) 김춘질(金春質; 혹은 춘일春日)을 명하여 점을 치게 했다. “대왕의 아버님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三韓)을 진호(鎭護)하고 계십니다. 또 김유신공(金庾信公)도 삼삼천(三三天)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 세계에 내려와 대신(大臣)이 되었습니다. 이 두 성인(聖人)이 덕()을 함께 하여 이 성을 지킬 보물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만일 폐하께서 바닷가로 나가시면 반드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얻으실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여 그달 7일에 이견대(利見臺)로 나가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살펴보도록 했다.

산 모양은 마치 거북의 머리처럼 생겼는데 산 위에 한 개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합해서 하나가 되었다. 사자(使者)가 와서 사실대로 아뢰었다. 왕은 감은사에서 묵는데 이튿날 점심 때 보니 대나무가 합쳐져서 하나가 되는데, 천지(天地)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치며 7일 동안이나 어두웠다. 그 달 16일에 가니 용 한 마리가 검은 옥대(玉帶)를 받들어 바친다. 왕은 용을 맞아 함께 앉아서 묻는다. “이 산이 대나무와 함께 혹은 갈라지고 혹은 합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용이 대답한다. “비유해 말씀드리자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오니, 성왕(聖王)께서는 소리로 천하를 다스리실 징조입니다. 왕께서는 이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부시면 온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이제 대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닷속의 큰 용이 되셨고 유신은 다시 천신(天神)이 되어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 하여 이런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보내시어 나로 하여금 바치게 한 것입니다.”왕은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 (五色)비단과 금()과 옥()을 주고는 사자(使者)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 가지고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때 산과 용은 갑자기 모양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왕이 감은사에서 묵고 17일에 기림사(祗林寺)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太子) 이공(理恭; 즉 효소대왕孝昭大王)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와서 하례하고는 천천히 살펴보고 아뢰었다. “이 옥대(玉帶)의 여러 쪽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왕이 말한다. “네가 어찌 그것을 아느냐.”“이 쪽 하나를 떼어 물에 넣어 보십시오.” 이에 옥대의 왼편 둘째 쪽을 떼어서 시냇물에 넣으니 금시에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이내 못이 되었으니 그 못을 용연(龍淵)이라고 불렀다. 왕이 대궐로 돌아오자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천존고(月城天尊庫)에 간직해 두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병(敵兵)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 지면 날이 개며, 바람이 멎고 물결이 가라앉는다. 이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國寶)로 삼았다.

효소왕(孝昭王)때에 이르러 천수(天授) 4년 계사(癸巳; 693)에 부례랑(夫禮郞)이 살아서 돌아온 이상한 일로 해서 다시 이름을 고쳐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했다. 자세한 것은 그의 전기(傳記)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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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27대 선덕여왕(? ~ 647, 재위기간 632년 정월 ~ 647년 정월 : 15)의 능은 보문동 산79-2번지로 경주 낭산(狼山) 남쪽 봉우리 정상(해발 100m)에 위치하고 있다. 산 정상의 남쪽 부분 일부를 깎아 평지로 만든 후 능을 조성하였다. 능은 원형봉토분으로 높이 6.8m, 직경 23.4m, 둘레 73.3m이다. 묘제는 횡혈식석실분으로 추정된다.

선덕여왕릉 찾아가는 길
신라 27 대 선덕여왕 (? ~ 647 년, 재위기간 632 년 정월 ~ 647 년 정월 : 15 년 ) 의 능

봉분자락에는 괴석을 쌓아 만든 호석이 있는데 2~3단으로 높이는 70cm로 봉분 주위를 둘러쌓았다. 현재 선덕여왕의 능은 원형이 아니라 1949년에 보수한 것으로 당시 호석은 봉분의 흙에 덮여 있는데 이를 제거 후 호석을 다시 축조를 하였다. 즉 괴석 몇 개를 나란히 쌓아 나가다가 중간에 큰 평석을 하나씩 세워서 끼우는 방법으로 호석을 조성하였다. 호석에 쓰인 괴석은 재사용하였고 부족한 것은 주변에 있는 돌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선덕여왕의 호석은 괴석 몇 개를 나란히 쌓아 나가다가 중간에 큰 평석을 하나씩 세워서 끼우는 방법으로 조성하였다.

낭산(狼山)은 나지막한 야산이지만 신라시대 신유림(神遊林)하여 신령스러운 산으로 숭앙받았다. 삼국사기기록에 의하면 실성왕 12(413) 8월에 구름이 낭산에 일어났는데 구름이 누각같이 보이고 사방에 아름다운 향기가 퍼져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늘의 신령이 내려와서 노는 것임에 틀림없다라고 생각한 왕은 낭산을 신령스러운 곳으로 여겨 나무 한 그루 베지 못하게 하였다.
()은 이리 낭()’로 이리가 엎드린 형상이라고 해서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는 사마천의 <사기>에는 동쪽의 큰 별을 ()’이라 한다.” 고 해서 왕궁(월성)의 동쪽에 있는 산이라 낭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삼국사기> ‘잡지·제사지는 신라에서 가장 큰 제사인 대사(大祀)를 지내는 3(三山)으로 나력(奈歷), 골화(骨火), 혈례(穴禮)’를 꼽았는데 학계에서는 3(三山) 가운데 유일하게 왕경(경주)에 속한 나력’(奈歷)낭산’(狼山)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를 통해 우리민족의 토착신앙인 산악숭배 사상을 엿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천년 신라의 망조가 낭산 주변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삼국유사>경명왕 때(918년 혹은 920) 사천왕사의 소조상이 잡고 있던 활시위가 저절로 끊어지고 벽화 속의 개()가 짖었으며,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덕여왕능(善德女王陵)의 상석

선덕여왕은 26대 진평왕과 마야부인(摩耶夫人)사이의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덕만(德曼)이다. 진평왕은 첫 왕비 마야부인에게서 두 딸이 있었는데 첫째 딸은 천명이고 진지왕의 아들 김용수에게 시집을 갔다. 김용수는 진평왕을 이어 왕에 될 수 있으나 진지왕이 폐위되어서 지지 세력이 없었다. 그리고 마야부인이 죽고 둘째 왕비인 승만부인에게 아들이 태어났으나 얼마 되지 않고 죽었다. 이후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그녀를 왕위에 추대하였고, 성조황고(聖祖皇姑), 거룩한 조상을 가진 여왕이란 칭호를 올렸다.
왕위에 오를 즈음 선덕여왕은 40세를 약간 넘긴 나이였고 공주시절에 이미 결혼을 하였으며, 남편은 김용춘이다. 김용춘은덕만공주가  왕위에 오른 후 자식을 낳지 못하여 남편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흠반과 을제(乙祭)가 각 각 남편이 되었으나 자식을 잉태하지 못하였다. 당시 신라에는 삼서제도(三婿制度)가 있어 왕녀가 자식을 가지지 못할 때, 남편 셋을 가질 수 있는 제도였다. 후에 29대 진덕여왕(眞德女王)이 되는 김승만(金勝曼)과는 사촌자매지간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왕이 될 수 있는 성골(聖骨)이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은 즉위하던 해인 632년에 대신 을제(乙祭)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하고, 전국에 관원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진휼(賑恤)하였으며, 633년에는 주군(州郡)의 조세를 일 년간 면제해주는 등 일련의 시책으로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634년에 분황사(芬皇寺), 635년에는 영묘사(靈廟寺)를 세웠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즉위3(서기634)에 인평(仁平)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중고왕실의 자주성을 견지하려고 했다. 다만 즉위 이래 거의 매년 당나라에 대해 조공사신을 파견함으로써 당나라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기도 하였다. 이것은 고구려, 백제의 신라에 대한 공격이 빈번해짐에 따라 당나라와 연합함으로써 국가를 보존하려는 자구책의 일환이였다.
신라는 642년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을 본격적으로 받았다. 이해에 신라는 백제의 의자왕의 침공을 받아 서쪽 변경에 있는 40여성을 공취 당하였으며, 신라의 한강 방면 거점인 당항성(黨項城:지금의 南陽)도 고구려백제의 침공을 받았다. 또한 백제장군 윤충(允忠)의 침공으로 낙동강방면의 거점인 대야성(大耶城:지금의 陜川)이 함락 당하였다. 이와 같은 국가적 위기에 직면한 선덕여왕은 김유신(金庾信)을 압량주(押梁州:지금의 慶山) 군주(軍主)에 임명하여 백제의 공격을 방어하는 한편 64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의 구원요청에 접한 당 태종 이세민은 신라 사신에게 세 가지 계책을 제시 하였다. 첫째는 당이 거란과 말갈을 시켜 요동을 치면 고구려가 함부로 신라를 공격하지 못할 것이고, 둘째는 신라가 당나라의 옷과 깃발을 사용하면 고구려와 백제가 겁을 먹고 도주할 것이고, 셋째는 여왕을 폐위시키고 그 대신 자기의 친족을 신라의 왕으로 앉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계책은 당의 위세를 과시하는 것이고 신라 사신을 농락하는 것이라서 사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644년 정월에 다시 사신을 당에 보내 군대를 요청하였고 당 태종은 고구려에 이현장을 보내 신라를 공격하지 말 것을 종용했으나 연개소문(淵蓋蘇文)에 의해 거부되고 말았다. 그 무렵 신라의 김유신은 백제를 공격하여 일곱 성을 회복하였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6453월 백제군이 쳐들어오자 김유신은 다시 출전하여 2천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뒀다. 그해 5월에는 당 태종 이세민이 고구려 공격하자, 선덕여왕은 군대 3만을 동원하여 협공을 하였다. 이 때 틈을 노려 백제가 신라변경을 급습하여 일곱 성을 점령했다. 이 무렵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자장(慈藏)의 건의에 따라 호국불교의 상징인 황룡사9층탑(皇龍寺九層塔)645년에 건립하였다.

그런데 당 태종 이세민이 제시한 계책이 신라 정계에 파문을 일으켜 647년 정월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 진골 귀족들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것을 구실로 명활산성을 장악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비담(毗曇)은 석()씨 계열의 수장으로 645년에 상대등에 임명된 인물로 당시 백성들에게 명망이 높아서 반란에 많은 군대가 참여하였다. 그러나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 알천에 의해 진압되었고 비담 등 진골 귀족들은 9족이 멸족 당했다. 선덕여왕은 이미 병을 앓고 있어 이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병세가 악화되어 64718일에 재위 16년 만에 죽으니 시호(諡號)를 선덕이라 하고 낭산(狼山)에 장사지냈다.
선덕(善德)이란 이름은 불교적인 것으로 5세기 초 인도 출신의 학승 담무참(385~433)이 번역한 대방등무상경(大方等無想經)에 나오는 선덕바라문을 따온 것인데 선덕이란 이름을 사용한 사람 불경에 여러 명 나타난다. 선덕바라문은 석가모니로부터 불법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교화시킨다는 전륜성왕의 운명을 예지 받는 인물이다. 인도에는 아소카왕이 선덕바라문 같은 운명을 갖고 있었다.

선덕왕(善德王) 지기삼사(知幾三事)
삼국유사 제1권 기이(紀異)에 나타난 지기삼사(知幾三事) 내용은 다음과 같다.
27대 덕만(德曼; 은 만으로도 씀)의 시호(諡號)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 ()은 김씨(金氏), 아버지는 진평왕(眞平王)이다. 정관(貞觀) 6년 임진(壬辰; 632)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 지 16년 동안에 미리 안 일이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나라 태종(太宗)이 붉은빛자줏빛흰빛의 세 가지 빛으로 그린 모란[牧丹]과 그 씨 서 되[]를 보내 온 일이 있었다. 왕은 그림의 꽃을 보더니 말하기를, “이 꽃은 필경 향기가 없을 것이다하고 씨를 뜰에 심도록 했다. 거기에서 꽃이 피어 떨어질 때까지 과연 왕의 말과 같았다.
둘째는,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인데도 개구리들이 많이 모여들어 3, 4일 동안 울어 댄 일이 있었다. 나라 사람들이 괴상히 여겨 왕에게 물었다. 그러자 왕은 급히 각간(角干) 알천(閼川), 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정병(精兵) 2,000명을 뽑아 가지고 속히 서교(西郊)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이 어딘지 찾아 가면 반드시 적병(賊兵)이 있을 것이니 엄습해서 모두 죽이라고 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각각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서교(西郊)에 가 보니 부산(富山) 아래 과연 여근곡(女根谷)이 있고 백제(百濟) 군사 500명이 와서 거기에 숨어 있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백제의 장군(將軍) 우소(亏召)란 자가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었으므로 포위하고 활을 쏘아 죽였다. 또 뒤에 군사 1,200명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모두 쳐서 죽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다.
셋째는, 왕이 아무 병도 없을 때 여러 신하들에게 일렀다. “나는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忉利天) 속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여러 신하들이 그게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해서 물으니 왕이 말하였다. “낭산(狼山) 남쪽이니라.” 그 날이 이르니 왕은 과연 죽었고, 여러 신하들은 낭산 양지에 장사지냈다. 10여 년이 지난 뒤 문호대왕(文虎()大王)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는데 불경(佛經)에 말하기를,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忉利天)이 있다고 했으니 그제야 대왕(大王)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가 있었다.

왕이 죽기 전에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아뢰었다. “어떻게 해서 모란꽃에 향기가 없고, 개구리 우는 것으로 변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왕이 대답했다.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므로 그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것은 당나라 임금이 나에게 짝이 없는 것을 희롱한 것이다.
또 개구리가 성난 모양을 하는 것은 병사(兵士)의 형상이요. 옥문(玉門)이란 곧 여자의 음부(陰部)이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흰데 흰빛은 서쪽을 뜻하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남근(男根)은 여근(女根)이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그래서 잡기가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은 모두 왕의 성스럽고 슬기로움에 탄복했다.
꽃은 세 빛으로 그려 보낸 것은 대개 신라에는 세 여왕(女王)이 있을 것을 알고 한 일이었던가. 세 여왕이란 선덕(善德)진덕(眞德)진성(眞聖)이니 당나라 임금도 짐작하여 아는 밝은 지혜가 있었던 것이다.
선덕왕(善德王)이 영묘사(靈廟寺)를 세운 일은 <양지사전(良志師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별기(別記)>에 말하기를, “이 임금 때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고 했다.

여왕을 사랑한 지귀(志鬼)의 이야기, 심화요탑설화(心火繞塔說話)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은 조선 선조 때 권문해가 편찬한 백과서로 여기에 선덕여왕을 사모하다가 죽어서 화귀(火鬼)가 된 자귀의 사랑을 그린 설화, 심화요탑설화(心火繞塔說話)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덕여왕이 영묘사(靈妙寺)란 절에 나들이를 갔다. 그 절에서 활리역의 역리(驛吏) 지귀(志鬼)라는 총각이 여왕을 한 번 본 후 그만 깊은 짝사랑에 빠졌다.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여왕을 사랑한 지귀 총각은 심한 열병을 앓았다. 그러던 중 여왕이 다시 영묘사에 온다는 소식을 접한 지귀는 여왕이 지나칠 목탑 밑에 쭈그리고 앉아 기다렸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고 지친 지귀는 그만 자신도 모르게 목탑을 베고 잠이 들어버렸다. 그 사이 여왕이 목탑을 지나치게 되었는데 잠든 지귀를 발견하고는 그 연유를 물었다. 연유를 알고 난 여왕은 불공을 올리고 그 목탑 밑에 자고 있는 지귀의 품속에 자신의 팔찌를 빼내 묻어주고 왕궁으로 떠났다. 얼마 뒤 잠에서 깨어난 지귀는 자신의 품안에 놓인 팔찌를 발견하고는 여왕이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자 그녀에 대한 열정이 불로 타올라 그의 몸을 태우고 곁에 있던 목탑까지 태워버렸다. 영묘사의 목탑은 이렇게 연모의 불길로 소실되고 말았다.

선덕여왕이 이 소식을 듣자 주문을 짓게 하여 화귀(火鬼)를 달래도록 하였다. 이후 민가에서는 이 주문을 문 벽에 붙여 화재를 방지하는 부적으로 삼았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귀의 마음 속 울화가
몸을 태우고 화신으로 변했구나.
부디 창해 밖으로 떠나다오
만나지 못하여 친할 수 없음을 어찌하리.“

 자귀의 심화(心火)로 인하여 영묘사는 전소 될 것이었는데 혜공스님의 신통력으로 그 일부는 화재를 면할 수가 있었다. 혜공스님은 원효대사와도 친분이 두터운 이름난 스님이었다. 그는 원효가 여러 불경의 소(疏)를 찬술할 때 서로 질문하고 토론한 상대이기도 하였다.
그는 작은 절에 살면서 언제나 미친 사람처럼 크게 취해서 삼태기를 지고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을 춘 까닭에 사람들은 그를 부궤화상이라 불렀으며 그가 있는 절을 부개사(婦蓋寺)라고 했는데 '부개'는 '부궤'에서 온 말이다
그는 또 절의 우물 속에서 살기도 했는데 한 번 우물에 들어가면 몇 달이나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우물에서 나올 때는 먼저 푸른 옷을 입은 신동이 솟아 나왔으므로 그것을 보고 혜공이 우물에서 나오는 시각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우물 속에서 나와도 옷이 젖지 않았다.
이러한 신통력을 가진 혜공이 하루는 풀로 새끼를 꼬아 가지고서 영묘사를 찾아 왔다. 그는 새끼줄로 금당과 경루와 남문의 낭무를 둘러 묶고는 절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일렀다.
"이 새끼는 3일 후에 풀어야 하느니라."
절을 관리하는 사람은 이상하게 여겼으나 신통력을 갖고 있는 혜공스님의 말이라 그대로 따랐다. 과연 그 3일 되던 날에 선덕여왕의 행차가 있었고, 지귀의 심화로 불이 난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혜공이 풀 새끼로 매어 둔 곳만은 화재를 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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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사지(念佛寺址)는 양피사지에서 칠불암 가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약 600m 떨어진 곳으로 통일신라시대 1금당 2탑식의 전형적인 사찰이다. 절의 규모는 경주시 남산동 1130번지 일원(면적 : 2,175)이고 삼국유사권 제5, 피은(避隱) 8 염불사(念佛師)조에 기록된 절이다.

삼국유사 염불사(念佛師)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남산(南山) 동쪽 산기슭에 피리촌(避里村)이 있고, 그 마을에 절이 있는데 피리사(避里寺)라 했다. 그 절에 이상한 중이 있었는데 성명은 말하지 않았다. 항상 아미타불을 외어 그 소리가 성() 안에까지 들려서 360() 17만호(萬戶)에서 그 소리를 듣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소리는 높고 낮음이 없이 낭랑하기 한결같았다. 이로써 그를 이상히 여겨 공경치 않는 이가 없었고, 모두 그를 염불사(念佛師)라 불렀다. 그가 죽은 뒤에 소상(塑像)을 만들어 민장사(敏藏寺) 안에 모시고 그가 본래 살던 피리사(避里寺)를 염불사(念佛寺)로 이름을 고쳤다. 이 절 옆에 또 절이 있는데 이름을 양피사(讓避寺)라 했으니 마을 이름을 따서 얻은 이름이다.

여기에 나오는 염불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알려진 내용이 없으나 삼국유사 5권 피은(避隱) 포천산(布川山) 5비구(五比丘) 경덕왕대(景德王代)를 보면 정토신앙(淨土信仰)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따라서 염불은 관음신앙과 정토신앙이 관련된 것으로 추정 된다.

창건 시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기록을 살펴보며 당() 천보(天寶) 4(745) 이전으로 추정되므로 최소한 8세기 초에는 창건된 것으로 생각된다. 폐사 시기는 삼국유사<皇龍寺九層塔>조와 고려사(高麗史)<세가(世家)>의 내용을 참조할 때, 고려 고종 25(1238)의 원의 침입에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폐사된 이후 조선시대 마을이 들어서면서 삼층석탑을 무너뜨리고 탑 부재를 석재로 이용하였다.

절 주위를 살펴보면 동편은 칠불암 진입로가 지나가고 서편에는 산자락이 산길을 사이에 두고 접해 있으며, 남편은 밭과 분묘가 분포하고 있다. 북편의 금당이 위치하는 곳에는 사찰과 민가가 들어서 있다. 2003년과 2008년에 발굴조사가 실시되었고, 20091월에 동·서 삼층석탑은 모두 복원되었다. 2003년 발굴조사 이전의 동 삼층석탑은 북쪽으로 넘어진 상태로 일부 부재만 잔존하고 있었고, 서 삼층석탑은 서쪽으로 넘어진 상태로 각 부재가 남아 있었는데 주변으로 와편과 토기편이 산재하고 있었다.

불국사역 앞 삼층석탑은 염불사지의 동 삼층석탑의 탑재를 사용하여 1962년 복원하였고 1층 옥개석만 이거사지의 탑재를 사용했다. 2009년에 이루어진 복원작업에 따라서 원래 자리인 전 이거사지(傳移車寺址)로 옮겨졌다.

동 삼층석탑

2003년에 이루어진 발굴 조사 당시 옥개석편 3매와 하층기단면석 1매만 남아 있었고, 나머지 부재들은 1962년에 불국사역 앞으로 옮겨져서 1963년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복원 당시 1층 지붕돌(옥개석)의 파손 정도가 심하여 부근의 이거사지(移車寺址) 석탑의 부재로 대신하였고, 원래의 1층 옥개석은 이설된 석탑의 뒤에 묻었다. 또한 현재의 노반석은 이설 당시에 새로 만들었다.

염불사지(念佛寺址) 동 삼층석탑
이거사지(移車寺址) 석탑의 지붕돌(옥개석)

동 삼층석탑은 이층기단에 3층의 탑신부(塔身部)를 갖고 있는 석탑으로 상·하층기단면석에 탱주(撑柱) 2, 지붕돌(옥개석)의 옥개받침 5단 등 전형적인 8세기의 형식을 가지고 있는 석탑이다. 하층기단면석은 8매의 돌로 결구되었는데, 탱주 1주는 별석(別石)으로 만들어졌다. 상층기단면석 역시 8매의 돌로 결구되었는데, 그 형식은 하층기단면석과 같다. 그 위의 상층기단갑석에는 각형2단으로 탑신받침이 있다. 몸돌(탑신석)은 양쪽에 우주(隅柱)가 조각되어 있고, 옥개석은 5단의 옥개받침과 2단 괴임이 있는 갑석과 갑석부연이 탑신석을 받치고 있다.

그러나 1층 옥개석 옥개받침의 최하단이 1층 탑신석의 폭보다 훨씬 넓은 것은 1층 옥개석의 부재가 이거사지에서 옮겨온 데 따른 것이다. 또한 상륜부(相輪部)는 노반석(露盤石)만 남아 있는데 노반석이 작은 이유는 복원 당시 잘못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1963년에 불국사 역 앞으로 이전된 동 삼층석탑의 복원된 전체 높이는 588이었지만, 염불사지로 옮겨서 복원된 석탑의 높이는 583.7이었다. 이는 새로 복원하면서 1층 옥개석과 노반석을 원래 형태에 맞춰서 새롭게 교체하면서 높이에 변화가 생긴 것으로 여겨진다. 

서 삼층석탑

염불사지(念佛寺址) 서 삼층석탑

서 삼층석탑은 2003년 조사 당시 탑재가 도괴되었으나 하층기단면석 2, 하층기단갑석 1, 상층기단면석 3, 1·2·3층탑신석, 2·3층옥개석이 남아 있었다. 기단면석과 지대석은 1매석으로 처리되었고 각 부재의 크기는 동 삼층석탑과 비슷하여 같은 크기의 쌍탑으로 만들어졌다. 동 삼층석탑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던 사리공을 서 삼층석탑이 3층 탑신석에서 확인 되었는데 방형으로 너비 18, 깊이 10.5이다. 복원된 전체 탑 높이는 545이다.

염불사지 동, 서 삼층석탑은 경주지역 삼층석탑의 시원이었던 감은사지 삼층석탑의 기본구조를 따라 세워진 후대 삼층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복원 공사 후 남은 석탑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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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은 루이 14세가 17세기말 베르사유로 궁권을 옮기기 전 까지 사용되었던 궁궐로써 800년 동안 증축공사의 결과가 현재의 모습이다. 1970년대까지 경제부처와 미술관으로 나누어 사용되었는데 1981년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에 의해 전체가 박물관으로 변경, 사용되었다. 6만㎡의 전시실은 리슐리외관, 숼리관, 드농관 등 3곳으로 나뉘며 발권장소인 지하층을 포함하여 총 4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는 11개 분야로 방대하여 전부를 감상하려면 일주일 정도가 소요된다.

최초의 루브르는 12세기말 늑대로부터 시가지를 보호하기 위해 필리프 오귀스트가 축조하였다. 이름의 유래는 늑대를 뜻하는 라틴어 Lupus, 즉 프랑스어 Loup에서 유래가 된 것이다. 당시에는 망루를 지키는 문지기 숙소와 감옥에 불과하였는데 14세기부터 궁궐로써 확장을 거쳐 거듭나게 되었다. 궁궐이 베르사유로 옮긴 후부터는 아카데미 회원들의 사무실과 유명 예술가들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프랑스 혁명 때 왕족과 귀족들로부터 압수한 재물 660여점을 전시하기 위해 1793년 박물관으로 용도가 변경되어다. 이후 계속된 정비와 확장을 통해 나폴레옹 3세 섭정기간 때인 1880년에 마무리가 되었다.

루브르 박물관 정문에 위치하고 있는 유리 피라미드는 1981년 프랑스 대통령 미테랑에 의해 지어졌고 건축가 이오 밍 페이의 작품으로 1989년에 완공되었다. 피라미드의 정사각형 바닥면에서 꼭짓점까지의 높이는 21.64m, 603개의 마름모와 70개의 삼각유리로 95톤의 철근이 지지하고 있다. 유리 피라미드 아래는 박물관 안내소와 유무인 발권장소가 있다.
총 5개의 층과 3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리슐리외(루이 13세 때 재상) 관, 쉴리(앙리 4세 때 재상) 관, 드농(루브르 박물관 초대 관장) 관이다.

 

암사슴과 함께 있는 사랑의 여신 아르테미스. 일명 베르사유의 다이아나
밀로의 비너스

밀로의 비너스는 1820년 한 농부에 의해서 에게 해의 밀로 섬에서 발견되었고 당시 프랑스 외교관이었던 샤를 프랑스와 드 리파르도가 루이 18세에게 바쳤다. 기원전 130 ~ 100년 당티오슈가 제작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날개를 단 사모트라케의 니케(승리의 여신)

날개를 단 사모트라케의 니케는 기원전 331년 ~ 323년에 제작 된 헬레니즘 시기를 대표하는 조각이다. 기울어진 날개의 각도, 왼쪽 다리의 위치, 바람이 불어 여신의 다리를 휘감는 듯한 옷의 표현은 조각을 보는 사람들에게 조각상이 날아오르는 듯한 인상을 준다.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은 15세기 작품으로 성모 마리아가 유다 산골의 즈가리아 집에 있는 엘리사벳을 만나는 것을 그린 작품이다. 고령으로 임신한 엘리사벳이 무릎을 꿇고 마리아에게 존경을 표하는데 마리아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엘리사벳의 어깨를 짚으며 그녀의 행동을 만류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뒤에 서 있는 두 여자는 마리아 야코비와 마리아 살로메이고 마리아 야코비는 배가 부풀었고 마리아 살로메는 두 손을 모았다.
화면배경에는 개선문과 항구도시 전경이 보이는데 그리스도교 미술에서는 개선문은 승리의 문, 항구는 구원의 기항지를 의미하는 메타포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 모자상"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 모자상”은 1503년에 스푸마토 기법으로 그린 작품으로 피렌체에서 제작한 후기 작품이다. 중앙에 정면을 향해 앉아있는 여인이 마라아의 모친 성 안나이다. 어머니의 무릅에 앉아있는 성모 마리아는 양의 등을 타려는 아기 예수를 양과 떼어놓으려고 하고 있다. 양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희생양의 상징으로서, 마리아의 행위는 아들을 험난한 운명으로부터 막고 싶은 모정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성 안나의 머리를 정점으로 하여 삼각형의 오른편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리고 어린 양으로 구성 된 피라미드 구도다.
스푸마토 기법은 윤곽선을 뚜렷하게 그리지 않고 희미하고 뿌옇게 그리는 기법으로서, 인물이 살아있는 듯한 생생한 느낌을 주는 효과가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밀라노 귀족 부인의 초상"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밀라노 귀족 부인의 초상”은 15세기에 밀라노에서 그린 작품이다. 검은 배경을 바탕으로 도발적인 눈, 꽉 다문 입, 밖에서 들어온 반사 된 빛까지 고스란히 담은 정교한 눈동자의 이 여인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밀라노에서 초상화를 그릴 때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요소다. 이 작품에는 손이 그려져 있지 않고 손 부분이 파라페토라고 불리는 난간으로 가려져 있는데 당시 이탈리아 화가들이 인물에 현실감과 공간감을 불어넣기 위해 자주 사용하던 요소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바위산의 성모"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바위산의 성모”는 스푸마토 기법으로 그린 작품으로 1483년 밀라노의 산 프란체스코 수도회 성당으로부터 주문을 받아 1485년에 완성한 것으로 밀라노에서 제작한 첫 작품이다. 성 가족이 이집트로 피난을 하던 중 세례자 요한을 만났다는 전설을 그린 것으로 동굴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순간을 묘사한 작품이다.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 그리고 천사와 예수가 피라미드 구도로 화면 중앙에 배치되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1503년 비단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아내가 그녀의 초상화를 다빈치에게 부탁해서 그린 작품이다. 모나는 이탈리어로 부인을 뜻하고 리자는 이름이다. 프란체스코가 작품료를 지불하지 않아 다빈치가 1519년 사망하기까지 그가 가지고 있었고 사망 후 그의 제자에게 남겼다.
피라미드 구도 속에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의 여인이 팔걸이의자에 몸에 살짝 의자에 앉아 있다. 모나리자의 원본은 관리차원에서 지하 아틀리에에 보관되어 있고 전시관에 걸린 작품은 최첨단 기법으로 그려낸 복제품이다.

로렌조 로토의 "간통한 여인과 예수"

로렌조 로토의 “간통한 여인과 예수”는 16세기 작품으로 이소케팔리아 원칙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소케팔리아 원칙은 다수의 등장인물로 짜이는 역사화의 구성에서 사람들의 머리 높이를 균등하게 맞추는 방식이다. 간음한 여인과 손바닥을 펴서 군중의 공격에 대한 저지, 만류, 반대하는 예수와 노란 옷을 입은 늙은 율법학자를 전면 중앙에 하나로 묶고, 손가락을 치켜들고 모세의 율법을 들먹인 남자, 병장기류를 든 군인 등 여인의 처벌을 요구하거나 예수의 반응을 떠보는 주변 무리를 묶어서 두 그룹 사이에 긴장감 넘치는 대치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는 1814년 나폴레옹의 여동생 캐롤린 뮈라의 의뢰를 받아 그린 작품이다. 오달리스크는 터키어 오달릭(odalik)에서 유래한 말로, 규방의 여인을 뜻한다. 여인의 나체를 극도로 미화한 작품으로 나폴레옹 제국의 멸망으로 인해 주문자로부터 값을 치르지 못해 화가의 손에 남겨졌다. 앵그르의 스승은 자크 루이 다비드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1세와 조세핀 황후의 대관식"
대관식 당시 조세핀은 마흔이 넘었는데 우아한 여인으로 묘사되었다.
전통적인 대관식에는 교황이 황관을 씌워주는데 나폴레옹은 본인 스스로 황관을 쓰는 쪽을 선택했다. 이로 인해 교황 피우스 7세는 나폴레옹 뒤쪽에 앉아 단지 축복하는 손짓만 하고 있다.
황관을 받는 인물은 그의 처남이자 나폴리 국왕인 뮈리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1세와 조세핀 황후의 대관식” 은 나폴레옹의 대관식 3개월 전인 1804년 9월 황제로부터 직접 청탁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2년의 제작 과정을 거쳐 완성하였다. 1804년 7월 국민투표로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12월 2일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나폴레옹이 아내 조세핀에게 직접 황관을 씌워 준 후 본인은 스스로 양손으로 황관을 썼다. 전통적인 대관식에는 교황이 황관을 씌워주는데 나폴레옹은 본인 스스로 황관을 쓰는 쪽을 선택했다. 이로 인해 교황 피우스 7세는 나폴레옹 뒤쪽에 앉아 단지 축복하는 손짓만 하고 있다. 대관식 당시 조세핀은 마흔이 넘어 는데 우아한 여인으로 묘사되었다.
황관을 받는 인물은 그의 처남이자 나폴리 국왕인 뮈리이고 조세핀의 두 시녀 뒤의 선 다섯 여인들은 나폴레옹의 여형제들로 첫 번째 여인이 데리고 선 사내아이는 나폴레옹과 전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 나폴레옹 샤를이다. 황관을 받는 인물 뒤의 그림 중앙에 앉아 있는 여인은 나폴레옹의 어머니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호라티우스의 맹세"

자크 루이 다비드의 “호라티우스의 맹세”는 1783년 루이16세의 요청으로 만들어진 신고전주의의 첫 작품으로 출장 전 호라티우스 형제를 묘사한 작품이다. 기원전 669년경에 로마와 알바(Albains)의 전쟁에서 싸웠던 사돈관계의 두 가문의 아들들, 즉 로마 호라티우스 가문의 세 형제와 알바의 큐라티우스 가문의 세 형제에 관한 이야기를 토대로 한 것이다.
그림의 왼쪽은 호라티우스 형제의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세 자루의 칼을 주면서 제국을 위한 죽음이나 전쟁의 승리를 맹세하게 있고 오른쪽은 고통스러워하는 큐라티우스로 시집 갈 누이 카밀라, 큐라티우스에서 시집온 아내 사비나 그리고 어린 손자를 감싸 안고 있는 어머니가 그려져 있다.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은 1819년 작품으로 1816년 7월 2일 영국에서 프랑스로 반환된 세네갈의 생루이 섬에 정착하기 위해 약 400명을 태운 군함 메두사호가 좌초되어 13일 동안 표류하였고 15명만 구조된 비극적인 사건을 그렸다.
작품은 생존자들이 13일간의 표류 뒤 수평선 멀리 구조선을 발견하는 순간을 묘사하였다. 먼 곳에서 지나가는 배를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흔드는 인물들과 무릎에 놓인 죽은 아들을 애도하는 아버지, 뗏목 가장자리에 곧 파도에 떠내려갈 듯한 시체들 등 피라미드 구도다.

역사화가 폴 들라로슈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역사화가 폴 들라로슈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은 1850년도 유화 작품으로 1800년 봄 이탈리아에 주둔한 오스트리아군을 기습 공격하기 위하여 제2차 이탈리아 원정 때 나폴레옹 보나파트트의 모습이다. 말 대신 노새를 타고 알프스 설산 그랑 생베르나르 고개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하는 모습으로 추위를 막기 위하여 회색 코트를 입었으며 차갑고 힘겨워하는 분위기로 실제 모습에 가깝도록 표현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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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도(目島)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산읍 방도리에 있는 무인도로 모양이 물고기 눈처럼 생겼다고 하여 부르게 되었고 세종실록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에는 동백도로 표기돼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부터 명칭이 춘도(椿島)로 바뀌었는데 청산해야 할 일제잔재이다. 일본에서는 동백나무를 한자로 춘(椿)자를 쓰는데 갑자기 생기는 불행한 일을 춘사(椿事)라고 한다. 식민사관의 일환으로 경주 양북 동해천(東海川)을 대종천(大鐘川)으로 바꾼 것처럼 목도(目島), 동백도(冬柏島)를 춘도(椿島)로 바꾼 것이다.

목도는 면적은 약 15047, 둘레는 440m으로 동해안 섬 중 유일한 상록수림(常綠樹林)으로 동백나무, 후박나무, 사철나무 등 각종 상록수림으로 절경을 이루어서 1962127일에 천연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다. 옛날에는 대나무가 많아서 대섬(竹島)이라고도 불렀고 신라 때에는 대나무를 길렀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주민들이 대나무 화살을 만들어 나라에 바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나무는 점점 사라지고 동백나무·후박나무 등 각종 상록수림이 그 자리를 메웠다.

1970, 80년대 울산 최고의 동백꽃 관광지로 꽃피는 봄이면 붉은 동백꽃을 보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고 45인승짜리 배 두 척이 운항했다. 그러나 점차 섬 생태계가 훼손되자 1992년부터 안식년제를 도입하면서 현재까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언젠가 생태계가 복원되어 개방되기를 손꼽아 기다릴 뿐이다.

목도를 소재로 한 대중가요도 있다. 가수 하춘화(河春花)197345에 부른 목도는 내 고향이다. 1970년대 울산이 농어촌에서 산업 도시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고향이 공장부지로 편입되어 고향을 떠나는 이주민들의 망향과 실향의 정서를 노래로 담고 있다.

 17세기 이곳 방도리(方島里)는 울산도호부 청량면 목도리 목도포구로써 안용복(安龍福)과 박어둔(朴於屯)1693년과 16962회에 걸쳐 독도로 출발한 포구이다. 이들은 독도를 지키기 위해 독도에서 돗토리현까지 건너가 싸웠다. 안용복은 이곳 목도 세거 광주 안씨 출신이다. 박어둔은 충청도 이산현(논산시 노성면) 소론명가 출신으로 증조부는 가선대부(2) 박잉석, 조부는 통정대부(3) 박국생이며 아버지는 정병 박기산이다. 조부 박국생이 1646(인조 24) 3월 그 지방의 유탁(柳擢)과 한양의 권대용(權大用)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을 하여 고향 이산현에서 살수가 없게 되자 울산으로 이사 왔다.

방도리(方島里)는 사방(四方)의 방()과 목도(目島)의 도()를 합성하여 만든 이름이다. 방도리에서 어부와 인어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동백도설화(冬柏島說話)라 하여 용왕의 딸인 인어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어부에 대한 보은담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옛적에 마음씨 착한 청년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다보니 그물에 인어가 들어 있었다. 다른 어부들은 인어를 팔아 돈을 벌 수 있다고 기대에 부풀었지만 이 어부는 인어가 불쌍해 풀어 주자고 하였다. 이 어부는 다른 어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어를 구해 주고 다른 어부들로부터 매를 맞고 쓰러졌다.

어부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부는 용궁에 있었다. 인어는 용왕의 딸이었다. 인어는 자신을 구해 준 어부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용궁으로 데려 온 것이다. 용궁에서 다시 만난 인어는 용왕에게 어부와 인간 세상에 나가 살겠다고 하였고 용왕은 딸을 위해 울산의 온산에 섬을 만들었다. 육지가 가까워지자 갑자기 하는 소리와 함께 물길이 하늘 높이 치솟으며 바다로부터 섬이 솟아올라와 지금 모양의 목도가 되었다. 이후 섬에서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갔다.

 현재 목도는 쌍용정유공장에 둘러싸여 외롭게 홀로 떠 있다. 낚시꾼들이 가끔씩 찾아 와서 외로움을 달래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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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산(日光山)은 일광면 삼성리에 있는 산으로 안산암의 암주(岩柱)로 되어 있고, 일광 신도시를 바라보고 있다. 해발 385m로 그리 높지 않고 비교적 완만하나 정상부 주변부터는 약간 급격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산의 형상은 종을 엎어놓은 듯한 종상형이고 산 정상에서 동해를 바라보면 경관이 뛰어나며 일광 바다가 아늑하게 보인다.

일광산 정상에서 바라보 보면 펼쳐지는 일광 앞 바다

임도와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인근 주민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자주 찾는 산이다. 또한 MTB 동호회가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기장읍지에는 아침 햇살을 가장 먼저 받는 곳이라고 하여 일광산이라고 하며 기장 향교가 기장읍 교리로 옮기기 전에 는 향교의 주산이었다.

남쪽으로 바라도 본 LCT와 해운대 장산

일광산(日光山)에 오르는 방법에는 임도를 이용하는 것과 소로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는데 소로를 이용하는 것이 운치가 나고 산행하는 맛이 난다. 가장 빨리 정상까지 가는 방법은 횡거사까지 차로 와서 주차 한 후 걸어가면 30분이면 도착한다. 그러나 임도의 경사가 심해 운전 할 때 주의를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많이 이용하는 방법은 백두사에서 출발하여 좌측과 우측에 조성 된 임도 또는 소로를 따라 올라간다.

일광면 백두사
백두사 좌측 임도에 있는 안내표지판
백두사 좌측에 조성 된 임도와 소로 입구
소로에서 만난 정3품 비석(증 통정대부 김해김씨지묘)

소로를 따라 산행을 하면 유난히 다양한 바위를 자주 만난다. 아무래도 산행의 묘미는 흙과 바위의 산세를 감상하고 꽃과 나무의 생명력을 느끼는 것일 것이다. 차성가(車城歌) 삭출금부(削出金芙) 일광산은 만장봉(萬丈峯) 높았는데~그 옛날 높고 높은 산봉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정상을 알리는 표지판
일광산 정상 표지석
멀리 보이는 고리원자력발전소
하산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
횡금사 방향을 안내하는 표지판
좌측 임도로 하산 때 만나는 휴게장소
백두사와 예지골못 갈림길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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